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흐린 하늘이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냥 만사가 다 싫고 그 중에서 나 자신이 제일 싫었다. 눈을 감으면 세상이 없어졌으면 싶었다. 사실 간단하다. 내가 없어지면 세상이 없어지는 것과 같으니까. 내가 없어져도 세상은 알아서 잘 돌아가겠지만, 내 기준에선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난 이미 없어졌으므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말하는 내세나 윤회는 없다. 애초에 종교라는 것 자체가 인간이 만들어 낸 개념일 뿐.


어제 평소보다 목을 더 많이 써서 오늘 하루종일 목이 아팠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후로 내 원래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아니 목소리 자체가 바뀐 것 같다. 톤이 더 낮아졌고 굵어졌다. 원래 목소리가 작고 목이 약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스트레스를 이유로 담배는 또 줄창 피워댔다.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담배 연기를 내 뱉었다. 타들어가는 담배소리를 들으며 한숨 또 한숨, 후회 또 후회가 이어졌다. 왜 그랬을까? 대체 왜 나는 그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을까? 자존심이 상했던 걸까? 그냥 내가 못난 사람임을 인정하면 되었을텐데, 왜 그에게 상처를 주며 허세를 부렸을까? 그는 또 왜 그날 따라 그렇게 신경질 적이었을까?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조금만 더 화를 덜 냈다면, 조금만 더 톤을 낮췄다면 그렇게 까지 되지 않았을텐데. 사실 계속 두려웠다. 이 관계가 쉽게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깨져버릴까봐.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한 사람을 잃게 될까 싶어 늘 두려웠다.


뭐라고 해야할까? 어떻게 연락해야 할까? 연락을 받아주긴 할까? 그냥 아무런 예고 없이 훌쩍 찾아가서 사과할까? 어떻게 설명해야 내 진심을 전달할 수 있을까?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고민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다 타버린 담배를 던져버리고, 발로 밟았다.




생활비를 다 써버려 라면 하나 사지 못하고 이틀째 굶고 있던 날, 그는 엄마 몰래 반찬과 밥을 잔뜩 싸서 가져왔다. 몰래 가져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설명하면서 그는 내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가 오빠를 위해 이렇게 애 썼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했다.


그는 일하느라 바쁘고 힘들었지만, 주말마다 꼬박꼬박 나를 만났다.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싶었을테지만, 일찍 일어나 내 자취방에 와서 먹을 걸 챙겨주고, 피곤하다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눕곤 했다. 난 그런 그에게 팔베게를 해주고 함께 누워 있는 것이 좋았다. 문득 잠이 들었다 깨면 그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것이 좋았다.


그는 화를 냈다. 집안 곳곳을 뒤져 겨우 찾아낸 동전 몇 개로 라면을 두어 개 살 지, 담배를 살지 고민하다가 결국 담배를 사는 나를 보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왜 오빤 자기를 아끼지 않아? 왜 오빤 오빠를 함부로 굴려? 제발 그만해! 지긋지긋해!


글쎄 어떻게 답해야 했을까? 소설을 쓰겠다고 골방에 칩거하며 산 게 벌써 몇 달째였다. 집에서 보내주는 얼마 안 되는 용돈으로는 한 달을 버티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 돈은 밥과 반찬이 아니라 담배와 술 값으로 대부분 나갔다. 수입 없이 더 버티기 어려워 결국 학원 강사를 선택한 날, 난 마음 속으로 소설을 포기했다.


어쩌면 그랬다. 나는 소설가가 될 수 없었다. 내 주제에 무슨. 하지만 찌질한 나는 뭔가 구실이 필요했다. 지긋지긋하다는 그의 말이 그 구실이 되어 주었다. 나는 편하게 그를 원망하며 소설을 접었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안심했다. 내가 부족해서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책임을 다른 곳으로 떠넘기고 나는 마치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수도 있었는데, 그의 말 때문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기억을 조작했다.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제일 싫은 건 나 자신이었다. 그는 나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내가 싫다 했다. 나도 내가 싫다 그래서 나를 잘 돌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싫은 사람을 누가 잘 돌보겠나.


