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수학 - 세상을 움직이는 비밀, 수와 기하
EBS 문명과 수학 제작팀 지음, 박형주 감수 / 민음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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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닭 2마리의 2와 숫자 2의 2를 같은 것으로 이해하기까지는

수천 년의 시간이 걸렸다.

 

- 버트런드 러셀 -

 

 

 

 

 Scene #1   “수학을 배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고대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의 유명한 일화로 글을 시작해본다. 그에게 기하학을 배우던 학생이 유클리드에게 질문했다. ‘이런 것을 배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유클리드가 하인을 불러 지시했다. “저 친구에게 동전 한 닢을 주어라. 그는 자기가 배운 것에서 반드시 무엇인가를 얻어야 하니까 말이다.”

 

오늘날에도 똑같은 질문을 던질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일상생활에서 간단한 계산 정도 만 할 줄 알면 됐지, 골치 아픈 수학을 왜 배워야 하느냐는 그 볼멘소리.

 

수학 공부 별로들 안 좋아한다. '수학은 공공의 적'이란 말이 나돌고 우리는 대개 학교 교육을 받는 동안 '적과의 동침'을 하게 된다. 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 수학은 말하자면 인류가 일궈 놓은 문명의 정수쯤 될 텐데, 어찌하여 수학을 백안시하는 그런 엉뚱한 일이 벌어졌을까.

 

어렸을 때 수학 공부를 했던 기억을 더듬어서 정리해본 결과 수학을 싫어하는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집약이 된다. 우선 사고의 단계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해보지도 않고 수학 교과서를 펼치자마자 미리 겁부터 먹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수학을 아예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스스로 자신은 수학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버리면 누적결손으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문제의 심각성을 커질 뿐이다.

 

그 다음 계산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점이다. 문명의 이기인 전자계산기나 컴퓨터에 익숙해져 있어 아예 사칙의 중요성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복잡한 계산은 컴퓨터가 해주는데 왜 머리 아프게 직접 풀 이유가 어디에 있겠느냐 하는 잘못된 생각이 가득하다. 자판만 누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안이한 생각이 수학을 어려운 과목으로 만들고 있다.

 

 

 

 Scene #2   '1+1=2', 증명이 어려운 수학의 세계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數)로 봤다. 이 수들의 조화가 세상 만물을 만들어내고 우주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법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숫자로 표현된다. 내가 혼자 있을 때는 숫자 1과 함께하는 것이다. 아기돼지 삼형제의 그림동화에서 숫자 3을 발견한다.

 

내가 친구와 둘이서 있을 때는 숫자 2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남과 여, 낮과 밤, 신발 두 짝, 양말 두 짝, 손바닥 두 개, 엄마와 아빠 등 이 세상에 두 개로 이루어져 있는 것들이 많다. 이 세상은 두 개로 되어 있을 때,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새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은 날개 하나가 아니라 양쪽에 날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발이 두 개인 것은 발 하나로는 걸어 다니거나 설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 마음에 두 개의 마음이 항상 있는 것은 조화와 균형을 갖기 위한 것이다.

 

괴테는 소설 『파우스트』에서 숫자의 속성을 가르쳐 준다. “하나로 열을 만들라. 둘은 떠나게 하고, 셋을 즉각 이루라. 그러면 그대는 부유하리라. 넷을 버려라! 다섯과 여섯으로, 이렇게 마녀는 말한다. 일곱과 여덟을 만들라. 그러면 성취하리라. 이리하여 아홉은 하나, 열은 영(零) 이것이 마녀의 구구셈이니라.”

 

인류가 문명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추상적 사고능력은 가장 위대한 사고능력이었다. 여러 가지 다른 사물들, 다른 현상들 속에서 공통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언어적 추상능력, 그것을 숫자와 도형으로 나타내고 사고하는 수학적 추상능력, 그 공통점을 여러 가지 기호를 사용하여 법칙을 나타내는 과학적 추상능력 등이 바로 그것이다.

