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뮤니케이션은 선전에 조종된다

 

노엄 촘스키는 “영상을 통한 미국화는 소리 없는 프로파간다(Propaganda)의 무서운 효율성으로 무장한 채 우리 안으로 침투한다. 따라서 영화, TV 등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영상들에 대해 경계하는 법을 시급히 배워야 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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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간다', 즉 선전이라는 말은 요즘처럼 사람들의 생각을 인위적으로 조작한다는 부정적인 혐의를 받지 않았다. 1차 대전에서 일상적인 용어로 남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PR(Public Relations)의 아버지'로 알려진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선전이라는 용어에서 부정적 이미지를 씻어버리는 동시에 선전 전략과 활동을 긍정적으로 소개했다.

 

 

"영어에 '선전'만큼 그 의미가 심하게 왜곡된 단어는 없다. 이러한 변화는 지난 전쟁 때 일어났다. 그 결과 이 단어는 음흉한 성격을 띠게 됐다. (중략) 본연의 의미에서 '선전'은 정직한 가문에서 태어나 명예로운 역사를 지닌, 그야말로 건전한 단어다." (에드워드 버네이스 『프로파간다』중에서)

 

 

선전이란 사람의 생각을 휘두르는 조작 방식이라는 의심을 많이 받지만, 버네이스는 "대중은 마음대로 주무르는 무정형의 덩어리가 아니다"며, 기업과 정부는 대중이 기꺼이 수용할 만한 방법을 통해 존재와 목적을 이해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버네이스의 주장은 어떤 용어나 행위가 아무리 가치중립적이더라도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에 의해 손쉽게 악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의 복잡한 사회ㆍ경제구조에는 버네이스가 제시한 비교적 단순하고 '소박한' 선전 전략이 통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 우리가 의사소통을 힘들어하는 이유

 

 

 

 

 

 

 

 

 

 

 

 

 

 

 

대한민국 직장인들이 직장생활에서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실제로 10명 중 3명이 가족 간에 대화를 하지 않고, 10명 중 8명이 직장에서 동료와 불화를 겪는 그야말로 각박하고 외로운 시대다. 상대방과 진심어린 마음을 주고받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인맥 쌓기에 열중한다. 관리가 아닌 관계 맺기에 있어서는 서툴기만 하다.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저마다의 다른 개성과 색조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각자의 처한 상황과 고통에 대한 내성 그리고 타고난 천성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요즘처럼 물질적 풍요로움에만 의존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려는 이기주의적인 사회에서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의 상처와 고통을 생각 없이 무시하고 오히려 그것을 발판삼아 올라서기 위해서 애쓰는 인간들이 수 없이 많이 있다는 사실과, 또한 상처받은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한 채 그저 그렇게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많이 일어남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일들을 저지른 사람들이 마지막 의지로 실행한 선택은 희망적이기 보다는 절망적인 쪽으로 기울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에 있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상처’다. 과연 상대방이 내 진심을 알아줄까, 나를 오해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을까, 혹시 배신을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과의 소통 부재와 스스로의 고립을 유발한다.

 

 

 

 

 ♣ 진정한 소통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결국,우리 사회가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로막는 현상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국민통합도, 조직과 사회의 건강성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잘못된 의사소통의 폐해에 시달린 우리 사회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나는 있다고 본다. 비록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드라마 <굿 닥터>에 ‘늑대소녀 은옥이’가 나오는 에피소드를 보면 박시온(주원 분)은 ‘진정한 소통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개들과 함께 자랐던 은옥이. 이 아이는 어른들의 잔인한 아동학대에 희생당한 친구다. 인간사회를 학습 받지 못하고 개들이 사는 세상에서 길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의 말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모든 행동은 개와 다름이 없다. 화가 나거나 경계를 하면 무조건 물어뜯고, 사람의 접근을 두려워하며, 인간의 소통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병실에서 길길이 날뛰는 은옥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일단 아이를 진정시켜야 한다. 온몸이 피투성이, 상처투성이인 채로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김도한(주상욱 분)은 강도 높은 진정제를 주사하라고 오더를 내린다. 조금은 잔인해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며, 또한 치료 시간을 획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김도한처럼 직업의식과 의사로서의 소명의식이 투철한 이가 있을까. 그는 의사가 가져야 할 완벽한 이성과 냉철함을 지니고 있다. 은옥이에게 그 어떤 해를 입혀서도 안 되며, 반드시 치료를 해서 낫게 해야 한다는 생각 또한 그 누구 못지않다. 하지만 그에게는 없고 박시온에게만 있는 한 가지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김도한은 모르고 박시온은 알고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박시온은 모든 이를 경계하며 으르렁거리기만 하는 은옥에게 사람이 아닌 개로 다가간다. 마치 엄마개가 새끼개를 찾아가듯, 무릎을 꿇고 두 손, 두 발로 어슬렁어슬렁, 그리고 조심스럽게 은옥에게로 기어간다. 조금씩 은옥의 경계가 풀어지려 한다. 박시온이 내미는 손에 자신의 손을 얹으려 할 뻔도 했었다. 다른 레지던트들이 은옥의 사지를 잡아 진정제를 투여하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이 짧으면서도 강렬했던 장면은 꽤 커다란 메시지를 던진다. ‘소통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소통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었다. 진정제 투여로 치료를 할 수 있었으니, 결론적으로 보면 김도한도 은옥과의 소통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박시온은 소통의 결과가 아닌, 소통의 방법을 건드렸다. 상대방의 처지가 되는 것, 그 처지가 설사 낮고 추하며 형편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밑으로까지 내려가 보는 것, 그렇게 된 후에야 상대방과 진정한 소통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박시온은 보여줬다.

