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는 '황순원'의 <소나기>가 실려 있었고, 국어를 좋아하거나 아니거나 그 소설만큼은 모두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소나기 바로 뒷편에 실린 소설은 내 기억에 의하면 '헤르만 헤세'의 <나비>였는데, 소나기 뒤에 배워서인지 그 시절 되게 지루하게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 소설을 지금 다시 읽으면 전혀 지루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거다. 얼핏 기억나는 장면은 마지막, 소년이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나비를 바스라뜨리는 거였는데, 일단 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 장면에 이르기까지 어떤 심리적 갈등이라든가 하는 것이 매우 잘 써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된 것. 어쩐지 지금 읽으면 너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다. 해서 읽어보려고 했는데, 제목이 나비가 맞는지, 작가는 헤르만 헤세가 맞는지, 헤르만 헤세의 나비, 라고 기억하는 거 보면 맞을 것 같긴한데, 내 기억이 과연 정확한건지를 모르겠는 거다. 그래서 오늘 헤르만 헤세 나비 를 넣고 검색해봤더니 이런 책이 나왔다.


















책 소개를 보면 헤르만 헤세가 나비에 관심이 있었고 이 책에 나비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는데(다른 '나비' 책도 마찬가지), 리뷰를 보려고 해도 리뷰도 없어.. 자, 여러분.


이 책은 제가 아는 바로 그 소설이 실린 책이 맞습니까? 혹시 아시는 분 계시다면 대답 좀..

만약 아니라면, 제가 기억하는 그 소설은 어떻게 하면 읽을 수 있겠습니까?




밑줄긋기 보니까 이 책이 내가 찾는 책 같다. 그런데 위의 책과 같은 책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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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4-09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작품은 헤르만 헤세의 ‘나비‘ 맞고요. 아래 책에 실려 있는 것 같네요. 락방 님 말씀처럼 주인공 소년의 심리가 매우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이니까 입다물게요. ㅋㅋㅋ

다락방 2019-04-09 10:11   좋아요 1 | URL
그러면 아래 책을 사야겠군요. 후훗. 감사합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생각하니 엄청 좋은 작품일 것 같더라고요. 감사드려요, 잠자냥님! :)

잠자냥 2019-04-09 10:17   좋아요 2 | URL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96622476
이 책에는 <공작나비>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기도 하네요.

다락방 2019-04-09 10:19   좋아요 1 | URL
오, 링크 주신 책이 좀더 최근에 나온 거고 더 읽고 싶게 생겼네요. 저기 나비 크게 그려진 건 딱히 읽고 싶게 생기질 않아서.... 하핫

별족 2019-04-10 0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딸래미가 웹툰을 보다 말고, ‘헤르만 허세‘가 누구냐고 물어서 와하하 웃은 기억이 ^^ 왜 한 권도 제대로 읽은 기억이 안 나는지-_-;;;

다락방 2019-04-10 10:23   좋아요 0 | URL
헤르만 허세 ㅋㅋㅋㅋ

저도 이 댓글 읽고 나는 뭘 읽었지, 읽은게 있나 싶어 헤르만 헤세 넣고 검색했더니, 데미안과 싯다르타를 읽었네요. 한 15-20년 전에 읽은 거라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질 않아요. 음...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도 집에 있는 것 같은데.. 음.....

비연 2019-04-10 12:40   좋아요 0 | URL
댓글 보다가 빵터진..ㅎㅎㅎ 헤르만 허세..ㅎㅎㅎ 아 넘 귀여운...
전, <수레바퀴 아래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데미안>.. 이런 거 읽었고 <유리알 유희> 읽다가 집어치웠고... <싯다르타>는 펴보지도 않았고... 흠... 그리고 정원에 관한 에세이 하나 읽은. 헤르만 헤세를 썩 좋아하지 않아서 오히려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내가 왜 싫어하지? 하면서.. 근데 여전히 저랑 잘 맞지는 않더라구요. 이 책 <나비>는 좀 흥미가 돋긴 한데...

다락방 2019-04-10 15:30   좋아요 0 | URL
오, 비연님 많이 읽으셨네요! 저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읽고 싶어서 사놓고는 여태...뭐 그런 책이 한두권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비는 읽고 싶은데 제가 나비만 읽고 싶어서 이 책을 사지는 않을것 같고 도서관에 있으면 빌려서 나비만 읽어 봐야겠어요. 그당시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작품인데 지금 읽으면 너무도 다른 느낌을 줄 것 같다는 확신이 있거든요. 후훗.
 
















동호회 사람들은 좀더 서사가 있어야 한다고 얘기했다. 플롯이 있었어야지, 액션도 있고 대화도 있고, 음악도.

"나는 그 영상을 아주 솔직하게 찍었어."

조용히 듣던 E가 반대는 하지 않고 다만 약간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거기에는 내 마음이 다 담겨 있어."

그러면서 E가 사람들 몰래 경애의 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기 때문에 경애는 그 말을 할 때의 E를 더 선명히 기억했다. 거기에는 내 마음이 다 담겨 있다는 말. (p.67-68)




벌써 오래전의 일이다. 우리의 술자리에는 남자1이 끼어있었다. 끼어있다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다. 우리는 함께 만났다, 고 하는 것이 맞다. 그 날 우리는 함께 만났다. 그러니까 남자1과 내가 단 둘이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함께 만났고, 그래서 함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친구였고 대부분 공통된 화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맥주를 마셨고 치킨을 먹었다. 그리고 어떤 대화중에 우리는 각자의 손을 앞으로 내밀었고, 그리고 잠깐, 아주 잠깐,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그가 내 손을 꽉 쥐었다. 아니, 꽉 쥐었다가 놓았다. 그의 한 손이 내 한 손을 폭 감쌌다가, 미처 내가 반응을 보일 틈도 없이, 놓았다. 아무도 그 순간을 보지 못했고, 다만 내가 알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그 자리에서 내 손을 쥔 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꼭 그 남자의 눈빛을 보고 싶었는데, 너무 부끄러워서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애써 피했다.


