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차별


여성과 남성의 차별 문제를 처음 깨달은 것은 언제였을까? 할머니가 통닭을 사와서 다리 두개를 모두 내 앞접시에 놓은 후에, 나머지를 여동생을 비롯한 사촌동생들에게 먹으라고 내놓았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옛날 사람이었고, 당연히 옛날 사람으로 살았다. 손자들 중에서 남성이고, 맏이였던 나를 엄청 챙기셨지만, 나머지 손자, 손녀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 내 여동생은 할머니의 차별을 늘 당하며 자랐다. 조금 말다툼이 있어도 할머니는 여동생에게만 "어디 기집애가 오빠야한테 대드냐!"고 호통쳤고, 앞서 통닭의 사례처럼 사소한 것도 무조건 남자이고, 맏이인 나부터 챙겼다.


역차별


반대로 여동생을 부러워한 적도 많았다. 아버지는 엄한 사람이었다. 평소에는 무뚜뚝하고, 말 한 마디 건네는 일이 없고, 뭔가 일이 생기면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유독 내게 무뚜뚝하고 엄하셨던 아버지는 여동생에게는 가끔 장난도 치고, 웃어주기도 하고, 예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나는 외탁(외모가 외할아버지를 비롯해 외가쪽 사람들과 닮았다.)을 해서 좋아하지 않고, 비교적 아버지를 비롯한 친가쪽 사람들과 닮은 편인 여동생만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여동생을 원망한 적이 많았다.


계층차별 / 지역차별


가난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늘 도시 변두리 지역에 살았다. 달동네, 산동네, 촌동네 등등으로 불렸던 그 동네들은 다른 말로 우범지대라고 불렸다. 늘 폭력이 만연한 동네였다. 골목을 걷다보면 언제 어디서 폭력에 노출될 지 몰라 늘 두려웠다. 저 모퉁이를 돌아서면 누군가가 욕을 퍼부으며 돈을 뺐거나 모욕을 줄 거라는 두려움에 숨을 크게 들이쉬고 걸어야 했다.


비록 덩치는 작았지만, 외모와는 달리 성격은 아버지를 닮아서 절대 물러서지 않는 편인 나는 비록 속으로는 두려웠지만 늘 그런 상황에 당당히 맞섰다. 뺏길 돈을 갖고 다니지도 못했고, 옷이나 학용품 역시 변변치 못한 것들 뿐이라 별로 뺏길 만한 것이 없기도 했고,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두들겨 맞고, 맞서 싸워도 두들겨 맞을 거라면 맞서 싸우고 맞는게 더 낫다는 생각에 힘없고, 싸움을 못 했어도 늘 맞서 싸웠다. 아주 어려서부터 그랬다. 동네에서 한창 키가 큰 형들에게 늘 맞고 살았고, 한번은 부당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어른들에게 맞섰다가 크게 맞은 적도 있었다. 맞아도 맞아도 또 일어나서 덤비는 편이었고, 그들은 결국 때리다 지쳐 "다음부터 조심하라!"는 경고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지만, 또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나는 또 덤볐고, 그들은 오히려 나를 피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 10여년을 맞고 살았더니 청소년기의 나는 폭력 상황에 많이 익숙해졌고, 수많은 경험 덕분에 싸움을 어느 정도 잘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폭력 상황은 늘 두렵다. 익숙하기에 잘 알 수 있는 그 분위기. 상대방이 먼저 주먹을 날리기 직전의 그 느낌을 잘 알 수 있고, 그 느낌이 드는 순간이면 늘 두려웠다. 이젠 예전과는 달리 싸우면 자주 이기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맞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컸다.


고등학교에 진학해보니 우리 동네는 정말 유명한 우범지대였더라. 그 동네 출신이라고 하면 웬만하면 눈을 깔고 고개를 숙이는 걸 봤다. 하나 밖에 없는 그래서 나도 거길 다닐 수 밖에 없었던 중학교는 유명한 폭력조직 두 곳의 조직원을 가장 많이 배출하는 곳이었다. 학교에 경찰차 여러 대가 들어와 폭력조직에 속한 학생들을 연행해가기도 했다.


다른 동네에서 온 아이들의 태도에서 또 다른 차별을 느꼈다. 그 동네 출신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차별. 이른바 흑인 거주지역 사람들에 대한 백인들의 차별 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할까? 너넨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고, 맨날 싸움만 하는 한심한 놈들이야 라는 뜻이 담긴 시선과 몸짓들.


여성차별


고등학교에서도 어김없이 몇 차례 폭력 사건에 휘말렸다. 누군가 건드리면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맞서다보면 어김없이 나도 문제아로 낙인이 찍힐 수 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더 반항적으로 변했고, 싸움은 더 자주 일어났다. 그러다가 공부를 아예 포기한 친구들과 어울렸고, 우린 친구들이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동안 밖에서 놀았다. 술을 마시기도 했고, 근처 여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만나기도 했다. 인문계 여고생들을 만날 기회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대신 자주 만나는 아이들은 상업계 여고생들이었다. 그것도 야간반 아이들과 어울리는 일이 많았다.


그때 여상 야간 아이들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들, 즉 차별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 그것이 여성에 대한 차별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놀라운 것은 자주 어울렸던 그 아이들도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을 잘 알고 있었고, 이미 받아들여 순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인문계가 아닌 상업계에, 그것도 야간으로 들어온 순간 이후 갈 길이 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한편 당시 가끔 만났던 인문계 여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성적이 좋아도 여성이기 때문에 멀리 수도권에 있는 대학을 가기보다는 이 지역에서 제일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좋겠다는 어른들의 권유(혹은 명령)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아이들을 여럿 보았다.


역차별


대학에 들어갔더니 우리 과에는 여성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 여자 선배들의 태도가 좀 이상했다. 신입생환영회라고 갔더니 새내기 남학생들을 모아놓고, "성기발랄하고 어여쁜 남자애들이 많이 들어와서 기쁘다"거나 "옆에 앉아서 술 한 잔 따라봐라" 등 보통 회사에서 남자 상사들이 여직원에게 할만한 언행을 하고 있었다. 이건 우리사회의 여성 차별에 대한 반작용으로 학과 내에서는 남성에 대한 차별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문제는 몇몇 여자 선배들의 도가 지나친 성희롱이 마치 아무 문제 없는 듯 혹은 당연한 듯 여기는 분위기였다.


당시 나는 1학년 학년대표를 맡아 전공 강의때 출석부와 마이크 등 강의에 필요한 물품을 챙겨야 했다. 여성학 강의를 맡아 일주일 한 번 서울에서 내려오는 강사가 있었다. 이 분은 강의시간에 남성에 대한 적대감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마치 모든 남성들이 사라져야 이 사회의 여성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우리 과는 남성이 몇 안되는데, 그 중 매일 얼굴을 마주치는 사람이 나였기 때문에 가끔 그 과도한 남성 혐오를 직접적으로 나에게 퍼부어서 당황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난 조교의 명을 받아 출석부와 마이크와 분필을 준비해주고, 수업 전에 칠판을 닦아두고, 수업이 끝나면 또 칠판을 닦고 강의실을 정리해주는 사람인데, 그 보답은 남성에 대한 혐오 발언과 비아냥이었다. 한 학기 내내 출석부와 마이크를 건네주면 의례적으로 건넬 법한 "고마워요!"라는 말 한 마디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운동권 내 여성차별


학생운동을 짧게 경험했지만, 그 조직의 보수적이고 부정적인 모습들 때문에 운동의 전체적인 흐름에는 함께했지만, 직접적으로 학생운동 내부에서 열심히 활동하지는 않았다. 제일 화가 났던 것이 수배당한 남성 선배들의 속옷과 양말을 여성 후배들이 빨아주는 등 뒤치닥거리를 맡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 문제를 지적하면서 당장 바로잡으로 화를 냈지만, 그들은 그게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고, 결국 그들과는 함께 운동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후 환경운동, 시민운동, 문화운동, 노동운동 등 여러 운동단체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해보면서 운동권 내부의 여성차별 문제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 존재한다는 점도 깨달았다. 


그러면서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늘 다짐하고 살지만, 생활의 영역에서 나 역시 알게 모르게 차별적인 언행을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 역시 늘 할 수 밖에 없었다.


