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백화점인 ‘봉 마르셰’를 소재로 한 에밀 졸라의 소설 『여인들의 행복백화점』에는 한 시골 처녀가 백화점 쇼윈도를 처음 구경하는 장면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드니즈와 일행은 무엇보다도 오밀조밀한 윈도 디스플레이에 매료되었다. (중략)

하지만 그들을 마치 못에 박힌 듯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게 만든 것은 마지막 진열창이었다. (중략) 이렇듯 상품이라는 모티브가 바뀌고 진열대라는 생생한 악절이 바뀌는 동안에도 나지막이 계속되는 반주가 있었는데, 그것은 크림빛 스카프의 나풀나풀한 주름장식 끈이었다.”

 

‘금발 여인의 보드라운 살갗’, ‘감미롭게 일렁이며 섬세하기 그지없는 꽃들의 다양한 빛깔.’ 온갖 관능의 어휘들로 치장한 졸라의 묘사 안에서 쇼윈도는, 벤야민이 ‘사용가치에서 교환가치로의 전이’라고 풀이한 19세기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창(窓)이다. 창 너머에는 필요에 앞서 펼쳐지는 욕망에 의한 소비의 시대적 매혹이 극장의 판타지처럼 펼쳐져 있다.

 

 

 

 

 

 

 

 

 

 

 

 

 

 

 

 

 

인류가 윈도쇼핑의 쾌락에 처음 몰두하게 된 것은 1784년 프랑스 파리에서였다고 한다. 부르봉 왕가의 루이 필립 오를레앙이 자신의 성 팔레 루아얄의 1층을 개조해 상점 거리를 만든 것. 산책을 나온 시민들은 긴 회랑을 따라 줄지어 입점한 당대의 패션상점들을 비 맞을 걱정 없이 구경할 수 있었다. 사려는 물건을 바깥에서 구경하는 것은커녕 매장에 들어서서도 원하는 물건을 말한 뒤에야 점원이 갖다 주던 식이던 이전과 달리 팔레 루아얄을 한 바퀴만 돌면 당대의 멋쟁이들이 지닌 유행 상품을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다는 것은 가히 생활의 혁명이었다고 한다. 시민들은 산책보다 구경, 즉 윈도쇼핑을 목적으로 그 곳을 찾았고, 쇼윈도는 비유도 과장도 아닌, 스펙터클 그 자체였다.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파리 곳곳에는 유리지붕을 얹은 아케이드 상가가 본격적으로 들어섰고, 기름 램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밝기의 가스등이 등장하면서 윈도 쇼핑은 조명의 세례까지 입게 된다.

 

19세기는 ‘진보’라는 새로운 신앙의 시대였고, 파리는 명실상부 그 신앙의 성지였다. 시민들은 쇼윈도의 풍요와 화려함 속에서 곧 도래할 지상 천국의 약속을 보았고, 그 약속 안에서 쇼윈도는 천년왕국 성전의 제단이자 임박한 미래였다.

 

진보의 신앙이 헛된 꿈에 불과하다는 게 처절하게 확인된 뒤로도 쇼윈도는, 비록 '물신(物神)'의 제단쯤으로 격하되긴 했지만, 건재했다. 의미의 층위에서 추락하는 대신 현실의 저변을 넓혔고 치장의 정성도 날로 더해졌다.

 

그 공간은 이제 저마다 '쇼핑 천국'의 입구와 벽면을 장식하며, 비주얼 머천다이징(VMD), 곧 시각 마케팅 기법과 행위의 총체라 해도 좋을 첨단 소비문화산업의 전시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쇼윈도는 빛과 색채의 마법 공간이다. 문화와 기술의 진보로 소품과 조명이 달라졌고 동시대인의 달라진 취향과 욕망을 겨냥하느라 기법과 분위기가 나아졌을 뿐, 예나 지금이나 저마다의 천국의 꿈 이미지를 구현하려 한다는 점은 같다. 주력 상품들을 전면에 돋보이게 배치한 고전적인 쇼윈도들 사이에는 상품의 진열 공간이라는 인식 자체를 스스로 부인하듯 소비 낙원의 이미지만 드러내는 파격적 은유의 쇼윈도도 있다. 그 때의 상품은 천국의 소품처럼 기둥 뒤나 LED 조명의 그늘 속에 실루엣처럼 배치되곤 한다. 그야말로 벤야민이 변화무쌍한 물신의 세계로 비유한 판타스마고리아(Fantasmagoría)가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리처드 에스테스  「사탕가게」  1969년

 

 