 

‘커뮤니케이션’, 우리는 이 단어를 하루에도 수십 번 듣는다. TV 광고에서, 직장에서, 교육을 통해서,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심지어 우스개 농담 속에서도 듣게 되는 말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소통을 하는 자세는 어떠한가. 이미 고착화된 생각을 쥔 채 상대방을 맞이하고 있지는 않은가. ‘절대’, ‘반드시’라는 말로 나의 생각을 견고히 하는 데 몰두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자세는 이기적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오고 감이 불가한 이기적인 소통만 낳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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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꿈의 작업

 

인간은 누구나 꿈을 꾼다. 이 꿈에 대한 해석은 많은 선각자들의 숙제 중 하나였다. 히포크라테스도 꿈을 통해 몸을 치료하고자 했으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자와 의학자들도 꿈의 존재와 인식에 대해 수많은 고찰을 해왔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 실체가 요원한 분야는 아직 도처에 산재되어 있다. 우리네 일상생활에서도 여러 분야와 현상들이 과학으로 완벽한 해석을 하기 어려운 바가 존재하는데, 꿈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한다.

 

인간이 꿈을 꾸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면서도 꿈을 꾸는 것은 현실세계와의 통로를 열어 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외부자극에 반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잠든 사이에 온도나 촉각, 소리에 대한 자극이 꿈으로 만들어지는 이유도 이렇게 설명이 가능하다. 몸은 잠들었어도 지각신경은 살아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을 억압된 '소망'의 위장된 '충족'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꿈을 해석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의 무의식적 활동에 이를 수 있는 왕도라고 봤다. 그렇다면 자는 동안 수없이 꾸게 되는 꿈은, 의식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평소에 원했던 소망이 환각적 경험 속에서 충족되는 과정의 편린들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꿈은 현실의 반대'라는 속설처럼, 꿈속에서 표현된 소망은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춘 채 늘 위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꿈에 관한 기억은 '꿈의 내용'이란 것과 '꿈의 사고'라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실제 드러나는 꿈 속 세계에서 있었던 직접적이고 현시적인 꿈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그 드러난 세계 이면에 있는 보다 간접적이고 잠재적인 꿈이다. 다시 말하자면, '꿈의 내용'이 우리가 경험하거나 기억하는 것으로서의 꿈이라면, '꿈의 사고'는 꿈의 진정한 뜻과 의미를 파악하게 해주는 측면으로서의 꿈이다.

그렇게 '꿈의 내용'이 '꿈의 사고'로 전환되는 과정을 프로이트는 '꿈의 작업(Traumarbeit)'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압축', '전치', '표상'의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 세 과정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꿈의 세계에서 경험하는 일은 늘 현실 세계의 조건과 맥락을 초월한다. 수면 위로 드러나는 빙산이 전체 얼음 덩어리의 극히 작은 일부이듯이 실제 우리가 기억하는 꿈은 잠재적인 꿈보다 늘 작은 내용을 갖도록 축소된다(압축). 또한 실제의 소망은 그대로 나타나지 않고 다른 얼굴로 변장을 한다(전치). 그리고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고 떠올리던 것들은 꿈속에서 생생한 이미지로 치환되어 나타난다(표상). 이처럼 꿈이란 것을 꾸게 됨으로서 우리는 심리적으로 자신의 욕망과 정서를 우회적으로 충족시키거나, 망각하거나, 억압하거나, 퇴행시키는 것이다.

