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세계 신화 여행 - 오늘날 세상을 만든 신화 속 상상력
이인식 지음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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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와 코스모스. 혼돈과 질서는 우리 인생처럼 경계가 모호합니다. 평온한 일상이 질서정연하고 안정된 삶이라면 불안하고 흔들리는 미래는 혼돈일 겁니다. 카오스는 가이아를, 다시 가이아는 타드타로스와 닉스와 헤메라를....카이아와 우라노스는 12명의 티탄과 크로노스를...크로노스와 레아는 헤라, 데메테르, 헤스티아, 하데스, 포세이돈, 제우스를...제우스는 수많은...

이 책으로 세계 신화를 처음 시작하는 건 어떠냐고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편적인 사건과 사고, 신들의 에피소드는 훗날 그려진 명화를 설명하고 뒤이어 과학적 사실과 현실의 문제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신화 본래의 맛과 멋과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다만 신화는 어차피 모두 허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신화가 주는 의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가 반영된 인류의 무지와 공포와 지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듯 싶습니다. 판테온pantheon에는 12명의 신이 있습니다. 제우스(최고의 신, 신과 인간의 아버지), 헤라(결혼), 아테나(지혜, 예술, 정의), 아폴론(빛, 음악), 포세이돈(바다), 아르테미스(술, 사냥), 아프로디테(미, 사랑), 헤파이스토스(대장장이), 데메테르(농업), 헤르메스(상업), 아레스(전쟁), 헤스티아(가정). 이들은 알 수 없는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인격화한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이해할 수 없는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합리화하는데 필요했을 거라 짐작합니다. 대표적인 그리스와 로마 신화 뿐 아니라 북유럽, 인도의 신화까지 정리해서 소개한 과학자의 수고로움에 경의를 보냅니다. 다만 신화와 관련된 과학적 사실과 현실의 이야기는 ‘통섭’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신화와 종교라는 전혀 다른 영역을 뒤섞어 독자들에게 혼란을 주는 부분들이 많아 아쉬웠습니다. 모든 걸 뒤섞는 게 통합이나 통섭적 사고가 아니라는 걸 모를 리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어쨌든 이 책은 서른네 가지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구성이지만 중복출연하는 신들이 있으니 서로 연결 고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틈틈이 한 편씩 읽어도 좋은 책입니다. 신화를 많이 읽었다면 과학적 해석에 흥미를, 읽지 않았다면 신화 이야기 자체로도 충분히 재밌게 읽을 수 있습니다. 모임에서는 인어, 바벨탑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동성애, 임사체험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주제는 신화를 떠나 각자의 경험과 생각을 나눴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든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토피아와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변치 않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 너무 복잡한 이해관계, 서로 다른 삶의 목적과 방향으로 매일매일 부딪치면서도 함께 사는 사람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어떤 곳일까요.

이인식은 “세속적인 천년왕국주의는 여러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로버트 오언Robert Owen(1771~1858)의 유토피아 사회주의, 카를 마르크스Karl Marx(1818~1883)의 공산주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의 나치주의가 대표적인 사례이다.”(548쪽)라고 황당한 주장을 하고 세속적 이념과 정치경제적 지향점은 천년왕국주의의 여러 형태가 아닙니다. 이 책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유토피아는 신들이 꿈꾼 적도 없고 인간들이 실현할 가능성도 없어 보입니다. 부정적 현실 인식이 아니라 지금-여기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꿈꿀 권리, 현실적 희망을 놓지 않는 용기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멀리서 오프 모임에 참석해 주신 회원님이 참석하신 모든 분께 선물해 주신 캘리그라피 필통이나 직접 육포를 만들어오신 사회자님의 정성을 감탄하며 사람들이 가진 따뜻함, 이타심에 다시 한번 놀라움을 느낌니다. 저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로 빛나는 인간은 또 그만큼의 슬픔과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이 부딪치는 자리, 오로지 단 한 권의 책으로 연결된 분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어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 또 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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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지배 - 디지털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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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한병철의 글을 읽었습니다. 아포리즘처럼 한문장씩 꾹꾹 눌러쓴 책이니 얇은 분량이라고 만만하게 볼 책은 아닙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거리가 멀고 행간의 의미가 채워지지 않으면 앞으로 나가기 힘이 듭니다. “자유와 감시가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지배는 완성된다.”라는 문장이 책 전체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정보화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부제는 이 책이 현대인이 겪는 불안과 위기의식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그 이유를 탐구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경제와 정치, 아니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한몸으로 움직입니다. 어울리지 않는 커플처럼 어색하지만 헤어질 수 없으니 불편한 동거가 계속됩니다. 한병철은 이를 “정보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의 권력 기술을 터득한다.”라고 지적합니다. 여전히 신자유주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몇몇 정치인이나 경제학자들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정보’와 ‘데이터’로 요약되는 미래 산업의 화두가 우리 삶-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점검하는 생활철학이자 사회학적 고찰입니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말과 사물』, 구스타프 르봉의 『군중심리』,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플라톤의 『정치학』 등 100쪽에 불과한 분량의 글에 사회학의 고전과 철학적 담론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발터벤야민이나 조지 오웰, 올더스 헉슬리까지 다양한 고전과 인문학적 교양이 진입장벽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연구자들의 특성상 일반대중을 향한 말과 글의 난이도 조절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실패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문턱일텐데 용어와 개념을 친절하게 풀어 설명하거나 쉬운 말로 바꿔 쓰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나 지나친 친절은 독서의 깊이와 확장성을 가로막을 수 있으니 선택은 독자의 몫이라고 하겠습니다.