결혼이라는 제도와 차별


이 나라의 결혼 제도는 무조건 여성에게 불합리한 방식이다. 나는 결혼하기 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결혼을 할 때 되도록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시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1년에 한 두번 만났고, 평소에도 거의 연락을 하지 않는 불효자인 나에게 익숙해진 탓에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았기에, 이 사회의 평균적인 가정에 비해서는 비교적 차별을 덜 당한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물론 차별이 없었을 수는 없다는 점을 잘 안다. 그래서 늘 미안했고, 뭔가 바꿔주고 싶었다.(이젠 그럴 기회조차 사라졌지만)


한 3~4년 전쯤 동네에서 아내를 비롯해 몇몇 동네 사람들과 여성문제에 대한 공부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책도 읽고, 경험담도 나누고, 영화를 보기도 했다. 동네 여성 선배들은 평소 아이들을 잘 돌보는 나를 자주 칭찬했다. 육아휴직을 해서 아이를 돌보기도 했고, 이후에도 육아와 가사노동을 되도록 공평하게 나눌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점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모임에서는 그런 개인의 노력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회 전체를 바꾸지 못하는 한계에 대해 고민하면서 뭔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자꾸 개인의 경험으로 환원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가 읽은 책에도 사례 나열 중심으로 평소 가부장제도 하에서 여성이 느끼는 부당함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무책임한 남성들의 이야기가 많았다.


그때 남성으로서 답답함과 한계를 많이 느꼈다. 당시 몇 차례의 공부모임에 계속 참여한 남성은 나 혼자였는데, 가끔 한 두 번 참여했던 다른 남성은 나와는 달리 그 모임의 분위기 자체에 질려버려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결혼은 생활이다. 남녀는 생활 속에서 늘 크고 작은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고, 그것을 최대한 잘 해결하려는 노력이 중요하지 그 갈등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태도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혼할 당시 주례를 맡아주셨던 대학 은사님은 육아와 가사노동을 반반씩 공평하게 하려고 노력했던 분이다. 내가 그렇게 노력하며 살고 있는 것은 은사님의 영향이 크다. 그 분은 주례를 부탁하려 우리가 찾아뵈었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에 대한 오해나 편견을 좁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면서 본인의 경험을 말씀하셨다.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열심히 실천하는 사람을 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깨달았다. 개인의 실천과 의지와는 달리 감정은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을 말이다. 크고 작은 갈등이 감정적인 상처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현명하게 생각하고 노력해서 상처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누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고, 누가 잘나고 못나고의 문제도 아니며, 누가 더 노력하거나, 덜 노력하거나의 문제도 아니다.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달았다. 















내게 '여혐'이라는 단어는 아직 낯설다. 이것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언론 등을 통해 접하고 있었지만, 나의 일상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단어라고 여겼다. 대신 늘 여성과 남성의 차별과 평등 문제를 일상에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하는 고민은 갖고 살고 있다. 이것은 아마 평생의 숙제로 가져가야 할 것이다.


정당 내의 성차별과 해결하기 위한 노력


녹색당은 모든 선출직 대표를 서로 다른 성 두 명 이상이 맡도록 되어 있다. 여성과 남성 뿐 아니라 성소수자까지 배려한 조항이다. 여남동수의 공동대표는 녹색당에서는 기본이고 상식이다. 녹색당은 대한민국 최초로 여성 당원이 다수인 정당이고, 내가 좋아하는 정희진 선생님을 비롯해서 여성 운동을 하는 당원이 많은 정당이다.


하지만 선거운동 과정에서 성차별 문제에 대해 잘 대처하지 못했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하나는 선거운동에 참여한 여성 당원이 일부 몰지각한 남성에게 당한 성희롱을 비롯한 폭력적인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대처하지 못했던 지점이고, 또 하나는 선본 사무실에서 식사를 비롯한 음식을 준비했던 사람이 주로 여성이었던 점에 대한 지적이었다.


첫 번째 지적에 대해서는 같이 선거운동에 참여하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한편 화가 났고, 또 한편 미리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잘 설계하지 못한 점에 대해 반성했다. 두 번째 지적에서는 사실 깨닫기는 했지만, 이 문제를 거론해서 다른 방식을 풀자고 제안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 뜨끔한 면도 있었고, 한 편으로 현실적인 문제들도 있었기에 약간 억울하다는 느낌도 있었다. 우선 주로 식사를 준비했던 분은 당시 선본의 최고 결정권자였고, 늘 그 분이 스스로 본인은 직접 선거운동에 나서는 것보다 뒤에서 식사 준비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그 역할을 자청했다. 그가 만약 최고 결정권자가 아니었다면 논의를 통해 공평하게 나눠서 하자고 제안하거나, 다른 사람이 나서서 나도 한번 하겠다고 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건 성차별 문제 이전에 직위에 따른 권력관계가 먼저 작동한 지점이 있다. 다만 그럼에도 처음부터 식사 문제를 성차별 문제를 고려해 공평하게 설계하지 못한 점은 역시 반성해야 할 지점이다.


선거 이후 이러한 평가가 나온 것은 무척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는 이후 이러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고 꼼꼼하게 점검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노력이 기존 정치와 다른 녹색당 만의 정치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본다.

 


여남평등 사회로 가기 위해


아무 죄없는 청년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하철 역 화장실에서 살해당하는 엽기적인 사고가 벌어졌다.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을 뿐 이 사회에서 여성은 평소 늘 크고작은 폭력적인 상황에 처할 위험을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으며, 이미 많은 폭력행위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 참담한 사태를 겪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크고 작은 노력은 부차적인 것이겠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것이다. 다만 보다 근본적인 어떤 해답과 대책이 무엇일지 잘 모르겠다. 무엇이든 방법이 있다면 그 길을 함께 할 것이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 이 문제를 고민하고 답을 찾기 위한 소통을 이어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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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2 2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01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의 날 10개의 질문
◇ 질문1. 언제,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 시간, 장소에 상관없이 책 읽는 건 좋다. 다만 제법 오랫동안 바빠서 책을 자주 읽지 못했다. 제일 좋은 장소라면 당연히 집. 거실을 뒹굴거리며 밤새 책 읽을 때가 좋다.
 질문2. 독서 습관이 궁금합니다. 종이책을 읽으시나요? 전자책을 읽으시나요? 읽으면서 메모를 하거나 책을 접거나 하시나요?
○ 종이책만 읽는다. 전자책은 시도해 본 적도 없다. 매일 컴퓨터로 문서를 비롯한 온갖 텍스트를 읽는 것도 피곤하다.
예전에는 책에 메모도 하고, 접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책은 깨끗하게 읽고 감상이나 메모 그리고 인상적인 구절은 노트에 따로 기록한다.
 질문3. 지금 침대 머리 맡에는 어떤 책이 놓여 있나요? 
○ 침대가 없어서 머리 맡에는 책이 없다. 주로 읽는 책은 책상 위에 쌓여 있는데, 한국 근대사 관련 책들과 환경 관련 책들이 대부분이다. 소설이 아닌 경우 한 번에 책을 읽지 못하고, 여러 권의 책을 두고 읽다 말다를 반복하는데 요즘 읽는 책은 아래와 같다.







◇ 질문4. 개인 서재의 책들은 어떤 방식으로 배열해두시나요? 모든 책을 다 갖고 계시는 편인가요, 간소하게 줄이려고 애쓰는 편인가요? 
○ 책의 주제에 따라 문학, 역사, 과학, 사회과학 등으로 분류해두려고 애쓰는데, 지금은 거의 아무런 체계없이 엉망으로 섞여 있다.
책 욕심이 많아서, 웬만하면 책을 계속 보관해두는 편이다. 책에 실망했거나, 다시 읽을 일이 없을 것 같은 경우에만 중고샵에 팔거나, 기증하기도 한다.

◇ 질문5.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은 무엇입니까?
○ 지금 기억을 떠올려보면 어려서 읽었던 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철가면』이다. 뒤마의 작품이 아닌 부아고베의 작품이다. 어려서는 문고판(축약본)으로 읽었는데, 지금 검색해보니 완역본이 나와있다.














◇ 질문6. 당신 책장에 있는 책들 가운데 우리가 보면 놀랄 만한 책은 무엇일까요?
○ 지금 책장에는 놀랄 만한 책은 없을 것 같다. 예전에는 아버지 책인 [대망]과 [후대망] 시리즈(세로판본)를 다 읽겠다고 갖다 둔 적이 있었다. 결국 [대망]도 다 못 읽고 다시 집으로 돌려놓았다. 그 시리즈가 있었다면 좀 놀란 만했을지도.