 


 ♣ 인생은 꿈

 

염세주의나 허무주의에서 나온 것이든, 혹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이라는 철학적 자세에서 나온 것이든 인간이 한때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게 혹시 꿈은 아닌가’ 하는 회의를 갖는 것은 본능의 수준이 아닌가 싶다. 고래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의문에 빠진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깊은 단계까지 가는 사람은 공연히 정말로 염세주의나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꿈이 아니라면 ‘인생은 연극이다’라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에 나만의 비정상이라든가 과도함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셰익스피어도 그의 작품 『뜻대로 하세요』에서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여자와 남자는 배우일 뿐이다”라며 ‘인생은 연극’이라고 했다. 그는 『맥베스』에서도 “인생은 변하는 환영(幻影)일 뿐/ 짧은 순간 무대 위에 있다 사라지는/ 아무 뜻도 없는”이라고 설파한다. 더 나아가 “이 짧은 인생은 한순간의 잠일 뿐”이라고까지 발전한다.

 

셰익스피어와 비슷한 시기의 바로크 시대 문인들도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지 않으면 꿈에 비유했다. 스페인 작가 칼데론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이라는 희곡에서 “한순간의 꿈이 인생”이라고 했다.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극작가인 루드비히 홀베르는 <산(山)사람 에페>의 줄거리를 ‘인생은 꿈’이라는 모티브를 칼데론에게서 빌려왔다

 

에페란 사람이 도랑 옆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남작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그래서 꿈속에서 자기가 가난한 농부였을 뿐이라고 믿게 됐다. 다시 남작의 침대에서 잠이 들었는데 사람들이 도랑 옆으로 옮겨 놓았다. 이제 또다시 잠에서 깨어난 에페는 자기가 남작의 침대에 누워 있던 것이 꿈일 거라고 생각한다.

 

 

 

 

 ♣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하지만 인생을 꿈에 비유한 것은 훨씬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고대 인도나 중국에서부터다. 대표적인 것이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이다.

 

“어느 날 장주(莊周)는 꿈을 꾸었다. 꽃과 꽃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는 즐거운 나비가 되어 있었지만 문득 깨어보니 자신은 나비가 아닌 장주였다. 그런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나 자신은 나비인데, 장주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대체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가?”

 

장자(莊子)의 이름이 주(周)다. 장주(莊周)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 자기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꿈속에서 장주는 유유자적하여 자기가 장주인지 알지 못했다. 이윽고 꿈을 깨자 장주로 돌아왔다. 장주는 자기가 꿈을 꾸어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을 꾸어 자기가 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애매모호함’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경계가 애매하고 색깔이 분명하지 않아 유심히 관찰해도 이것이 저것인지, 저것이 이것인지를 잘 모른다는 뜻. 애매모호함의 이러한 특징은 장자의 호접몽에서 잘 나타난다.

 

장주와 나비, 나비와 장주가 또렷이 변별되면서 또한 변별할 수 없으니 지극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이치는 변별을 양식으로 삼는 지식 너머에 있는 것이므로 아무리 큰 성인이라도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호접몽 외에도 장자는 '제물론'에서 '큰 깸이 있은 뒤에야 현실이 꿈이었음을 안다(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고 했다. 꿈이라 인식되는 현실뿐만 아니라 꿈인 줄 아는 자신조차도 꿈속의 사람이므로 주관과 객관이 모두 큰 꿈인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장자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았던 서양철학자인 데카르트도 동일한 주제에 대해서 고민을 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해답을 찾는 일이다. 그 해답을 처음으로 구한 것은 데카르트라 할 수 있다. 그조차도 처음에는 깨어 있는 상태와 잠든 상태를 확실히 구분하는 특징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성찰>에서 “내가 지금 여기서 윗도리를 입고 화롯가에 앉아 있다고 하는 것이 꿈이 아니라는 절대적인 보증은 없으므로 신뢰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고 했다. 여기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가 나온 것이다. 데카르트 이전의 많은 석학들이 바로 그 직전에서 철학적 고찰을 끝내고 말았지만 데카르트가 비로소 ‘생각하는 나’만은 틀림없는 ‘현실’이라는 답을 찾은 것이다.