정보체제, 인포크라시, 소통행위의 종말, 디지털 합리성, 진실의 위기 등 다섯 가지 주제로 정밀하게 써내려간 현대사회의 자화상을 통해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것 또한 독자의 몫입니다. 문제를 인식하고 자각하는 역할로 철학자와 사회학자들의 역할은 충분합니다. 저는 해법과 대안까지 한세트로 구성된 완벽한 책을 원하지 않습니다. 현실에 뛰어든 정치, 경제, 사회학 연구자들의 면면을 우리는 수없이 경험했고 지금도 지켜보고 있습니다. 학문적 이론이 어떻게 현실에 실현될 수 있는지, 그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 무수한 시행착오를 모르지 않습니다. 특히 ‘교육’ 분야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들어 육아, 교육 전문가로 자처하며 특단의 대책과 기막힌 해법을 내놓습니다. 추종자가 생기고 반대를 위한 반대자도 나섭니다. 장하준이나 한병철처럼 영어나 독일어로 쓴 글들을 통해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요.

미성숙하며 조작 가능한 ‘투표 가축’이라는 표현은 양극화를 부추기고 담론 분위기에 독극물을 뿌린다는 저주에 가까운 우려가 뼈아프게 느껴집니다. 생각이 다른 주장을 ‘가짜 뉴스’로 치부하는 양극단의 진영 논리도 어이 없지만 실제 사실관계를 따지기 보다 자기 생각과 감정에 맞는 정보와 데이터만 수용하는 필터 버블과 디지털 동굴이 바로 지금 우리가 겪는 소통행위의 종말 현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점점 더 넘치는 정보의 감옥에 갇혀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는 대중은 그 정보 자체의 출처와 관점을 비판적으로 살피지 않습니다. 미성숙한 어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바라보는 한병철, 아니 우리들의 시선은 어떤가요. 그들은 친구, 연인, 가족, 이웃, 동료들입니다. 아니, 또 다른 ‘나’의 모습입니다.

트럼프 당선이 촉발한 ‘대안 사실들alternative facts’은 서사적 연속성과 정합성 결여, 탈이데올로기화된 정보체제를 의미합니다. 가짜 뉴스를 대안 사실이라뇨. 정말 놀라운 발상입니다. 어느 초등학교 교사의 극단 선택이 종북주사파가 추진한 대한민국 붕괴 시나리오라는 발언이 실제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의 발언일까요. 아니면 가짜 뉴스일까요.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 등 미국 사회에 어둔 그림자를 드리운 트럼프 당선의 의미를 이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없을까요.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인류는 실수를 반복하는 법입니다. 한병철이 들고나온 민주주의의 위기는 단순히 정보를 지배하는 현대사회의 시스템을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길들여지되 길들여지는 줄 모르고 판옵티콘에 갇혀 자유를 외치는 죄수같은 형국을 인식하지 못하는 현대인을 향한 경종입니다. 딸랑딸랑~ 여러분 정신차리세요~

모임에 참석하신 분들이 대부분 진실의 위기가 인상적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로운 가치 허무주의가 자리잡는 현실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공론장에서 대화와 타협을 시도하고 합리적 토론이 이어질 수 없다면 ‘정보’라는 이름으로 쇠뇌시키는 미확인 카톡들, 유튜버의 뇌피셜들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거대한 구조적 모순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세상 전부로 착각하는 우리는 정보의 집에 갇혀 사는 ‘소비 가축’은 아닐까요. 탈정치화는 새로운 미성숙을 만들고 디지털 커뮤니티는 하나의 상품commodity으로 전락한 현실에 대한 한병철의 비판이 정치적 해위 능력 없음을 자인해야 하는 우리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간만에 귓가에 울리는 매미 소리가 여름이야~ 라고 외치는 듯 싶습니다.