 

어린 시절 때 배우게 되는 ‘1+1은 2’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연산이다. 그러나 인류가 ‘자연수 1과 1의 합은 2’라는 과정을 이해하고 결론을 증명하기까지 수많은 사고능력이 필요했다. ‘1+1이 2인 이유’는 언뜻 당연한 것처럼 보이나, ‘1+1=2’를 증명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놀랍게도 이 단순한 질문의 답은 1913년에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증명했다. 허나 워낙 전문적인 용어가 동원돼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이렇듯, 수학은 답을 찾기 위한 과목이 아니다. 문명이 발전되어도 여전히 풀리지 못한 문제가 수두룩하다. 여러 가지 사물들 속에서, 자연물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숫자로 표현하고 나타내보게 하는 것이 추상적 사고의 출발이다. 그러므로 수학공부는 자연 속에, 사회 속에, 인간의 마음과 생각 속에 담겨있는 비밀을 발견하는 추상의 세계로 여행하는 것이다.

 

 

 

 Scene #3   문명사 속에 남겨진 수학의 흔적

 

어린아이들은 손가락을 구부리며 수를 헤아린다. 평범하지만 이 자연스러움에서부터 수의 개념이 시작되었고, 수 개념을 좀 더 확장된 수 체계로 넓히기 위해 ‘연산’을 정의하게 되었다.

 

수학은 문명이 생긴 이래 인류와 함께 발전돼 왔다. 수학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는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사고를 통해 문명을 발달시켰고 개척해 왔다. 오래전 사람들은 하나와 둘 외의 수는 단지 “많다”라고 했다. 그러나 기르는 가축 수가 늘면서 나무에 눈금을 새기기 시작했다. 이집트인은 물건의 개수를 셀 때 조약돌을 사용하여 물건 하나에 돌 하나씩을 묶어 셈을 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셈하다’라는 뜻의 영어 단어 ‘calculus’는 ‘작은 돌’이란 뜻에서 나온 것이다.

 

또 수의 개념이 확장되고 연산을 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손을 사용하여 셈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10개인 손가락을 자연스레 사용함에 따라 십진법이 현재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게 되었다. 10진법 탄생으로 아무리 많은 숫자도 쉽게 표시할 수 있어 우주를 탐구하려는 인간 호기심이 충족되기 시작했다. 과학 발달과 더불어 인간은 더 빠른 계산을 필요로 하면서 1과 0만을 사용하는 2진법을 이용했다. 이를 이용해 컴퓨터를 개발해 삶의 질을 높이고 우주탐험도 가능해졌다.

 

0이 우리들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상보다 훨씬 다양하고 강력하다. 0은 양수(+)도 음수(-)도 아닌 '무(無)'일 뿐이며, 현대 수학에서 나눗셈을 허용하지 않는 등 어떤 의미에서 0은 수학 합리성을 붕괴시키는 특수한 힘을 갖고 있다. 0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0을 통해서 수학이라는 우주의 언어를 파악하고 그것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의 막연한 질서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게 됐다.

 

결국 우주를 이해하는 모든 수학은 무라고 하는 0의 토대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긴 세월을 거쳐 온 0의 탄생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런 의미에서 0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고 절망과 기쁨의 은유적인 상징이며, 없음이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없음이다. 또 0은 우리 모두의 궁극적인 근원이자 영원한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0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는 출구로 수학과 철학,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는 숫자다.

 

 

 

 Scene #4   수학, 인류의 과제를 풀기 위한 ‘가능성의 학문’    

 

인간이 무리를 이뤄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수를 세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수 집합의 종류가 다양하고 복잡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외계에 보내는 메시지조차 이진법의 코드로 되어있는 것을 보면 문명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수가 있다고 생각해도 틀림없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쉽게 지나치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숫자는 다양하고도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굳이 돈 계산이나 어떤 대상의 측정과 같은 수치적인 표현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여러 상황에서 수를 사용해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고 편리한 여러 가지 생활의 지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숫자는 산수를 비롯한 수리과학을 배우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대상이고, 가장 이해하기 쉬운 수학의 도구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다양한 수의 성질을 이용한다면 그 명료하고 분명한 사고와 판단에 좀 더 논리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수학이 어느 시대에나 인간에게 이만큼 중시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현실 세계의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신비스러운 천체와 자연에 대한 강력한 인식 수단으로서 수학은 절대 진리로 여겨지기도 하고, 때론 신성시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인은 수학이 현상의 본질이라 믿었으며 ‘모든 것은 수’라는 피타고라스학파의 사상도 여기에서 나왔다. 이 사상은 시대와 더불어 확대 재생산됐다. 갈릴레이, 케플러, 뉴턴, 아인슈타인 등이 이룬 과학 분야의 최고 업적은 모두 수학 언어로 구성됐다.