 

 

 

 

  ‘다른 세계’라는 절망적인 환상

 

 

 

 

 

 

 

 

 

 

 

 

 

 

 

 

최근 자각몽(lucid dreaming, 自覺夢)이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자각몽이란 수면자 스스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채 꿈을 꾸는 현상을 말한다. 꿈을 꾸면서 스스로 그 사실을 인지하기 때문에 꿈의 내용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자각몽을 꾸는 비결이 있다. 꿈속에서 초현실적인 현상이나 비정상적인 사물을 발견하면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고 자문한다. 처음엔 그 순간 꿈에서 깨기 쉽지만, 연습을 계속하면 깨지 않고 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 지각하지 못하고 꾸는 꿈의 내용에 비해 현실적이며 일관성이 있다. 또 꿈을 꾸는 동안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수면상태와 깨어있는 상태의 차이가 거의 없다. 아직까지 확실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루시드 드림』의 저자 스티븐 라버지는 드림을 통해 스트레스 해소, 슬럼프 극복, 악몽 극복 등 자기를 괴롭히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루시드 드림은 자신을 치유하고 성장할 수 있는 도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은 자각몽으로 현실 속의 고민을 해결하는 사례도 제시하고 있다. 골프황제 잭 니클라우스는 어느 날 갑자기 슬럼프에 빠졌다. 아무리 애써도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공이 원하는 대로 잘 맞기에 살펴봤더니 자신이 평소와 다르게 클럽을 쥐고 있음을 알았다. 다음날 현실에서 꿈속의 방식대로 스윙을 해보니 공이 잘 맞아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원소주기율표를 만든 러시아의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원자량에 따라 원소를 분류하는 법을 발견하기 위해 오랜 세월 노력했지만 찾지 못했다. 1869년 어느 날, 그 문제와 씨름하다 지쳐 쓰러져 잠에 든 그는 꿈속에서 어떤 표를 보게 됐다. 그는 잠에서 깨자마자 곧바로 꿈에서 본 그 표를 종이에 옮겨 적었다. 그 표 가운데 잘못된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오늘자 국민일보는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 “자각몽 열풍이 불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젊은 층에서 자각몽이 대유행하는 것은 만화, 소설, 게임 등 개인적으로 현실 도피를 접할 수 있는 세대인 만큼 현실과 또 다른 삶을 살고 싶은 욕망 때문다. 이를 반증하듯, 최근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자각몽’ 관련 글들이 속속들이 올라오며 현실과 다른 세계인 꿈에서나마 자유를 만끽하려는 젊은이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후기들 중에는 부작용에 가까운 것들도 있다. 한 자각몽 경험자는 “꿈 속에서 자해를 했는데 깨어난 후에도 몇 주일간 고통을 느꼈다. 악몽이 두려워 불면증이 생겼다”라고 적었다. 또 다른 자각몽 경험자는 “꿈속에서 내가 해를 입힌 사람이 자꾸 떠올라 괴롭다. 어린 시절 당했던 학교폭력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나서 힘들다”라고 토로했다. 무리한 자각몽 시도로 피곤한 상태가 계속되거나, 자각몽에 몰입하다가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현실을 인식하는 주체도 객체인 현실도 몽땅 한바탕 큰 꿈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가 모두 꿈속의 허망한 일이라면 눈앞에 엄연히 전개돼 시시각각 접하는 사물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물을 인식할 때 사물과 인식 주체인 자기 사이에 '나'란 관념 또는 이러저러한 상념들이 개입되지 않는다면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무너지고 허망한 꿈도 사라진다. 이것이 큰 꿈을 깨 변별하지 않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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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뉘르주는 팡타그뤼엘의 부하로서 사악하고 교활할 뿐만 아니라 남을 골탕 먹이기를 잘 하는 주정뱅이다. 그가 마침 배를 타고 여행 중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양을 잔뜩 실은 상인과 함께 배를 타게 되었다. 상인은 허름해 보이는 팡타그뤼엘의 행색을 보고 모욕적인 말을 내뱉는다.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파뉘르주가 주인을 위한 복수를 꾸민다.

 

그리하여 좋은 말로 살살 구슬러 그 자가 데리고 가는 양들 가운데서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는 제일 큰 양 한 마리를 비싼 값으로 산다. 그런 후에 그 양을 집어 들어 냅다 바다 속으로 던져 버린다. 양들에게는 크고 기운 센 우두머리 양을 따라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습성이 있었으므로 파뉘르주는 그런 습성을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파뉘르주의 양떼' 같은 부화뇌동(附和雷同)의 무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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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 나랑 비슷한데...’

 

 

 

 

 

 

 

 

 

 

 

 

 

 

 

 

 

다음의 글을 읽고 스스로에게 적용해보자.

 

 

당신은 규율을 지키거나 제약이 따르는 상황을 불만스러워한다. 하지만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어느 정도의 규칙과 통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지나친 망설임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친 적이 있다. 당신은 만족할 만한 증거가 없으면 타인의 의견을 잘 수용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의견을 불편해하는 타인이 있을까 봐 조심하는 편이다.