◇ 질문7. 고인이 되거나 살아 있는 작가들 중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고 싶습니까? 만나면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 호메로스를 만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본인이 다 쓴 것인지 묻거나, 세익스피어를 만나 그토록 많은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비결이 뭔지 묻고 싶기도 하지만, 만나도 말이 안 통할 것 같다. 단순히 만나서 뭘 묻기 보다는 가끔 만나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친구 사이가 되면 좋겠다.

◇ 질문8. 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있습니까?
○ 많다! 집에 쌓여있는 읽지 못한 책이 몇 권인지 셀 수도 없다. 여러번 도전했던 책은 앞서 언급한 [대망] 시리즈와 [토지] 등이다.


◇ 질문9. 최근에 끝내지 못하고 내려놓은 책이 있다면요? 
○ 소설이 아니라면 대개 완독을 목표로 하지 않고, 조금씩 생각날때마다 읽거나, 아예 일부만 읽기 때문에 대부분 끝내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아예 읽다 말고 다시 읽지 말아야지 했던 책은 최근에는 없다.

◇ 질문10. 무인도에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시겠습니까?
○ 딱 세권이라니. 무인도에서 먹고 살 수 있는 식물을 찾을 수 있도록 『한국식물생태보감1』(참고로 1,200쪽으로 분량도 어마어마하다), 무인도에서도 술은 담궈 마셔야 할텐데, 술 담는 법은 따로 배워가기로 하고, 술을 홀짝이며 읽을『술의 세계사』, 그리고 술 안주로 잡을 해산물을 고를 때 참고하기 위해『내 술상 위의 자산어본』이렇게 3권 가져가면 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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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6-04-25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 안주! 선생님 책보다 저는 선생님을 모시고 무인도로 들어가고 싶어요 ㅎㅎㅎ

감은빛 2016-05-20 15:32   좋아요 0 | URL
한창훈 선생님을 모시고 가면 아마 책은 한 줄도 못 읽을 것 같아요.
그 인생 이야기를 다 들으려면 끝이 없을 것 같아요.
작년에 한창훈 선생님 강연의 진행을 맡은 적이 있어요.
끝나고 술도 한 잔 나눴는데, 정말 말씀을 잘 하시더라구요.

답글이 많이 늦어 죄송합니다!

라임69 2016-04-25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투요! 이왕이면 갈때 한자리 더 만들어 주세요 ♡♡

감은빛 2016-05-20 15:33   좋아요 0 | URL
예전에 이렇게 무인도 갈 때 가져갈 책을 물으면,
책이 아니라 사람을 데려가겠다고 답하곤 했죠.
여럿이 함께 들어가면 더이상 무인도가 아닌거 아닐까요? ^^

답글이 많이 늦어 죄송합니다!

페크pek0501 2016-04-29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상적인 구절은 노트에 따로 기록한다˝
- 저도 요런 노트 몇 권 가지고 있습니다. 기록하는 즐거움이 있지요.

˝술을 홀짝이며 읽을『술의 세계사』˝
- 멋지십니다. ^^

감은빛 2016-05-20 15:34   좋아요 0 | URL
독서 기록 노트를 몇 권이나 갖고 계시다니!
저는 꾸준하지 못해서 어디 구석에 박혀 있는지 모르겠네요.

답글이 많이 늦어 죄송합니다!

oren 2016-05-14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감은빛 님도 어린 시절에 <철가면>을 좋아했었군요. 저 역시 그 책을 무지 재미나게 읽었었는데 그만 새까맣게 잊고 있었답니다. 방금 다른 책 속에서 우연히 그 책을 다시 발견할 때까진 말이지요...
* * *
「그럼 잉크는 무엇으로 만들어준담?」
「대부분의 죄수는 쇠녹에다 눈물로 잉크를 만들지만 이건 흔해빠진 방법으로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야. 최고의 권위자는 자기 피를 사용하는 거야. 짐은 그렇게 할 수 있어. 그리고 자기가 어디에 갇혀 있는지 짧고도 흔해빠진 소식을 온세계에 알리고 싶다면, 양철 접시 아래에다 포크로 써서 창 밖으로 던뎌버리는 거야. <철가면>은 언제나 그렇게 했어. 그거야말로 멋들어진 방법이지」
-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중에서

감은빛 2016-05-20 15:36   좋아요 1 | URL
오렌님도 그 책 재밌게 읽으셨군요.
아주 오랜 기억이지만, 몰입해서 읽었던 기억이 선명하게 납니다.
다시 완역본을 읽어보려고 보관함에 넣어두긴 했는데,
요즘은 일이 바빠 통 책을 붙들 여유가 없네요.

답글이 많이 늦어 죄송합니다!

yamoo 2016-05-22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 감은빛 님 어린 시절 철가면 좋아하셨네요~ 저는 어린 시절 별로 책을 읽은 적이 없는지라..ㅎ
인상적인 책에 대한 답변들 잘 봤습니다!ㅎ

감은빛 2016-06-01 17:56   좋아요 0 | URL
네, 저 책을 어릴때 읽었는데
이상하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네요.
꽤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고맙습니다! ^^
 

10년 전의 좌절과 허무


열심히 달렸건만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때, 그런 상태를 좌절이라고 표현하던가? 어제 환경운동연합이 낸 '새만금 방조제 완공 10년, 새만금을 다시 이야기하자'라는 성명을 읽었다. 그래. 벌써 10년이 지났구나. 아니 2003년 6월 정부가 아직 2~3개월 더 남은 공사기간을 줄이기 위해 밤낮없이 덤프트럭으로 바위와 흙을 퍼날라 4공구를 막았던 날로 부터 13년이 지났다. 2006년 4월 21일은 새만금 끝물막이 공사가 끝난 날로 2공구가 완전히 막힌 날이다. 하지만 방조제가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방조제는 그로부터 4년이 더 지나 2010년 4월 27일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방조제가 완성되고도 6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 새만금 사업은 더 진행되지 못한 채 버려져 있다. 해수유통이 되지 않아 바닷물과 갯벌은 썩어가고 있고, 갯벌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던 수많은 생명들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당시 새만금 싸움의 실패와 연이어 벌어진 고속철도 싸움의 분열과 실패는 나에게 무척 충격적이었다. 아마 그때 나는 좌절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실망했다. 허무했다. 환경활동가로서 나에게 더이상 어떤 전망이 있을까 절망했던 것 같다.


녹색당의 도전과 허무


녹색당의 세번의 도전 실패 역시 허무했다. 2012년 당시 단번에 국회의원을 낼 거라고 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 저조한 득표율은 너무 허무했다. 비록 비례후보 밖에 없었기에 선거운동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당시 진보신당(현 노동당)과 청년당과 녹색당 이렇게 3당이 비공식 선거평가와 뒷 이야기를 나누는 선거 뒷담화를 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내가 진행을 맡았었다. 3당의 당원들이 한결같이 했던 얘기가 주위 사람들은 다 우리당 찍었는데, 어떻게 이거 밖에 안 나올 수 있냐는 얘기였다. 그나마 경험이 좀 있었던 진보신당 당원들은 예상을 아예 못한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청년당과 녹색당 당원들은 정말 멘붕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좁은 틀 안에 갇혀 살고 있는지를 확실히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그래 현실 감각을 익힌 소중한 기회였다고 볼 수 있겠다.


두번째 도전 지방선거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지역구 후보와 광역비례 후보를 내어 나름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었다. 정말 될 수도 있겠다 믿었던 과천과 구미가 모두 안 되어 결국 한 석도 얻지 못한 것은 충격이긴 했지만. 이번에는 녹색당이 정당으로서의 기반을 다져가는 과정으로 의미를 둘 수 있겠다.


이 두 번의 실패는 나름 힘들었고, 조금 허무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어떤 지점에서는 더 독하게 다음을 준비해야 한하는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이번 세번째 실패는 그간 축적해온 노력과 성과에 비해 득표율이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해 참담한 기분이다.


그렇지만 녹색당의 선거운동은 과거 두 번에 비해 훨씬 진화했고,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을 보여줬다. 녹색당 당원은 짧은 기간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지지자도 가파르게 늘어났다. 이것은 녹색당이 준비해왔던 노력을 인정받을 만한 성과로 볼 수 있다.


한편 나는 이성적으로 이 땅의 정치 현실을 깨닫고 허무하게 주저앉기보다 즐겁고 신났던 선거운동의 기억을 통해 또 하나의 희망을 이야기 하고 싶다.


