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차별


여성과 남성의 차별 문제를 처음 깨달은 것은 언제였을까? 할머니가 통닭을 사와서 다리 두개를 모두 내 앞접시에 놓은 후에, 나머지를 여동생을 비롯한 사촌동생들에게 먹으라고 내놓았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옛날 사람이었고, 당연히 옛날 사람으로 살았다. 손자들 중에서 남성이고, 맏이였던 나를 엄청 챙기셨지만, 나머지 손자, 손녀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 내 여동생은 할머니의 차별을 늘 당하며 자랐다. 조금 말다툼이 있어도 할머니는 여동생에게만 "어디 기집애가 오빠야한테 대드냐!"고 호통쳤고, 앞서 통닭의 사례처럼 사소한 것도 무조건 남자이고, 맏이인 나부터 챙겼다.


역차별


반대로 여동생을 부러워한 적도 많았다. 아버지는 엄한 사람이었다. 평소에는 무뚜뚝하고, 말 한 마디 건네는 일이 없고, 뭔가 일이 생기면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유독 내게 무뚜뚝하고 엄하셨던 아버지는 여동생에게는 가끔 장난도 치고, 웃어주기도 하고, 예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나는 외탁(외모가 외할아버지를 비롯해 외가쪽 사람들과 닮았다.)을 해서 좋아하지 않고, 비교적 아버지를 비롯한 친가쪽 사람들과 닮은 편인 여동생만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여동생을 원망한 적이 많았다.


계층차별 / 지역차별


가난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늘 도시 변두리 지역에 살았다. 달동네, 산동네, 촌동네 등등으로 불렸던 그 동네들은 다른 말로 우범지대라고 불렸다. 늘 폭력이 만연한 동네였다. 골목을 걷다보면 언제 어디서 폭력에 노출될 지 몰라 늘 두려웠다. 저 모퉁이를 돌아서면 누군가가 욕을 퍼부으며 돈을 뺐거나 모욕을 줄 거라는 두려움에 숨을 크게 들이쉬고 걸어야 했다.


비록 덩치는 작았지만, 외모와는 달리 성격은 아버지를 닮아서 절대 물러서지 않는 편인 나는 비록 속으로는 두려웠지만 늘 그런 상황에 당당히 맞섰다. 뺏길 돈을 갖고 다니지도 못했고, 옷이나 학용품 역시 변변치 못한 것들 뿐이라 별로 뺏길 만한 것이 없기도 했고,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두들겨 맞고, 맞서 싸워도 두들겨 맞을 거라면 맞서 싸우고 맞는게 더 낫다는 생각에 힘없고, 싸움을 못 했어도 늘 맞서 싸웠다. 아주 어려서부터 그랬다. 동네에서 한창 키가 큰 형들에게 늘 맞고 살았고, 한번은 부당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어른들에게 맞섰다가 크게 맞은 적도 있었다. 맞아도 맞아도 또 일어나서 덤비는 편이었고, 그들은 결국 때리다 지쳐 "다음부터 조심하라!"는 경고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지만, 또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나는 또 덤볐고, 그들은 오히려 나를 피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 10여년을 맞고 살았더니 청소년기의 나는 폭력 상황에 많이 익숙해졌고, 수많은 경험 덕분에 싸움을 어느 정도 잘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폭력 상황은 늘 두렵다. 익숙하기에 잘 알 수 있는 그 분위기. 상대방이 먼저 주먹을 날리기 직전의 그 느낌을 잘 알 수 있고, 그 느낌이 드는 순간이면 늘 두려웠다. 이젠 예전과는 달리 싸우면 자주 이기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맞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컸다.


고등학교에 진학해보니 우리 동네는 정말 유명한 우범지대였더라. 그 동네 출신이라고 하면 웬만하면 눈을 깔고 고개를 숙이는 걸 봤다. 하나 밖에 없는 그래서 나도 거길 다닐 수 밖에 없었던 중학교는 유명한 폭력조직 두 곳의 조직원을 가장 많이 배출하는 곳이었다. 학교에 경찰차 여러 대가 들어와 폭력조직에 속한 학생들을 연행해가기도 했다.


다른 동네에서 온 아이들의 태도에서 또 다른 차별을 느꼈다. 그 동네 출신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차별. 이른바 흑인 거주지역 사람들에 대한 백인들의 차별 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할까? 너넨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고, 맨날 싸움만 하는 한심한 놈들이야 라는 뜻이 담긴 시선과 몸짓들.


