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병
#1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는데, 여학생 무리가 정류장을 꽉 채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류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뒤로 돌아가려는데, 나를 본 한 여학생의 눈빛이 갑자기 변했다. 저건 반가운 표정인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가 웃음기를 머금고 쳐다본다. 설마 나를 보고 반가워하는 건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저 나이의 여성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비록 내가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불치병에 걸린 처지라 자신하기 어렵지만, 아는 사람 중에 고등학생인 여성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짧은 시간 이런 생각들을 하며 버스정류장 뒤로 돌아서면서 혹시 하는 마음에 내 뒤를 돌아봤다. 한 여성이 작고 귀여운 강아지를 안고 오고 있었다. 그 여학생은 내가 아니라 내 뒤에 있는 강아지를 보고 반가워했던 것이다.
#2
길을 걷다가 맞은 편에서 오던 여성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눈이 잠시 커졌다가 웃으면서 작아졌다. 혹시 나를 보고 웃는 건가? 뒤를 돌아봐야하나, 혹시 나를 보고 웃는 거라면 내가 뒤를 보는 행동에 불쾌해 할텐데,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불치병 때문에 난감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일단 더 가까워지기 전에 머리 속에서 저 사람의 얼굴과 내가 아는 사람들 얼굴을 빠른 속도로 대조하기 시작했다. 쉽게 생각나지 않았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드는게 아는 사람인 것 같긴 한데, 얼른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자주 만났던 사람은 분명 아닐거라고 보고, 가끔 만나는 사람 혹은 한 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 목록을 대조했다.
그러는 사이 그 사람과 나의 거리는 점점 좁혀져, 금방 눈 앞에 다가왔다. 그가 먼저 반가운 표정과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역시 나를 아는 사람이 맞았다. 혹시라도 뒤돌아봤다면 얼마나 난감했을까? 속으로 안심하면서 나도 최대한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순간 그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젠장! 내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곧바로 그가 물었다. "아, 저 못 알아보시나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아니면 거짓말을 해야할까? 사실을 말하는 순간 그는 서운해할 것이고, 난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해야할텐데, 난 지금 바쁘고 그런 변명을 할 여유는 없었다. 아니라고, 지금 바삐 어딜 가느라 그렇다고 말하고 꾸벅 인사를 한 뒤 바쁘게 그를 지나치려 했다. 그가 몸을 돌려 "여기서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수고하세요!" 라고 큰 소리로 말하며 웃었다. 나도 "네! 저도 정말 반갑습니다! 또 뵐게요." 라고 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한참 지난 후 그가 누구인지 기억났다. 최근 토요일마다 교육을 받고 있는데, 함께 교육 받는 분이었다. 심지어 그 분은 팀장을 맡았고, 난 부멘토를 맡아서 다른 분들보다 더 자주 소통했던 분이었다. 그렇게 토요일마다 만났지만 정작 우리 동네에서 꽤 먼 곳에 살기 때문에 여기서 만난 건 무척 뜻밖에었을 것이다. 순간 모든 것을 이해했다. 본인 입장에선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 무척 반가워 인사를 건넸건만,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걸 보고, 못 알아본다고 생각했던 것이고, 헤어지며 '여기서 만나서' 반갑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토요일 교육에서 그를 만났다. 난 그날 일이 생각나서 괜히 눈치가 보였는데,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혹시라도 다음에 또 마주치면 꼭 알아보도록 노력할게요.
녹색 투표 용지에는 녹색당
언제부터인가 일터 일이 무척 벅차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번 그렇게 느끼기 시작하니 계속 힘들었다. 일이 힘드니 일에 매달리는 시간이 더 늘어났다. 야근이 늘어났고, 주말에도 일정이 자꾸 생겼다. 토요일마다 교육을 받아야 했고, 일요일에 나가야 하는 경우도 자주 생겼다. 평일엔 일하고, 야근하고, 가끔은 저녁에 아이들과 지내며 지냈고, 그 와중에 동네 시민신문 편집위원으로 회의도 나가고, 글도 써야 했다. 그리고 녹색당 지역 활동을 해야했고, 최근에는 선거운동도 뛰어야 했다.
너무 여유가 없는 삶을 살고 있어서 다른 당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선거운동원은 맡지 않고, 여유가 될 때마다 도우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이 없다는 말에 결국 선거운동원으로 등록을 해야했다. 매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두세번 아침 일찍 지하철 역에서 피케팅을 하고, 출근했다. 낮엔 일하고, 저녁에 시간이 나면 선거운동에 결합해야 하지만,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았다. 대신 주말에는 이틀을 하루종일 선거운동에 매진했다. 평소에도 야근이 잦아 밤에 아이들 잠든 모습을 보고 이마에 입 맞추고 자고, 아침에 아이들이 아직 깨기 전에 또 이마에 입 맞추고 출근하곤 했는데, 주말에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하니 좀 안타까웠다. 선거운동을 하는 와중에 아이들이 보이면 우리 아이들이 생각나서 괜히 서러웠다.