데이터주의는 이데올로기 없는 전체주의다. -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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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 소중한 것을 지키는 삶에 대하여
임승수 지음 / 수오서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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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란 녀석은 자신을 목격한 이에게 어김없이, 그리고 단호하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그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에서 나는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 53쪽

잠시 비가 그치고 나면 사람들은 젖은 마음을 말리려 바람을 햇빛과 바람을 찾는다.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은 돈이 없어도 누구나 즐길 수 있으니 다행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숨 쉬는 공기까지 비용을 지불한다. 여름에 시원한 바람, 겨울에 따뜻한 온기, 미세 먼지 걱정 없는 실내 공기는 공짜가 아니다.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을 나열하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돈의 액수가 행복의 크기, 인생의 만족감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왕과 귀족이 다스리던 시대를 지나 부르주아가 탄생하고 ‘혁명’을 통해 공화정이 들어섰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놀랍게도 ‘개나 소나’ 한 표를 행사하는 국민주권 시대, 절차상 완벽한 민주주의 시대를 살게 됐다. 대의민주주의를 표방한 현대 국가 체제를 감히 부정하는 사람은 없지만 플라톤의 염려대로 대중들의 열망은 중우 정치 혹은 포퓰리즘으로 비난받고 거대한 ‘이권 카르텔’, 이를테면 법조 카르텔에 의해 입법, 사법, 행정의 견제장치가 무너진 과두 정치가 대한민국의 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심각한 현상은 국민 대다수가 이를 용인하며 현실을 변화시키는데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 계층 상승의 욕망에만 몰입한다는 사실이다. 자존심이 세지만 자존감이 낮을 때 벌어지는 우울한 현실을 우리는 매일 목도하며 산다. 지긋지긋한 ‘을’들의 전쟁 말이다.

경제 체제로서 자본주의와 정치 제도로서 민주주의는 성격이 전혀 다른 부부처럼 오랫동안 동거 중이다. 정부가 라면값에 개입하는 건 공산주의다. 자유 시장경제 체제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위다. 무상급식, 의료보험, 노인 연금 같은 모든 복지 제도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다. 어떤 ‘이즘-ism’도 사람보다 소중한 가치일 수 없다. 무엇을 표방하는 정부든 인간다움을 잃는다면 민주주의는 반드시 책임을 묻는다. 서로 다른 생각을 편견없이 수용하며 동의할 순 없어도 인정하는 태도를 잃는다면 그것이 곧 독재와 파시즘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본주의는 실체가 없다. 수없이 많은 변화를 거쳤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며 다듬고 고쳐가는 중이다. 수정자본주의는 시대정신을 담아내고 민주적 가치를 받아들여 계속해서 변해가는 유기체와 같다. 정치, 즉 국민들의 삶과 삶의 가치에 따라 놀랄만큼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현실에 적용하기도 한다. 사회민주주의가 보편화된 유럽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복지를 부러워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쓸데없는 이념 논쟁, 이를테면 종북몰이와 수구보수 논쟁 같은 소모적 진영 논리에 갇혀 있는 건 아닌가. 전임 대통령이나 과반의석을 차지한 야당을 반국가세력으로 몰고 전직 대통령을 간첩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공직에 임명되는 현실을 우리들의 ‘상식’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들에게 정권을 넘겨준 이들의 면면과 실수 또한 작금의 현실에 버금가는 부피와 무게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 어느 쪽이든 거대한 이권 카르텔, 기득권에 의한 과두 정치라는 사실을 국민들은 알고도 외면하는 것일까. 총선과 대선마다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이제 그들의 목소리에도 귀기울여 보자. 세상을 흑백논리로 구분할 수는 없지 않은가. 또 다른 대안이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2008)으로 반향을 일으켰던 임승수는 페미니스트 아내와 함께 행복한 사회주의자로 살고 있다.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는 개인적인 성향상 개인적인 이야기, 내밀한 고백은 대체로 불편하다. 소설가와 시인은 작품으로, 논픽션 작가들은 이성의 사유로 기능할 뿐이다. 개인으로서 그들의 삶이 궁금하지 않은 건 내 성향일 수 있으나 적어도 책을 통해 만나는 그들을 굳이 현실적 개인으로서 그 면면을 살피고 싶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로 사는 임승수의 생활이 궁금해 책장을 넘겼다.