비좁은 폐쇄공간의 그 호사스러운 확장성은 외양과 개성의 다채로움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소비 욕망을 선도적으로, 또 압축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또 멋과 풍요와 여유와 기대 등 억눌린(혹은 억눌러온) 시민들의 욕구를 스스로 발견하게 하고 분출하게 유혹한다는 점에서 하나다. 쇼윈도는 그 자체로는 만질 수도 들쳐볼 수도 없는 시각 공간일 뿐이고, 보다 직접적으로는 쇼윈도의 벽 너머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함으로써 소비자의 발길을 매장 안으로 유인하거나 상품의 상징적 가치를 돋보이게 과시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쇼윈도를 향한 개별적 시선의 주체인 소비자는 그 판타지에 대한 욕구의 연대를 통해, 바로 그 집단의 판타지 안에서, 비로소 공동체임을, 이 소비공화국의 구성원임을 확인한다. 그렇게 쇼윈도는, 벤야민이 '물신을 향한 집단 예배의 방식'이라 칭했던 유행을 창조하고 확산시킨다.

 

물론 쇼윈도가 백화점이나 패션 부티크만의 공간은 아니게 된 지 오래다. 가게의 거의 모든 벽들이 투명 유리로 바뀌면서 이제 옷 가게나 자동차 매장 등 어지간한 상점들은 공간 전체가 쇼룸이 됐고, 그나마 남은 쇼윈도는, 음식점들이 더러 그러한데, 메뉴판 수준으로 왜소해진 곳도 적지 않다. 사이버 쇼윈도, 즉 인터넷 쇼핑몰을 통한 상거래가 활성화하면서 오프라인 매장은 공간의 물리적 투명성과 무관하게, 꼼꼼한 소비자들이 실물을 확인하는 곳으로만 기능하기도 한다. 그 때의 오프라인 매장은 매출보다 홍보에 치중하는, 쇼룸이 된다.

 

소비의 대중화와 유행의 확산시차 단축으로 쇼윈도의 마네킹이 어제 입고 쓰고 신은 신상품을 오늘 거리에서 실제로 보게 되는 일도 있다. 연예인이 방송에서 선보인 상품이 거의 실시간으로 조회되고, 또 소비된다. 그 때의 평면 모니터 역시 전자 쇼윈도다. 멋에 민감한 이들로 북적대는 서울 도심의 어떤 거리들은 그렇게 그 자체로 다채롭고 생동감 넘치는 쇼윈도가 된다. 도시가, 아니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시장 공간이라는 말은 그렇게도 확인된다.

 

원형으로서의 쇼윈도는, 그래서 사회의 축소판인 동시에 시(詩)적인 시연무대, 시장 자본주의의 내일을 향도하는 깃발이다. 쇼윈도가 스타일과 라이프스타일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혹은 집단의 소비 판타지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이 시즌에 소비해야 할 것들을 미리 보여주면, 내일 우리는 그 분위기와 양태를 알게 모르게 본받게 된다.

 

 

 

 

 

 

 

 

 

 

 

 

 

 

 

 

한편 보드리야르는 산업자본주의 핵심에는 기술 발전보다도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부추기는 유혹적인 소비의 논리가 있다고 보았다.

 

현대인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서비스 및 물적 재화의 증가에 따른 소비의 풍부함을 누리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인간들은 풍요로울수록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사물들과의 관계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새롭게 개발되고 생산되는 상품들의 리듬과 끊임없는 연속에 따라 사람들의 삶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또 이에 맞춰 인간들도 더욱 사물 의존적이고 기능적인 존재로 전락해가고 있다. 현대는 말 그대로 상품이 지배하는 시대, 곧 소비를 학습하고, 소비에 대한 사회적 훈련을 사회화의 주된 내용으로 하는 ‘소비사회’인 것이다.

 

 

 

 

 

 

 

 

 

 

 

 

 

 

 

 

 