나는 사실 신기했다. 나조차 싫어하는 나를 좋아해주는 그가 신기하고 이상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불처럼 내게 빠져들었다. 허세에 가득 찬 교만하고 삐딱한 인간이 뭐가 그리 좋았을까? 나조차 좋아하지 못하는 날 좋아하고 챙겨주는 그를 잃는 것이 너무나도 두렵고 싫다. 잃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젠 느낄 수 있다. 이 관계가 이젠 더 이어지지 어려울 수 있겠다. 돌릴 수만있다면 뭐라도 하겠지만, 돌릴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안다.


슬픔을, 아픔을, 구차함을 견디고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건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다. 차라리 그만두면 안 될까? 이렇게 힘든 삶이라면 그만해도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 그만둘 용기조차 없는 세상에서 제일 싫은 나는 오늘도 온갖 핑계로 자신을 정당화 시키며 살아간다. 그 옛날 그랬듯이.언제나 그랬듯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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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4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19 1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0 0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냥 2018-12-17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허지원 임상심리전문가의 책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를 추천합니다.
어쩌면 눈꼽만큼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 는 생각이 들어요.

감은빛 2018-12-19 19:55   좋아요 0 | URL
뇌과학 책이네요. 일단 보관함에 담았어요.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선택은 틀렸나보다. 평소 강변보다는 올림픽도로가 덜 막힌다는 생각에 올림픽을 탔는데, 차가 많이 막힌다. 그제서야 스마트폰 네비게이션을 켜본다. 과연 다시 강변으로 넘어가면 좀 덜 막히려나. 이렇게 차가 막혀서야 무조건 약속 시간에 늦을 수 밖에 없다. 뭐라 변명을 해야 하나. 솔직하게 차가 막혔다고 말해도 별로 이해받지 못할텐데.


네비게이션은 GPS를 수신한다고 한참을 기다리게 만들더니, 그냥 올림픽도로를 계속 가라고 말한다. 교통상황을 보려고 이래저래 만져보다가 그냥 네비를 종료시킨다. 라디오 볼륨을 올려놓고, 눈을 질끈 감는다. 어차피 늦은 거 마음 졸이지 말고 느긋하게 가자. 눈을 감고 있어도 크락션 울리는 소리가 없는 걸보아 여전히 꽉 막힌 차들은 움직일 생각조차 없는 듯하다. 한쪽 눈만 지그시 떠보니 앞 차가 멀어진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오른발을 엑셀로 옮긴다. 조금 멀어졌던 앞 차가 다시 멈춘다. 엑셀을 밟고 있던 발을 다시 브레이크로 옮긴다. 이 차가 수동식 기어였다면 왼발과 오른손도 바빴을 것이다.


라디오에선 냉장고에 전화기를 넣어두었다던가, 전자레인지에 리모컨을 넣어두었다는 시시콜콜한 사연이 나오고 있었다. 채널을 돌리다가 어느 순간 딱 멈췄다. 곧바로 볼륨을 올렸다. 청아한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노래를 듣는 순간 누군가를 떠올렸다.  


어느날 문득 눈에 들어온 그는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였다. 그저 가끔 얼굴을 마주치는 타인일 뿐. 유독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내 눈에 자꾸 들어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제서야 그 깊은 눈매가, 웃을때 살짝 패이는 보조개가, 시원한 입매가 내 시선을 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모만이 아니었다. 그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 그가 일에 집중하는 모습 등이 보였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옆 사람과 수다떠는 목소리,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목소리, 나를 부르는 목소리, 나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는 목소리. 내용은 전혀 들리지 않고 그저 그 목소리가 내 감각을 휘젖고 있었다.


