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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어드는 남자 ㅣ 밀리언셀러 클럽 76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줄어드는 남자>라는 제목을 보고 흠칫 놀랄 중년 남자들이 떠오른다. 다행히 그런 중년의 고개 숙인 남자가 등장하는 섹슈얼한 내용은 아니고, 문자 그대로 하루에 0.36센티미터씩 매일 줄어들어 점점 작아지는 스콧 캐리가 주인공이다. 사춘기 시절 흔히 눈에 보이지 않게 작아지면 여자 목욕탕도 가고 짝사랑하는 아이의 집에 몰래 숨어들어야지 하는 공상을 하곤 했는데, 이 책을 보고 나면 날마다 작아지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작품의 첫 시작부터 스콧은 정신없이 달리고 있다. 뒤에서 쫓아오는 집채만한 거미를 피해.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괴물 같은 거미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무작정 도망쳐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콧은 왜 천형이라 할 수 있는 작아지는 병을 얻게 된 것일까? 그는 형과 함께 보트를 타고 바다에 머물다가 정체 모를 안개에 몸이 닿는데, 나중에 그 안개는 방사능에 오염된 것으로 밝혀진다. 이 작품이 처음 씌어진 해(1956년)가 처음으로 원자폭탄이 사용된 1945년과 비교적 가까운 시기라는 걸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비록 원자폭탄의 가해국이라지만 원폭의 가공할 위력과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재앙은 미국인들에게도 끔찍한 공포가 되었으리라는 걸 유추해볼 수 있는 설정이다.
<나는 전설이다> 이후 오랜만에 읽어본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이지만 아주 만족스러웠다. 여러 모로 <나는 전설이다>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책인데, 6일 후에 0센티미터까지 떨어져 망각 속으로 사라져야만 하는 주인공 스콧이 느끼는 절절한 고독과 슬픔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흡혈귀, 좀비인 세상에서 혼자 살아남아 극도의 외로움 속에서 투쟁하는 <나는 전설이다>의 네빌의 처지와 어쩜 그리 흡사한지. 외로움에 사무친 스콧이 바비인형과 한 침대에 누워 그녀(?)를 끌어안고 자는 처절하도록 안쓰러운 장면이 나오는 소설이 또 있을까. 또한 <나는 전설이다>에서 1950년대 대중소설 작가로 혁명적이라고 생각했던, 단 한 명 유일한 인간으로서의 어찌할 수 없는 네빌의 성욕을 솔직히 고백하는 장면이 이 작품에서도 등장한다.
스콧은 아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몸 크기를 갖게 되었을 때도 육체와 정신은 팔팔 뛰는 삼십대 장년의 그것이라 아내를 원하지만 몸 만큼이나 작아진 자존심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내내 번민만 한다. 스콧 부부의 아이를 돌봐주기 위해 고용한 십대 베이비시터 여자아이를 몰래 훔쳐보는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스콧의 모습은 희극적이면서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 가혹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다.
모든 훌륭한 작가는 자신을 둘러싼 당대의 공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아마도 작가 리처드 매드슨은 사회와 시대의 흐름이 변함에 따라 강인함과 권위를 숭상하던 기존의 남성상이 붕괴하고 있는 현상을 예민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더 이상 가족에게 어떠한 작은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남성 스콧의 작아지는 몸과 마음은 비슷한 상황에 빠져 점차 위축되어만 가는 당시 미국 남성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얻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정말 좋아하게 되었던 건 날이 갈수록 줄어들어가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을 돌보기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낸 스콧의 강인한 모습 때문이었다. 그는 타인들의 무분별한 호기심에 흥밋거리로 치부되는 걸 그토록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떠난 뒤 남겨진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수기를 써 돈을 버는가 하면, 운명에 희롱당했지만 패배자로만 남지 않기 위해 자신을 공격하는 거미와 정면승부하는 용기를 보여준다. 절대 물러서지도 포기하지도 않는 스콧의 모습은 진짜 남자가, 진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어떤 의지와 결기가 필요한지를 독자에게 일깨워줄 것이다. 예상 밖의 결말에서 스콧이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그토록 통쾌하고 희망에 가득차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스콧이 보여준 용기에 감복한 작가의 흐뭇한 보너스가 아닐까.
표제작 '줄어드는 남자' 말고도 이 책에는 총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나는 전설이다>와 비슷한 구성이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이 훨씬 완성도가 있다고 평가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데뷔작이었던 '결투'나 누구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상황이 괴물보다 훨씬 끔찍하게 느껴지는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등 매드슨의 대표 단편들이라고 할 만하다. <줄어드는 남자>나 <나는 전설이다>가 1950년대 작품들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리처드 매드슨의 역량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독특한 설정과 탄탄한 완성도, 깊은 감동을 자랑하는 <줄어드는 남자>는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