선거운동 이야기


#1

하루종일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건 중노동이다. 거기에 마이크도 없이 생목으로 녹색당을 외쳐야했다. 미세먼지 경보는 계속 '나쁨'으로 야외활동을 자제하고 실내에 머물라고 했건만, 매연과 미세먼지를 마셔가며, 온갖 소음에 맞서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소리를 냈더니 목이 완전히 가버렸다. 선거운동이 끝나고 10일이 지났건만 아직도 목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2

그런 와중에 사람들의 호응은 정말로 큰 힘이 된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을 때, 차량 한 대가 서행으로 다가오더니,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고 "녹색당 화이팅!"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떠났을 때, 횡단보도를 건너온 한 시민이 역시 "화이팅"이라고 외쳤을 때, 당원인데 선거운동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너무 반갑다고 다가와 인사를 건넸을 때, 여성 두 분이 "녹색당에 투표하겠다"고 말하고 지나갔을 때, 또 한 여성이 웃으며 "수고 많으세요! 고맙습니다!"하고 지나갔을 때 몸은 힘들지만, 기분이 좋아 잠시나마 피로가 가시는 경험을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들고 있던 피켓을 더 힘껏 높이 들어올리고, 허리를 꽂꽂이 세워 당당하게 시민들을 만났고, 좀 더 힘차게 녹색당을 알리기 위해 목소리를 냈다.


#3

재미있었던 건 한 고등학생이 나에게 함께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던 일이다. 당시 난 어깨와 팔이 좀 뻐근했지만 피켓을 높게 들고 있었는데, 그 학생과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어깨의 통증을 참으며 억지로 웃음을 짓는 일이 좀 힘들기도 하고, 좀 웃기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학생과 대화를 좀 해보고 싶었는데, 뭐라 말을 걸어볼까 잠시 망설이는 사이 사진을 찍어준 친구와 함께 저 쪽으로 사라졌다. 그때 멀리서 들린 사진 찍어준 친구의 말. "너 취향 참 독특하다!"


#4

신촌은 정말 사람이 많은 공간임을 새삼 깨달았다. 특히 차없는 도로로 운영하는 주말 저녁이면 어마어마한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이었다. 저녁때가 되면 이미 많이 지쳤고,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조용히 피켓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시선을 맞추곤 했다. 주로 연인들이 많았지만, 친구들끼리 온 경우도 많았다. 그 젊음의 거리 한 가운데에서 나는 피켓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요즘은 저런 옷을 주로 입는 구나. 요즘 사람들은 저런 말을 하는 구나. 마치 나는 요즘 사람이 아닌 것처럼(물론 좀 옛날 사람이긴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고 서 있었다.


#5

신촌에는 외국인이 정말 많았다. 우리 청년들과 함께 다니는 외국인도 많았고, 외국인들끼리 다니는 무리도 제법 있었지만, 외국인 커플도 제법 봤다. 그날은 일요일이어서 점심무렵부터 선거운동을 했는데, 지하철 역 앞에서 한 커플을 만났다. 여성은 금발에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였고, 남성은 짧은 곱슬머리에 아주 짙은 고동색 피부였다.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내 앞쪽으로 걸어왔다가 멈춰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필 내 바로 앞에 서길래 내가 뒤로 두어발짝, 옆으로 두어발짝 물러서야 했다. 가까이 있는게 부담스럽기도 했고, 그들이 피켓을 가리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갑자기 두 사람의 입술이 가까워졌다. 쳐다보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눈이 그쪽으로 갔는데, 잠시 후 두 사람은 지하철 역 바로 앞, 그 사람 많은 공간에서 딥키스를 나눴다. 두 사람의 혀가 섞이고, 서로 상대의 입술을 쪽쪽 빠는 모습을 보고 들으며 갑자기 내가 그들의 침실에 침범해서 엿보고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성이 몸을 돌려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려는 걸 남성이 붙잡아 끌어당겼다. 또 키스가 이어지고, 여성은 아마도 늦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는데, 다시 몸을 돌리고, 또 남성은 끌어당기고 또 키스가 이어졌다.


그날 오후 늦게 또 다른 외국인 커플을 봤다. 이번에도 밝은 갈색에 창백한 피부의 여성과 모자를 써서 머리는 보지 못했지만 조금 어두운 갈색 피부의 남성 커플이었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내 옆에 서서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는데, 남성이 내가 든 피켓이 뭔지 여성에게 물었던 것 같다. 여성이 내 바로 옆에 있어서 정확하게 들었는데, 이렇게 답했다. "Mmm I guess something about nation." 그리고 뚫어져라 내 피켓을 쳐다보았는데, 잠시후 어깨를 으쓱 올리며 "I don't know" 말했다. 곧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고, 그들은 마지막으로 나와 피켓에 시선을 주고 길을 건넜다. 아마 여성이 '녹색당을 국회로' 라는 문구의 '국'자를 읽고 'nation'을 떠올린 건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6

신촌에서는 외국인 뿐 아니라 우리나라 청년들도 사람들 앞에서 애정행위를 벌이는데 별로 거리낌이 없었다. 앞서 언급한 만큼의 딥키스를 하는 연인을 본 적은 없지만, 가볍게 입을 맞추는 행위는 여러번 보았고, 꼭 끌어앉고 있는 모습도 제법 보았다. 상대방의 뺨을 어루만지거나, 상대 허벅지 위에 앉아 있는 모습도 보았다. 뭐 문제라거나 그러면 안된다는 의미로 언급하는 건 아니다. 그저 그런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 신기했다. 사실 이것도 하나의 편견일 수 있겠지만, 저 아래 따뜻한 남쪽 도시(그 도시도 작은 도시는 아닌데)에서 올라온 서울 사람들이 대중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신기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7

사람이 많은 만큼 신촌에는 이상한 사람들도 많았다. 끊임없이 와서 시비를 거는 사람들, 취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다. 녹색당 선거운동원 중에 젊은 여성이 여럿 있었다. 이들은 이렇게 젊은 여성들에게 접근해서 뭔가 말을 걸거나, 어떤 행동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운동원들은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입장이라 평소처럼 단호하게 행동하거나 회피하지 못했다. 이들은 아마 그런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예전에도 보면 선거에 나온 후보가 유권자들에게 함부러 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다가와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모욕을 주려고 하거나, 장난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 당원들이 그러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주위에서 도와줘야 하는데, 우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붙어 있지 않고, 제각각 흩어져 있었다. 이런 부분은 당 차원의 공식 선거평가에도 언급해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다.


#8

내가 함께했던 서대문 선본의 후보는 인디밴드 활동을 하고 있는 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녹색당의 대표적인 정책들을 곡으로 만들어 선거운동기간 동안 매일 저녁마다 정책 콘서트 형식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중 '녹색당을 국회로'(앨범에는 선거법 때문에 '녹색당을 거기로'라고 녹음했다.) 라는 흥겨운 곡에 후보의 아내(이 두 사람은 본선거 운동기간에 들어가기 직전에 결혼했다.)가 율동을 붙여 춤을 만들었다. 선본 사람들은 신촌 한 가운도에서 이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췄다. 재밌었던 건 춤을 춘 당원들이 완전히 이 곡과 춤에 빠져들어서 너무 즐거워했던 것. 대중 앞에서 춤을 춘다는 행위가 민망하기도 하고, 쑥쓰러울수도 있을텐데, 한 두번만 춤을 춰보면 대부분 태도가 확 바뀌었다.


난 사실 평일엔 거의 결합을 못해 뒤늦게 춤을 배웠는데, 처음엔 춤을 배울 생각이 없었다. 춤을 추는 대신 피켓을 들거나, 명함을 뿌리거나, 사진을 찍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후보의 아내(자꾸 이렇게 표현해 미안하지만, 이름을 부르지 않는 이상 달리 표현하기 어렵네)를 비롯해 여러 당원들이 자꾸 권해 어쩔수 없이 몸을 움직였다. 사실 난 몸치로 춤을 춰 본 적이 별로 없다. 물론 술에 취해 막 몸을 움직인 적은 있겠지만, 그건 춤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저 몸부림이다. 대학 시절부터 몸짓이나 율동이나 춤 같은 건 거의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 역시 당원들과 함께 몸을 움직여보니 즐거웠고, 용기를 내어 어색하고 못 추는 춤이지만, 녹색당을 국회로 보내기 위해서라면 까짓 춤 따위 못 추겠나 하고 생각을 바꿨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서 함께 춤을 춰보니 다른 사람들이라고 다 잘 추는 것도 아니었다. 다들 자기만의 개성어린 동작이 있었고, 틀린 동작도 있었고, 각자의 분위기가 있었다.