어느날 술자리에서였다. 저쪽 옆 테이블에서 그와 다른 사람들이 떠들고 있었다. 내 옆에도 일행들이 무언가를 주제로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내 관심은 오직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있었다. 물론 노골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슬쩍 시선을 비껴 뒤쪽 대형 티비를 보거나, 그 옆 창가를 보기도 하면서,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들리지도 않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누군가 건배를 권했고, 소주를 들이키고 내려놓는 순간 옆 자리에 누군가가 앉았다. 그였다. 살짝 취한 그가 내게 잔을 채워달라고 빈 잔을 내밀었고, 천천히 술을 따랐다. 살짝 풀린 눈, 평소보다 더 쾌활한 모습, 뭐라고 말을 하다가 내 어깨를 툭 친다. 평소라면 상상도 못할 그의 행동에 조금 당황스러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다. 나에게 이만큼 편하게 대한다는 뜻이니 나쁠 건 없겠지.


그날 그는 내 옆에서 이런저런 많은 말을 했는데, 깜짝 놀랄 사실이 있었다. 우리가 훨씬 오래 전부터 만나왔다는 사실. 꽤 오랫동안 이런저런 일 때문에 마주칠 일이 많았는데, 최근까지 내가 그를 본체 만체 했다는 것. 그러다가 최근에야 내가 그를 알아봐주기 시작했다고 불평했다. 자기가 얼마나 서운했는지를 강조하며 또 한번 어깨를 툭 친다. 그리고는 잔을 들어 '원샷!'을 외친다. 그랬던가? 내가 그를 의식하기 훨씬 전부터 우린 가끔 만났던 사이였구나. 역시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내가 그에게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 살면서 많이 겪었던 익숙한 상황이라 마치 영화를 보듯 뻔히 내 모습이 그려진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후회가 막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인식 범위 밖에 있었던 걸 무슨 수로 되돌릴 수 있을까?


그땐 몰랐다. 이 관심이, 이 감정이, 이 설렘이 불러올 아픔을, 고통을, 슬픔을 미처 몰랐다. 이 노래를 들으며 갑자기 울컥 감정이 복 받쳤다. 눈물이 날 것 처럼 눈 앞이 흐려졌다. 차가 흔들렸다. 눈물을 훔치고 핸들을 바로 잡았다. 노래는 점점 더 고조되어 고음으로 올라가고, 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 슬프고 아팠다. 도저히 운전을 할 기분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출구로 무조건 차를 몰았다. 한참을 이리저리 도는 동안 여전히 노래가 흘렀다. 마침내 어느 한적한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때 노래도 멈췄다. 나는 시동을 끄고 나와 담배 한 대를 물었다. 후우! 담배 연기가 한강을 향해 멀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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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창고 2014-12-17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이좋다고해도 실례가 아니라면 잘읽었습니다
소설같은 글에 내 옛날 이야기인듯했습니다
감은빛님 친구허락 감사드리고요 오늘 추운하루 감기조심하세요

감은빛 2014-12-17 18:21   좋아요 0 | URL
아유~ 실례는요? 무척 감사하죠! 소금창고님 인연 맺게 되어 반갑습니다! 따뜻한 댓글도 고맙습니다! ^^

북극곰 2014-12-17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침부터 눈물이 왈칵하신거에요? ㅜㅜ 덕분에 저는 간만에 노래 잘 들었습니다만, ...

감은빛 2014-12-17 18:22   좋아요 0 | URL
아침부터는 아니구요. 밤에 쓰다만 글을 손봐서 아침에 올린 거예요.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

다락방 2014-12-17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저도 어떤 기억이 떠오르네요, 감은빛님.
아침부터..

감은빛 2014-12-17 18:23   좋아요 0 | URL
아침부터 어떤 기억이 떠오른 날엔 일이 손에 안 잡힌다던가 하지 않던가요? ㅎㅎ
저는 영 일이 안 풀리는 날이던걸요

무해한모리군 2014-12-17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아침부터...
언제나 누르면 눈물이 날것 같은 곳이 마음속 어딘가에 누구나 있나봐요.