프랑스 작가 조르주 페렉은 자신의 소설 『사물들』에 관한 인터뷰에서 소비사회에 유혹된 현대인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물질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현대 문명의 풍요로움이 어떤 정형화된 행복을 가져다주었지요 … (두 주인공) 실비와 제롬이 행복해지려고 하는 순간, 자신들도 모르게 벗어날 수 없는 사슬에 걸려든 것입니다. 행복은 계속해서 쌓아 올려야 할 무엇이 되고 만 것이지요. 우리는 중간에 행복하기를 멈출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현상은 거꾸로, 쇼윈도의 변신에 대한 사회의 끊임없는 요구로 작용한다. 사회보다 한 발짝 앞서야 하는 그 공간이 더 이상 앞서 나가지 못할 때, 혹은 대중적 욕망의 관성에서 지나치게 벗어날 때, 쇼윈도만큼 금세 남루해지는 공간도 없다. 그 때의 쇼윈도는 물신의 제단이 아니라 상품의 무덤이 된다. 화려함의 그늘은 그렇듯 짙어서, 불 꺼진 쇼윈도와 먼지 앉은 마네킹은, 패잔병의 찢어진 깃발만큼이나 참담하고 스산하다. 그래서 쇼윈도는 밤낮없이 전투가 치러지는 전장도 된다. 그 전투는 경쟁업체와 소비자들의 변덕스러운 취향과 앙다문 지갑과도 치러지지만, 본질적으로는 시간과 치르는 고독한 전투다. 행복을 원하는 도시인들은 오늘도 쇼윈도에 있는 물신 앞에서 자신의 행복을 기꺼이 바치고 있다 . 인적 끊긴 세모의 거리에서도 쇼윈도의 조명이 꺼지지 않는 것은, 그 적막의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기 때문이다. 멈추고 싶은, 멈출 수 없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리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사랑하기 때문에 푹푹 눈이 내린다는, 이 말도 안 되는 구절 때문에 나는 백석의 이 시를 좋아한다. 분명히 문장구조의 인과관계를 무시하는 충돌이거나 모순이다. 연애의 달인답다. 여기에 넘어가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우주에 눈이 내린다니! 그리하여 나는 가난하고, 너는 아름답다는 단순한 형용조차 찬란해진다.

 

 

 

 

 

 

 

 

 

 

 

 

 

 

 

 

백석의 밤에도 눈이 푹푹 날리고, 강원도의 밤에도 눈이 오지게 내리고 있을 것이다. 이런 밤에, 백석은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자고 외쳤지만, 사람들은 그만 눈으로 덮인 도시에 갇혔다. 응앙응앙 우는 흰 당나귀 소리 대신 쓸어도 쌓이는 하얀 쓰레기 때문에 짜증나 미칠 것 같은 군인들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학창시절, 백석의 시는 그가 늘 동경하고, 때로는 모방한 러시아 시인들보다 무게가 없고 감상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날 때 읽을수록 이 어린아이 같은 시인에게 뭔가 애틋한 것이 있음을 느낀다. 그건 세월이 지날수록 백석의 밤에서 멀어지기 때문일까.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김광균 「설야(雪夜)」 -

 

 

 

예전엔 눈이 오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린애처럼 마냥 기쁘고 즐겁기만 했다. 아무리 큰 고통도 하얀 눈이 어루만져 줄 것 같아서 눈 오는 날은 마음도 따뜻했다. 그래서 저런 시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눈이 내리는 소리를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좀 야한 은유. 지금도 이 구절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잠이 밀려올 정도로 지루한 국어시간에 이 시의 문제(?) 구절만 소리 내서 읽으면 모든 남학생들을 웃게 만드는 웃음 폭탄이 되기도 했다. 국어 선생님은 이상한 생각하지 말라고 핀잔을 줬지만, 아마도 김광균 시인은 이 구절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 킥킥거렸을 것이다.

 

 

 

 

 

 

 

 

 

 

「설야」는 화자가 왜 슬퍼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원인이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화자 즉 시인이 그리워하는 대상이 어떤 여인이라는 점만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이 시에서는 과거의 여인에 대한 막연한 애상만이 감돌뿐이다.

 

이젠 저 시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얗게 쌓인 눈 위에 슬픔이 서린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싸늘한 추회가 왜 시인을 애타게 했는지 알 것 같다. 먼 곳에 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만 늘 시인의 귀에 남는다. 두근거리며 한 사람으로 향한 소리의 길, 풀어 벗는다. 홀로 부끄러움 없이 뜨거워진 몸을 열어 흘러내리는 비단자락. 소리를 감추는 소리의 소리. 뉘우칠수록 사무쳐 소리를 묻는 소리. 길을 묻는 길. 기별도 가지 않는 먼 곳 지우는 소리. 다만 지우는 소리였을 뿐, 옷 벗는 그 여자 없었다. 아련하지만 이제는 손에 잡을 수 없는.