 

세상과 문명이 변하는 것처럼 수학도 변하며, 새로운 수학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성경이나 불전 같은 ‘절대 진리’란 없다. 옛 수학자들은 절대 진리를 탐구한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했지만 자유로이 공리를 설정함으로써 수학의 가치를 재발견했다. 그 몸부림 속에서 끊임없이 발전을 도모하는 노력이 모든 것을 수학의 대상으로 삼는 지적 인간의 숙명이다. 인류 공동체의 과제는 지식의 바다에서 유연하게 헤엄쳐 나아가며 끊임없이 참다운 지식을 찾아내는 데 있다. 뉴턴과 같은 위대한 수학자도 자신을 거대한 진리의 대양 앞에서 더 예쁜 조개와 동그란 조약돌을 찾는 소년에 비유하지 않았던가.

 

새 문명은 수학을 자극하고 수학은 그것을 받아들여 새로운 수학을 낳았다. 또 그 열매를 다시 현실 세계에 투영함으로써 문명을 세웠다. 이 때문에 수학은 ‘가능성의 학문’이자 시대 자체이기도 하다. 각 시대마다 수학은 문명의 상징이었다. 인류 문명에는 수학 우주와 현실 세계를 잇는 우주왕복선이 수시로 왕래한다. 앞으로도 자연, 사회, 인문 분야를 넘나들며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내는 수학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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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평론가가 내 그림을 마구 난도질해 댈 때마다 절망에서 버티게 해 준 힘은 오직 세잔의 그림이었다. 세잔만이 나의 유일한 스승이다.” (앙리 마티스)

 

외고집 세잔의 꿈은 소박하면서도 거대했다. 그는 평생 그림만 그리며 살다가 죽는 소박한 꿈과 불후의 명작을 만들려는 거대한 포부를 동시에 이루려 했다. 그의 그림은 처음에는 실력이 부족한 비주류로 멸시받았지만, 세잔은 스스로 선택한 화가의 길을 수도자처럼 고행하듯 살았다.

 

 

 

 

 

 

 

 

 

 

 

 

 

 

 

 

세잔의 그림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죽마고우였던 소설가 에밀 졸라였다. 졸라가 『작품』이라는 소설을 통해 누가 봐도 세잔이 모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끌로드라는 인물을 만들어 놓는다. 끌로드는 능력도 없으면서 자기가 위대하다고 착각하다가 결국 자살하고 마는 화가이다. 이 소설을 계기로 그들의 우정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폴 세잔 「생트 빅투아르 산」 (1906년)

 

 

세잔은 친구의 잔인한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고향에 있는 거대한 산의 풍경에만 집착했다. 그곳은 바로 생트 빅투아르 산이었다. 산은 세잔에겐 어머니 같은 대상이었다. 언제든 달려가 품에 안길 수 있고 유일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변함없는 산. 세잔의 상처를 제일 먼저 보듬어 준 곳도 이 산이다.

 

산의 기운이 상처투성이 세잔에게 와서 붓을 잡아 준다. 세잔은 성실한 농사꾼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리고 또 그린다. 죽을 때까지 그린 산의 풍경은 87점. 평온하고 웅장한 형태의 생동감 넘치는 산을 20년 동안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창조해낸다.

 

 

 

폴 세잔 「생트 빅투아르 산」 (1906년)

 

 

세잔은 사물을 바라보며 있는 그대로 그리려 하지 않았다. 본다는 것은 눈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물의 본질을 그림에 반영할 수 없었다. 그 사물을 감각적 부분들로 해체함으로써 이미 우리 머리에서 해석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생트 빅투아르 산」연작은 하늘이나 바위나 나무에 대한 것이 아니다. 자연이 뇌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그대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그림들은 훗날 입체파(자연을 입방체로 묘사하는 화파, 대표적인 화가는 피카소)의 탄생을 예고한다.

 

평생을 걸어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리다 죽어간 세잔. 외고집은 예술을 위한 투지였다. 그는 자신의 꿈이 옳았음을 세상 앞에서 증명했다. 산 하나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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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미술의 주요 특징은 간단히 말해 꿈과 자연, 이상향이다. 낭만주의자들이 동경하는 이 모든 것은 지금 여기 없는 것이다. 아득하고 무한하며 끝닿을 데 없는 저 너머를 향해 있다. 윌리엄 터너(1775~1851)의 그림은 낭만주의의 이런 원형적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비, 증기, 속도」는 좀 더 각별해 보인다. 일단 제목에 ‘증기’, ‘속도’가 있는 것부터 근대적이다.