감은빛 2014-12-17 18:25   좋아요 0 | URL
모리님 앞에 붙은 수식어를 바꾸셨군요~ ^^

누구나 그런 아픈 멍울 하나씩 갖고 살겠죠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14-12-17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샷˝ 하는 그 분위기, 그 자리에 저도 있는 것 같네요.
그 느낌, 그 기분, 그 눈물...이 싸한 겨울에 저에게도 익숙한 느낌을 주네요.
글이 너무 좋아요..^^

감은빛 2014-12-17 18:26   좋아요 0 | URL
언젠가 현맘님과도 원샷! 한 번 해보고 싶은걸요

yamoo 2014-12-17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생한 일화네요..근데, 노래를 듣고 왜 그런 슬픔을 느꼈는지 막 궁금해 집니다. 그 노래를 부르는 분이 술자리 옆에서 어깨를 툭 쳤던 바로 그분인가요? 감은빛님은 왜 그런 슬픔에 빠졌을까요? 그분이 이 세상을 하직했나요?? 글에서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매우 궁금증을 유발하는 글입니다..^^

감은빛 2014-12-18 17:16   좋아요 0 | URL
야무님, 그러게요. 왜 그렇게 슬펐을까요?
저도 그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네요.
야무님 말씀처럼 노래를 부른 사람이 아니고,
세상을 떠난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노래를 듣는 순간 그가 떠올랐고, 마음이 아팠어요.
그와의 여러 추억들이 오래된 필름처럼 머리속에서 돌아가더라구요.
왜 슬펐는지를 설명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과 글이 필요할 것 같아요.

나와같다면 2015-07-03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릎이 꺽이네요.. 이 곡을 들으니..

감은빛 2015-07-06 17:21   좋아요 0 | URL
무릎이 꺾인다는 표현, 어떤 느낌일지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저기 있다. 순간적으로 몸이 긴장했다. 짧은 머리칼을 한번 매만지고, 헛기침도 한 두번 해보고, 얼굴을 찡그렸다가 입을 벌리면서 안면근육의 긴장을 풀었다. 옷 매무새를 한번 만져보고 천천히 버스 정류장을 향해 다가갔다. 얼마 전부터 아침마다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타는 여성을 만났다. 처음엔 그냥 자주 보네 정도의 느낌만 가졌다. 이 버스는 우리가 타는 정류장에 올때쯤엔 늘 사람들로 꽉 차있다. 만원 버스라서 누가 먼저 타던 우린 바로 붙어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날엔 내가 그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면서 가고, 어떤 날엔 등 뒤에서 그이의 시선을 느끼며 가곤 했다.

 

이틀 전이었다. 오르막길을 오르던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를 했다.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기에 무슨 일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이 버스는 경사가 급한 오르막과 내리막을 오르내리기 때문에 자주 있는 일이다. 과학 시간에 배운 관성의 법칙이 이런 걸까? 내 앞에 서 있던 그이가 다음 순간 내 품에 안겨있었다. "어머!"라고 높은 소프라노 톤의 비명이 버스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정작 내게 몸을 기댄 그이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니 "아!"하고 작게 소리를 냈던 것 같기도 하다. 당황한 그이는 서둘러 몸을 바로 세우려 했지만 차기 기울어져 있어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나는 의도치 않게 안은 모양새가 되어버린 팔을 살짝 벌려서 옆의 손잡이를 잡았다. 곧 버스가 출발하면서 그이는 몸을 바로 세웠으나, 다음 순간 다시 버스가 급하게 멈췄다. 그이는 또다시 내 품에 안겼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낯선 남자에게 두 번이나 안기다니! 처음과 달리 이번엔 거의 무방비여서 그이의 어깨가 내 가슴을 들이받을 때, 제법 충격이 느껴졌다. 버스는 시동을 다시 켜서 천천히 출발했다. 그이는 다시 몸을 일으켜 손잡이를 단단히 잡더니 내 쪽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아마 5초쯤 되었을까? 그이가 안겨있던 그 짧은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뜨거운 여름이었다. 만원 버스 안은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얇은 면티셔츠를 통해 그이의 체온을 느꼈던 터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의식하지 않는 척 했지만, 자꾸만 그이의 옆 얼굴을 훔쳐보게 되었다. 그이 역시 모르는 척 하고 있지만 아마 내 쪽을 신경쓰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문득 그이가 고개를 돌려 차분하고 조용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또 다시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느낌. 그 눈빛을 마주 보기가 어려워 고개를 돌렸다. 왜 갑자기 나를 보았을까? 내가 자길 힐끔거리는 게 기분이 나쁘다는 뜻일까? 지금도 보고 있을까? 짧은 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는데, 잠시 후 버스에서 우루루 사람들이 내렸다. 드디어 조금 여유가 생겼다. 자연스럽게 보이길 바라며 자세를 바꾸면서 그이 쪽으로 눈을 돌렸다. 어? 그런데 바로 옆에 있는 줄 알았던 그이는 어느새 저만치 떨어져 창밖으로 눈을 주고 있었다.

