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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고 저자는 처음부터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모더니즘’에 대한 시기 구분조차 모르는 내게, 20세기 초반의 예술의 유파, 운동, 용어들은 혼란 그 자체였다. 아니, 대부분 1차 세계 대전을 전후의 시기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 의아했을 정도이다.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은 바로 19세기 초반에 집중되고 있었고, 그 이후의 미술사는 세 번째 이야기를 예고하고 있었다. 아직 이해가 부족하지만, 내가 볼 수 있는 한에서 충분히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일단, 익히 한 번쯤을 들어봄직한 용어들-야수주의, 입체주의, 순수추상, 절대주의, 표현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과 무척이나 생소한 용어-신즉물주의, 구축주의, 데스테일, 바우하우스-에 대한 호기심과 흥분으로 책에 대한 기대감에 들떴다. 지금껏 여러 번 예술 분야의 책을 접하면서 흔히 미술사조의 개념들을 몰라 애가 탔던 경험이 많다. 용어의 난해함으로 그저 그림 자체를 익혀 두는 것에 만족하게 하였다. 그러한 갈증에도 불구하고 애써 찾아보는 노력이 부족했던 내게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은 안성맞춤이었다. 여러 사조들의 나열 속 그 관계와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책을 가뿐하게 펼칠 수 있었다.

 

책을 읽다보니, 산업화로 인한 급격한 사회변화의 다양한 양태가 미술, 예술 분야에서 훨씬 급진적이고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었다. 때론 혼란의 시기 그 자체처럼, 머릿속 역시 혼란스러웠지만, ‘미술’이란 것 또한 하나의 역사적 흐름으로 바라보게 되니, 무척 흥미진진했다. 작용과 반작용, 양극단의 대립과 융합 등등이 복합적으로 일어나면서 정말로 다양한 사조, 유파, 운동들이 뒤엉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특히, ‘부조리와 무의미의 예술’ 다다이즘과 ‘현실 속의 경이로움’ 초현실주의에 대해 비로소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기존의 알고 있던 용어 속 그 의미와 그들이 생각을 읽다보니, 20세기로 시간 여행을 떠난 기분에 젖었다. 아직은 면밀하게 12개의 유파를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예술이 아무리 예술 그 자체를 추구하려 발버둥을 쳐도 ‘인간’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 어떤 이상의 추구에도 불구하고 12개의 여러 유파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흥했다가도 순간 사그라지는 것을 보니, 뭔지 모를 ‘희열’이 느껴졌다.

 

아직은 무척이나 희미한 불빛을 감지한 정도다. 어느 순간에는 그 빛조차 의문스럽고 혼란스럽다. 특히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음~’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한 순간 ‘뭐지?’ 하면서 물음표가 뒤따르며 아리송해진다. 여전히 문외한인 내게 버거울 정도로 학문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마지막 장을 덮으며 뿌듯함이 자리하였다. 다만, ‘기분 좋은’ 숙제를 해야 할 듯하다. <서양미술사>의 ‘고전예술’편도 만나보고, 모더니즘 이후의 이야기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좀 더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반복해서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숙제들이 훨씬 풍성한 가을을 약속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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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 - 생생한 사진으로 만나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잔혹사
이재갑 글.사진 / 살림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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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수시로 마음속을 어지럽히는 일련의 뉴스들은 지난 과거의 역사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몇 달 전 일본 지자체(구마노시)가 기슈 광산에 강제 동원되었던 조선인 희생자의 추모비 부지에 세금을 부과했다는 황당한 뉴스를 접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인접한 영국인 묘지(영국인 포로 16명)는 사적으로 인정해 관리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안의 무엇인가가 불쑥 솟구쳐 올라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 인식이 어떤 자극에 의해 순간적 분노의 표출은 아닌지, 진정 스스로 지난 과거, 그 쓰라린 역사와 대면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회피하고 외면하고 방관하다가 불현 듯 요란만 떨었던 것은 아닌지, <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은 걷다>를 펼쳐들며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어뜨리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더욱더 우리는 그 100년의 역사를 돌아봐야했다. 지난 100년의 기억, 그 기억은 슬프고 아린 상처다. 그런데 ‘일본’이란 공간에서 그 역사의 흔적을 찾고 있다니, 시선이 절로 갔다. 그 역사의 현장 속으로 성큼 성큼 걸어가야 할 이유가 우리에게 분명히 있었다.

 

미처 알지 못했던 많은 역사적 사실들과 그 현장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지난 몇 해 전부터 일본의 여러 도시-후쿠오카, 나가사키, 오사카, 히로시마, 오키나와-를 돌며 조선인 강제징용과 그와 관련한 건축물들, 그 잔재들-군부대 진지, 탄광, 광업소, 댐, 해저탄광 비행장 등등-을 사진에 담고 있다고 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여러 작업들이라지만 이 한 권의 책이 갖는 의미와 가치는 오롯이 다가왔다.