 

 

 

 

 

 

 

 

 

 

 

 

 

 

 

 

누군가는 눈 소식이 썩 반갑지 않을 것이다. 눈이 푹푹 나리는 백석의 밤이 아니라 눈보라가 내리치는 백색의 계엄령일 것이다. 눈은 눈이 올 때면 심장이 콱 옥죄이는 것은 모두 그때 그 기억 탓이다. '대설주의보'가 문득 몸서리 쳐지도록 아프고 두려운 것은 그 때문이리라. 그것은 단순히 기억에서 온 게 아니라 최승호 시인이 「대설주의보」에서 낮게 읊조린 곡조와 함께 돌출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 최승호 「대설주의보」 -

 

 

 

그러니까, 저 오래되고 유구한 기억 속에는 '백색의 계엄령'에 대한 공포가 깊게 새겨져 있어서라고 말할 수 있을 터이다. 대설주의보가 걱정스러운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래서 짧게 흩날리는 눈을 보며 담배를 피울 때, 김수영이 「눈」에서 젊은 시인들에게 재채기를 하라고 했던 구절이 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것도 우연일 수 없다.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 김수영 「눈」중에서 -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그러니까 아픔과 아픔이 만날 수 없도록 만드는, ‘눈 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해도 무관심한 사회적 풍경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만드는 저 ‘백색의 계엄령’에 대고 ‘기침’을, 재채기를 하는 것이라도 필요한 계절이니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엄혹한 한기는 마치 진짜 계엄령이라도 선포된 듯, 어쩌면 삶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는’ 황홀경에 매혹되지만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과 같은 자본은 한 개인의 무릎을 닳게 만들 터이다.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도록 고립되는 삶.

 

그러므로 '대설주의보'가 기후에 따른 경고발령이거나 1980년대 군부독재가 발령한 국민에 대한 강력한 경고인 계엄령일 수만은 없다. 그것은 우리 눈앞에, 발밑에, 바로 옆에 있는 존재나 자연과 손을 맞잡지 않는 데에 대한 처절한 내적 울림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닐까? 기형도가 지적했듯, ‘가누기 힘들어 제 목을 스스로 부러뜨리는 법’을 배우는 시절이니 말이다. 모두, 살아남으시라. 암울한 백색의 계엄령이 아닌 마음을 밝게 만드는 백석의 밤을 보내시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잘잘라 2014-02-10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산에도 눈이 내려요.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쌓인 눈이 얼어붙기 시작하면 정말이지 도무지 어쩔 줄을 모르는 울산, 눈이 오면 사람들이 한꺼번에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만 같은 울산이기에 아아아.. 잠이 오질 않네요.

cyrus 2014-02-10 23:28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포핀스님. 잘 지내시죠? ^^ 올해는 대구가 눈구름이 피하는 곳인가봐요. 부산에도 눈이 왔다던데.. 이 곳은 조금 눈이 내리긴했는데 눈이라기보다는 금방 녹아서 비처럼 내렸어요. 그래도 눈 엄청 쌓여서 밖에 돌아다니지 못하면 정말 답답하게 느껴질거에요. 눈길 잘못 걷다가 넘어지면 다칠 수도 있고요...
 

 

 

 Scene #1   불운했지만, 유쾌했던 르네상스인

 

 

 

 

 

 

 

 

 

 

 

 

 

 

 

 

정치판을 둘러싼 음모와 야욕, 배신 따위를 말할 때 우리는 곧잘 마키아벨리를 들먹이곤 한다. 마치 ‘권모술수의 화신’ 이라도 되는 양 그는 주로 이렇게 비쳐져왔다. 르네상스 시대의 도시국가 일개 서기관에 불과했던 그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남긴 그림자는 너무나 크다.

 

시오노 나나미는 마키아벨리를 보는 것이 곧 르네상스를 보는 것이라고 했다.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던 피렌체에서 평생을 보냈던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기는 르네상스를 둘러싼 전후시기였다. 그만큼 역동적인 시대를 살다간 사람이었다.

 

혼란스러운 때였기에 그에 맞는 정치사상이 태어날 수 있었다. 도시국가 중심의 사회에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출현하던 시기였다. 이탈리아 반도를 넘보는 프랑스, 에스파냐와 같은 외부세력간의 힘겨루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 간의 갈등,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 등 당시의 이탈리아 반도의 정세는 혼란스러웠다.

 

만약에 그가 관직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군주론』과 같은 작품은 아마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관직 생활을 너무나 즐겁게 수행했다. 『군주론』은 복직을 위해 피렌체의 명문가였던 메디치가에 바친 책이다. 그러나 오늘날 마키아벨리는 일개 서기관 보다는 정치사상가로 널리 알려졌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인지도 모른다.

