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에 대한 부분을 오늘 아침 출근길에 읽었다. 이 책에 실린 저자들중 몇 안되는 남성인데, 그를 다룬 꼭지의 앞부분에는 그가 '빅토리아 시대 여성운동의 절정기를 이끈 지도자' 라고 되어있다. 그가 썼다는 책 《자유론》과 《여성의 종속》은 물론 일찍부터 사두었지만, 다른 많은 책들이 그러한 것처럼 아직 읽지는 않았...으니 이 책으로 예습을 해보자. 그러니까, 밀은 여성의 종속을 왜 썼고, 어떻게 쓸 수 있었으며, 어쩌다가 여성운동의 절정기를 이끈 지도자가 되었나. 남성이란 성별로서.


페미니스트를 지지하거나 혹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칭하는 남성들이 있어왔다는 걸 알고 또 앞으로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남성'으로 태어나서 온전하게, '스스로' 페미니즘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은 가능한가. 밀이 다른 남성들과는 달리 이렇게 여성운동에 앞장설 수 있었던 동력은 어디 있었을까. 이 책을 읽노라면 그가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본젹적으로 여성의 종속을 써낼 수 있었던 것은 '해리엇 테일러'라는 여성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언급된다. 오, 나는 그가 여성의 종속을 썼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가 그걸 써내는 배경에 다른 '여성'이 있었던 줄은 몰랐던 터라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1830년 스물다섯 살의 밀은 존 테일러의 부인인 스물세 살의 해리엇 테일러(Harriet Taylor, 1807-~58) 를 만나 첫눈에 "깊고 강한 감정, 투철하고 직관적인 지성, 그리고 남달리 명상적이고 시적인 성품을 가진 여성"임을 알아본다. 밀과 해리엇의 우정은 이십 년 동안 유지되었고, 결국 존 테일러가 죽은 지 2년이 흐른 1851년에 (밀의 가족의 반대를 감수한 채) 결혼에 이르렀다. 결혼생활은 1858년 해리엇의 죽음으로 마감된다. 이듬해 밀은 해리엇과 함께 저술해왔고 마지막 교정까지 함께 보려고 준비해두었던 원고를 정리해서 발표하는데, 이것이 『자유론』이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 밀은 영혼의 반려자였던 해리엇을 기리며 "진리와 정의에 대한 높은 식견과 고매한 감정으로 나를 한없이 감화시켰던 사람, 칭찬 한마디로 나를 무척이나 기쁘게 해주었던 사람, 내가 쓴 글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그녀의 영감에게서 나온 것이기에 그런 글을 나와 같이 쓴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 함께했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추억 그리고 그 비통했던 순간을 그리며 나의 친구이자 아내였던 바로 그 사람에게 이 책을 바친다"는 애정 어린 헌사를 남긴다. (p.89-90)



자유론을 먼저 쓰고 나중에 여성의 종속을 쓰게 되는데, 그러니까 그는 스물다섯에 알게된 여성과 깊은 우정을 유지하면서 생각과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는 거다. 그가 저런 헌사를 남길만큼 그녀의 영향력이 대단했던 바, 물론 밀이 원래 가진 여성에 대한 생각이 있었겠지만, 그것이 해리엇과의 대화들로 인해 팡팡 터지면서 화악 열린 것 같다. 밀은 그러니까 지금도 찾아보기 힘든, 보기 드문 개념남이지만, 그 혼자 스스로 개념남이 되었다기 보다는 단단한 조력자가 있었던 셈.




여성참정권을 핵심적인 의제로 삼고 밀고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여성의 종속』이 생생하게 웅변하는 바, 평등이 인간의 자유로운 삶에 필수적이라는 평생의 신념에서 나왔다. 이는 걸출한 여성 해리엇을 흠모한 영민한 청년 밀의 순수한 열정에서 싹텄고, 사회개혁이 진정으로 자유를 향유할 줄 아는 평등한 개인들에 의해 완성될 수밖에 없으리라고 믿으면서 그녀와 함께 『자유론』을 집필했던 원숙한 사상가 밀의 통찰에서 발전되어 온 것이다. 1860년대 말 영국의 여성참정권운동은 밀의 자유주의 사상 그리고 그것의 완성에 영감의 원천을 제공한 해리엇 테일러라는 탁월한 여성에게 철학적 원리를 빚진 셈이다. (p.93)