우리가 손을 잡은 것이 그 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너무 손을 잡고 싶어, 갖은 핑계를 대다가, 내 말을 하도 못알아쳐먹어서, 그냥 손을 잡아 달라고 내가 말을 했었더랬다. '손 잡아줘요' 라고.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 쓰다보니까 너무 웃기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리고 내가 너무 좋다. 역시 나는 짱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그 날, 손을 잡고 싶어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는데, 바보같이, 내 마음도 모르고! 이 빵꾸똥꾸 같으니라고!


그 일이 있고나서 처음 만나는 거였나, 그건 잘 모르겠다. 아 숨막혀서 못쓰겠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무튼 그 호프집에서 그는 그렇게 내 손을 꽉, 잡았다 놓았고, 정말이지 짧은 순간이었고, 아직도 나는 내 한 손이 그의 한 손에 쏙- 들어가던 느낌을 기억하고, 그 날, 내 표정으로 누군가 눈치채지 않을까 너무 두근거렸고, 그러면서 우리 모두가 헤어지기까지 그런 순간이 한 번쯤 더 올 수 있기를 바랐었다.






엄마 말에 따르면 나는 그때까지도 건널목에서 꼭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건넜다고 했다. (중략)오크우드 애비뉴에서 모퉁이를 돌면서 나는 충동적으로 조지 오빠의 손을 잡아 버렸다. 곧바로, 내 손을 꽉 잡는, 손가락들. 태양. 진분홍 무더기를 이루며 창문 위로 드리워진 더욱 탐스러운 부겐빌레아 넝쿨. 그의 따뜻한 손바닥. 인도에 웅크리고 앉은 오렌지색 줄무늬고양이. 낡은 검은색 티셔츠 차림으로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 활짝 열리는, 도시.
우리는 인도에 도착했고, 손을 놓았다. 얼마나 바랐던가, 바로 그때, 온 세상이 건널목이기를.
 (p.88)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을 읽는데, 와- 그 순간이 떠올랐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안에서 하필이면 그 날의 그 호프집이 떠올라, 그의 손 안에 들어갔던 내 손이 기억나, 와 마음이 덜컹, 거렸다. 경애는 E 에게 손 잡힌 것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 날의 기억을 그저 떠올렸을 뿐이고, 사람들이 여럿 있던 곳에서 그가 자신의 손을 잡았던 순간에 대해 얘기했을 뿐인데, 나는 다른 사람들 있는 곳에서 내 손을 잡았던 그 일이 떠올랐고, 그 때 내가 덜컹거렸던 그 순간의 감정까지 떠올라버려서, 더이상 독서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아니 경애여.. 왜 그런 일을 떠올렸어요, 왜. 그러니까 나까지 그 순간을 떠올렸잖아요. 기억 속 저 멀리 묻어버렸던 것인데.. 왜 갑자기 떠오르게 만들었어요. 흙흙. 아침부터 심장이 덜컹, 마음이 덜컹 했잖아요. 어휴, 심장이야 ㅠㅠ 어이고 마음이야 ㅠㅠㅠㅠㅠㅠㅠㅠ


마음아, 진정해, 진정해야 해. 지금은 고작 월요일일 뿐이야, 어쩌려고 그래, 어쩌려고. ㅠㅠㅠㅠㅠㅠㅠㅠ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은 고작 70페이지까지 읽었을 뿐인데 참 좋다. 김금희를 처음 만났던 <아주 한낮의 연애>보다 훨씬 좋다. 70페이지까지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아, 여성작가의 글을 읽는 건 이래서 좋다, 이래서 소중하다' 느꼈는지 모른다. 여성 작가들이여, 응원합니다, 더 많이 글을 써주세요! 게다가 아주 한낮의 연애로 나는 김금희를 기억할만한 이름에 올리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경애의 마음으로는 좋으니 뭔가 작가의 발전같아서 그것도 좋고, 한 줄 한 줄 아주 맛있게 읽고 있다. 다만... 이, 어떤, 김금희의 뭐랄까, 버리지 못하는 그 어떤 클리셰.. 라고 해야하나.이걸 뭐라고 해야하나. 경애도 그렇고 다른 인물들도 잘 만들어내다가, 왜, 어째서 '상수'가 여성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어 운영하게 했는지, 게다가 그것은 왜그다지도 인기가 좋은 걸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이게 꼭 필요했나, 대체 이런 설정을 왜한걸까 싶었다. 내가 이십대 후반이었나, 소설 쓰고 싶다고 이것저것 구상했을 때 했던 것 중에 하나가, 온라인 고민사이트 만들어서 인기 끄는 주인공에 대한 거였는데, 김금희의 소설에 딱, 그런 남자가 나오는 거다. 아주 한낮의 연애에서도 맥도날드 씬에서 흐음, 너무 전형적이야, 했던 기억이 있는데, 어째서, 왜, 온라인 고민상담으로 인기 많은 등장인물을 만들었을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게 어떤 역할을 더 하게될지, 굳이 이런 설정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고개를 끄덕이게 될지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오오, 경애의 마음은 다르다, 좋구나, 하면서 읽다가 그 부분에서 삐끗- 했다. 소설을 이렇게나 오래, 이렇게나 많이 읽어온 독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러니까, 김금희는 욕심을 좀 버려도 되지 않을까,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라는 생각을 하게된 것이다.




