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어떤 감정을 갖게될지는 그 책을 읽기 전까지 아무도 모른다. 소문난 고전이라고 해서 그 책을 읽고 감동받으리란 법도 없고, 뻔한 구절이 가득한 책이라 해서 당연히 실망하리라는 법도 없다. 사람을 만나도 마찬가지...라고 쓰려다가 또 쓸데없이 길어질까 이쯤하고.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읽는대신 단발머리 님 방식대로, 원하는 사람들을 먼저 골라 읽기 시작했다.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시몬 드 보부아르를 읽었고, 오늘 아침엔 베티 프리단을 시작했다.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 1921~2006)은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em, 1934~)과 더불어 1960년대 이후 미국 여성운동을 이끈 가장 유명한 지도자로 손꼽힌다. 프리단이 이 역할을 맡게 된 것은 1963년에 출간된 『여성성 신화』가 불러일으킨 엄청난 성공과 반향에 힘입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 쏟아진 엄청난 관심과 열광적 평가는 짧은 지면에 다 소개할 수 없을 정도다. 앨빈 토플러는 이 책을 일컬어 역사의 방아쇠를 당긴 책이라 격찬했는데, 역사의 방아쇠까지는 아닌지 몰라도 여성운동에서 한 새로운 단게의 출발을 알린 책인 것은 분명하다. 이 책은 미국 근대 여성주의의 가장 중요한 전화점이 되어주었다고 평가되기도 하고 1960년대 후반에 일어난 서구 여성주의 운동 (이른바 여성주의 제2의 물결)을 이끌어낸 기폭제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프리단이 2006년 2월 사망했을 때 『뉴욕타임스』지의 부고기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였다. "여성주의의 십자군 용사이자 1963년 현대 여성운동을 작열시킨 뜨거운 첫 저서 『여성성 신화』의 저자이며, 그 결과 미국과 세계 각국의 사회구조를 영구히 변화시킨 인물인 베티 프리단이 사망했다." (p.315)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도 죽었다. 파이어스톤도 죽었다. 보부아르 역시 마찬가지. 그러니까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살아있지 않은 저자들을 만나왔는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오늘 아침에는, '베티 프리단이 사망했다'는 구절에서 왈칵- 치밀어 올랐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심지어 나는 베티 프리단의 책은 읽어보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왜 그녀가 사망했다는 구절에서 왈칵했을까. 모르겠다. 나는 가만, 처음으로 돌아가 그녀의 태어난 날과 사망한 날을 다시 보았다. 얼만큼을 살다간 것인가.
많은 여성들에게 읽히고 자극을 준 책, 여성주의의 기폭제가 된 책을 쓰기 위해서 베티 프리단은 의문을 가졌고, 설문조사를 했고, 집필을 했다. 그렇게 열정적 삶을 살아서 업적을 남긴 사람이지만, 결국은 죽었다. 죽는다는 것은 인간이 결국 닿게 되는 종착지일텐데, 문득 '인생은 무엇인가', '왜 사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버리는 거다. 우리는 결국 죽을텐데, 왜이렇게 살고 있을까. 세상이 뒤죽박죽이고, 어어 이 세상 이상해, 그렇다면 이상한 이유가 뭘까?, 내 생각엔 이래서 이런것 같아, 라는 치열한 사고를 거쳐 세상에 알렸건만, 죽었다.
좋은 작품을 쓰고 위대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더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변방에서 책을 읽으며 회사를 다니는 평범한 나라고 해서 일찍 죽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누가됐든 사람은 태어났고 태어난 이상 죽게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인데, 새삼, 어떤 삶을 살든 죽어야 한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픈 거다. 우리는 왜 태어났을까. 우리는 왜 죽어야할까.