 

시오노 나나미를 통해 바라본 마키아벨리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음흉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엉뚱했고 불운했지만 늘 유쾌한 남자였다.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그에게 아쉬운 점이라면 그가 너무 시대를 앞서갔다는 점이었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본 사람이었다. 서기관 이라는 자리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실은 대단히 막강한 자리였다. 자리의 위치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하는 일은 매우 많아서 모든 정보는 자연히 그에게로 집중되는 자리였다.

 

그는 용병제가 판을 치던 당시에 국민개병제를 주창했다. 애국심을 가지지 않은 채 돈만 써서는 절대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당시에는 이상주의자로 비쳐졌던 그의 주장들은 오늘날엔 당연시 여기는 현실이 되어있다. 그는 시대를 앞서서 바라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의 소유자였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기독교의 위세가 아직 등등해서 정치를 윤리와 동일시하던 때였다. 권모술수가 가득한 정치현실을 꿰뚫어 본 정치사상을 내놓았으니 당시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그는 권모술수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단지 정리해놓은 사람에 불과했다.

 

그가 바친 『군주론』을 메디치가에서는 아예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미 반 메디치가로 낙인찍힌 마키아벨리의 복직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남긴 책이 오늘날까지도 그를 권모술수의 달인쯤으로나 생각하게 만들어놨으니 그는 불행한 편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Scene #2   현실주의적 단호함을 택한 마키아벨리

 

그를 향한 세상의 낙인은 죽은 뒤에서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군주론』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더욱 거세졌다. 오늘날 상식이 된 ‘사악한 마키아벨리’라는 통념은 역사적으로 종교개혁과 종교전쟁 시기에 교황과 교회가 자신들과 대립했던 군주들이 저지른 잔악 행위들에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낙인을 찍으면서 시작되었다.

 

마키아벨리는 1495년 피렌체에서 반란이 일어나 전제정치를 하던 메디치가가 추방당하고 공화국이 복구되면서 자유를 보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을 보았다. 마키아벨리가 생각하기에 반란 지도자는 상당한 희생이 뒤따르더라도 공화정을 위한 강력한 단안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반란 지도자 피에로 소데리니는 인내와 선량함만 있으면 적절한 보상을 통해 유혈 사태 없이 사악한 파벌들을 근절하고, 왕정으로 되돌아가려는 잔당들의 야망을 없앨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마키아벨리의 우려대로, 이러한 소데리니의 순진한 예상과 달리 1512년 피렌체가 카를5세 군대에 정복된 뒤 살아남은 왕정의 잔당들은 소데리니를 제거하고 다시 전제정을 복원하고 만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소데리니가 어리석기 짝이 없게도 도시의 자유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사소한 양심에 굴복했다고 보았다.

 

이처럼 마키아벨리가 잔혹한 조치를 옹호했다고 해서 그 점만이 부각되는 것이 마키아벨리에 대한 중대한 오해 중의 하나이다. 오히려 마키아벨리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을 볼 때 그가 사태에 관한 뛰어난 현실주의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음이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예를 살펴보자.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뛰어난 군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거론하는 체사레 보르자는 피렌체 국경 지역에 새롭게 등장한 위협적인 군사적 강자였다. 전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사생아로 태어나 추기경이 되었으나, 성직자 신분을 버리고 칼을 잡아 속세의 군주가 된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1502년 12월 로마냐 통치를 담당하던 보르자의 부하 레미로 데 오르코의 강압적인 통치에 로마냐 시민들이 분노를 폭발시키자 보르자는 중대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오르코의 잔인한 폭정 때문에 눈 덩이처럼 불어난 시민들의 증오심은 로마냐의 지속적인 안정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보르자는 놀라운 기민함으로 이에 대응했다. 그는 즉시 오크로를 소환했고, 나흘 후 그의 몸이 두 동강이 난 채로 광장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시체는 모든 시민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그곳에 계속 방치되었다.

 

이 사례에서 마키아벨리는 보르자가 오로지 공과에 따라 부하들을 완벽하게 통제했으며 전광석화와 같이 재빠르고 단호하게 일을 처리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도 마키아벨리는 음모적이고 신속한 살해 명령을 옹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하 한 사람을 희생시킴으로써 로마냐의 무질서를 효율적으로 방지했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Scene #3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였다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냐 아니면 전제군주를 옹호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하자면 마키아벨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공화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악의적인 해석에 도전한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기의 공화주의 사상가들인 몽테스키외와 루소, 디드로였다.