아무튼, 아침부터 덜컹거렸다. 크-

그 때, 좋았었지 참... 좋은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 내게 있었어.....



잘 지내나요?





경애는 언제나 어찌 되었건 살자고 말하는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렇게 말해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잦아들기 때문이었다. - P24

"누구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 P27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산주와 경애는 뻔뻔하게 로맨스를 이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만났다 헤어지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그것마저 관계의 숙명처럼 느껴지던 시절은 오히려 로맨스의 과정이었고 한쪽이 결혼을 한 상황은 확실히 그것의 정리에 가까운 일이었다. 식장에 가서 무슨 오기인지 50만원을 축의금으로 내고 계단식 연단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평소에 신지도 않던 펌프스 때문에 발가락의 찌릿찌릿한 통증을 참아가며 식당에 가 잔치국수를 먹는 일. 관계의 변화는 그렇게 등 떠밀리듯 왔다. 우리 헤어져, 하는 선언이나 다 관둬, 하며 뒤도는 동작이 아니라 식권을 받아 식당으로 가 남들이 다 하는 표정과 몸짓으로 그 절차를 기꺼이 밟으며 그 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오는 것이었다. - P60

경애는 그 말들을 자신에 대한 애정으로 받아들였고, 미유가 모든 인맥을 동원해 소개팅 자리를 만들면 선선히 나가서 앉아 있었다. 미유 말대로 대부분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이 남자들은 어디서 뭘 하며 괜찮게 있다가 자기 앞에 나타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기 위해서는, 그렇게 안녕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행운이 작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야 했고 자라야 했고 먹어야 했고 사고를 피해야 했고 견뎌야 했다. 무엇보다 불운을. 불운이라고 말하면 대체 피할 수 있는 건가 싶은데, 적어도 살아 있다면 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경애는 알았다. - P62

경애는 철봉에 기대서 어떤 기대호 희망도 없지만 여전히 뛰는 사람들의 표정과 흩날리는 머리카락 같은 것을 지켜보았다. 그대 문자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산주였다. 오늘은 뭐 하니, 하는 문자를 들여다보다가 아무것도 안해, 라고 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자 날이 이렇게 좋은데 왜 아무것도 안하니, 라고 다시 문자메시지가 왔다. 경애는 그냥, 이라고 문자를 쓰면서 혹시 만나자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기다렸다. 그 육칠초간은 너무 길었고 오늘의 어느 순간보다도 경애를 마음 졸이게 했는데, 그래 좋은 하루 보내, 하는 답장이 도착했다. - P92

그런 여름날 속에서 경애를 집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은 맥주와 옥수수뿐이었다. 어느날 시장에 갔다가 옥수수가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경애는 이삼일에 한번씩 나가서 옥수수를 사왔다. 옥수수의 힘센 잎들, 동물의 것처럼 부드러운 수염, 그리고 아주 꽉 차오른 알갱이들을 보고 있으면 창으로 문득 들어오는 밤바람을 느끼듯 어떤 환기가 들면서 산다, 라는 말이 생각나곤 했다. 경애가 이 방에서 하릴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저 밖에는 ‘산다‘라는 것이 있어서 수많은 것들이 생장하고 싸우며 견디고 있다는 것. 다행히 그런 것들이 여전히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싫어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여름의 낮을 보내다 슬리퍼를 끌고 시장으로 나가면 그 살고 있는 것들을 두 손 무겁게 사들고 어쨌든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해서 경애도 아무튼 살고 있다는 것. - P97

그뒤로 경애는 산주와 자주 만났다. 살아 있지만 더이상 가까이 있을 수 없기에 죽은 사람처럼 여겨졌던 누군가가 다시 일상으로 들어온다는 건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도 다시 산주에 대한 마음을 키워가는 자신이 두려워지면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에도 괴물 같은 데가 있어서 시간이 흐를수록 애정의 허기를 채우려는 욕심을 버리지는 못했다. 경애는 산주의 일상에 점점 더 깊이 들어가면서 오늘은 산주가 점심에 무엇을 먹었고 누구를 만났으며 어떤 물건을 사고 몇시에 잠이 들었는지에 관해 아는 것이 당연한 상태를 맞았다. 마치 둘이 여전히 연인이었을 때처럼 전화를 받자마자 ㅇ보세요, 라든가, 선배 혹은 경애야, 하고 부르지도 않고 응, 가는 길이야, 왜, 밥 먹었어? 하면서 곧장 일상적인 대화로 들어가는 것이, 헤어질 때는 내일도 또 볼 테니까 아쉬움이나 대단한 안녕 없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 P110

그렇지 않아도 늘 뭔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았으니까 상수에게는 그리 힘든 기다림도 아니었다. 경애는 세상을 떠난 사람도 아니고 19세기 브론테 자매의 소설 속 인물도 아니며 브로마이드 속에만 존재하는 히로인들도 아니었다. 경애는 지금이라도 눈을 감으면 아주 복합적인 실감으로 떠올릴 수 있는 대상이었다. 경애와 상수에게는 추억이 있고 대화가, 어긋났던 감정들의 순간과 실패의 경험과 자주 있었던 낙담과 서로를 서툴게 위로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적어도 상수에게는 너무나 뚜렸했으므로 상수는 기다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여전히 "언니들의 마음을 보듬는 진짜 언니가 될래요" 하는 낯간지러운 제목 아래 기사가 실리면 순식간에 달리는 ‘그럴 바에는 x 없애라‘ ‘변태일 듯‘ 같은 댓글 속에서도 늘 기다리는 마음을 유지했다. - P349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라는 것, 자신을 방기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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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19-04-14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콩닥콩닥