 

 

당신은 내향적이며 과묵한 편이다. 하지만 공감을 확신하는 상대에겐 외향성이 발휘되고, 과감해진다. 한마디로 기회가 오면 충분히 사교적인 사람으로 변모한다. 당신은 가끔 비현실적일 때도 있다. 숨어 있던 진짜 아버지가 나타나 수억 짜리 건물을 증여한다거나, 현빈 같은 남자가 우주여행을 하자고 프러포즈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의 당신은 알뜰하며, 현실에 만족하는 편이다.

 

 

위의 글이 자신의 성격과 어느정도 부합될까. 심리학자인 B.R. 포러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이 평가서가 자신의 성격을 얼마나 잘 설명하는지 점수를 매기라고 주문했다. 결과는 5점 만점에 4.26점.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의 성격과 비슷하다는 답을 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평가서는 신문의 점성술 내용을 대강 짜맞춘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성격특성을 자기만의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심리적 경향바넘 효과(Barnum Effect)라고 한다. 19세기 말 곡예단에서 사람들의 성격과 특징 등을 알아내는 일을 하던 바넘에서 유래했다. 혹은 성격 진단실험을 통해 처음으로 증명한 포러의 이름을 따서 '포러 효과'라고도 한다.

 

바넘은 19세기 말 미국에서 서커스단을 이끌었던 유명한 곡예사다. 그는 서커스 도중에 관객을 아무나 불러내어 직업이나 성격 등을 알아맞히는 것으로 인기를 끌었다. 신통력이 뛰어났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보편적으로 들어맞는, 이를테면 "당신은 활발한 성격이지만 때로는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내성적인 면도 가졌군요"라고 말해도 관객은 저절로 "어쩌면 그렇게 잘 맞힐까?"라고 감탄하기 마련이었다. 바넘 효과는 유행가를 자신의 이야기인 양 착각하는 현상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사람들이 답답할 때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서 그의 신통력에 탄복하는 것도 바넘 효과가 작용한 것이다.

 

 

 

 

 ♣ 사주는 사주일 뿐

 

어제 KBS 2TV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에서 ‘사주점에 빠진 친구’가 등장했다. 점에 빠진 친구는 손금, 관상, 사주를 보느라 용돈을 다 썼고, 아침마다 오늘의 운세를 본 후 그곳에 적힌 내용대로 실천했다. 그리고 오늘의 운세에 ‘사람들 앞에서 말조심할 것’이라고 나오면 밤 12시가 지날 때까지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으며, ‘오늘은 차조심 할 것’ 이라는 운세를 보면 그날은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유명한 점집의 복채를 준비하기 위해 막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운세 내용을 있는 그대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 방송에서는 우스갯소리로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지만, 사실 주변 사람 입장에서는 운세와 점을 그대로 믿는 사람과 함께 생활하면 심적으로 피곤하거나 친밀감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또 사주 결과 때문에 극단적인 결정을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가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파혼 소식을 전해왔다. 이유가 황당하기 그지없다. 사주를 봤는데, 서로 궁합이 안 맞더란다. 주변에도 사주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일부는 아주 맹신하는 사람도 있다. 어제 방송에 나온 ‘점에 빠진 친구’처럼 말이다.

 

주변에서도 흔히 정초에 본 사주에서 올해 운이 안 좋다며 크게 낙담하거나 자신감마저 잃는 사람을 발견하기도 한다. 생년월일시만 가지고 성격은 물론 과거와 미래를 그렇게나 소상하게 말할 수 있다니 신기하고 재밌긴 해도, 과연 어디까지 믿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혈액형별 성격도 보면 그럴 법한 성격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 A형은 다정다감하고, B형은 바람둥이이라는 둥, O형은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AB형은 사이코다? 필자는 B형이지만 지금까지 바람을 핀 적이 없었고, 독창적이지만 제멋대로라며 AB형 아니냐는 소리도 종종 듣는다. 그리고 세상에 지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혈액형별 성격이나 심리테스트, 오늘의 운세에서는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성격을 모호하게 풀어 놓는다. 그런 두루뭉술한 묘사일지라도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자신의 특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혈액형 성격론은 이미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이론으로 판명난지 오래다.