여성차별


고등학교에서도 어김없이 몇 차례 폭력 사건에 휘말렸다. 누군가 건드리면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맞서다보면 어김없이 나도 문제아로 낙인이 찍힐 수 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더 반항적으로 변했고, 싸움은 더 자주 일어났다. 그러다가 공부를 아예 포기한 친구들과 어울렸고, 우린 친구들이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동안 밖에서 놀았다. 술을 마시기도 했고, 근처 여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만나기도 했다. 인문계 여고생들을 만날 기회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대신 자주 만나는 아이들은 상업계 여고생들이었다. 그것도 야간반 아이들과 어울리는 일이 많았다.


그때 여상 야간 아이들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들, 즉 차별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 그것이 여성에 대한 차별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놀라운 것은 자주 어울렸던 그 아이들도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을 잘 알고 있었고, 이미 받아들여 순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인문계가 아닌 상업계에, 그것도 야간으로 들어온 순간 이후 갈 길이 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한편 당시 가끔 만났던 인문계 여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성적이 좋아도 여성이기 때문에 멀리 수도권에 있는 대학을 가기보다는 이 지역에서 제일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좋겠다는 어른들의 권유(혹은 명령)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아이들을 여럿 보았다.


역차별


대학에 들어갔더니 우리 과에는 여성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 여자 선배들의 태도가 좀 이상했다. 신입생환영회라고 갔더니 새내기 남학생들을 모아놓고, "성기발랄하고 어여쁜 남자애들이 많이 들어와서 기쁘다"거나 "옆에 앉아서 술 한 잔 따라봐라" 등 보통 회사에서 남자 상사들이 여직원에게 할만한 언행을 하고 있었다. 이건 우리사회의 여성 차별에 대한 반작용으로 학과 내에서는 남성에 대한 차별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문제는 몇몇 여자 선배들의 도가 지나친 성희롱이 마치 아무 문제 없는 듯 혹은 당연한 듯 여기는 분위기였다.


당시 나는 1학년 학년대표를 맡아 전공 강의때 출석부와 마이크 등 강의에 필요한 물품을 챙겨야 했다. 여성학 강의를 맡아 일주일 한 번 서울에서 내려오는 강사가 있었다. 이 분은 강의시간에 남성에 대한 적대감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마치 모든 남성들이 사라져야 이 사회의 여성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우리 과는 남성이 몇 안되는데, 그 중 매일 얼굴을 마주치는 사람이 나였기 때문에 가끔 그 과도한 남성 혐오를 직접적으로 나에게 퍼부어서 당황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난 조교의 명을 받아 출석부와 마이크와 분필을 준비해주고, 수업 전에 칠판을 닦아두고, 수업이 끝나면 또 칠판을 닦고 강의실을 정리해주는 사람인데, 그 보답은 남성에 대한 혐오 발언과 비아냥이었다. 한 학기 내내 출석부와 마이크를 건네주면 의례적으로 건넬 법한 "고마워요!"라는 말 한 마디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운동권 내 여성차별


학생운동을 짧게 경험했지만, 그 조직의 보수적이고 부정적인 모습들 때문에 운동의 전체적인 흐름에는 함께했지만, 직접적으로 학생운동 내부에서 열심히 활동하지는 않았다. 제일 화가 났던 것이 수배당한 남성 선배들의 속옷과 양말을 여성 후배들이 빨아주는 등 뒤치닥거리를 맡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 문제를 지적하면서 당장 바로잡으로 화를 냈지만, 그들은 그게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고, 결국 그들과는 함께 운동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후 환경운동, 시민운동, 문화운동, 노동운동 등 여러 운동단체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해보면서 운동권 내부의 여성차별 문제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 존재한다는 점도 깨달았다. 


그러면서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늘 다짐하고 살지만, 생활의 영역에서 나 역시 알게 모르게 차별적인 언행을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 역시 늘 할 수 밖에 없었다.


결혼이라는 제도와 차별


이 나라의 결혼 제도는 무조건 여성에게 불합리한 방식이다. 나는 결혼하기 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결혼을 할 때 되도록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시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1년에 한 두번 만났고, 평소에도 거의 연락을 하지 않는 불효자인 나에게 익숙해진 탓에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았기에, 이 사회의 평균적인 가정에 비해서는 비교적 차별을 덜 당한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물론 차별이 없었을 수는 없다는 점을 잘 안다. 그래서 늘 미안했고, 뭔가 바꿔주고 싶었다.(이젠 그럴 기회조차 사라졌지만)


한 3~4년 전쯤 동네에서 아내를 비롯해 몇몇 동네 사람들과 여성문제에 대한 공부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책도 읽고, 경험담도 나누고, 영화를 보기도 했다. 동네 여성 선배들은 평소 아이들을 잘 돌보는 나를 자주 칭찬했다. 육아휴직을 해서 아이를 돌보기도 했고, 이후에도 육아와 가사노동을 되도록 공평하게 나눌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점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모임에서는 그런 개인의 노력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회 전체를 바꾸지 못하는 한계에 대해 고민하면서 뭔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자꾸 개인의 경험으로 환원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가 읽은 책에도 사례 나열 중심으로 평소 가부장제도 하에서 여성이 느끼는 부당함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무책임한 남성들의 이야기가 많았다.