 

어제는 그이를 만나지 못했다. 내가 평소보다 5분 늦게 나와 그 버스를 놓친 것이다. 사실 또 마주치면 어떻게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한번 말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처음에 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수 없었다. 시간을 묻는 건 너무 뻔해보이고(우린 계속 같은 시간대에 같은 버스를 타고 있으니), 뜬금 없이 날씨 얘길 건네는 것도 웃기다. 뭔가 자연스레 말을 걸어볼 꺼리가 없을까? 고민을 거듭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또 그이가 저기 버스 정류장 앞에 서있다.

 

 

 

그래. 너무 뻔해 보이긴 하지만 그냥 솔직하게 말을 걸어보자. 자주 마주치는데, 인사라도 한번 하고 싶다고 말이다. 그래서 반응이 괜찮으면 계속 말을 걸고, 반응이 좋지 않으면 그냥 그만두지 뭐. 생각은 이렇게 했지만, 막상 그이 근처에 다가서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몸은 더운데, 자꾸만 덜덜 떨렸다. 지금쯤 말을 걸어야 할텐데, 좀 있다 버스가 오면 기회를 놓치는데, 오늘은 꼭 말을 걸어보고 싶은데. 자, 지금이야. 말을 걸어!

 

"저기"

"네?"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그이가 나를 본다. 놀란 듯한 표정.

 

"저, 저희 여기서 자주 마주치네요. 아침마다 계속 마주치니까, 인사라도 하면서 지내면 어떨까 해서요."

 

그이는 같은 표정, 같은 자세로 아무런 말이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뭔가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낄 즈음, 그이가 입을 열었다.

 

"그러네요. 자주 뵈었던 것 같아요. 아, 그리고 엊그제는 죄송했어요."

"아, 아닙니다. 그 버스가 워낙 그. 그런 일이 자주 생기죠."

 

그이는 여전히 표정변화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사과하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하고는 뒷 머리를 긁으며,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그 뒤에도 매일은 아니지만 계속 그이와 마주쳤다. 난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그이는 작은 목소리로 답하거나, 입은 열지 않고 그냥 고개만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인사를 나눈 후에 대화를 이어가지는 못했다. 뭔가 말을 걸어보고 싶은데 마땅한 꺼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게다가 어찌보면 무표정해 보이는 그이의 얼굴을 마주하면 왠지 말걸기가 어려웠다.

 

그 날도 우린 만원버스에 올라 사람들에게 틈에 간신히 끼어 있었다. 그날따라 기사 아저씨의 난폭운전은 극에 달했다. 버스는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 급하게 속력을 줄이고,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로 크게 커브를 돌기도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사람들 틈에서 밀리고 또 밀렸다. 내리막 길에서 버스는 속도를 한껏 높였다. 버스가 기울어져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한쪽 방향으로 쏠렸다. 문득 내 등을 짚는 그이의 손바닥이 느껴졌다. 다음순간 그이의 몸이 내 등에 닿았다. 부드럽고 푹신한 느낌이 닿은 후 그대로 체중이 실렸다. 손잡이를 잡은 팔에 힘을 꽉 주고, 앞으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버텼다. 이 내리막길이 이렇게 길었던가? 경사가 급한 크게 휘어지는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내내 그이는 내게 기대어 있었다. 마침내 내리막길이 끝나자 내 등을 짚은 손바닥에 힘이 느껴지더니 등에 닿아있던 몸이 떨어졌다. 이마에 흥건한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아까 등에 닿았던 부드럽고 푹신한 느낌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얼굴이 붉어졌다.