춤은 하루에 두세번 가량 췄는데, 저녁이 되고 바람이 불면 제법 쌀쌀했기 때문에 추워서라도 다들 춤을 추고 싶어했다. 나 역시 한 두번의 어색함을 극복한 뒤론 누구보다 열심히 그 춤과 노래를 즐겼다. 나중에 사람들 앞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렇게 춤을 춰봤다고 말했는데, 내게 춤 출 것을 권했던 안무를 만든 당원이 그 말이 인상적이었는지 나중에 언급하기도 했다. 


이 춤 덕분에 내가 참 재밌게 읽었던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라는 책 제목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이전까지는 정말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였다면, 이젠 몸으로, 감각으로 그 느낌을 깨달은 것이다. 이런 뜻이었구나! 춤 춘다는 건 바로 이런 느낌이었구나! 하는 소중한 감각을 배웠다.


#9 

녹색당은 2011년 창당준비를 시작해, 2012년 초에 정식 창당했고, 곧바로 총선을 치뤘다가 득표율 미만으로 정당등록이 취소되었다. 다시 재창당 과정을 거쳐 '녹색당플러스'란 당명으로 창당했는데, 우리 의도는 '녹색당+' 였는데, 선관위의 오락가락하는 입장 덕에 선거용지에 한글 여섯 글자가 기재된 이상한 이름이 되어버렸다. 우린 득표율이 낮다고 정당 등록을 취소해버린 악법에 저항해 헌법소원을 제기해 다시 '녹색당'이란 당명을 되찾았다. 그리고 득표율이 낮다고 정당등록을 취소하던 악법도 없앴다. 만약 아직 그 법이 남아있었다면, 노동당, 민중연합당, 녹색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정당들이 모두 등록이 취소되고 같은 이름을 쓰지 못하는 뭐 같은 경우를 또 당했어야 할 것이다.


암튼 그렇게 녹색당은 나름의 시간을 거쳐 성장해 온 정당이다. 활동하는 정당중에 가장 오랫동안 같은 이름을 유지해 온, 다른 말로 오래된 정당이며, 선관위에 등록된 정당 중에 당비를 납부하는 당원이 가장 많은 정당이고,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더 많은 정당이며, 국내 최초로 전면 추첨식 대의원제도를 운영하는 정당이다.


그런데 지난 총선에 짝퉁 녹색당이 하나 더 나타났다. 녹색당의 공식 색깔보다 약같 옅은 연두색에 가까운 녹색을 쓰는 안모씨의 정당이다. 선거운동을 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녹색당이 아닌 비슷한 색깔의 다른 당으로 오해했다. 자주 안모씨와 녹색당의 관계가 뭐냐고 질문을 받았고, 심지어 녹색당이 무슨 당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녹색당은 그냥 이름 그대로 녹색당이라고 말해도 계속 더민주냐 국민의당이냐 뭐 이런 질문을 하기도 했다. 


충격적이었던 건, 응원한다고 했던 사람 중에 가까이와서 자세히 보더니 왜 번호가 3번이 아니고 15번이냐고 물었던 사람이 있었다. 원조 녹색당 당원으로서 참 화가 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결국 우린 거리에서 안모씨의 정당 선거운동을 해준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짝퉁 녹색당은 하나 더 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녹색당의 표를 많이 가져가버린 '국제녹색당'이다. 이 정당은 거의 활동이 없어 어떤 당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지난 지방선거 당시 정책을 보면 분명 녹색당과는 거리가 먼 정당임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이름처럼 국제적인 정당도 아니었다. 우리 녹색당은 전세계 90여개 국에서 함께 하는 국내 유일의 국제정당이다.(세계 녹색당은 글러벌그린스 라는 네트워크로 묶여 있으며 공동의 가치를 추구한다.) 이 가짜 국제 정당이 가나다 순으로 우리보다 앞 번호를 받아 녹색당으로 와야 할 표를 많이 먹었다. 당시 '녹색당'에 투표해달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나중에 선거 이후 만나보니 "네가 시키는 대로 찍었어. 국제녹색당 맞지?" 하는 얘길 엄청 많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은 이번에 이 가짜 국제 정당은 선거에 나오지 않았다.


#10 

이번 총선을 통해 명확하게 깨달았다. 방송과 전국언론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 원외정당, 소수정당인 녹색당은 대중 인지도도 지극히 낮고, 정권심판의 논리, 진영의 논리, 사표 논리 등 현실 정치 지형 안에서 힘을쓰기 어려운 구조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이 헛된 논리를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답을 찾지 않는다면 앞으로 녹색당에게 기회가 오기는 어렵다고 본다. 우리끼리 즐겁고 행복한 것도 한 두번이다. 계속 선거에서 참패한다면 정당으로서 제대로 된 꼴을 유지해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고민 또 고민이다!


#11

선거운동 첫날과 마지막날이 가장 힘들었다. 엄청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사실 난 평일엔 일 때문에 거의 결합하지 못하고, 주말과 가끔 시간이 나는 저녁에 함께 했고, 마지막 날은 월차를 내고 아침부터 함께 했다. 이렇게 쓰고 나니 한 편 미안하다. 더 엄청난 일정을 소화했던 후보와 선본의 다른 당원들은 나보다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식 선거운동을 함께 한 날은 토요일이었다. 아침부터 만나 홍제천을 한강 방면에서 홍제까지 걸었다. 노란 개나리꽃이 예쁘게 핀 날이었다. 미세먼지가 지독한 날이기도 했다. 홍제역에서 정책콘서트를 짧게 하고 점심을 먹은 후 무악재를 넘어 독립문을 지나 서대문까지 걸으며 선거유세를 했다. 몇몇 당원들은 다음 일정 때문에 빠져서 택시나 버스로 이동했는데, 선거차량으로 쓰고 있던 세발 자전거와 두 명의 당원은 서대문에서 다시 충정로, 아현, 이대 앞을 지나 신촌으로 돌아와야 했다.


마지막날은 그간의 피로가 쌓여 더 힘든 날이었다. 매일 선거운동을 함께하진 못했지만, 일터 일 때문에 야근을 하기도 했고, 하루는 거의 밤을 새기도 했기 때문에 몸이 엄청 피곤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하루종일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쉬지 못한 채 마지막 날을 보냈다. 막판에는 정말 온 몸이 다 아프고, 특히 발목이 너무 아파서 미칠 것 같았다.


한편 주변의 젊은 당원이 비교적 여유있는 모습을 보면서 난 이제 정말 늙었구나 하는 낙담을 하기도 했다. 다음 선거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체력을 더 길러 놓아야 겠다.


#12

마지막날 11시까지 공식적으로 마이크를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린 10시까지 흩어져 선거운동을 하다가 신촌 광장으로 모였다. 빙 둘러 앉아 시민들과 당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서대문 선본과 비례후보 1명과 청년 선본이 결합해 인원이 제법 많았다. 감동적이었다. 제각각 모두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 하는 일도 다르고, 다른 이유로 당에 들어온 사람들이지만, 지금 이 순간 모두 자발적으로 녹색당을 알리기 위해 여기 서 있었다. 한 시간 남짓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며 행복하다고 느꼈다.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이런 행복을 느낄 수 있어서 선거운동을 하길 너무 잘했다고 생각했다.


#13

광란의 뒤풀이가 이어졌다. 거의 빌려쓰다시피 했던 지하의 펍은 녹색당의 열기로 꽉 차 있었다. 실내에는 후보의 앨범을 계속 틀어놓아서 2주 동안 함께 선거운동을 하며 노래를 다 외운 당원들은 계속 노래를 따라 불렀고, '녹색당을 국회로' 노래가 나오면 앉은 자리에서 혹은 일어서서 일제히 춤을 추었다. 아! 이 사람들 모두 미쳤구나. 단 한 명 미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나 역시 반쯤 미쳐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이 정말 즐거웠다. 함께 선거운동을 했지만, 잘 알지 못했던 당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장난치고, 노래 부르고, 춤추며 밤을 지새웠다.