태어났고 태어난 이상 살아가고, 그리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한 과정을 겪어내야 하는거라면, 그 과정을 어떻게 살아야할지는 자기의 몫일 것이다.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평온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함께하는 사람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내가 죽더라도 내 뒤에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삶의 절대가치 혹은 상대적 가치를 평가하는 건 누구의 몫일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하나의 위대한 저작을 냈다고 해서 평생을 위대한 사람으로 살다 죽는 것도 아니다. 이 책에서도 잠깐 언급되지만『백래시』에서도 베티 프리단이 오히려 페미니즘에 역행하는 책을 쓰기도 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게다가 동시대에 인기를 끌었던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질투했다는 얘기도. 인간은 태어난 이상 죽어야하고, 그 개인으로 들여다보면 무수히 많은 복잡한 감정들에 휩싸여있다. 어마어마한 저작을 냈으니 그것만으로도 어깨힘 뽝주고 살아가도 됐을텐데, 아마도 더한 것, 더 높은 것을 바랐던 것일까. 책을 쓰기 전에는 그 책이 이렇게나 큰 반향을 일으킬지 몰랐을 것이고, 그 어마어마한 책을 써낸 뒤에는 더 높은 곳에 닿고 싶다는 바람이 생길지도 몰랐겠지. 인생은 아주 많이, '이럴 줄은 몰랐어' 를 내뱉으며 살게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어제 엄마랑 노화에 대해 얘기를 나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엄마와 둘이 시장에 가면서 엄마의 팔에 핀 검버섯을 보았다. 검버섯은 손에도 있었다.
엄마, 나도 곧 그 검버섯이 내 몸에 깔리겠지.
응.
나 벌써 시작된 것 같아.
누구나 그래. 신경쓰지마. 늙으면 검버섯 생기는 건 당연한거야.
나는 늙어가고 죽음에 이르겠지. 나도 그냥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니까. 다른 사람과 똑같은.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할까. 베티 프리단처럼 큰 반향을 일으키는 책을 쓰지는 못할거다. 내가 살면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리고 내 온전한 행복을 위해서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내가 바라는대로 살 수 있을까?
죽기 전에 『여성성 신화』는 읽어야겠다. 검색해보니 2018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남편인 칼은 부인의 활동을 격려하고 적지 않게 지원해주기도 했지만 지적이고 독립적인 부인에 대해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했고, 의견 마찰이 있을 때는 부인을 구타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결혼관계는 결국 1969년 이혼으로 끝났다. 칼은 얼마 후 가정적인 여성과 재혼해서 아주 만족스러워했으며, 베티와 같이 지적인 여성은 존중하기는 해야 할 테지만 그러한 여성과 결혼할 것은 아니라고 극구 주장하기도 했다. (p.320)
맙소사.. 베티 프리단의 남편도 아내를 때렸다니. 세상에 아내를 때리지 않는 남자가 있기는 한건가요? 그리고 왜, 남자들은 지적인 여자를 싫어하는가.. 왜 지적인 여자랑 결혼하기 싫어하는가. 나는 이거 너무 이상하다. 사람들이 대부분 똑똑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나? 토요일에 남동생 부부랑 저녁 식사 하면서 '애인에게 용납 안되는 한가지' 화제가 나왔는데, 나는 '멍청한 남자는 질색팔색' 이라고 했단 말이야? 누구나 다 멍청한 사람 만나기 싫어하는 거 아닌가? 왜 남자들은 자기보다 똑똑한 여자를 기를 쓰고 싫어하지? 그런데 대부분 다 자기보다 똑똑할 수밖에 없는데.. 아아, 모를 일이다.
남동생 부부와 바깥에서 저녁을 먹고 2차로는 남동생 부부의 집으로 갔다. 텔레비젼을 틀어서 보며 술을 마시다가, 채널을 돌리고 잠깐 무슨 밥상 차리는 프로를 보게 되었다. 프로그램 제목은 생각이 안나는데, 여자가 지역 특산물로 밥을 차려내고 있었다. 닭장 육수로 떡국을 끓이고, 보쌈을 준비하고, 토하(새우)젓을 준비해 상을 차려냈다. 차려진 상에 밥을 먹기 위해 남자 셋이 몰려들었다. 한 명은 남편인것 같고 다른 두 명은 모르겠는데, 일단 준비과정부터 여자 혼자 하는 걸 봤던 터라 몹시 기괴한 장면. 나는 한마디 하려다가, 아아 지금 분위기 좋은데 걍 입닫고 있자, 괜히 남동생 부부 앞에서 욕하지 말자, 하고 있었단 말야? 그런데 남자가 '토하에서는 특유의 향이 난다' 고 하는 거다. 여자는 '그게 싫지 않지?' 하는데 남자가 대답을 안해..아아, 나는 나를 참을 수 없었다.