 

많은 생각들이 스쳤다. 역사의 여러 편린들이 아로 새겨진 현장은 단지 우리만의 쓰라린 상처만은 아니었다. 전쟁의 야만성, 그 잔혹함, 무자비함과도 마주해야 했고,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과 인간됨을 지키려 노력했던 많은 이들의 이야기에 가슴속이 뜨거워졌다.

 

역사를 통해 ‘지금, 바로 여기’를 직시하게 된다. 책을 읽는 내내 강제 동원되어 핍박 받고 착취당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현재 진행형이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분노한다. 지난 역사에. 하지만 우리는 비슷한 이유로 이 땅의 다른 이들을 멸시하고 차별하지는 않는지, 그들의 분노와 아우성을 외면하면서 우리가 어찌 당당할 수 있을지, 가슴 속이 왠지 모르게 씁쓸해지고 또한 숙연해졌다.

 

‘보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만 보일 뿐’(219)이라는 말이 깊숙이 파고들어 귓가에 맴돈다. 우리는 역사를 바로 바라봐야한다. 물론 그 시선 또한 바로 서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단지 그 역사를 통해 분노를 확대 재생산하는 것 또한 그릇된 역사 인식일 것이다. 저자가 밝히듯, 대립과 갈등이 아닌 상호 공존을 위한 해법은 분명 일본 잔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일 것이다. 우리 또한 올바로 알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로 우리, 각 개인에게 있어 역사가 무엇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숙고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진정한 반성과 용서, 화해’라는 화두를 제시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와 미래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끝으로 바로 보려고 노력하는 수많은 이들의 노력에 감사와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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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미술 - 르네상스에서 21세기 아시아까지 미술의 탄생과 역사
KBS [다큐멘터리 미술] 제작팀.이성휘 지음 / 예담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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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그저 고고하고 도도한 것, 속칭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일 뿐이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 미술>을 통해 너무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의 세계라는 편견이 와장창 깨져버리는 순간을 만났다. 특히, 책은 터놓고 말한다. ‘미술은 돈’이라고. 여기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소리지? 하나의 이미지만으로 함축적이고 고차원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높은 성 아니었던가? 그런데 ‘돈?’ 의문 다음엔 곧장 궁금증이 일었다. 호기심이 발동하면서 ’미술‘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하게 되었다.

 

처음엔 무척 낯선 구성에 놀랐다. 그 유명한 ‘모나리자’를 이야기하면서 최근 광고에서 많이 듣게 되는 ‘메디치가’의 예술 후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단지 하나의 작품과 짤막한 그림 이야기에 국한하지 않고 있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와 그의 작품 세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술의 시기별 분류가 ‘도시’라는 공간의 이동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정치, 경제,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었던 ‘예술 수도(피렌체-파리-뉴욕-런던-베이징)’ 중심의 횡적 구성이 가미되어 미술사의 흐름이 훨씬 입체적으로 다가와 쉽게 이해되었다. 미술과 그 시대, 그 공간의 역사과 문화, 정치가 어우러져 더 풍성하고 다채롭게 다가와,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다.

 

그렇게 공간과 시간이 예술의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과정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돈’과 미술의 관계엔 물음표가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에 <도시의 승리>라는 책을 펼치게 되었는데, 첫 머리에 “왜 그토록 많은 예술 운동들이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도시들에서만 그렇게 빨리 일어났을까?(15쪽)하고 묻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다큐멘터리 미술>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핵심이 정확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예술은 고고한 것이라는 편견에 갇혀, 스스로 그 본질, 가치에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아직도 그 천문학적인 거래액엔 입이 ‘떡’ 벌어지고, 여전히 난해함에 고개를 갸우뚱하고, 깊은 감흥은 멀기만 하다. 하지만 이 책을 계기로 우리가 예술에 대해 왜 떠들고, 그 가치와 의미를 생각하는지 조금은 눈을 뜰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 미술>은 시공간 속, 예술, 미술사를 좀 더 쉽게 들려주면서, 그를 통해 자본과 권력, 그리고 시대에 대한 깊은 고뇌와 통찰, 문제 제기와 담론의 확장, 갈등의 증폭과 반발 등등 다분히 인간적인 면모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미술이라는 것이 우리는 비쳐 주는 거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듯, 훨씬 가까워진 느낌이다.