 

사람은 대개 부정적인 점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법이다. 대체적으로 혈액형 성격론에서 사람들이 맞다고 여기는 부분은 부정적인 요인이다. 사람은 긍정적인 점보다 부정적인 요인에 더 신경을 쓰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은 혈액형 성격학에서 말하는 성격적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사람은 때론 소심하고 때론 활달하다. 진득하게 하나에 집중하다가도 쉽게 싫증을 내는 게 사람이다. 일관성이 있다가도 때론 제멋대로 이거나 변덕스럽다. 때로는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창조적이었다가 너무 개성이 넘쳐나기도 한다. 때론 얌전하다가도 광기를 갖기도 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했듯이 혈액형 성격론은 그 태생부터가 의심스럽다. 혈액형 성격론은 1880년대 독일에서는 우생학적인 관점에서 발생 했다. 칼 란트슈타이너가 1901년 ABO식 혈액형을 만들었고 그 이후 연구한 결과 1910년대 아시아 인종은 B형이 많고, 유럽은 A형이나 O형이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유럽인들은 아시아인을 낮추고 백인을 높이기 위해 B형을 열등하게 만들었다. 일본에서는 일본인들이 유럽인과 같이 A평과 O형을 강조하면서 혈액형 성격론이 굳어진다. 그래서 B형 성격론은 적은 혈액형이므로 매우 편파적인 측면이 많다.

 

 

 

 

 ♣ 진짜 ‘나’를 알려는 자세

 

철학관의 훈수나 타로점을 믿지 않고, 혈액형별 성격 분석에 시큰둥한 나 같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바넘 효과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편견이나 선입견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또 다른 편견이 될 수도 있다. 보편타당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고 편견이나 선입견을 극복한 판단적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 바넘 효과의 진실 유무를 떠나 세상의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영혼이 몇이나 될까.

 

 

 

 

 

 

 

 

 

 

 

 

 

 

우리는 자신에 대해 매우 궁금해 한다. 소크라테스가 지적하기 이전부터 자신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이러한 이해를 통해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심리적 에너지 낭비를 막으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좋아하거나 높이 평가하는 점은 강점으로 키우려하는 반면,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하고 평가 절하하는 부분은 약점으로 숨기려고 한다. 자기 스스로 속이는 일종의 자기기만을 함으로써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긍정적인 것만 노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주변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다. 자신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을 통해 타인의 성격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자신을 알 수 있을까. 전문적인 성격분석 서비스나, 인터넷에 나도는 여러 가지 성격 검사도 있지만, 주변 사람을 통해서 더 잘 알 수 있다. 부모는 자녀를 통해서, 직장인은 동료를 통해서, 또한 친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들이 나에 대해서 하는 말이 자신의 성격을 아는 데 가장 큰 팁이 된다. 주변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이 자신을 아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또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자신을, 사람을 아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사실 사람들은 일이 잘되고 상황이 좋을 때보다는 힘들거나 난관에 부딪쳤을 때 원래 성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더 많다. 상황이 좋고, 어려움이 없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적절한 사회기술로 상황에 대처하지만 위기상황일 때는 기술보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내비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자신을 알아가는 일은 끝이 없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처한 상황에 따라, 만나는 사람에 따라 성장하기도 하고 퇴화한다. 또 자신을 알아가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눈과 귀를 닫고 자기가 아는 대로 고집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수천 년 전에 죽은 그리스 철학자는 오늘도 ‘너 자신을 알라’고 한다. 이에 심리학자 융은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의 의미라고 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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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9-25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이 글을 읽으니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명한 인물의 본보기로 삼았고, 평생을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데 몰두했던 몽테뉴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그가 말했던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에는 우리와 남들 사이만큼이나 차이가 있다"는 말은 두고두고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싶더군요.

* * *

운은 우리들을 좋게도 나쁘게도 하지 않는다. 운은 우리들에게 그 재료와 씨를 제공할 뿐이다. 우리의 마음은 운보다도 더 강하며, 행복 또는 불행한 조건의 유일한 원인이 되고, 자기 마음대로 운을 돌리며 적용한다.(몽테뉴)

"항상 동일한 인간으로서 행세하기는 대단히 어려움을 명심하라."(세네카)

cyrus 2013-09-25 21:37   좋아요 0 | URL
몽테뉴의 명언이 제 글과 잘 어울리면서 좋아요. 오렌님 덕분에 몽테뉴와 세네카의 좋은 명언 알아갑니다. ^^

김성환 2014-11-17 0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Scene #1  확증 편향

 

 

 

 

 

 

 

 

 

 

 

 

 

 

 

 

 

심리학 용어에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증거나 자료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선택하는 경향을 말한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과 일치하는 정보는 쉽게 받아들이지만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자신의 의견에 맞도록 왜곡하거나 무시해버린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보거나 듣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확증 편향의 원인은 자기논리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선입견 때문이다. 이러한 선입관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새로운 정보나 다른 의견은 틀린 정보로 인식하게 된다. 결국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보를 재해석(축소, 왜곡)하는 자기합리화가 발생,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확증 편향의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하나의 거대한 집단 사고로 형성하게 되면 사회 갈등을 야기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확증 편향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사회적인 이슈를 하나를 꼽자면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와 인식이다.