 

 

 

 

 

 

 

 

 

 

 

 

 

 

 

 

마키아벨리의 주요 저작 가운데 하나는 『로마사 논고』이다. 이 책에서 공화주의자로서의 마키아벨리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사실 마키아벨리의 대표작으로 너무나도 잘 알려진『군주론』만 읽은 독자라면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에 『군주론』만 읽는다면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볼 수 없다.

 

마키아벨리는 만약 로마가 성공을 거둔 비결을 발견할 수 있다면, 피렌체 역시 그런 성공을 또다시 맛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키아벨리는 로마가 이룩한 업적의 비결을 단 한 줄로 요약한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일찍이 도시국가들이 자유롭지 않았다면 결코 지배와 부를 증진시킬 수 없었다.”

 

우선 고대 아테네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폭정에서 해방된 뒤 100년이 지나는 동안 눈부시게 번영했다. 로마도 왕의 통치로부터 자유로워진 뒤 얼마나 위대해졌는가?

 

마키아벨리가 자유를 강조하면서 무엇보다 염두에 둔 것은 위대함을 추구하는 국가라면 반드시 정치적인 예속 상태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내적으로는 독재자로부터의 예속으로부터, 국외적으로는 제국의 힘에 대한 예속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함을 뜻했다. 이것은 피렌체가 위대해지려면 국내에서 독재를 없애고 프랑스, 스페인, 독일 같은 강대국들에 대한 예속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군주정을 완전히 배제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피렌체에서 그랬듯이 대중 지배의 지속이 군주제 형태의 정부와 얼마든지 병립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명백히 군주정보다는 공화정 체제를 더 선호했다.

 

 

 

 Scene #4   우리 안에 있는 마키아벨리즘

 

마키아벨리가 “정치란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무도덕, 즉 도덕과는 무관한 것이며 윤리적인 행위나 선악이 가치 기준일 수 없으며, 국가를 존속시키는 수단이라면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했을 때 마키아벨리가 정치가들이 행하는 모든 잔혹한 조치를 옹호한 것이 아니라 정치 행위란 본질적으로 도덕적 판단에서 벗어나 그 행위의 효율성과 유용성이 최고의 잣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보았을 때 정당화될 수 있는 정치 행위의 목적은 공화정의 건설 및 존속이나 시민 자유의 수호와 같은 가치들이었다. 게다가 마키아벨리가 옹호했던 군주의 테러 조치는 그러한 조치가 더 많은 피가 흐르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였다. 마키아벨리에게 군주란 원칙적으로 잔인하다는 평판을 받아서는 안 되지만, 지나친 자비심을 베풀어 혼란을 초래하고 약탈과 유혈 사태를 빚게 하기보다는 잔인함을 보여 주어 무질서를 진압하는 편이 결과적으로 더 자비로운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가 살아있다면 독재자들이 자신들의 폭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군주론’의 구절을 이용하는 것을 보면 씁쓸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무엇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제시한 일견 반도덕적이고 악명 높은 조언들은 마키아벨리가 외교관으로서 목격했던 당대 군주나 정치 지도자들이 권력의 획득, 유지, 행사를 둘러싸고 벌였던 투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사악함과 기만성이 드러났다면 이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정치 현실이 그러한 원리에 따라 전개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여전히 남는 문제는 마키아벨리가 통치자들이 내세우는 정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테러적 방법을 ‘미덕’의 위치로까지 격상시켰다는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두려움을 심어주되 민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법가와 잔혹한 독재정치가 동의어가 아니듯, 마키아벨리의 현실적인 정치론과 권모술수의 정치는 동일하게 볼 수 없다.

 