 

 

 

 

 

윌리엄 터너 「비, 증기, 속도」 1844년

 

 

화면을 아래와 위로 나눈다면, 아래는 땅을 보여주고 위는 하늘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리 분명하지는 않다. 자세히 보면, 오른편에 조그맣게 말이 끄는 마차가 보이고, 그 강물 위로 희미하게 조각배 한 척 지나간다. 기차는 몇 가지 색들이 교차하는 철길 위로 치닫듯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비와 기차는 붕 떠다니는 듯하다. 이 효과는 화면을 채우는 안개의 희뿌연 색채로 인해 더 실감 난다. 악조건의 기상에도 불구하고 질주 중인 기차의 속도감이 느껴진다. 어딘가에서 달려와 다시 어딘가로, 무한으로 기차는 달려간다. 기계의 힘, 그로 인한 가속도의 증가는 무한정 뻗어 갈 것이다.

 

여기에서 속도가 풍경을 압도하고, 기술(과학)이 자연(이상향)을 능가한다. 원래 무한성이나 신비는 자연의 속성이었지만, 이제 자연을 벗어나 기계 문명의 성격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기차는 산업화 이후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의 괴물을 암시하기도 한다. 낭만주의자들은 고대 신화나 중세 등 이미 가버린 시대를 갈망했지만, 터너가 갈망한 세계는 인간과 자연의 대립이 지양된 곳이다.

 

터너는 문명에 의해 잊힌 이상향의 은유물을 그림에 숨겨 넣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토끼의 얼굴도 있다. 토끼는 순결함과 평화로움의 상징이다. 그래서 이상향에 사는 동물로 그려지는데 우리 조상들은 달을 늘 이상향으로 그렸고, 그 이상향에는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다고 했다. 토끼가 어두운 밤 달나라에서 방아를 찧을 수 있는 것은 눈이 그만큼 밝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끼 눈을 명시(明視)라고 한다.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고 믿으면서 눈이 밝은 분이라면 이 그림에 숨은 토끼를 찾을 수 있다. 터너가 그린 토끼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이상향의 희미한 흔적인 것이다. 과거에도 현재도 인간은 변함없이 자연과 이상향을 동경한다.

 

 

 

 

* 터너가 숨겨 놓은 토끼의 얼굴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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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너가 숨긴 토끼의 얼굴은 기차가 지나가는 다리 아래에 있다.

단순한 착시에 의한 형상이라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 미술 연구가들도 그림에 남아있는 토끼의 얼굴 형상에  

각자 나름대로 해석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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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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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868]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스밀라가 없는 그린란드의 겨울은 시원한 얼음 한 조각 없는 속 빈 냉장고와 같다. 그린란드라는 이름처럼 녹색의 땅일뿐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덴마크 코펜하겐과 눈의 황무지인 그린란드를 우리에게 특별한 공간으로 각인시킨다. 눈이 내리는 코펜하겐과 얼어붙은 그린란드는 아주 멀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고독하고 강하고 아름다운 그녀, 스밀라가 손을 내밀면 그녀가 입고 있는 코트 자락을 쓰다듬어 볼 수 있을 것처럼 가깝고 생생하다. 우리는 그녀와 함께 그곳으로 간다.

 

스밀라는 특별하다. 그린란드인 어머니와 덴마크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어린 시절을 그린란드에서 보내고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덴마크에서 성장한 이력. 그녀는 추위와 고독과 과학의 세계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나간다.

 

그녀는 경계의 삶과 운명을 산다. 때로는 거칠게 저항하며, 때로는 기꺼이 끌어안으며. 그녀의 몸속에는 야생 이누이트인과 서구 문명인의 피가 동시에 흐르고 있다. 그녀는 야생의 방식과 문명의 방식 모두를 알고 있다. 그 사이에서 스밀라는 자신만의 방식을 끝없이 찾아 헤맨다.

 

떨어져 죽은 아이의 사망 사건을 추적하는 장편추리극은, 단지 소설의 형식일 뿐이다. “사람들은 죽는다. 어떻게 죽느냐 또는 왜 죽느냐를 궁금해 해서 무엇을 얻겠는가?” 스밀라는 ‘문명비판’이든 ‘인간의 존엄’이든 그 무언가를 얻기 위해 그린란드로 떠난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가? 세부적인 것은 그렇지만, 큰 것들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삶은 거짓으로 얽혀 있다. 그런데 세계는 진실도 담고 있다.