 

 

 

 

 Scene #2  확증 편향의 함정에 빠진 역사관

 

 

 

 

 

 

 

 

 

 

 

 

 

 

 

 

한국사가 2017학년도부터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된다. 한국사가 대학입학 시험의 독립·필수과목이 되는 것은 24년 만이다. 한국사의 수능 필수화는 일본의 역사왜곡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청소년들의 역사인식 수준이 낮다는 우려가 나오면서 정치권을 중심으로 논의가 시작됐다. 한국인으로서 나라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교육이 필요한 건 자명하다.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에 총을 겨눈 안중근 의사를 병원에 일하는 의사로 안다거나 ‘3.1절’을 ‘삼점일절’로 읽는 중·고등학생들이 있다면 그냥 웃고 넘기기에는 심각하다. 6.25 전쟁이 몇 년 몇 월 며칠에 발발하는지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대학생도 있다.

 

정부의 한국사 수능 필수화 도입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도 있는 반면에 부정적인 여론도 있다. 한국사는 암기해야 할 과목이라서 청소년의 학습 부담이 커져 오히려 흥미가 잃을까 우려되기도 하며 평가 위주의 입시 제도를 통한 역사 공부가 과연 역사인식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사 수능 필수화가 제대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신중한 논의가 장기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청소년이 올바른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균형 있고 건전한 역사관이 들어있는 역사 교과서로 배워야 한다. 지난 8월 27일 한국사가 수능 필수 과목으로 지정되고, 3일 뒤인 8월 31일에 교학사에서 출판한 역사 교과서가 검정을 합격했다. 하지만 야당 및 일부 학계에서는 해당 교과서의 역사 왜곡이 심각한 수준이라며 이번 검정 합격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친일파 인사들에 대한 미화, 군위안부 축소 기술, 식민지근대화론 일부 차용, 이승만 및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화 등으로 일각의 비판을 받고 있다.

 

교과서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역사적 내용 및 역사관은 뉴라이트의 역사관과 일치하다. 뉴라이트 소속 교과서포럼은 2008년에 기존 역사 교과서의 내용을 문제 삼아 중점적으로 수정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출간했다. 교과서 검정을 받지 않았으나 편향된 내용 때문에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식민지 근대화론 옹호는 물론이요, 일제 강점기 동안의 항일 운동이 우파 위주로 비중이 작게 서술했다. 이승만의 활동을 내세우기 때문에 우파 가운데서도 김구와 안창호를 소박하게 그리거나 일부 폄훼했다는 비판도 있다. 역사학계는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편집자 중, 한국사 전공자는 한명도 없으며 교과서포럼이 일본의 극우 단체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유사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김기협은 《뉴라이트 비판》에서 뉴라이트 역사관은 학문적으로 매우 부실하며 대안교과서 출판은 정치적 책략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책 제목처럼 김기협은 뉴라이트만 비판하고 있는 건 아니다. 뉴라이트 역사관이 등장하게 된 원인을 한국 사학계의 지배 담론인 ‘(식민지) 수탈론’에서 찾고 있다.

 

식민지 수탈론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한 이후 일본이 조선에서 행한 경제관련 기반 시설이나 정책들은 조선의 행복증진을 위함이 아니라 조선을 키워서 수탈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반대 입장이라고 보면 된다. 이를 비판하기 위해 나온 역사론이 ‘근대화론’이다. 그러나 수탈론 역시 근대화론 못지않게 역사학계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민족주의적 사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의한 피해망상적 정서의 뒷받침도 받아왔다는 문제점이 있다. 김기협은 수탈론자들의 지나친 편향성에 대한 뉴라이트의 지적에 일부 공감하기도 한다. 결국 하나의 역사를 서로 상반된 입장으로 바라보는 뉴라이트와 주류 역사학계는 확증 편향이 만들어 낸 사고의 함정을 피할 수 없다. 편협된 사고의 함정에 빠진 이상 두 진영 간의 대립과 갈등은 장기화될 것이다. 자신에게 익숙하거나 오랫동안 믿고 있는 역사관과 조금 다른 내용에 반감을 형성하고 여기에 이념 대립 같이 더해진다면 ‘보수 대 진보’ 양상으로 싸움판이 더욱 커지게 된다.