다락방 2019-04-14 10:11   좋아요 1 | URL
저도 읽으면서 콩닥콩닥 했어요. 히히히히히
 















이 책을 쓴 공저자로서 나와 내 동료들은 독자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한다. 첫 번째로 우리는 여기서 여남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것이며, 여러분은 다시는 이전 같은 방식으로 여자, 또는 남자, 또는 여남 관계를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을 읽는 건 감정적으로 힘겨운 여정이 될 것이다. (p.35)



이 책의 70페이지까지 읽은 현재, 머리말에 쓰여진 이 구절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추천의 말, 옮긴이의 말, 해설, 감사 인사, 머리말.. 까지, 읽을 게 많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되게 '쎄다'. 와 쎄다, 하면서 읽다가 저 머리말을 딱 만나게 되는데, 그 후에 시작되는 본문을 읽노라면 다시 앞페이지로 돌아가 저 머리말을 읽고 끄덕이게 된다. 아, 거짓없이 과장없이 당신이 한 말은 사실이네요.



이 책의 1장은 일단 스톡홀름 증후군 의 의미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스톡홀름 증후군이 생겨나게 된 바로 그 사연에 대해 자세히 들려주는데, 이 자세한 사연만 읽으면서도 너무 충격적이라 멍해진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톡홀름 증후군에 대해서 알고는 있을 것이다. 인질이 인질범에게 동화되는 현상. 나도 그렇게는 알고 있었지만, 그 용어가 탄생한 사건에 대해 이렇게 자세하게 알게된 건 이 책 때문이었는데, 아, 외부에서 보는 것과 내부자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나 다르구나 싶었다. 


내가 누누이 얘기했던 것 중에 하나는, 내가 어떤 감정에 깊이 빠져있을 때, 그것이 분노나 슬픔이나 어떤 감정이든 거기에 깊이 들어가있을 때, 그 때는 판단하기를 뒤로 미루자는 것이었다. 그 때 내릴 판단은 잘못된 확률이 크므로. 그 때의 나는 내 감정의 내부자이니까. 그 감정에서 조금만 비켜나도 우리는 좀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은 온전히 내 개인에 대한 문제라면, 사회적으로도 역시 마찬가지. 


나는 종교에서 일어나는 성폭행을 여기에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에 깊이 들어가있을 때, 그 종교를 열렬하게 믿고 있을 때, 그 때 성직자는 신도에게 매우 힘이 세다. 절대적인 권력자. 그가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신도들을 성폭행을 하게 될 때, 외부에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왜 그사람 말을 듣고 그러지' 하고 고개를 갸웃하겠지만, 그 내부 안에서는 그런 판단을 내릴 수가 없는 거다.



스톡홀름 신드롬에서 인질은 철저하게 내부자였다. 외부자인 내가 볼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당연히 인질은 인질범을 두려워한 후 증오해야 한다. 왜 자신을 인질로 잡아 이런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했는지, 그러므로 인질범을 미워하고 경멸해야 하는 게 마땅하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인질범의 편이 되어 인질범을 동정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거야말로 내부와 외부가 나눠지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됐을까.



'스톡홀름 증후군'은 1973년 인질로 잡힌 4명의 은행 직원이 인질범에게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이자 이를 설명하기 위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p.47)



인질로 잡힌 4명중 3명이 여자였는데, 인질범은 2명이었고, 인질범들은 이들을 인질로 잡아 목숨을 위협함과 동시에 인질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아직도 왜 신호가 안 떨어졌는지는 모르겠다. 다리에만 쏘겠다니 올손은 너무나 친절하다고 감격했던 게 아직도 떠오른다. 당연히 올손은 강도였고, 친절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 목숨을 위협했던 범법자였으며, 언제든 우리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억지로 노력하지 않으면 자꾸 그 사실을 잊게 됐다." (p.53)



그들이 며칠간 인질로 잡혀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건 인질범들 때문이었다. 인질범들이 은행으로 들어와 총으로 위협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인데, 인질들은 오히려 그들의 요구를 제때 들어주지 않는 경찰들을 원망하게 된다. 경찰들이 그들을 구하기 위해 최루 가스를 살포하기로 했고 가스를 살포할 구멍을 금고실 천장에 뚫으려고 하자 인질범은 환기구에 폭발물을 설치했다.



이후 폭발물에서 멀어지려던 올손은 바닥에 함께 웅크리고 있던 엔마르크와 올드그렌에게 다가왔다. 둘은 손으로 귀를 막고 머리 위로 담요를 두르고 있었다. 올손은 참을성 있는 말투로 둘에게 벽에서 움푹 들어간 곳까지는 폭발물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자기처럼 폭발물에서 더 멀리 떨어질 것을 충고했다. 귀를 막을 필요는 없지만 입은 열고 있는 게 좋을 거라는 팁도 주었다. 올드그렌은 인터뷰에서 "전 그때 경찰은 왜 저이만큼 배려심이 없을까 생각했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p.59)



인질범이 인질로 잡지 않았다면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폭발물 설치도 인질범이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인질범에게 '배려심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내가 가장 놀란 건 이 사건이 종결되고난 후였다. 




1985년 [유에스뉴스앤드월드리포트U.S. News and World Report] 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인질이었던 여자 세 명 중 두 명이 인질범 두 명과 각각 약혼했다. (p.62)



정말 놀랐다. 너무 놀랐다. 어떻게 인질로 만든 사람과 약혼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외부인의 시각과 이토록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아, 대체 스톡홀름 신드롬이란 무엇인가. 너무 마음이 복잡해지는 거다. 초반에 이미 스톡홀름 신드롬의 배경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어 내 영혼이 탈탈 털리는 느낌인데, '사회적 스톡홀름 증후군'으로 이야기될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서 어떤 식의 흐름으로 진행될지 짐작이 되면서, 감당할 수 있을까 싶어지는 거다. 읽고 싶으면서 동시에 읽기 싫은 마음. 알고 싶으면서 동시에 알기 싫은 마음이 공존해서 마음이 너무 복잡하다. 