비난을 받아야 하는 대상은 마키아벨리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는 ‘마키아벨리즘’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 책을 현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실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마키아벨리적’인 우리들 자신이다.『군주론』을 읽으며 독재자가 왜 실패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들은 마키아벨리의 말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에 실패한 것일까, 아니면 마키아벨리의 충고를 제대로 따르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마의 정치가이자 뛰어난 문인이었던 키케로는 ‘책 없는 방 안은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다’고 말했다. 르느와르의 그림 「책 읽는 여인」을 보고 있으면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책을 읽을 때 육체에 영혼이 깃든다’고. 독서를 하고 있는 여인의 빛나는 얼굴은 그녀의 삶 속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생기 있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 같다. 이 여인의 모습을 보면 독서를 통해 간접 경험을 함으로써 자신의 세상을 넓히고 인격을 높인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를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그러나 모두가 예찬할 것 같은 독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특히 의외로 철학자들 모두가 독서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경우 책을 구성하는 문자 자체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대화편 『파이드로스』를 보면 문자의 고안에 대한 신화가 하나 나온다. 이집트의 신은 수, 기하학, 천문학에 이어 문자를 고안한 후 왕에게 보여준다. 왕이 문자의 용도를 묻자 신은 인간을 더 지혜롭게 만들며 인간의 기억력을 향상시켜 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인간은 문자와 글에 대한 믿음 때문에 외부의 기호에만 의존하고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기억해 내거나 상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래서 이 대화편에서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책이 아닌 상대방과 서로 적절히 논박하며 진행되는 살아있는 대화만이 진정한 지식을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의 저작이 모두 대화편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학설도 있다. 서술 형태로 대화하는 방식을 취해 글로 씌어진 말의 약점을 조금이나마 보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철학이라는 것은 글로써 서술된 것이 아니라 행위와 탐구 과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런 면에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오는 언명은 주목할 만하다. “나는 게으름을 피우며 책을 읽는 자를 미워한다. 독자를 아는 자는 독자를 위해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한 줄의 글을 읽을 때도 눈으로 훑고 지나쳐 갈 일이 아니라 글쓴이의 정수를 캐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된다는 의미이다. 수박 겉핥기라는 속담처럼 독서를 할 때 행간의 뜻보다는 표면적 의미만 읽고 있는 게 아닌지 반성해볼 일이다.

 

쇼펜하우어 역시 책에 대해서 그렇게 긍정적인 입장은 아니었다. 그는 “책은 어디까지나 실재하는 세계의 재현이고 모방일 뿐이다.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재현에 필요한 거울이 먼지 하나 없이 완벽하게 깨끗한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라고 해 플라톤과 유사한 입장을 보였다.

 

플라톤은 세상의 사물을 참 존재인 이데아를 모방한 불완전한 실재로 봤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 책은 이데아에서 2단계나 떨어진 그림자 같은 것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책은 쇼펜하우어에게도 실재 자체가 아니라 흠 있는 모방이었다.책을 통한 지식의 습득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은 동양에도 있었다.

 

 

 

 

 

 

 

 

 

 

 

 

 

 

 

 

명대의 철학자 진헌장의 경우 매일 독서에만 집중해 자는 것과 먹는 것을 잊고 도를 추구했으나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는 책을 통한 공부를 버리고 정좌한 후 사색만 죽어라고 해 마침내 ‘이르는 곳마다 천리를 체인한다’는 학설을 터득하게 됐다.

 

 

 

 

 

 

 

 

 

 

 

 

 

 

 

 

 

태워버려야할 책이라는 뜻의 『분서』라는 제목의 책을 지은 명대의 유학자 이지는 인간의 본성을 아이들의 마음인 ‘동심’으로 파악하면서 “학자들이 책을 많이 읽고 도리를 알아서 오히려 동심을 저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유가의 경전들을 멍청한 제자들이 스승의 말을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한 채로 적어놓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사상가로서 남녀평등론을 주장하고 틀에 박힌 해석만 하는 유학자들을 비판한 이지는 결국 정치적 박해로 투옥당하자 자살하고 말았다.

 

이런 철학자들은 독서 자체를 거부하기보다는 책에 담긴 내용을 곱씹어 보는 일 없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비판했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고 뉴턴의 중력이론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보완된 것처럼 전통만 신봉했다면 학문의 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대부분의 철학자가 독서를 중요시했고 책을 수집하는 일을 사랑했다.

 

책은 이렇게 사람들을 일깨우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이에게는 탄압의 대상이기도 했다.대부분의 독재자들은 지배의 편의성 때문에 대중이 문맹이길 원하지만 피지배자들이 한번 익힌 읽기 능력은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검열을 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익히 알고 있는 진시황의 분서갱유 사태부터 시작해 칠레의 피노체트 군사정권이 자유를 호소하고 권위에 도전한다는 이유로 『돈키호테』를 금서 목록에 올린 것까지 검열은 권력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든 존재했다. 심지어 민주 군대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한국의 국방부도 금서 목록을 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철학에서 책은 더 이상 해석 대상의 모든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는다.철학에서 쓰고 있는 ‘텍스트’라는 말은 책뿐만 아니라 예술이나 꿈, 문학 등도 포함된다. 해석학의 경우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면 어떤 형태이든 텍스트로 보기 때문에 넓게 생각한다면 이 세계 전체가 텍스트이며 발생하는 모든 일이 텍스트다. 모든 세계의 현상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해석학의 중점 사항으로 바뀐 것이다.