"차려주는대로 쳐먹기나 하지, 가만히 앉아서 밥상 받는 주제에 말이 많어 개새끼가."
남동생은 "누나가 뭐라고 할 줄 알았다" 면서, "저거 여자가 혼자 차렸고 치우는 것도 여자 혼자 치울 거 아냐"며 거들었다. 으으...
자, 다시 베티 프리단으로 돌아가면,
한동안 이런 생활을 하던 여성들이 표현할 수 없는 심적 고통과 고뇌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잔디밭 깔린 좋은 집과 가구, 온갖 가전제품, 착한 아이들이 있고 사이좋은 이웃들과 환한 얼굴로 담소하며 유행따라 멋진 옷을 갖춰 입고 취미생활까지 하며 사는 여자들이 정신과 진료를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감적이 격해져 울거나 집을 뛰쳐나가 거리를 헤매거나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다. 신체적으로도 징후가 나타나 손과 팔에 큰 물집이 생겨 터져 피가 흐르기도 했다(세척제 문제가 아님). 이런 문제를 안은 여성들은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 더욱 노력하며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으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여성들이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성적 요구를 하고 이를 통해 "살이 있음을 느끼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인들은 성적 동물이 되어갔고 남편들은 부인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여자들이 어머니로서의 존재 확인을 위해 끊임없이 임신하고 아이를 낳는 것도 이 현상의 특징이었다. (p.337-338)
나는 이 부분을 읽다가 정확히 이 부분에 해당하는 구절이 나오는 소설, 『마담 보바리』 생각이 났다. 보바리 부인도 자기 안에 그 감정 때문에 교회를 찾아가지만, 너에게 부족한 건 없고 그런건 다른 가난한 여자들이나 갖는 감정이다, 라는 말을 듣게 되지.
「사실」 하고 그는 엠마 곁으로 되돌아와서는 커다란 사라사 손수건을 이빨로 물어 펴면서 말했다. 「농민들은 정말 불쌍해요」
「그들 말고도 또 있어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물론이지요! 예를 들어서 도시의 노동자들이 그렇죠」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실례지만 말입니다, 내가 아는 불쌍한 가정의 어머니들은, 정숙한 여성들은, 정말이지 거의 성녀라고 해도 좋을 사람들인데 빵 한 조각 없이 헐벗고……」
「하지만 저어……」 하고 그녀는 말을 받았다(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입술 양쪽 끝이 일그러졌다). 「신부님, 빵은 있어도 여전히 뭔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여자들이……」
「겨울에 불이 없는 여자들」하고 신부가 말했다.
「아니! 그런 거야 아무려면 어때요?」
「뭐라고요! 아무려면 어떠냐고요? 내가 보기엔 사람이란 몸 따뜻하고 배불리 먹기만 하면……왜냐하면……결국……」
「아아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하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p.167)
인생 뭘까.
인생 왜 사는 걸까.
난 모르겠다..
현대의 생물학자, 사회과학자, 심리분석학자들은 인간적 성장의 요구(need)나 충동(impulse)이 섹스 못지않게 원초적인 인간적 요구이며, 기본적인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1940년대 메국에서 프로이트 이론은 여성의 비정상성, 열등성, 인간적 결함을 설명하는 근거 역할을 했다. 여성은 자신이 남근을 가지지 못한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부터 남근을 부러워하고 남성성을 원하게 된다는 것이야말로 프로이트가 여성에 대해 적용한 기본 관념이었다. 게다가 여성은 본래적 결핍인 남근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남근 선망을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에 초자아를 발전시키기 어렵고 본능을 승화시키는 능력도 더 약하다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그는 여성은 남성 성기에 대한 갈망을 자녀에 대한 갈망으로 대체하고자 한다고 주장했다. - P3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