게다가 본문 전에 나오는 옮긴이의 말과 해설에도 쎈 말들이 가득해서, 와, 이거 이성애자인 사람들이 읽으면 대단히 충격받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내가 밑줄 그은 문장들은 아래 밑줄긋기로 추가하겠다.



아아, 일요일 밤, 나는 이 책을 조금 더 읽을 것인가, 여자 전쟁과 여자는 인질이다로 지친 마음, 줌파 라히리로 달랠 것인가 잭 리처로 달랠 것인가, 조금 고민해봐야겠다. 

오늘 봄날의 선물이라며 친구에게 이 책을 같이 읽자고 선물했는데, 내가 잘한걸까.... 못할짓 한 건 아닐까... 아아 혼란스럽다.




"너는 창녀, 아기는 사생아라 불리겠지.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가리키는 말은 없어." 1920년대가 배경인 한 영국 드라마(피키 블라인더스)에 등장하는 대사다. 이제 우리는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싸튀충(정액을 싸고 튄 사람이라는 뜻)‘ 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새로운 이름으로 가해자를 끌어낼 때 페미니즘은 가속 페달을 밟은 듯 거칠게 돌진했다. (유혜담, 옮긴이의 말) - P19

꼭 소개하고 싶었던 용어가 ‘탈혼‘이다. 온라인을 주축으로 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만들어낸 이 단어는 이혼이 일종의 탈출 감행임을 지적한다. 결혼 제도 속의 여자는 인질이나 마찬가지라는 통찰이 담겨 있다. 책을 읽지 않고도 책의 메시지를 꿰뚫는 용어를 만들어낸 셈이다. 실제로 책의 주요 주제 중 하나가 ‘탈출‘이며, 6장 전체를 우리가 ‘탈출‘할 수 있는 범에 할애하고 있다. (유혜단, 옮긴이의 말) - P22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시각으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가해자와 애착을 형성한 것은 이들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피해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선택한 심리적 기제였더 것이다. (박혜정, 해설) - P27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수천 년의 시간 동안 남자들이 조직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여자들을 때리고 강간하고 살해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들 대다수가 왜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가 하는 언뜻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적인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남자들의 폭력과 이성애는 서로의 존재를 상호 보완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들의 폭력으로부터 한 순간도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여자들은 자신의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남자 계급의 시각에 동화되고 자신을 보호해줄 남자를 찾아 그에게 의지하고자 하게 된다. 여자에게 서폭력을 저지르지 않는 신사적인 남자라 할지라도, 그는 분명 다른 남자가 여자에게 행하는 성폭력으로부터 이득을 본다. 여자들의 남자의 보호를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종속적인 이성애 관계 안으로 들어가 남자에게 감정적, 성적, 가사적 무보수 노동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박혜정, 해설) - P28

한편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한편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한다면, 가부장제는 기름칠 잘 한 기계처럼 남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게 되어 있다. 여자 계급이 피억압 계급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지배 계급의 시각에 동화되게 되므로 집단적 저항의 가능성이 매우 효과적으로 차단되는 셈이다. (박혜정, 해설) - P28

6장은 여자들이 계속 남성 폭력을 경험하며, 서로로부터 사상적.물리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탈출할 수도 없고, 남자의 사소한 친절에 기댄채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우리의 인질 심리(사회적 흐톡홀름 증후군)를 바꿀 수 있을지를 다룬다. 지배나 복종이 아닌 상호성에 기반을 둔 관계만 존재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런 세상을 상상할 수 있어야만 한다. (머리말) - P41

정혈: 여자가 주기적으로 자궁에서 피를 흘리는 현상. 남자가 배출하는 체액은 깨끗하다는 뜻의 ‘정액‘ 이라고 부르면서, 여자가 배출하는 체액은 더러운 것처럼 ‘생리‘, ‘그날‘, ‘월경‘등으로 돌려 말하는 문화에 반대하여 만들어진 말이다. - P57

웨셀리어스와 데사르노는 두 번째 인질 피해자만 스톡홀름 증후군 증상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이 피해자가 인질범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긍정적인 접촉도 가장 많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또 다른 인질들은 함께 감금되어 있었던 반면 이 피해자는 홀로 고립되어 있었다. 감금 기간이 짧았음에도 이 피해자에게 스토골름 증후군이 나타났다는 근거로는 "그가 인질범에게 긍정적인 느낌이 들었다는 점, 외부에 있던 책임자들에게 분노했다는 점, 인질이 죽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워 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인질범이 실제로는 악취를 풍기고 행색이 초라했음에도, 인질범이 말쑥하고 매력적이었다고 묘사한 유일한 피해자였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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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5월, 여자는 인질이다
    from 마지막 키스 2019-04-29 07:53 
    오늘 아침 눈뜨자마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여자 디제이는 자신의 첫사랑에 대해 얘기했다. 지금이라면 전혀 달랐겠지만, 대학시절 사귀었던 첫사랑 남친에게 왜그렇게 매달렸는지 모르겠다고. 심지어 그 남자는 바람을 피우기까지 했는데, 그걸 알면서도 헤어지기 싫어서 매달리고 고가의 지갑까지 선물로 주었었다는 거다. 같이 방송하던 게스트도 왜그랬냐고 하고, 디제이 역시도 왜그랬나 모르겠다고 대답하는데, 나 역시도 의문이었다.'왜 그랬을까?'바람을 피운 건 나를 배
  2. [여자는 인질이다] 바람남은 바람남이다
    from 마지막 키스 2019-05-07 11:27 
    어제 늦은밤. 컵라면에 밥을 먹고 홍콩에서 돌아온 짐을 풀며 틀어둔 티비에서는 <연애의 참견>을 방송하고 있었다. 사연 속의 여자는 남자와 일년 가까이 연애하면서 사랑을 키워나가던 중, 남친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핀 사실을 알게 된다. 여자는 복수를 결심한다.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든 뒤에 보란듯이 빵 차주겠어!' 하며 D-day 를 50일 뒤로 잡는다. 그렇게 남자의 집에서 다른 여자의 흔적을 찾아 확보하던 중, 까페에서 남친이 다른 여자와
 