 

“수학의 기초가 뭔지 알아요?” 나는 물었다. “수학의 기초는 숫자예요. 누군가 내게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숫자라고 말할 거예요. 눈과 얼음과 숫자.” (157쪽)

 

 

스밀라는 좀체 사랑에 빠지지 않는 성격이다. 사랑보다 눈과 얼음을 더 높게 친다. 그녀의 말에 빌리자면, 이제 더 이상 볼거리에 걸리지 않듯이 질병으로서의 사랑을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차가운 주인공에게도 사랑의 본능이 느껴진다.

 

스밀라는 자신이 아이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파헤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나는 아이에 대한 애정을 가졌을 뿐이다. 그 아이의 죽음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내 고집을 그 사람 처분에 맡겼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나밖에 없었다.”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아이에 대한 애정을 행동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스밀라가 죽으면, 내가 스밀라의 가죽을 가져도 돼?” (70쪽)

 

이누이트들은 고래를 잡으면 가죽과 살을 발라낸 뒤, 먼 바다로 고래의 턱뼈를 돌려보내 영혼을 풀어준다고 한다. 고래는 죽지 않고 이듬해 살을 붙여 다시 돌아온다. 스밀라와 영혼의 교감을 나누었던 이누이트 소년, 이사야는 이런 조화론적인 세계관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박물관에서 본 물개와 들소가 사람에 의해 죽어 욕보이듯 전시된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착취 없이 공존하는 관계라고 생각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이누이트 소년의 원시적인 사랑의 물음. 문명세계 야만의 징표가 사랑의 징표로 전복되는 순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사랑뿐이다. 스밀라라면 그 이유를 이 우주에 나란 존재는 하나뿐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단 한 번만이라도 ‘삶의 역경’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을 이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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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09-10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연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이룬, 보기드문 완벽한 인간 스밀라.. 그때 물개가 다시 튀어올랐고, 어머니는 물개를 쏘았다....˝나는 남자만큼 강하지˝ 스밀라의 엄마도 멋지죠.

cyrus 2017-09-10 19:10   좋아요 0 | URL
네. 스밀라의 어머니가 사냥꾼이었죠. ^^

sprenown 2017-09-12 0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김연수작가의 스밀라에 대한 오글거리는 찬사가 없었다면 손대기 힘들 정도로 지루하고,지겨운 소설이더군요..문화차이뿐만 아니라 번역도 매끄럽지 못하고... 김연수작가가 옛기억을 살려 윤문이라도 할 것이지.ㅋㅋ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리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사랑하기 때문에 푹푹 눈이 내린다는, 이 말도 안 되는 구절 때문에 나는 백석의 이 시를 좋아한다. 분명히 문장구조의 인과관계를 무시하는 충돌이거나 모순이다. 연애의 달인답다. 여기에 넘어가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우주에 눈이 내린다니! 그리하여 나는 가난하고, 너는 아름답다는 단순한 형용조차 찬란해진다.

 

 

 

 

 

 

 

 

 

 

 

 

 

 

 

 

백석의 밤에도 눈이 푹푹 날리고, 강원도의 밤에도 눈이 오지게 내리고 있을 것이다. 이런 밤에, 백석은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자고 외쳤지만, 사람들은 그만 눈으로 덮인 도시에 갇혔다. 응앙응앙 우는 흰 당나귀 소리 대신 쓸어도 쌓이는 하얀 쓰레기 때문에 짜증나 미칠 것 같은 군인들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학창시절, 백석의 시는 그가 늘 동경하고, 때로는 모방한 러시아 시인들보다 무게가 없고 감상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날 때 읽을수록 이 어린아이 같은 시인에게 뭔가 애틋한 것이 있음을 느낀다. 그건 세월이 지날수록 백석의 밤에서 멀어지기 때문일까.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김광균 「설야(雪夜)」 -

 

 

 

예전엔 눈이 오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린애처럼 마냥 기쁘고 즐겁기만 했다. 아무리 큰 고통도 하얀 눈이 어루만져 줄 것 같아서 눈 오는 날은 마음도 따뜻했다. 그래서 저런 시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눈이 내리는 소리를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좀 야한 은유. 지금도 이 구절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잠이 밀려올 정도로 지루한 국어시간에 이 시의 문제(?) 구절만 소리 내서 읽으면 모든 남학생들을 웃게 만드는 웃음 폭탄이 되기도 했다. 국어 선생님은 이상한 생각하지 말라고 핀잔을 줬지만, 아마도 김광균 시인은 이 구절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 킥킥거렸을 것이다.