 

 

 

 

 Scene #3  콤플렉스가 만든 확증 편향적 역사 인식

 

 

 

 

 

 

 

 

 

 

 

 

 

 

 

 

“일본인들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문화를 무시한다.” (5쪽)

 

유홍준 교수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확증 편향적인 역사 인식의 문제점을 단 한 줄로 제대로 요약했다. 1981년 고고학자 후지마라 신이치가 일으킨 구석기 유물 조작은 일본보다 앞선 한반도 고대 문화에 대한 일종의 열등감이 만들어 낸 최악의 사건이다. 이 사건 또한 사실을 부정하고 자신(일본 역사학계)에게 유리한, 그것도 거짓된 정보를 자기 합리화하는 확증 편향이 원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일본, 특히 우익은 과거의 역사는 바뀌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자신의 눈을 스스로 가리고 왜곡을 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 역시 잘못된 역사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앞에서 말한 근대화 수탈론은 일본 강점기 때 받은 피해의식이 개입될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데 ‘근대사 콤플렉스’로 볼 수 있다. 일본의 고대사는 우리나라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으나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문호 개방 덕분에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빠른 근대화 발전을 이룩했다. 과거 일본이나 지금 역사를 왜곡하려는 오늘날 일본의 모습이 혐오스럽다고 해서 그들의 문화마저 무시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역사관이다.

 

한 때 국내 역사학계 내에서 고대 삼국이 일본을 지배했다거나 백제의 한 갈래가 일본을 건설했다는 주장이 주목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주장을 뒷받침만한 확실한 유물이나 사료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이러한 역사적 주장은 한반도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일본문화를 무시하는 확증 편향적인 태도로 빠질 우려가 있다. ‘일본의 고대문화는 우리가 만들어준 것’, ‘일본의 천황은 백제 왕의 후손이니까 결국 한반도 사람’이라는 일반화의 오류를 하나의 역사적 통념으로 인식하게 된다.

 

 

 

 Scene #4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확증 편향적 역사관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익숙한 역사만 알려고 하는 확증 편향적 태도는 단순히 편협적인 사고에 갇힌 채 비합리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것 자체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인간 자신은 스스로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결정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가지 편향으로 가득 찬 결정을 선택하게 된다. 이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혼란을 주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오직 ‘내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다. 자기 생각에 비판적 의견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 집단에서 드러나는 확증 편향은 그냥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심각한 심리적 현상이다.

 

한국사가 필수 과목이 된 이상, 한동안 잠잠했던 역사 교과서 논란이 다시 한 번 점화될 가능성이 높다. 보수 성향의 여당이 집권하고 있는 지금, 뉴라이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자신들이 만든 대안 교과서를 다시 한 번 강조하거나 자신들의 역사관과 일치한 교과서 검정 찬성에 동조할 것이다.

 

확증 편향의 함정에 빠진 역사 싸움에 가장 큰 피해자라면 수험생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다. 수험생들은 공부해야 할 분량이 많아져서 부담스럽고, 교사들은 역사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혼란스럽다. 한 쪽 이념에 치우친 역사를 가르치다가 학부모들로부터 비난의 뭇매를 맞기도 한다.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나 역사를 가르치는 역사 선생님이나 신중의 자세를 취하기 위해서는 많이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 확증 편향의 함정에 빠진 역사를 구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학과(행정학과) 2학년 2학기에 ‘근현대사와 한국정부론’이라는 과목이 개설되어 있는데 나랑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교수님이 강의를 맡게 되었다. 그러자 어제 교수님이 페이스북 메시지로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근현대사와 한국정부론> 강의를 맡게 되었는데 현대사 중심으로 가르치면 문제가 될까요?“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입장에서 민감하게 걱정을 하신 거 같았다. 일부 대학 교수는 대놓고 편향적인 역사를 가르쳐서 문제가 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나는 소신 있게 대답했다. 나는 그 분의 지도 역량을 믿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칠 거라 믿고 있다. 확증 편향의 함정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교수님, 이번 학기에 2학년 과목인 ‘근현대사와 한국정부론’ 강의를 담당하시는군요. 저는 근현대사 중심으로 가르치는 쪽에 대해서 나쁘지 않게 봅니다. 우리나라 정부 수립 이후부터 현 정부까지를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가르치려는 근현대사의 범위라고 정한다면 이것 또한 대학생들이 배워야 할 역사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국사가 필수과목으로 지정됐다하더라도 과연 국사 교과서 뒷부분에 있는 현대사를 교사들이 충분히 그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내용 분량도 그리 많지 않은데다 학기 말 무렵에 배우기 때문에 현대사 학습을 소홀히 여기는 부분이 있거든요. 학습 진도 맞추기에 급급하다보면 그냥 수박 겉핥기식으로 공부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현대사는 대학교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대 우리나라 정부의 정통성, 정부 활동의 업적과 과오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정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대학에서 근현대사를 가르치는 데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편향적인 역사관 한 쪽으로 기울어진 채 지도하는 것입니다. 좌우 균형 선상의 관점으로 현대사를 가르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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