그때 남성으로서 답답함과 한계를 많이 느꼈다. 당시 몇 차례의 공부모임에 계속 참여한 남성은 나 혼자였는데, 가끔 한 두 번 참여했던 다른 남성은 나와는 달리 그 모임의 분위기 자체에 질려버려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결혼은 생활이다. 남녀는 생활 속에서 늘 크고 작은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고, 그것을 최대한 잘 해결하려는 노력이 중요하지 그 갈등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태도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혼할 당시 주례를 맡아주셨던 대학 은사님은 육아와 가사노동을 반반씩 공평하게 하려고 노력했던 분이다. 내가 그렇게 노력하며 살고 있는 것은 은사님의 영향이 크다. 그 분은 주례를 부탁하려 우리가 찾아뵈었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에 대한 오해나 편견을 좁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면서 본인의 경험을 말씀하셨다.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열심히 실천하는 사람을 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깨달았다. 개인의 실천과 의지와는 달리 감정은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을 말이다. 크고 작은 갈등이 감정적인 상처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현명하게 생각하고 노력해서 상처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누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고, 누가 잘나고 못나고의 문제도 아니며, 누가 더 노력하거나, 덜 노력하거나의 문제도 아니다.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달았다. 















내게 '여혐'이라는 단어는 아직 낯설다. 이것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언론 등을 통해 접하고 있었지만, 나의 일상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단어라고 여겼다. 대신 늘 여성과 남성의 차별과 평등 문제를 일상에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하는 고민은 갖고 살고 있다. 이것은 아마 평생의 숙제로 가져가야 할 것이다.


정당 내의 성차별과 해결하기 위한 노력


녹색당은 모든 선출직 대표를 서로 다른 성 두 명 이상이 맡도록 되어 있다. 여성과 남성 뿐 아니라 성소수자까지 배려한 조항이다. 여남동수의 공동대표는 녹색당에서는 기본이고 상식이다. 녹색당은 대한민국 최초로 여성 당원이 다수인 정당이고, 내가 좋아하는 정희진 선생님을 비롯해서 여성 운동을 하는 당원이 많은 정당이다.


하지만 선거운동 과정에서 성차별 문제에 대해 잘 대처하지 못했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하나는 선거운동에 참여한 여성 당원이 일부 몰지각한 남성에게 당한 성희롱을 비롯한 폭력적인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대처하지 못했던 지점이고, 또 하나는 선본 사무실에서 식사를 비롯한 음식을 준비했던 사람이 주로 여성이었던 점에 대한 지적이었다.


첫 번째 지적에 대해서는 같이 선거운동에 참여하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한편 화가 났고, 또 한편 미리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잘 설계하지 못한 점에 대해 반성했다. 두 번째 지적에서는 사실 깨닫기는 했지만, 이 문제를 거론해서 다른 방식을 풀자고 제안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 뜨끔한 면도 있었고, 한 편으로 현실적인 문제들도 있었기에 약간 억울하다는 느낌도 있었다. 우선 주로 식사를 준비했던 분은 당시 선본의 최고 결정권자였고, 늘 그 분이 스스로 본인은 직접 선거운동에 나서는 것보다 뒤에서 식사 준비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그 역할을 자청했다. 그가 만약 최고 결정권자가 아니었다면 논의를 통해 공평하게 나눠서 하자고 제안하거나, 다른 사람이 나서서 나도 한번 하겠다고 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건 성차별 문제 이전에 직위에 따른 권력관계가 먼저 작동한 지점이 있다. 다만 그럼에도 처음부터 식사 문제를 성차별 문제를 고려해 공평하게 설계하지 못한 점은 역시 반성해야 할 지점이다.


선거 이후 이러한 평가가 나온 것은 무척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는 이후 이러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고 꼼꼼하게 점검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노력이 기존 정치와 다른 녹색당 만의 정치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본다.

 


여남평등 사회로 가기 위해


아무 죄없는 청년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하철 역 화장실에서 살해당하는 엽기적인 사고가 벌어졌다.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을 뿐 이 사회에서 여성은 평소 늘 크고작은 폭력적인 상황에 처할 위험을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으며, 이미 많은 폭력행위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 참담한 사태를 겪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크고 작은 노력은 부차적인 것이겠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것이다. 다만 보다 근본적인 어떤 해답과 대책이 무엇일지 잘 모르겠다. 무엇이든 방법이 있다면 그 길을 함께 할 것이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 이 문제를 고민하고 답을 찾기 위한 소통을 이어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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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2 2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01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