 

사람들이 많이 내려 차 안이 널널해졌을 때, 내가 앞 쪽 의자가 비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이에게 보았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이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차분한 눈길이 돌아왔다. 나는 눈짓으로 빈 의자를 가르켰다. 그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사양하지 않고 어깨에 맨 가방을 벗으며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그이가 내 허벅지를 톡톡 건드렸다. 한 쪽으로 맨 내 가방을 가르키며 달라는 몸짓을 했다. 손을 내저으며 아니예요. 괜찮아요. 작게 말했다. 그래도 그이는 내 가방을 잡더니, 자기 무릎으로 당겼다. 아니. 괜찮아요. 근데 이거 무거울텐데. 억지로 내 가방을 무릎 위 자신의 가방 위에 올린 그이는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무얼 보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가만히 그 옆 얼굴을 살폈다. 선이 참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묶어 올린 머리칼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해 여름 내내 같은 버스정류장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함께 탔던 우리는 잠시 사귀다가 여름이 끝나 가을로 넘어가던 무렵 헤어졌다. 나는 버스를 타는 시간대를 늦췄고, 그 후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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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3-13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 새벽의 글도 그렇고, 이 글도 좋아요, 감은빛님.
:)

감은빛 2013-03-14 17:52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께서 좋아해주시니 영광입니다! ^^
 

잠 못 드는 밤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귀를 울렸다. 맞은 편에 앉은 후배가 전화기를 꺼내더니 몸을 일으켰다. 나와 내 옆의 친구에게 고개를 숙여 양해를 구한 후배는 황급히 술집 밖으로 나가면서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음악 소리 때문에 제대로 듣진 못했지만 한참 떠들어대던 후배 녀석이 자리를 비우고 나니 대화가 끊겼다. 친구 녀석은 술잔을 들어 올렸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쓴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통화가 길어지는 건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후배를 기다리며 나도 울릴 리가 없는 전화기를 꺼내보았다.

 

화장실을 갔다가 테이블로 돌아오려다가, 귀를 울리는 음악 소리 때문에 머리가 멍해서 잠시 바람을 쐬려고 술집 밖으로 나섰다. 밤인데도 더운 열기가 확 얼굴을 덮쳤다. 담배를 피워물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저쪽에서 아까 나간 후배와 또 한 사람이 걸어왔다. 서너 살 어린 여자 후배였다. 학생회 일로 몇 번 얘길 나눠본 적이 있었는데, 제법 호감 어린 눈길로 바라보던 친구였다. 그런데 아까 한창 영양가 없는 얘길 떠들다 나갔던 후배 녀석이 이 친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알고 보니 둘은 전부터 사귀는 사이였다고, 남자 후배에겐 썩 좋지 않은 감정을, 여자 후배에겐 제법 좋은 감정을 갖고 있던 터라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불쾌해졌다. 둘이 먼저 술집으로 들어가고 담배를 마저 피우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술집에선 또다시 남자 후배 녀석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옆에 다소곳이 앉은 여자 후배. 원래 그렇게 조용한 성격이었던가. 남자 친구 옆이라고 저러고 있는 건가. 애초에 별로 끼고 싶지 않은 자리였건만, 이제 더 앉아 있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남아있던 술잔을 급히 비우고, 가방을 챙겨 들고 나섰다. 깜짝 놀란 후배들과 친구에게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둘러대고 등을 돌렸다.

 

학교 앞 자취방은 언덕길을 이십여 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술을 한 병 사서 갈까 말까. 고민하며 담배를 빼어 물고 걷는데, 이미 걸음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벌써 제법 취했구나. 원치 않는 술자리에선 말도 별로 안 하게 되고, 괜히 술만 더 빨리 들이켜게 된다. 비틀거리는 발걸음마다 자꾸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1년 반을 만났던 여자. 2달 전에 헤어진 여자. 어지러운 정신에 그 여자와 아까 만났던 여자 후배의 얼굴이 겹쳤다. 전혀 닮지 않은 두 사람인데, 왜 그 아이를 보고 그녀가 떠오르는 걸까? 난 단지 후배들을 질투하는 것인가?