 

 

 

 

 

 

 

 

 

 

또한 하나의 텍스트를 가지고 해석의 다양성이 어디까지 허용될지도 문제가 된다.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수많은 해석이 가능하다고 할 때 해석의 한계는 어디인지도 논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해석에도 한계가 있어 너무 자의성 짙은 해석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움베르토 에코가 있는가 하면 오독조차 텍스트를 풍부하게 한다며 모든 해석의 지평을 열어놓는 철학자도 있다.

 

텍스트는 우리에게 한 가지 길만 열어놓는 것이 아니다. 같은 책을 읽고도 사람마다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수많은 해석이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책은 하나의 세상이며 세상도 하나의 책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oren 2014-01-25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많은 해석이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음악도 하나의 세상이며 세상도 하나의 음악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쇼펜하우어와 니체도 책뿐 아니라 음악과 예술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사실이 떠오르네요.

책을 마음껏 읽기 위해 아예 자신의 성에 틀어박혔던 몽테뉴조차 '책과 너무 가까이 지내는 일'을 늘 경계했던 인물이었지요.

* * *

책은 재미있다. 그러나 책과 너무 가깝게 지내다가 우리에게 최선의 부분인 쾌활성과 건강을 잃고 만다면,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저버리자. 나는 책을 읽는 결과가 이러한 손실을 보충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몽테뉴)

cyrus 2014-01-25 23:02   좋아요 1 | URL
저도 나름 책을 엄청 좋아하는 성격인데 독서에 관심 높은 사람 아니면 책 이야기를 잘 안해요. 요즘은 책 밖으로 나와 주변에 접할 수 있는 문화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특히 전시회 관람은 책에 인쇄된 그림을 보면서 생기는 느낌과 전혀 다르더군요. 그리고 너무 책에만 푹 빠져 있으면 좋은 벗을 잃기 마련이죠.
 

 

 

 

 

 

 

 

 

 

 

 

 

 

 

 

 

 

 

안녕하세요. 저는 ‘외국인’이라고 합니다. 피부색이라는 유치한 기준에 따라 붙여진, 차별받고 있는 이름이지요. ‘외국인’이라는 단어가 사람의 피부와 만나면 어떻게 순식간에 ‘이방인’으로 달라질 수 있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군요.

 

며칠 전에 찜질방의 여성사우나에 들어가다가 황당한 것을 보게 됐어요. 제가 가야 할 여탕 옆에 외국인 전용 목욕탕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외국인 손님만을 위해서 더 좋게 만든 것이 아니었어요. 외국인들과 같이 목욕하는 걸 한국 손님들이 싫어하니까 따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내부 시설은 샤워기 네 개만 달려 있고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형편이 없었어요.

 

여러분은 차별에 분노하십니까? 성차별, 학력차별이 여전하더라도 피부색에 따른 차별에 비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인종차별이라는 것은 어떻게 감출 도리도 없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냥 빼도 박도 못하게 규정됩니다. 피부를 다 벗겨 내고 살 수 없듯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 차별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X년 전에 한국에 온 이후로 ‘깜둥이’, ‘더럽다’는 주변의 놀림에 시달린 적이 있어요. 향수도 뿌리고 했는데 또 놀렸어요. 이제 결혼해서 자녀를 갖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아이가 저처럼 피부색 때문에 차별받고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거든요.

 

TV와 신문에서는 한국 사회를 ‘다문화 사회’라고 말하더군요. 그만큼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대부분 사람은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한국 국적을 가졌으면 한국인 아닌가요? 그런데 왜 저만 보면 피하는 건가요? 외국인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무척 속상해요.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라고, 모두가 저처럼 차별을 받으면서 살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피부색 때문에 차별하는 시선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차별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순간에 발생하고, 편견에 기대어 지속합니다. 그래서 차별은 아주 사소할수록 치명적입니다. 한국에는 차이를 차별이라 부르며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엄마 뱃속에서 나와 조그만 차이 하나 있을 뿐인데 사람들은 왜 그리 사소한 것에 억지를 부리는지요.

 

 

 

 

 

 

 

 

 

 

 

 

 

 

 

 

 

여러분, 제 이름은 ‘외국인’이 아닙니다. 한국 국적을 가진 엄연한 ‘한국인’입니다. 피부색이 다르다고 무시하지 마세요.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서 인종차별에 맞서는 변호사 애티커스가 딸에게 이런 말을 한다죠. “누군가를 정말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을 해야 하는 거야. 말하자면 그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 다니는 거야.” 애티커스는 이 땅에서 편견의 색안경을 벗게 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알려줬어요. 차별당하는 우리들의 입장이 되어 보세요. 여러분이 차별받는다면 그럴 땐 어찌하시렵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