하나 아쉬웠던 건 막판에 술에 취해버렸던 점. 물론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것이지만, 술에 취해 몇몇 청년 당원들에게 꼰대짓을 한 건 아닌가 걱정이 된다. 사실 자꾸 나이가 들면서 아는 척하고, 가르치려고 들고, 잘난 척하는 꼰대짓을 하는 걸 느낀다.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 조심하고 있었는데, 결국 못 지키고 해버린 거다. 한심한 아저씨의 쓸데없는 말을 받아주고 있었을 청년 당원들께 죄송한 마음이다.


다음 선거를 기다리며


선거 운동은 힘들었지만 즐거웠고, 선거 결과는 참담했지만, 그래도 선거를 뛸 수 있어서 행복했다. 누군가 선거를 민주주의의 축제라 부르던데, 나에게는 당원들의 축제였던 셈이다. 아마 다른 정당이었다면 이렇게 즐겁고 행복할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물론 그들에게도 그들의 즐거움과 행복이 있으리라 믿는다. 이 말은 어디까지나 나는 그랬을 거라는 뜻) 다시 돌아올 선거가 어떤 양상일지, 어떤 후보와 어떻게 치룰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역시 힘들겠지만, 즐거울 것이고, 어렵겠지만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다음 지방 선거에서는 '녹색당을 지방 의회로' 보내고, 다음 총선에서는 꼭 '녹색당을 국회로' 보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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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샘 2016-04-22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내세요, 녹색당 파이팅! 입니다.

감은빛 2016-04-25 15:5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덕분에 힘이 납니다! ^^

나와같다면 2016-04-22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의 수고를 압니다..
그 씨앗들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를 기원합니다

감은빛 2016-04-25 15:5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언젠가는 열매를 맺으리라 믿습니다.

수이 2016-04-22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조건 응원! 다음 지방 선거때는 말로만 응원 관둘게요, 고생하셨어요.

감은빛 2016-04-25 15:59   좋아요 0 | URL
야나님의 응원 덕분에 힘이 납니다.
말로만 응원이 아닌 직접 응원?
늘 고맙습니다! ^^

2016-04-23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25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6-04-23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쓰셨어요~~~
감은빛님, 수고 많으셨어요...
녹색당 파이팅!!!

감은빛 2016-04-25 16:03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고맙습니다!
응원에 힘입어 더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

2016-04-25 1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0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1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01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불치병


#1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는데, 여학생 무리가 정류장을 꽉 채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류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뒤로 돌아가려는데, 나를 본 한 여학생의 눈빛이 갑자기 변했다. 저건 반가운 표정인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가 웃음기를 머금고 쳐다본다. 설마 나를 보고 반가워하는 건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저 나이의 여성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비록 내가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불치병에 걸린 처지라 자신하기 어렵지만, 아는 사람 중에 고등학생인 여성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짧은 시간 이런 생각들을 하며 버스정류장 뒤로 돌아서면서 혹시 하는 마음에 내 뒤를 돌아봤다. 한 여성이 작고 귀여운 강아지를 안고 오고 있었다. 그 여학생은 내가 아니라 내 뒤에 있는 강아지를 보고 반가워했던 것이다. 


#2

길을 걷다가 맞은 편에서 오던 여성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눈이 잠시 커졌다가 웃으면서 작아졌다. 혹시 나를 보고 웃는 건가? 뒤를 돌아봐야하나, 혹시 나를 보고 웃는 거라면 내가 뒤를 보는 행동에 불쾌해 할텐데,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불치병 때문에 난감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일단 더 가까워지기 전에 머리 속에서 저 사람의 얼굴과 내가 아는 사람들 얼굴을 빠른 속도로 대조하기 시작했다. 쉽게 생각나지 않았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드는게 아는 사람인 것 같긴 한데, 얼른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자주 만났던 사람은 분명 아닐거라고 보고, 가끔 만나는 사람 혹은 한 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 목록을 대조했다.


그러는 사이 그 사람과 나의 거리는 점점 좁혀져, 금방 눈 앞에 다가왔다. 그가 먼저 반가운 표정과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역시 나를 아는 사람이 맞았다. 혹시라도 뒤돌아봤다면 얼마나 난감했을까? 속으로 안심하면서 나도 최대한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순간 그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젠장! 내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곧바로 그가 물었다. "아, 저 못 알아보시나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아니면 거짓말을 해야할까? 사실을 말하는 순간 그는 서운해할 것이고, 난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해야할텐데, 난 지금 바쁘고 그런 변명을 할 여유는 없었다. 아니라고, 지금 바삐 어딜 가느라 그렇다고 말하고 꾸벅 인사를 한 뒤 바쁘게 그를 지나치려 했다. 그가 몸을 돌려 "여기서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수고하세요!" 라고 큰 소리로 말하며 웃었다. 나도 "네! 저도 정말 반갑습니다! 또 뵐게요." 라고 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한참 지난 후 그가 누구인지 기억났다. 최근 토요일마다 교육을 받고 있는데, 함께 교육 받는 분이었다. 심지어 그 분은 팀장을 맡았고, 난 부멘토를 맡아서 다른 분들보다 더 자주 소통했던 분이었다. 그렇게 토요일마다 만났지만 정작 우리 동네에서 꽤 먼 곳에 살기 때문에 여기서 만난 건 무척 뜻밖에었을 것이다. 순간 모든 것을 이해했다. 본인 입장에선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 무척 반가워 인사를 건넸건만,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걸 보고, 못 알아본다고 생각했던 것이고, 헤어지며 '여기서 만나서' 반갑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토요일 교육에서 그를 만났다. 난 그날 일이 생각나서 괜히 눈치가 보였는데,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혹시라도 다음에 또 마주치면 꼭 알아보도록 노력할게요.


녹색 투표 용지에는 녹색당


언제부터인가 일터 일이 무척 벅차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번 그렇게 느끼기 시작하니 계속 힘들었다. 일이 힘드니 일에 매달리는 시간이 더 늘어났다. 야근이 늘어났고, 주말에도 일정이 자꾸 생겼다. 토요일마다 교육을 받아야 했고, 일요일에 나가야 하는 경우도 자주 생겼다. 평일엔 일하고, 야근하고, 가끔은 저녁에 아이들과 지내며 지냈고, 그 와중에 동네 시민신문 편집위원으로 회의도 나가고, 글도 써야 했다. 그리고 녹색당 지역 활동을 해야했고, 최근에는 선거운동도 뛰어야 했다.


너무 여유가 없는 삶을 살고 있어서 다른 당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선거운동원은 맡지 않고, 여유가 될 때마다 도우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이 없다는 말에 결국 선거운동원으로 등록을 해야했다. 매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두세번 아침 일찍 지하철 역에서 피케팅을 하고, 출근했다. 낮엔 일하고, 저녁에 시간이 나면 선거운동에 결합해야 하지만,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았다. 대신 주말에는 이틀을 하루종일 선거운동에 매진했다. 평소에도 야근이 잦아 밤에 아이들 잠든 모습을 보고 이마에 입 맞추고 자고, 아침에 아이들이 아직 깨기 전에 또 이마에 입 맞추고 출근하곤 했는데, 주말에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하니 좀 안타까웠다. 선거운동을 하는 와중에 아이들이 보이면 우리 아이들이 생각나서 괜히 서러웠다.


사실 선거가 다가올 즈음부터 서재에 녹색당 이야기를 여러번 써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도무지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가끔 밤에 써야지 하고 컴퓨터를 켰다가도,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글이 써지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예전 선거때 녹색당 이야기를 썼던 글에 누군가(비회원이) 좋아요를 눌렀다는 알람이 몇 차례 떴다. 하나는 2012년 녹색당이 창당하자마자 뛰었던 선거운동 이야기였고, 또 하나는 2014년 실직하고 곧바로 뛰었던 지방선거 이야기였다. 두 옛 글에 모두 좋아요를 누른 건 다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날짜와 시간이 제각각 달랐다. 어쨌건 기존 알라디너는 아니고, 누군가 녹색당 당원이 검색으로 들어와서 읽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 이번 선거 이야기도 꼭 글로 써야지 생각은 계속 했으나, 늘 몸은 피곤했고, 마음은 글 쓸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선거를 하루 앞둔 날, 선거운동을 나가야 할 아침 시간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오늘 하루 몇 명이나 이 글을 읽을지 알 수 없지만, 읽는 분들 모두 녹색당에 표를 던져 주신다면, 조금쯤 늦게 나가는 것도 괜찮으리라 여기며 글을 쓴다. 기억해주시라! 녹색 투표 용지에는 녹색당을 찍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즐겁고 행복한 선거운동


녹색당은 작년 여름부터 매주 목요일 아침 탈핵 캠페인을 통해 시민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고, 올해는 주말마다 정당연설회를 해왔다. 난 아침 캠페인이 참 힘들었는데, 그래도 의무감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정당연설회 역시 대부분 참여했고, 어떻게 하면 길을 가는 시민들에게 효과적으로 녹색당을 알릴 수 있을지 고민을 거듭했다. 본 선거기간에 들어와서는 선거운동원으로 등록하고, 앞서 말했듯 평일 두세번 아침 캠페인에 참여하고, 주말마다 선거운동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참여한 서대문 선본이 참 재밌다. 이런 선거운동은 처음이다!