 
단발머리 2019-04-09 1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밑줄긋기 해주신 옮긴이의 말, 해설만 따라 읽어봐도 어마무시하네요.
<혁명의 영점>의 ˝우리는 하녀이자 매춘부이고 간호사이자 정신과 의사이다. (45쪽)˝의 문단급 폭풍 감동이 예상되요.
다락방님의 친구라면 봄날의 선물인 이 책에 대해 큰 기대를 갖게 될 거라 의심하지 않습니다. 부럽부럽^^

다락방 2019-04-09 11:2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혁명의 영점 그 문구 떠올렸어요. 와, 이 책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책이에요. 읽는데 막 너무 후려치고 아파요. 단발머리님, 단단히 각오하셔야 해요. 저는 스톡홀름 증후군에서 인질들이 인질범과 약혼한 거 읽고 너무 망치로 머리 맞은 것 같았어요. 힘들어요 ㅠㅠ

단발머리 2019-04-09 14:12   좋아요 0 | URL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하시니 진짜 각오는 필요할 것 같아요.

현실에 대한 적확한 인식이 있는 여자가 이 세상을... 남성 위주의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전 없다고 봐요.
저를 포함해 많은 여자들이 타협하고, 이해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죠. 그래야만 생존이 가능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테니까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처럼요 ㅠㅠ
다락방님께 망치로 맞은듯한 충격을 주는 책이라면 저도 꼭 읽어봐야하는 책이었네요.
두려움과 기대가 공존합니다.

다락방 2019-04-10 10:24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여자 전쟁도 또 여자는 인질이다도 읽게 되시면 틈틈이 글 남겨 주세요.
저 어제 여자 전쟁 2장 읽었거든요. 아르헨티나 할머니. 또 여러가지로 마음이 복잡했어요. 휴..
여자들은 계속 강했는데 왜 세상은 ‘여자는 약하다‘는걸 그토록이나 주입하려 한걸까요. 마치 남자가 지켜줘야 되는것처럼.
저는 틈틈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힘겨운 책들을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수 로이드 로버츠'는 이 책을 마무리 하기 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이 책의 <들어가며>는 저자의 딸인 '세라 모리스'가 썼다. 




세라에게,

질문: 우리가 너희 가족이 겪는 참담한 슬픔에 함께 고통스러워하고, 수가 누렸어야 마땅할 생을 너무 일찍 마감했다는 점을 계속 괴로워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그녀가 더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용기를 줬던 수의 놀라운 삶을 기리는 게 나을까? (들어가며, p.10, 수 로이드 로버츠가 사망한 뒤 그녀의 딸에게 도착한 메세지)



최고의 언론인이면서 약자의 편에 서고자 했던 수 로이드 로버츠가 이 세상에 살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기억하고 기리고자 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라니. 들어가며 를 읽는 순간부터 코끝이 찡해진다. 새삼 내가 얼마나 멀리 왔는가도 실감했다. 나는 공공연하게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해왔는데, 어느틈에 시간은 나를 '여자들이 너무 좋다'고 말하는 지금으로 데려다 놓았다. 열심히 분노하고 열심히 싸우는 여자들이 이렇게 세계 곳곳에 있다. 감사와 응원과 연대의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는데, 아이쿠야, 이 책의 1장은 무려 할례에 대한 이야기다. 읽기 전부터 벌써 기운이 딸리는 느낌.



수 로이드 로버츠는 감비아에서 할례자가 될 수 밖에 없는 한 여성을 인터뷰한다. 그걸 하기 싫어서, 다른 어린 여자아이들의 성기를 자르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조국으로부터 도망온 여자. 그녀는 곧 영국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놓였다. 수 로이드 로버츠는 감비아로 가 '이맘(이슬람교 교단의 지도자로서 학식이 뛰어난 이슬람 학자에 대한 존칭 p.27)' 을 만난다. 여성의 성기를 가지고 살아본 적이 단 일 분도 없으면서 그러나 여성의 성기에 대해 아주 잘도 지껄인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이것이 이슬람 문화권에서 받아들여져온 이유이며,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는 이유, 또 그것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이유입니다."

배석한 남자들이 동의의 뜻을 담아 연신 끄덕거리는 분위기에 취해, 이맘은 말을 계속했다. "FGM은 여성에게 이로운 일입니다. 할례할 때 잘라내는 것은 매우 가려운 부위예요. 너무나 간지러워서 그걸 완화하려면 철수세미로 문질러야 할 정도라고요.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말이죠, 할례를 하지 않은 여자는 축축한 분비물이 나와요. 의자에서 일어날 때마다 옷이 잔뜩 젖을 지경이라 공공장소에 있다면 정말 망신스러운 일이 될 거예요."