사실 선거가 다가올 즈음부터 서재에 녹색당 이야기를 여러번 써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도무지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가끔 밤에 써야지 하고 컴퓨터를 켰다가도,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글이 써지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예전 선거때 녹색당 이야기를 썼던 글에 누군가(비회원이) 좋아요를 눌렀다는 알람이 몇 차례 떴다. 하나는 2012년 녹색당이 창당하자마자 뛰었던 선거운동 이야기였고, 또 하나는 2014년 실직하고 곧바로 뛰었던 지방선거 이야기였다. 두 옛 글에 모두 좋아요를 누른 건 다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날짜와 시간이 제각각 달랐다. 어쨌건 기존 알라디너는 아니고, 누군가 녹색당 당원이 검색으로 들어와서 읽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 이번 선거 이야기도 꼭 글로 써야지 생각은 계속 했으나, 늘 몸은 피곤했고, 마음은 글 쓸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선거를 하루 앞둔 날, 선거운동을 나가야 할 아침 시간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오늘 하루 몇 명이나 이 글을 읽을지 알 수 없지만, 읽는 분들 모두 녹색당에 표를 던져 주신다면, 조금쯤 늦게 나가는 것도 괜찮으리라 여기며 글을 쓴다. 기억해주시라! 녹색 투표 용지에는 녹색당을 찍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즐겁고 행복한 선거운동
녹색당은 작년 여름부터 매주 목요일 아침 탈핵 캠페인을 통해 시민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고, 올해는 주말마다 정당연설회를 해왔다. 난 아침 캠페인이 참 힘들었는데, 그래도 의무감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정당연설회 역시 대부분 참여했고, 어떻게 하면 길을 가는 시민들에게 효과적으로 녹색당을 알릴 수 있을지 고민을 거듭했다. 본 선거기간에 들어와서는 선거운동원으로 등록하고, 앞서 말했듯 평일 두세번 아침 캠페인에 참여하고, 주말마다 선거운동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참여한 서대문 선본이 참 재밌다. 이런 선거운동은 처음이다!
물론 내 선거운동 경험은 별로 없다. 4년 전에는 서울에 지역구 후보가 없었기 때문에 비례대표 선거운동은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투표 독려 문구를 녹색당 명의로 찍어서 지하철역에서 피케팅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말로 홍보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선거법이 이따위인지 참 황당하기만 했다. 그리고 비공식 사무장으로 선거를 뛰었던 지방선거를 통해 선거법과 선거 운동의 과정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첫 선거는 사실 뭐 한 것도 없었고, 녹색당이 창당하자마자 정당득표 3% 미달로 등록취소가 되어 이름을 잃어버렸다.(나중에 헌법소원을 제기해 이름을 되찾고, 득표가 적다고 등록을 취소하는 악법을 고쳤다!) 두번째 선거는 참 어렵고 힘들었다. 아마도 비공식이긴 하지만 사무장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기에 더 그랬던 것 같다.(그래도 우리 후보가 정말 열심히 선거에 임했고, 제법 괜찮은 수준의 득표를 했기에 뿌듯하긴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다.)
이번 선거는 무조건 비례대표 3% 득표를 바라고 선거운동을 하는데, 그만큼 지역구 후보와 선본은 부담이 적은 것 같다. 게다가 지난 두 번의 선거에서도 그랬지만, 녹색당 당원들은 늘 유쾌하고, 즐겁고, 기발한 방법으로 선거운동을 한다.
이번 서대문 선본은 서대문, 마포, 은평 당원의 연합 선본이다. 당원이 가장 많은 서북권역에서 반드시 1명의 후보를 내고자 하는 마음에 연합 선본을 꾸렸다. 후보는 얼마전 SBS와 JTBC 방송에 소개된 이색 후보다. 신학대학원 출신에 기타를 메고 노래하는 인디밴드이고, 주거권 활동을 해온 시민활동가이다. 매일 신촌에서 녹색당의 정책을 바탕으로 직접 만든 노래를 부르며 정책콘서트를 이어가고 있다.
선거운동은 얼마나 기발하고 재미있는지 모른다. 분명 주말에 쉬지 못해 몸은 피곤하고 힘들지만, 막상 함께하면 즐겁고 행복하다. 길에서 주운 커다란 팬더곰 인형을 세워놓고 '낡은 정치 팬다'라는 이름을 걸어두고, 자전거에 앰프를 싣고 다니며 거리 곳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후보가 직접 만든 '녹색당을 국회로'라는 곡에 율동을 만들어 신촌 한복판에서 단체로 춤을 추기도 한다.
홍제천에서 선거운동을 하면서 노랗게 핀 개나리를 즐기고, 신촌에서 선거운동을 하면서 벚꽃을 즐겼다. 피켓을 들고 있으면서, 미세먼지로 아픈 목이지만, 열심히 녹색당의 정책을 떠들었다. 몸치라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춰 본적이 거의 없는데, 특히 단체 율동에는 단 한 번도 참여해본 적이 없는데, 녹색당이기 때문에 즐겁게, 자신있게, 함께 춤을 췄다.
지금껏 말한건 우리 서대문 선본의 특징이다. 다른 선본은 또 다 제각각의 매력과 재미가 있다. 종로의 하승수 선본과, 동작갑의 이유진 선본 모두 개성이 넘치는 활동을 펼치고 있고, 비례후보 다섯 명도 전국 각지를 돌면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홍제천에서 시민들에게 했던 말을 옮기고 선거운동하러 나가야겠다.
"정치에 실망하신 시민 여러분, 포기하지 마세요! 녹색당이 희망이 되겠습니다. 녹색당은 여러분과 같은 평범한 시민들의 정당입니다. 권력자나 기득권의 입장이 아닌 평범한 시민의 눈높이로 사회를 바라보고 정책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바람을 국회에서 실현시키겠습니다. 녹색당에 힘을 실어주신다면 반드시 다른 정치, 새로운 정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반드시 기억해주십시오. 여러분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은 녹색당입니다!"
내일 투표하러 가시면, 녹색 투표 용지에는 꼭! 녹색당을 선택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