밀의 여성의 종속, 자유론에 대한 내용도 궁금해졌지만 해리엇과의 관계가 너무 흥미로웠다. 혹시 이것만 다룬 책이 따로 있을까? 해리엇이 지성을 가진 여성이었다는 것도 흥미롭고 다른 남자의 아내였다는 것도 그렇다. 무엇보다 밀이 그런 여성임을 알아보았다는 것도 그렇고. 그가 해리엇을 한눈에 알아보았는데 그것이 지성이나 감성 때문이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는 지성과 감성에 반하는 사람들을 보는 게 너무 좋다. 지성과 감성에 반하는 사람들은, 그 지성과 감성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하고, 그렇게 변화될 수 있다는 것도 뜻한다. 밀이 그런 사람이었기에 해리엇을 만나 자신의 생각을 더 쭉쭉 뻗어나갈 수 있었지만, 만약 그렇지 않은 다른 보통의 남자들이었다면, 해리엇 백명하고 우정을 지속해봤자 자기 사고의 테두리안에 머물렀을 것이다. 뭐, 그런 남자라면 해리엇이 우정을 지속할 리도 없었겠지만.



해리엇의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20년이나 밀과 우정을 지속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남편인 자신이 아니라 다른 남자와 생각과 사상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의견을 교환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해리엇은 남편이 있으면서 다른 남자와 우정을 지속하는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역시나 값싼 호기심인걸까? 나는 이들이 그 우정을 지속했던 그 시간동안 닥쳐왔을 감정의 변화가 너무 궁금하고 그 얘기들을 들어보고 싶다. 아울러 그 시간동안 유지했던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그들은 이십년동안 '우정'을 지속했다 말하지만, 해리엇의 남편이 죽고나서는 결혼을 하잖아. 결혼은 십년도 채 안돼 해리엇의 사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밀이 자유론에 그런 어마어마한 헌사를 쓸만큼, 그렇게나 지성을 나누는 우정(혹은 사랑)관계를 가진 사람의 마음 상태는 어떤 것이었을지도 궁금하다. 나는 지성을 나누는 파트너가 섹스 파트너 구하기보다 이천배쯤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겠지만, 내 경우에는 섹스 없이 살아도 삶에 별 지장은 없지만 지성을 나누는 파트너가 없으면 너무 외로울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밀은 나름의 행복을 충실히 쌓으면서 살았던 게 아닐까.... 라고 혼자 너무 멀리 나가고 있나.......




지성을 가진 여성을 알아본 것처럼, 밀은, 우정에 대해서도 인지한다. 어쩌면 이런 것들을 인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고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했던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밀이 그리는 이상적인 부부관계는 "높은 수준의 능력과 소질을 비슷하게 갖추고 그 생각과 지향하는 목표가 똑같은 두 사람이 상대방에 대해 일정 정도 비교 우위를 지닌 까닭에 서로를 바라보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특혜를 누릴 뿐 아니라 자기 발전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지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도받는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는 상태이다. (p.104)



밀이 꿈꾸는 이상적인 결혼생활은 자유로운 두 영혼이 결합하여 서로에게 배우고 서로 발전하도록 보살피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잠자리에서부터 재산관리에 이르는 결혼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일방적인 권력행사에 위한 억압, 복종, 희생이 추방되고 상호합의를 기반으로 한 신뢰, 배려, 호혜가 통용되는 관계를 추구한다. 이렇게 완벽한 평생의 반려자와 맺는 관계는 아마 최고 수준의 우정일 것이다. (p.106-107)




이렇게 우정과 평생의 반려, 그리고 결혼까지 그는 오래 생각하고 들여다본 것 같지만 '비혼 여성에 대해 철저하게 무심하다(p.108)'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밀이 19세기에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한 이상, 그에게 완벽한 개념남이 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밀은 아마 자신이 가진 한도 내에서 생각할 수 있는 한껏 생각하고 할 수 있는 한껏 말했을 것이다. 그는 애초에 열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남자였고, 그래서 해리엇을 만나 열릴 수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 남편과 아내 역시 그런 평등한 관계여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가장 좋은 반려가 어떤 건지도 알았지만, 그러나 비혼에 대해서는 무심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걸까.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관심을 가진 분야에 대해서만 열렬히 생각하게 될거다. 밀의 주변에 해리엇이 있어서 밀이 자유론과 여성의 종속을 저술하고 참정권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면, 그가 좀 더 나아가기 위해서, 그러니까 비혼에 관심을 갖기 위해서는, 아마도 또 그의 사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다른 비혼 여성이 있어야 했을 수도 있다. 아, 비혼 여성은 그런 삶을 살고 있어? 하고 그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그가 '더' 개념남이 되기 위해서는 또다른 조력자가 필요했던게 아닐까. 우리가 볼 수 있는 데까지 보고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더라도 분명 부족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가급적 오류를 잡아내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만, 시간이 지나야 드러나는 오류도 있으니까.