이쯤 되자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여자로서, 약간의 분노를 담아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클리토리스를 가진 채 60년을 살았어요. 그리고 단 한 번도 그런 일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는 능글거리는 눈빛으로 답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요, 당신은 일반적인 여자들과는 좀 다른가보죠."

앞선 무식한 주장보다도 이 웃음에서 더 이상은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만일 그가 진심으로 어린 여성들의 성기 절제가 신의 섭리이고, 여성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웃지 않았으리라. 그는 자신이 내뱉는 말이 상식에 어긋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바로 그 점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 자체가 성기 절제는 오직 여성 통제를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그가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p.28-29)




그것이 정말 '아름다운' 일이었다면 이맘이여, 당신이 당신 고추를 먼저 잘랐겠죠. 그러나 니 고추는 제자리에 잘 붙어있지, 온전한 형태로?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도 가해지는 할례에 대한 부분을 읽는 데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다. 몇 번이나 쉬었다 읽어야 해서.  



수 로이드 로버츠가 인터뷰한 감비아의 '마이무나'는 할례자가 될 운명이었고, 그것이 싫어 고국에 자신의 아이들을 둔 채로 도망쳤다. 아이들이 너무 보고싶지만 아이들을 보러 자신이 그곳으로 돌아가면 할례를 해야할테고, 그것은 다른 여자아이들에게 못할 짓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립지만 참아야 한다고. 마이무나가 사는 곳에서 할례자는 반드시 정해져있고, 그 사람으로부터 할례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에, 마이무나가 없는 지금 그곳은 몇 년째 할례가 중지되어 있다. 



마이무나의 운명은 할례를 집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어머니, 할머니와 그보다 앞선 선대부터 그들은 지역사회를 위해 의무를 다해왔다. 그런데도 이 여자는, 어떤 교육도 받지 않았고 여성 성기 절제Female Genital Mutilation(FGM) 에 반대하는 운동가들이 마을에 오기도 훨씬 전인데, 어린 소녀들에게 그토록 무참한 고통을 가하고 성기를 절단하는 짓이 잘못임을 깨달았다. (p.21-22)




나는 항상 스스로 깨닫는 사람들에게 깊은 존경을 보낸다.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을 수 있는 사람. 마이무나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금 마이무나가 태어난 곳에서 할례가 멈춰있고, 그러나 마이무나는 자신의 아이들을 보지 못한 채로 살고 있다. 그녀를 인터뷰하고 기록해 이렇게 책으로 내는 수 로이드 로버츠나 그런 곳으로부터 빠져나오고자 한 마이무나 모두 얼마나 대단한지. 세상은 이렇게 스스로 깨닫고 변하고자 하는 사람들 덕에 바뀔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할례에 대한 1장을 다 읽었는데, 2장은 그나마 좀 수월하게 읽힐까. 오늘은 그저 1장 읽는 걸로 마치련다. 기운없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해야 한다는 신념은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훔친 이래로,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여성은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된다고 경고해왔다. - P29

클리토리스에 대한 설명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묘사는 [뉴욕 타임스]의 과학 전문 기자이자 작가인 내털리 앤지어Natalie Angier가 쓴 문장이다. "클리토리스는 목적이 분명하다. 신체에서 순수하게 쾌락만을 위해 설계된 유일한 기관이다. 클리토리스는 단순한 신경 다발, 정확하게는 8000개의 섬유질 뭉치다. 손가락 끝, 입술과 혀를 포함해 신체의 그 어느 곳보다 고밀도의 신경섬유를 갖고 있으며, 남성의 음경과 비교해도 두 배 가량 된다. 자동소총을 갖고 있는데 권총이 왜 필요하겠는가?" 여성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이 클리토리스를 ‘위험한 것‘으로 간주할 만도 하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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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9-04-09 0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맘.. 좀 패고 싶은데요..
고추를 자르지 않은 남자는 여자를 볼 때마다 발기를 해요. 바지 겉으로 드러날 지경이라 공공장소에 있다면 정말 망신스러운 일이 될 거예요. 그러니 잘라요!
라고 하고 싶네요

다락방 2019-04-09 08:03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수시로 발기하는 그 해로운 고추나 떼낼 것이지 어디 달고 살아본 적 없는 여자 성기에 대해 말하는건지, 원. 아 정말 징글징글해요.

블랙겟타 2019-04-09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읽기시작하셨네요. 저도 곧 따라갈께요.

앞 선 책 <가부장제의 창조>에서나 이 책 1장에서 보듯 종교에서도 여지없이 남성의 눈으로 멋대로 여자들을 평가하고 마음대로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죠.....ㅜ

다락방 2019-04-10 07:36   좋아요 1 | URL
블랙겟타님, 저 어제는 2장 아르헨티나 할머니들 읽었어요.
납치된 자식들을 찾기 위해 시위를 하고 조직을 구성한 것도 다 여자들이었는데, 세상에 이렇게나 여자들이 활발하게 움직여왔는데 왜 세상은 남자들이 다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던 걸까요?

네, 곧 따라오세요. 저도 천천히 기다리며 읽겠습니다!
 















나는 비어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반드시 채워야 한다는 강박이 내 안에 있다. 그 강박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 바로 독서이다. 나는 재미있어서, 흥미로워서 책을 읽지만, 이 재미있고 흥미로운 것이 모든 빈 시간을 메꾸는 데 어찌나 효과적인지 모른다. 친구를 기다리는 까페 안에서, 출퇴근길의 지하철 안에서, 잠들기 전 침대에 앉아서. 나는 그 시간들을 책으로 채운다. 잠시라도 혼자 있는 시간이 생길라치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어떤 책을 읽을까이다.