물론 내 선거운동 경험은 별로 없다. 4년 전에는 서울에 지역구 후보가 없었기 때문에 비례대표 선거운동은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투표 독려 문구를 녹색당 명의로 찍어서 지하철역에서 피케팅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말로 홍보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선거법이 이따위인지 참 황당하기만 했다. 그리고 비공식 사무장으로 선거를 뛰었던 지방선거를 통해 선거법과 선거 운동의 과정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첫 선거는 사실 뭐 한 것도 없었고, 녹색당이 창당하자마자 정당득표 3% 미달로 등록취소가 되어 이름을 잃어버렸다.(나중에 헌법소원을 제기해 이름을 되찾고, 득표가 적다고 등록을 취소하는 악법을 고쳤다!) 두번째 선거는 참 어렵고 힘들었다. 아마도 비공식이긴 하지만 사무장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기에 더 그랬던 것 같다.(그래도 우리 후보가 정말 열심히 선거에 임했고, 제법 괜찮은 수준의 득표를 했기에 뿌듯하긴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다.)





이번 선거는 무조건 비례대표 3% 득표를 바라고 선거운동을 하는데, 그만큼 지역구 후보와 선본은 부담이 적은 것 같다. 게다가 지난 두 번의 선거에서도 그랬지만, 녹색당 당원들은 늘 유쾌하고, 즐겁고, 기발한 방법으로 선거운동을 한다.


이번 서대문 선본은 서대문, 마포, 은평 당원의 연합 선본이다. 당원이 가장 많은 서북권역에서 반드시 1명의 후보를 내고자 하는 마음에 연합 선본을 꾸렸다. 후보는 얼마전 SBS와 JTBC 방송에 소개된 이색 후보다. 신학대학원 출신에 기타를 메고 노래하는 인디밴드이고, 주거권 활동을 해온 시민활동가이다. 매일 신촌에서 녹색당의 정책을 바탕으로 직접 만든 노래를 부르며 정책콘서트를 이어가고 있다.




선거운동은 얼마나 기발하고 재미있는지 모른다. 분명 주말에 쉬지 못해 몸은 피곤하고 힘들지만, 막상 함께하면 즐겁고 행복하다. 길에서 주운 커다란 팬더곰 인형을 세워놓고 '낡은 정치 팬다'라는 이름을 걸어두고, 자전거에 앰프를 싣고 다니며 거리 곳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후보가 직접 만든 '녹색당을 국회로'라는 곡에 율동을 만들어 신촌 한복판에서 단체로 춤을 추기도 한다.




홍제천에서 선거운동을 하면서 노랗게 핀 개나리를 즐기고, 신촌에서 선거운동을 하면서 벚꽃을 즐겼다. 피켓을 들고 있으면서, 미세먼지로 아픈 목이지만, 열심히 녹색당의 정책을 떠들었다. 몸치라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춰 본적이 거의 없는데, 특히 단체 율동에는 단 한 번도 참여해본 적이 없는데, 녹색당이기 때문에 즐겁게, 자신있게, 함께 춤을 췄다.




지금껏 말한건 우리 서대문 선본의 특징이다. 다른 선본은 또 다 제각각의 매력과 재미가 있다. 종로의 하승수 선본과, 동작갑의 이유진 선본 모두 개성이 넘치는 활동을 펼치고 있고, 비례후보 다섯 명도 전국 각지를 돌면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홍제천에서 시민들에게 했던 말을 옮기고 선거운동하러 나가야겠다.


"정치에 실망하신 시민 여러분, 포기하지 마세요! 녹색당이 희망이 되겠습니다. 녹색당은 여러분과 같은 평범한 시민들의 정당입니다. 권력자나 기득권의 입장이 아닌 평범한 시민의 눈높이로 사회를 바라보고 정책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바람을 국회에서 실현시키겠습니다. 녹색당에 힘을 실어주신다면 반드시 다른 정치, 새로운 정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반드시 기억해주십시오. 여러분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은 녹색당입니다!"


내일 투표하러 가시면, 녹색 투표 용지에는 꼭! 녹색당을 선택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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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4-12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녹색당 파이팅입니다^*^

감은빛 2016-04-12 13:3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덕분에 힘이 납니다!

다락방 2016-04-12 0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행동하며 지내시네요, 감은빛님.
늘 숙연해집니다. 빚진 느낌도 들고요.
제가 달리 해드릴 수 있는 건 없고, 어쨌든 저는 녹색당을 지지합니다.
이번 선거에서 정당투표는 녹색당에 해달라고 주변에 얘기해서 몇 개의 표를 얻어 놓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번에는 국회진입이 가능할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힛.

감은빛 2016-04-12 13:33   좋아요 0 | URL
역시 다락방님 멋지세요! 고맙습니다! 오늘 자정까지 한 표라도 더 모으기 위해 거리에서 목이 터지도록 소리 지르는 중입니다. 매연과 미세먼지 때문에 힘드네요.

무해한모리군 2016-04-12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례 순번을 앞당기기 위한 이름을 내내 생각했습니다...
가자 블라당보다 앞서려면 선택지가 많지 않더군요...

가난한 녹색당 ㅠ.ㅠ
가로본능 녹색당 --;;

비천한 상상력을 탓하며
원내 진입으로 빨라집시다.
원조 녹색 녹색당 화이팅!

감은빛 2016-04-12 13:34   좋아요 0 | URL
녹색당이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지향하긴 하지만, 가난한 녹색당이란 당명은 좀 어색한걸요. ^^
모리님, 응원 고맙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16-04-12 15:03   좋아요 0 | URL
제 제일 가까운 벗이 이반인데 다 필요없고 녹색당 원내진입이 소원이라더군요. 녹색당이라는 이름으로 원내진입이 된다면 이번 총선에 어떤 것보다 의미있으리라 봅니다 ^^

`가자` 보다 빠른 꾸미는 말이 생각이 안나요 ㅋㄷㅋㄷㅋㄷ

자, 문익환 목사님 식으로 합시다.
녹색당 원내진입은 됐어!

아무개 2016-04-12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일이 선거일이네요.
한것도 없는데 왠지 떨리고 긴장되네요.

녹색당 힘냅시다 으라차차차!!!!!!!!!!!!!!!!!!!

감은빛 2016-04-12 13:36   좋아요 0 | URL
마지막 한 표라도 모으기 위해 일터에 월차내고 아침부터 거리에 나섰습니다. 결과가 어떨지 저도 긴장되네요. 고맙습니다!

cyrus 2016-04-12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 선거에는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감은빛 2016-04-12 13:36   좋아요 0 | URL
네 늘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chika 2016-04-12 1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침 뉴스에,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밝히는 것도 불법이라고 하더군요 ㅡ,.ㅡ

선거일은 비 예보가 있어서 어머니 모시고 사전투표했습니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 투표를 하신다고 해서 녹색당을 얘기했는데, 돋보기 없이 투표용지를 보다가 잘못찍을뻔했습니다. 안보인다길래 급히 선관위에서 준비한 글자용 돋보기를 받았는데 여전히 안보인다고 하다가 `찾았다!`하면서 손가락으로 짚으셨는데 그 위를 잘못짚으셨....
나는 투표하기 전이라 정말 놀래서 은근슬쩍 돋보기없어도 되냐며 손가락으로 다시 잘 가리켰는데, 그 위에 어머니가 찍으려고 했던 건 노동당이더군요 ㅎㅎ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자꾸만 내게 정의당이냐 노동당이냐 하시더니 어머니는 노동당이었다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

암튼. 희망을 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힘을 보태드리겠습니다 ^^

감은빛 2016-04-12 14:11   좋아요 0 | URL
언론에선 출구 조사도 하는데, 왜 난린가요? 참내!

