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의 몸 - 일의 흔적까지 자신이 된 이들에 대하여
희정 글, 최형락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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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거실 창밖에 밧줄에 매달린 분이 나타난 적이 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허공에 매달린 사람을 거실에서 마주하니 놀라움이 먼저였다. 도심 빌딩 외벽에서 작업을 하거나 청소를 하는 분들을 올려다볼 때마다 ‘불가능’이란 단어가 떠오르곤 했다. 노력하면 가능할 듯싶은 일이 있고,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아 보이는 일이 있다. 존경과 두려운 마음으로 작업 광경을 바라본 적이 많다. 그래서 12명의 베테랑 중 로프공 김영탁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게 느껴졌다. 고소공포증까지는 아니어도 현기증이 나서 유리가 바닥으로 된 관광지의 전망대나 출렁다리도 건너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목숨을 건 직장에서 일하는 로프공 김영탁은 “베테랑은 내 안전 내가 지키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기술은 왜 특정한 곳에만 쓰이는지. 왜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는 일에 진심인 베테랑이 이를 악물고 지켜야 하는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일까. 파리바게뜨, 베스킨라빈스 등 SPC 계열사의 음식을 먹지 않은 지 오래다. 집 근처 프랜차이즈 빵집을 지날 때마다 목이 멘다. 산업재해를 지적하기 위해 쓴 책은 아니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베테랑들이 처한 노동환경에는 할 말이 많아진다. 작업의 위험성 여부를 떠나일하는 모든 사람, 즉 노동자의 권리가 바로 서지 않으면 행복한 세상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세공사, 조리사, 로프공, 어부, 조산사, 안마사, 마필관리사, 세신사, 수어통역사, 일러스트레이터, 배우, 식자공 등 열두 가지 분야의 베테랑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론과 추상의 세계가 아니라 경험과 실제다. 온몸으로 생을 밀어 온 베테랑들의 인터뷰가 주는 감동은 어떤 철학자들의 개념과 다양한 주장보다 숭고함이 느껴진다. 베테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쉽고 간명하게 자기 삶의 철학을 담아낸 한마디가 겸손하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프로페셔널 혹은 전문가라는 호칭보다 베테랑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와 깊이는 남다르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사람들에게 감탄과 공감을 얻은 이유는 평범한 이웃의 이야기이며 곧 우리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친근함 때문이었다.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과 보람은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특권, 선민의식과 구별된다.

삶의 달인, 인생의 베테랑 아닌 사람이 있을까.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스토리를 갖고 있다. 어느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고 자기 삶의 베테랑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이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귀하고 소중하다.

“베테랑은 내가 아니라 우리가 일한다는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 - 세공사 김세모

“베테랑은 자존심 지키며 일하는 사람” - 조리사 하영숙

“베테랑은 내 안전 내가 지키는 사람” - 로프공 김영탁

“베테랑은 묵묵히 제 일을 하는 사람” - 어부 박명순, 염순애

“베테랑은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 - 조산사 김수진

“베테랑은 자기 일에 모르는 것은 없는 사람” - 안마사 최금숙

“베테랑은 말을 이해하는 사람” - 마필관리사 성상현

“베테랑은 내 몸 다치지 않게 일하는 사람” - 세신사 조윤주

“베테랑은 준비를 열심히 하는 사람” - 수어통역사 장진석

“베테랑은 내가 하는 일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 - 일러스트레이터, 전시기획자 전포롱

“베테랑은 나에게 올 미래를 적극적으로 상상하며 사는 사람” - 배우 황은후

“베테랑은 수많은 활자들 사이에서 길 잃지 않는 사람” - 식자공 권용국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 위태롭지 않은 인생도 없다. 알 수 없는 미래를 확신하며 자기 신념이 뚜렷한 사람들이 오히려 두렵다. 그러나 베테랑들은 묵묵히 일하며 자기 삶을 겸손하게 받아들인 분들이다. 온몸으로 살아낸 삶의 흔적과 결과로 그들을 베테랑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가을비 갠 다음 날 맑고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한가로운 날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이 평화와 안정 뒤에는 보이지 않는 노력과 투쟁의 흔적이 숨어 있다. 아무 일도 없는 날의 소중함이여. 다만 그냥 이렇게 사는 거죠, 라고 따라 해본다.

베테랑들은 참 이 말을 좋아했다. “그냥 하는 거죠.” 다만 열심히. - 프롤로그,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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