김진영이 입원을 해야 한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그 시간동안 책을 읽어야지, 라고 내가 되어 생각했다. 내가 입원한다면 병실 안에 내내 혼자 있을테니, 책을 엄청 많이 읽을 수 있겠네! 라고, 애도 일기를 읽으면서 부끄럽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죽음을 앞에 둔 철학자의 가만한 내면 일기를 읽으면서, 입원에 이르기까지 그 고통은 또 얼만한 크기였을까를 생각하기보다, 책을 계속 읽을 수 있겠구나, 한것이다. 이 병의 크기를 무시한채로. 아, 나란 인간..



한 번 든 생각은 쉬이 사라지질 않아서 자꾸만 자라났다.

입원하면 하루종일 병실에 있으니 책을 많이 읽겠지, 그렇다면 그 책을 다 어떻게 마련하나. 일단은 집에 있는 책들을 좀 가져갈 수 있겠지만, 입원 시간이 길어진다면.. 병실로 책 배송을 시키면 안되겠지? 그러면 내가 가져온 책을 다 읽으면... 누구한테 가져다달라고 하지? 엄마 아빠는 무거운 거 들고 다니시면 안되는데.

남동생? 남동생한테 야, 오면서 내 방에 들러 이 책 저 책 가져와, 라고 해야할까?

친구들? 친구들이 온다고 하면, 친구야 책 좀 사다줘, 해야할까. 헌 책이라도 좋으니 책 좀 사다줘, 해야할까.

병실에 오기전에 연락해 친구들아.


어쩌면 병원 근처에 서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잠시 외출해서 여러권 사가지고 와야지.

편의점이 있다면, 그렇게 읽은 책들 차곡차곡 중고샵에 팔고 또 서점 가서 책 사오고, 책 사오고...



라고 생각하다가 내가 입원하는 상황이면 몸이 무척 아플 거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아, 돌아다니고 책을 하루종일 읽을 수 있으려면 도대체 입원은 왜 한거냐, 그걸 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입원한 거 아니냐, 하고... 나여.....




그러고보면 책만 있으면 혼자 있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은것 같다.

<나는 자연인이다> 보면서 '나도 자연인 되고 싶다'고 생각할 때도, 그 산 속으로 책만 잔뜩 가져가면 지내는 데 별 문제 없지 않을까, 한 것. 물론 밤에 자는 건 다른 문제..그거슨 초큼 무서울 것 같아. 그래도 낮에는 해를 벗삼아 비를 벗삼아 산새소리를 벗삼아 책을 읽으면 혼자 산 속에서 지내는 것쯤은 해낼 수 있을 듯.

그렇지만 별로 자연에서 살고 싶진않다...



원래도 책이 좋았지만 점점 더 좋아진다.

이런 일은 되게 드물기 때문에 너무 소중하다.

조카가 태어났을 때 그리고 조카가 자라는 걸 계속 보면서,

와, 어떻게 어제보다 더 사랑할 수가 있지..라는 신기한 감정을 경험했었는데,

칠봉이랑 연애하던 시절에,

와, 어떻게 어제보다 더 사랑할 수가 있지..라는 감정에 스스로 벅차했었는데,

책이 그렇다.

어릴 때도 책이 좋아서 읽었지만 요즘에는 책이 진짜 더 좋다. 책 읽는 거 진짜 너무 좋아. 책 만만세다.


그리고,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뒤적인다. 부끄럽고 괴롭다. 그의 고통들은 모두가 마망 때문이다. 마망의 상실 때문이다. 그의 고통들은 타자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러면 나의 고통은 무엇 때문인가. 그건 오로지 나 때문이다. 나는 나만을 근심하고 걱정한다. 그 어리석은 이기성이 나를 둘러싼 사랑들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사실 나는 바르트보다 지극히 행복한 처지다. 그는 사랑의 대상을 이미 상실했다. 그러나 내게 사랑의 대상들은 생생하게 현존한다. 나는 그들을 그것들을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기만 하면 된다. (p.254)




안부를 묻고 싶어졌다.

그럴 수 있다면, 그래도 된다면,

당신 자신을 잘 보살피라는 문자메세지를 따뜻하게 보내고 싶어졌다.





당신 자신을 잘 보살피도록 해요.









베란다에서 세상의 풍경을 바라본다. 또 간절한 마음이 된다.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 P046

내 안의 텅 빈 곳이 있었다. 돌아보면 그 텅 빈 곳을 채우기 위해 돌아다녔던 세월이 나의 인생이었다. 도서관을 헤매던 지식들, 애타게 찾아다녔던 사랑들, 미친 듯이 자기에게 퍼부었던 히스테리들, 끝없이 함몰했던 막막한 꿈들 …… 그것들은 모두가 이 텅 빈 곳을 채워서 그 바람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몸부림들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그 텅 빈 곳을 채우지는 못했다. 이제 또 무엇이 내게 남아 있는 걸까. 무엇으로 이 텅 빈 곳을 채울 수 있는 걸까. 이제 남은 시간은 부족한데 과연 나는 그 텅 빈 곳의 주인을 찾을 수 있을까. - P144

"얼마나 걸어가야 절이 나오나요?"
라고 물으면 촌부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자뿌리고 그냥 가소. 그라면 나오니께 ……" - P182

나의 존재 자체가 축복이고 그래서 사랑받을 자격이 충만함을 알게 하고 경험케 한 부모님에 대한 기억. - P226

언젠가 어딘가에 적었던 말, 간절할 때 마음속에서 혼자 또는 누군가에게 중얼거리는 말들, 그게 다 기도란다-기도하는 법을 배운다. 나를 위해서, 또 타자들을 위해서 ……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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