이제 우리는 미술이 솔직 담백하게 드러낸 이야기, 우리의 모습에 때론 격분하고 때론 위로받으면 되지 않을까? 미술이 불러일으키는 우리 안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우리의 삶이 훨씬 ‘괜찮게’ 다가오지 않을까? 맨 얼굴의 미술,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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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추석을 맞아 더욱 풍성하게 다가오는 9월, 

이번에 과연 어떤 책들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을지,  

기대감에 들떠, 책나들이를 떠나본다.  

 여전히 생각했던 것보다는 출간된 책 자체가 적은 편이지만, 

알찬 내용으로 눈길을 끄는 책이 있어, 9월 읽고 싶은 책으로 

두 권의 책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검은 미술관>을 선정해본다.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예전에 민화관련 책을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이 책은 어떤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을지, 기대된다. 정병모 교수의 민화읽기 시리지 1권이라고 하니, 왠지 더 풍성하고 다채롭게 민화의 세계를 펼쳐줄 것 같다.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만나보고 싶어진다.  

 

  

 

  

검은 미술관? 제목이 무척 이색적이다. 그런데 책의 기획이 더욱 흥미롭다.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짚고 있다니, 과연 어떤 문제의식을 드러내며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지, 그 그림들의 속사정을 들어보고 싶다. 그 속에서 우리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의 실마리를 찾고, 위로받게 될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 왜 미술이 던지는 그 불편한 질문들과 마주하고 싶어질까? 사색의 계절, 가을과 절묘하게 어울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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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승리 - 도시는 어떻게 인간을 더 풍요롭고 더 행복하게 만들었나?
에드워드 글레이저 지음, 이진원 옮김 / 해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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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승리? 과연 도시는 승리했을까? 그렇다면 도시가 낳은 많은 문제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우리의 현실을 고려해도 도시가 갖는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턱없이 비싼 물가, 주택난, 환경오염과 교통 등의 일상생활 전반에서 우리는 도시의 풍요와 행복을 누리고 있을까? 그렇다면 저자는 왜, 어떤 근거로 도시는 ‘궁극적으로 승리한다!’고 당당하게 외치는 것일까? 기존 우리가 겪는 여러 고통과 상반된 도시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무척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그리고 내가 사는 이 공간, 그리고 그 매커니즘에 대한 호기심도 이 책 <도시의 승리>로 이끌었다.



저자는 ‘도시’라는 물리적 공간을 유기체로 바라보듯, 도시의 흥망성쇠를 논하고 있다. 또한 여러 도시의 사례를 들면서 그의 주장을 더욱 견고히 하고 있었다. 한편, 고도 제한 등의 여러 규제를 풀어 개발 건설을 옹호, 아니 찬양하는 수준이었다. 도시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서는 도시로의 집중과 선택-고밀도 도시-가 훨씬 더 푸른 미래를 보장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이색적이었다. 환경과 도시를 ‘교통’이라는 요소만을 고려한 듯한 그의 일관된 주장, 더 나아가 아스팔트가 더 친환경적이라는 논지에는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하지만 가장 눈길을 끌고, 흥미로웠던 것은 바로 ‘인적 자본은 성공하는 도시의 핵심’이라는 주장이었다. 사회적 동물로써의 인간은 상호 능력을 보완, 경쟁함으로써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되고, 이러한 학습의 집중과 선택은 ‘도시’라는 공간에서 더욱 극대화된다는 ‘지식을 확산시키는 도시’의 긍정적 측면에 크게 마음이 움직였다. 또한 도시가 갖고 있는 여러 문제들, 특히 도시의 공동화 현상. 스프롤 현상에 대한 여러 대안, 나름의 해법을 찾을 수 있었다.

 

저자의 논리에 기대어 직접 확인하는 과정은 결코 만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때론 기존의 생각들과 수시로 부딪히며 더디게 읽혔다. 그리고 저자의 논지에 반박하고 싶은 많은 생각들과 어느 정도 타당한 논리, 수긍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주장이 팽팽한 긴장감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책을 읽는 동안,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도시의 진정한 가치, 의미에 대해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으로써의 도시가 갖는 장점, 풍요와 행복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물론 도시의 문화적 풍요로움에 이끌려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부제처럼 ‘진정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고 더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의혹이 고개를 들었다. 진정 도시의 승리를 외치는 그의 주장이 우리를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까? 여전히 피부로 느껴지는 산재한 많은 문제들이 저자의 낙관적 전망보다 훨씬 커 미심적은 부분도 많다. 그럼에도 도시가 인간의 집적 장소로 기능하면서 아이디어가 샘솟고, -디지털의 발달에도- 사람과 사람의 상호 교류(직접 대면)를 통해 놀라운 창조성과 혁신을 이룬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도시의 풍요와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는 도시를 떠날 수 없는 유일한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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