밀의 비혼 여성에 대한 관심의 한계, 여성관의 한계 같은 걸 잡아낼 수 있는 것도 그 시기를 지난 후에야 가능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때문에 밀은 '후대의 비평가들에게 표적이 되었(p.109)'다는데, 후대의 비평가들이 할 일이 바로 그런 거 아닐까. 앞서 나왔던 생각들의 오류를 잡아내고 보완해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것.



밀에 대한 부분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밀의 삶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본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그의 삶이 즐거움의 연속은 아니었겠지만, 그가 존경하는 여성이 있었다는 것, 그녀가 그의 생각과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게된 건 이 책을 읽으며 얻은 큰 수확이다.


메리 울스턴트래프트, 존 스튜어트 밀, 시몬 드 보부아르, 베티 프리단,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을 읽었고 아우구스트 베벨, 프리드리히 엥겔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뤼스 이리가라이, 주디스 버틀러가 남았다.





그가 말한 자유는 남성과 여성을 아우르는 ‘인간‘의 자유였다. 밀은 법조항 속에서 ‘사람‘으로 통용되던 단어인 ‘man‘을 중립적인 단어 ‘person‘으로 교체할 것을 주장했다. ‘인간‘이라 써놓고 ‘남성‘으로 읽는 구습을 정면에서 비판한 드문 남성지식인이었다. - P88

밀은 세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고전어, 역사, 문학, 철학, 경제학을 배웠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일종의 영재교육을 받은 셈이다. 이는 당연히 밀 개인의 놀라운 재능에 대한 주석이지만, 나아가 밀의 시대가 누렸던 비옥한 지적 풍토를 암시한다. - P88

유망한 저술가들과 토론회를 주도하면서 런던 지식인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할 무렵, 밀은 심한 신경쇠약을 앓게 된다. 이때 무기력과 우울을 문학의 힘으로 극복했다는 일화는 『자서전』의 가장 유명한 대목 중 하나인데, 그는 이 시기가 인생 최대의 위기였으며 문학을 통해 ‘감정‘에 눈뜨지 못했더라면 이 위기를 넘길 수 없었으리라고 술회한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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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7-26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 멋쟁이... 밀 잘 써... <자유론> 밀나좋음...

다락방 2019-07-26 12:43   좋아요 0 | URL
나 자유론 있지롱~~~~ ㅋㅋㅋㅋㅋ

syo 2019-07-26 13:05   좋아요 0 | URL
읽었나요? 읽었나요? 읽었나요?

다락방 2019-07-26 13:36   좋아요 0 | URL
안읽었다!!!!!!!!!!!!!!!!!!!!!!!!!!!!!왜!!!!!!!!!!!!!!!!!!!!!!!!!!!!!!!!!!!!!!!!!!(내가 안읽고 내가 분노한다)

잠자냥 2019-07-26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존 스튜어트 밀에게 저런 별과도 같은 존재가 있었군요. 처음 알게된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도 늘 읽기만 해야지 했던 밀의 <자유론>과 <여성의 종속>을 이 참에 꼭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감사한 포스팅.

그나저나 지성 파트너가 섹스 파트너 구하기보다 이천배쯤 어렵다고 생각한다는 다락방 님 말씀에 저도 이천배 동감합니다! (혼자 너무 멀리 나간 이야기 늘 그렇듯 재밌어요 ㅋㅋㅋㅋㅋ)

그럼 즐거운 불금토일 되시길.

다락방 2019-07-26 16:43   좋아요 1 | URL
우앙. 제가 긴 포스팅을 한 보람이 느껴지는 댓글이네요.

저도 밀에 대해 알게된 게 너무 재미있고 좋았어요. 책을 읽는 일은 그래서 좋은 것 같아요. 몰랐던 것을 알게 되잖아요. 저도 사두었지만 안읽은 책을 일단 어디있나 찾아봐야겠어요. 하하하하. 분명히 자유론 샀는데... 아하하하. 아닌가? 모르겠다. ㅋㅋㅋㅋㅋ

저는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다 보니까 자꾸 멀리 멀리 가게 되는데, 이렇듯 재미있게 읽어주시니 기쁩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글쓰기는 계속됩니다.


잠자냥 님도 즐거운 불금토일 되세요. 우리는 곧 또 만납시다. 잠자냥 님의 글로 그리고 제 글로.
:)

공쟝쟝 2019-08-03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론은 실제로 해리엇이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ㅠㅠ 아 그런 여성들 진짜 천지 삐까리겠죠?? 맴찢....
밀과 해리엇의 ‘여성의 종속’ 이 될때까지 !!!

livebeautifully0707 2020-01-30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리엇처럼 능력이 있어도 빛을 발하지못한 여성들이 얼마나 많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