 

 

 

결국, 소주와 과자 하나를 사서 자취방으로 들어섰다. 가방을 던져놓고, 땀에 젖은 옷을 벗어서 방구석에 내팽개치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했다. 찬물을 맞으니 조금은 취기가 가시는 듯했다. 몸을 제대로 닦지도 않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방으로 들어섰다. 옷을 입기도 전에 잔을 찾아 술을 따랐다. 짜릿한 감각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담배를 피워물고 맨바닥에 드러누웠다.

 

자꾸만 그녀의 옆얼굴이 떠올랐다. 가만히 눈을 내려 책을 보던 그 얼굴. 옆에서 빤히 쳐다보는 나를 의식하고 있을 텐데, 책에만 눈길을 주고 있던 그 얼굴, 간혹 손을 들어 귀밑머리를 넘기면서도 눈길을 계속 책에 주고 있던 그 얼굴. 손을 뻗어 머리칼을 만지고, 뺨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그 조용한 모습을 흩트리고 싶지 않아 참고 또 참았던 바로 그 순간이 자꾸만 떠올랐다.

 

소주 몇 잔을 거푸 마시고, 과자를 씹고, 담배를 몇 대 피우다 보니 시간은 새벽 1시 15분. 자꾸만 전화기로 손이 가는 것을 참고 또 참았건만, 어느새 전화기가 손에 쥐어져 있다. 울리지 않는 전화. 울릴 리가 없는 전화. 헤어지고 며칠 후 술에 취해 새벽에 전화를 걸었고, 그 다음 날 아침 머리를 벽에 박아대며 전화번호를 지워버렸건만, 어느새 머릿속에 입력되어 버린 그 번호는 잊고 싶어도 쉽게 잊히지 않았다. 다른 번호는 절대 못 외우건만, 심지어 십 년 넘게 같은 번호를 쓰고 있는 집 전화번호도 못 외우건만, 왜 그 번호는 잊히지 않는 걸까?

 

참아야 해! 참아야 해! 술 기운에 전화를 하고 싶진 않아! 아니 전화해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더는 유효하지 않은 말들을 함부로 내뱉지는 말자! 아무리 머릿속으로 생각을 해도 손은 어느새 전화기 폴더를 열었고, 손가락은 익숙한 그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젠장! 전화기를 벽에 던져버리고 남은 술을 입에 던지듯 털어 넣었다. 젠장! 오늘도 또 취하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는 여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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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에 감정적으로 가장 예민해진다. 그 시간까지 잠들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그런 날이면 거의 술을 한잔 마신 날이다. 어제도 그랬다. 후배 하나가 술을 사달라고 해서 12시까지 술을 마시고, 돌아와서 씻고, 컴퓨터를 켠 시간이 대략 1시였다. 뭔가를 끄적거리려고 문서 창을 하나 띄워놓고, Lady Antebellum 의 Need You Now 를 들었다. 한동안 자주 듣던 음악. 언젠가 이 노래로 글을 하나 써야지 싶었는데, 시간을 보내 딱 1시 15분이다.

 

Its a quarter after one, I'm a little drunk,
And I need you now.
Said I wouldn't call but I lost all control and I need you now.

 

이 가사를 오래 되새기며 자판을 두드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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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2013-03-08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 후배에겐 썩 좋지 않은 감정을, 여자 후배에겐 제법 좋은 감정을 갖고 있던 터라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불쾌해졌다." 이것만큼 짜증나는 일은 없죠. :)

감은빛 2013-03-08 13:29   좋아요 0 | URL
그렇죠? ^^
오늘 서울은 미세먼지 비상이라더니,
목이 칼칼하고 눈도 불편하고 그러네요.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