치카님 고맙습니다! 덕분에 여의도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겠네요! ^^

마녀고양이 2016-04-12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네요.
열심히 하시는 모습, 많이 좋습니다.

감은빛 2016-04-12 14:30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도 녹색당을 국회로 보내기 위해 힘을 보태주실거죠? ^^

감은빛 2016-04-12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녹색당을 지지합니다.˝
락뮤지션 한대수, 문정현 신부, 채현국 할배, 밀양어르신들, 김진숙 지도위원, 임순례 감독 등 문화예술인, 영화인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녹색당을 지지해 주었습니다.
아는 얼굴, 아는 이름을 찾아보세요!

* 문화예술인 지지선언: www.kgreens.org/?p=9267
* 영화인 지지선언: www.kgreens.org/?p=9222
* 동물단체 지지선언: www.kgreens.org/?p=9115
* 밀양주민 입당 기자회견: www.kgreens.org/?p=9298

하이드 2016-04-12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전투표 제 표와 `녹색당`이 뭐야 하는 어머니 표까지 잘 찍고 왔습니다.

카스피 2016-04-13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하신만큼 좋은 결과가 있기 바랍니당^^
 


어제 밤 12시 기준 88시간 동안 8시간 잠을 잤다. 몇 차례 회의를 참석하고, 여기저기 이동했으며, 사무실에서 문서를 만들거나, 전화를 돌리기도 했고, 워크숍에 참석했고, 교육을 받기도 했으며, 술을 마시기도 했다. 잠을 잔 시간이 대략 8시간 이니, 약 80시간 동안 깨어 있었다. 그리고 난 대략 3시간 가량 술을 더 마시다 잠들었다.


단체로 어디 놀러가면 늘 밤에 잠을 자지 않는 편이었다. 1박2일짜리 엠티나 워크숍 등은 늘 그랬고, 2박3일이나 3박4일이라도 연속으로 계속 밤새 술을 마시거나 토론을 하거나 밤 산책을 하곤 했다. 언젠가 전국을 돌며 10일 가량 교육을 받았을 때는 10일 내내 밤새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땐 이동하는 버스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면 아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엊그제는 워크숍을 가서 대략 새벽 2시까지 몇 가지 주제에 대한 논의를 했고, 그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대부분 3시쯤 잠을 잤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사람이 4시 반쯤 자러 들어갔다. 난 남아있는 술을 다 마시고 5시쯤 잠이 들었고, 3시간쯤 자고 일어나 교육을 받으러 갔다. 8시간 동안 열심히 교육을 받고 저녁 7시쯤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워크숍 끝나고 마지막까지 남아서 술을 마셨던 선배가 이 술자리에 참여해, 이틀 연속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나에게 "괜찮냐?"고 "교육은 잘 받았냐?"고 물은게 대략 11시 쯤이었던가 싶다. 그래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괜찮다고 했다. 오전 교육은 좀 지루했지만, 그리 졸립지 않았고, 점심을 먹은 후 조금 졸리기 시작했는데, 그땐 조별 논의 후 발표 수업이었는데, 내가 맡은 역할(조장) 때문에 조별 논의를 이끌고, 발표를 4번 가량 해야 했다. 당연히 졸릴 틈이 없었다.


교육이 끝날 무렵인 5시쯤부터 무척 피곤했는데, 다 끝나고 이동해서 7시쯤 술을 마시기 시작했더니 또 거짓말처럼 컨디션이 괜찮아졌다. 처음엔 피곤하니 많이 마시지 말아야지 생각했고, 가볍게 맥주로 시작했는데, 도중에 소주를 섞어 쏘맥을 마셨고, 나중엔 소주를 마셨는데, 점점 컨디션이 좋아져 소주도 제법 많이 마셨다. 아마 엄청 피곤했을텐데 술은 평소보다 훨씬 잘 들어갔고, 평소라면 이미 취했을 주량을 마셨는데, 의식은 또렸했다. 오히려 아주 심각한 주제에 대해 토론을 했는데, 평소보다 머리가 더 잘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오늘 5시 전까지 원고 하나를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오늘 저녁에 인쇄소에 넘겨야해서 반드시 시간을 맞춰야 했다. 계속 바빠서 원고에 대해 고민하지 못했고, 어제 그 술자리가 없었다면 집에서 원고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며칠 연속인지 기억도 안 날만큼 계속 마신 술을 또 새벽까지 마셨고, 잠이 들었다.


일요일 아침인 오늘 아이들이 장난치는 소리에 깼다. 평소 평일엔 모자란 잠을 일요일 낮까지 늦잠을 자며 보충하는 편이라 더 잘 생각이었는데, 아내는 일이 있어 나가고, 아이들이 배고파해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를 뒤져봐도 딱히 뭔가 만들 재료가 없었다. 그리고 뭔가를 만들 의욕도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간단하게 아이들 밥을 먹였다. 이제 자야지 싶었는데, 원고가 떠올랐다. 잠시 고민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글의 얼개를 만들어냈다. 쓰는 건 한 두시간 두드리면 되리라 여기고 빨리 끝내고 좀 더 자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두드리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마감 시간 보다는 그래도 좀 일찍 보냈지만, 내가 예상했던 시간 보다는 한참 더 늦게 글을 보내고, 알라딘 잠시 살펴보고 이젠 자야지 생각했는데, 알라딘을 또 몇 시간 동안 들여다봤다. 


음 점심도 거르고 벌써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 결국 낮잠은 못 잤다. 오늘 밤에 푹 자고, 내일은 좋은 컨디션으로 출근해야겠지. 언젠가부터 일요일 오후가 되면 출근하기 싫어서 막 기분이 나빠지고 술이 땡기곤 했는데, 오늘은 어떨지 모르겠다.
















책을 사놓고 아직 읽지 못하고 있다. 다른 책들은 조금씩 손을 댔다가 말다가 하면서 최근에는 완독한 책이 별로 없다. 이반 일리치 책들은 발췌독이 아닌 완독을 하고 싶은데, 그럴 여유가 없어서 안타깝다. 주말에 일정이 없어야 진득하게 앉아 책을 좀 볼텐데, 자꾸 일정이 생긴다. 게다가 4월까지는 거의 매주 토요일마다 8시간씩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 책을 조금씩 야금야금 읽고 있는데, 읽는 동안 자꾸 담배가 생각나서 미치겠다. 책 읽다 담배 피우러 나갔다 돌아오면 흐름이 끊겨 집중이 잘 안된다. 그래서 속도가 느린 책이다. 지궐련이라고 하는 지금의 담배가 나온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역사가 오랜 담뱃대나 엽궐련이라고 하는 시가를 꼭 피워보고 싶다. 오래 전에 김형경의 단편소설 [담배 피우는 여자]를 여러번 반복해서 읽고, 필사도 했었는데, 그때마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던 기억이 난다. 집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원칙을 그때 처음 어기고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웠던 기억이 있다. 앞으로 몇 개비의 담배를 피워야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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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1-31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술을 좋아해서 그런가요? 글을 읽는데 술이라는 단어가 많이 보입니다. ㅎㅎㅎ

저는 술을 많이 마시면 평소보다 잠이 잘 오는 체질입니다. 이렇다고 해서 제가 술에 완전히 취해 길바닥에 퍼지는 정도는 아닙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잠을 자요.

감은빛 2016-02-01 12:39   좋아요 0 | URL
제 서재는 항상 술, 담배 이야기가 많아서요.
제가 그 두가지를 늘 입에 달고 살아서요.

저는 술을 적당히 먹으면 잠을 못 자는 편이예요.
그리고 술 마시며 대화하는 걸 좋아해서 늦게까지 마시는 편이구요.
거의 매일 술을 마시는데, 한번 마시면 늦게까지 마시니까 잠이 늘 부족해요.

아무개 2016-02-01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제 화두가 술. 잠. 담배라고 할정도로
위의 세가지 때문에 여라가지 일들이 많습니다.
줄여야지... 하는 생각만하고 있네요.

감은빛 2016-02-03 11:36   좋아요 0 | URL
아무개님 화두라고 하시니 뭔가 심각한 느낌이 듭니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저는 잠은 체력이 허락하는 한 상황에 따라 잘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규칙적인 생활은 어울리지도 않고, 잘 되지 않더라구요.
어떤 날은 밤을 새고, 어떤 날은 일찍 자고, 어떤 날은 늦잠을 자면서
체력을 맞춰가야 할 것 같아요.

술과 담배는 뭐 과하지 않은 선에서 원하는대로 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