 

 

 

 

 

 

 

 

 

 

「설야」는 화자가 왜 슬퍼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원인이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화자 즉 시인이 그리워하는 대상이 어떤 여인이라는 점만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이 시에서는 과거의 여인에 대한 막연한 애상만이 감돌뿐이다.

 

이젠 저 시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얗게 쌓인 눈 위에 슬픔이 서린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싸늘한 추회가 왜 시인을 애타게 했는지 알 것 같다. 먼 곳에 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만 늘 시인의 귀에 남는다. 두근거리며 한 사람으로 향한 소리의 길, 풀어 벗는다. 홀로 부끄러움 없이 뜨거워진 몸을 열어 흘러내리는 비단자락. 소리를 감추는 소리의 소리. 뉘우칠수록 사무쳐 소리를 묻는 소리. 길을 묻는 길. 기별도 가지 않는 먼 곳 지우는 소리. 다만 지우는 소리였을 뿐, 옷 벗는 그 여자 없었다. 아련하지만 이제는 손에 잡을 수 없는.

 

 

 

 

 

 

 

 

 

 

 

 

 

 

 

 

누군가는 눈 소식이 썩 반갑지 않을 것이다. 눈이 푹푹 나리는 백석의 밤이 아니라 눈보라가 내리치는 백색의 계엄령일 것이다. 눈은 눈이 올 때면 심장이 콱 옥죄이는 것은 모두 그때 그 기억 탓이다. '대설주의보'가 문득 몸서리 쳐지도록 아프고 두려운 것은 그 때문이리라. 그것은 단순히 기억에서 온 게 아니라 최승호 시인이 「대설주의보」에서 낮게 읊조린 곡조와 함께 돌출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 최승호 「대설주의보」 -

 

 

 

그러니까, 저 오래되고 유구한 기억 속에는 '백색의 계엄령'에 대한 공포가 깊게 새겨져 있어서라고 말할 수 있을 터이다. 대설주의보가 걱정스러운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래서 짧게 흩날리는 눈을 보며 담배를 피울 때, 김수영이 「눈」에서 젊은 시인들에게 재채기를 하라고 했던 구절이 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것도 우연일 수 없다.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 김수영 「눈」중에서 -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그러니까 아픔과 아픔이 만날 수 없도록 만드는, ‘눈 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해도 무관심한 사회적 풍경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만드는 저 ‘백색의 계엄령’에 대고 ‘기침’을, 재채기를 하는 것이라도 필요한 계절이니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엄혹한 한기는 마치 진짜 계엄령이라도 선포된 듯, 어쩌면 삶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는’ 황홀경에 매혹되지만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과 같은 자본은 한 개인의 무릎을 닳게 만들 터이다.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도록 고립되는 삶.

 

그러므로 '대설주의보'가 기후에 따른 경고발령이거나 1980년대 군부독재가 발령한 국민에 대한 강력한 경고인 계엄령일 수만은 없다. 그것은 우리 눈앞에, 발밑에, 바로 옆에 있는 존재나 자연과 손을 맞잡지 않는 데에 대한 처절한 내적 울림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닐까? 기형도가 지적했듯, ‘가누기 힘들어 제 목을 스스로 부러뜨리는 법’을 배우는 시절이니 말이다. 모두, 살아남으시라. 암울한 백색의 계엄령이 아닌 마음을 밝게 만드는 백석의 밤을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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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4-02-10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산에도 눈이 내려요.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쌓인 눈이 얼어붙기 시작하면 정말이지 도무지 어쩔 줄을 모르는 울산, 눈이 오면 사람들이 한꺼번에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만 같은 울산이기에 아아아.. 잠이 오질 않네요.

cyrus 2014-02-10 23:28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포핀스님. 잘 지내시죠? ^^ 올해는 대구가 눈구름이 피하는 곳인가봐요. 부산에도 눈이 왔다던데.. 이 곳은 조금 눈이 내리긴했는데 눈이라기보다는 금방 녹아서 비처럼 내렸어요. 그래도 눈 엄청 쌓여서 밖에 돌아다니지 못하면 정말 답답하게 느껴질거에요. 눈길 잘못 걷다가 넘어지면 다칠 수도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