글을 쓰고 강의하는 사람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에 고개를 끄덕였고, 명문대 공대 출신으로 안락하고 일반적인 삶을 거부한 사람의 행복과 자유에 동의했다. 사람들은 과격하고 폭력적인 ‘혁명’과 ‘전쟁’을 떠올리지 않고 냉정하게 사회주의를 들여다 본 적이 있이 있을까.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같이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데 필요한 아이디어를 빌려올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상관없는게 아닌가. 수많은 ~~주의 너머에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먼저라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인류 문명에 끼친 빛과 그림자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한 적은 없다. 합의는 절망과 체념이 아니라 배려와 양보다. 니체의 말대로 사실보다 결국 해석의 문제일 뿐이다. 이 책은 임승수 개인의 일상이 아니라 건전한 상식과 다함께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한숨이다. 내게는 임승수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상식주의자’로 보인다. 제2, 제3의 더 많은 임승수가 나타나기를, 더 많은 사람이 ‘상식주의자’로 변해가기를 희망한다. 바꿀 수 있는 충분한 힘과 능력이 주어졌으나 스스로 외면한채 그들만의 리그에 진입하려는 이기적 욕망들이 현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아무도 당신의, 아니 나의 삶을 바꿔주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려하지 말고 내가 바뀌면 된다는 적응적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열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공감해야 답답하고 느리지만 작은 변화가 시작된다. 그 시작은 생각과 태도의 변화로부터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이기심만 가득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초래하는 공동체성 파괴와 인간 소외 현상을 마치 본성의 산물인 양 호도한다. 그런 언동이 인민을 착취하는 한 줌 지배 계급의 행동에 면죄부를 준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 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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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와 여우 -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대하여
이사야 벌린 지음, 강주헌 옮김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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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야기 본능은 강력해서 웬만해선 막을 수 없다. 상대방의 관심과 무관하게 쏟아내는 자기 고백은 감정의 배설에 가깝다. 뜨거워진 휴대폰을 귀에 대고 들어야 하는 친구의 연애사 혹은 친정 어머니의 하소연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내가 말하고 싶은 만큼 상대방이 듣고 싶지 않은 욕망이 비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관계 양상과 성향에 따라 이야기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주변에 잘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주변에 원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 일상에서 매일 벌어지는 개인차의 비극이다. 4가지 유형의 혈액형으로 80억 명을 분류하는 오류보다 조금 나은 방법이 16가지 유형으로 나눈 MBTI 테스트다. 조금씩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관계의 기본은 타인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신체 기관은 눈이 아니라 귀다. 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를 할 수도 없고 관계를 유지할 수도 없다.

놀랍게도 이사야 벌린은 인류를 단 2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를 소환한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라는 말은 흑백 논리의 전형이다. 당신은 여우인가, 고슴도치인가. 마치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에서 전짓불의 공포에 짓눌린 박준과 같은 질문이다. 질문자의 실체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어느 편인지에 대한 말 한마디가 생사를 가르는 절체절명의 순간. 질문을 가장한 억압과 강제는 박준에게 트라우마로 남는다. 물론 이사야 벌린이 톨스토이를 둘 중 하나로 분류하고 이를 논증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고슴도치 혹은 여우로 나눌 수 없다. 마치 붉게 물든 석양의 하늘처럼 모든 인간은 농도의 차이만 확인할 수 있는 그라데이션으로 물들어 있다.

일원론자인 고슴도치형은 지식인과 예술가 성향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인 비전, 즉 명료하고 일관된 하나의 시스템에 관련시키는 사람을 고슴도치형이라 한다. 여우형은 다원론자로 푸슈킨 같은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서로 모순되더라도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거대한 서평을 이렇게 다채로운 해석과 분석으로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이사야 벌린은 작가의 내면과 삶의 궤적을 꼼꼼하게 살핀다. 그래서 결론은? 톨스토이는 고슴도치인가, 여우인가. 그게 중요한가?

소설은 개연성 있는 허구로 삶의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고 해서 핍진성이 부족한 소설이 주는 재미와 장르 소설이 가진 허구와 상상의 즐거움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고전으로 남아 인간과 생의 이면을 성찰할 수 있는 작품에 대한 이해는 다양한 비평과 해석의 필요하기도 하다. 가벼운 분량이지만 결코 만만찮은 톨스토이의 무게를 생각한다면 톨스토이의 작품뿐만 아니라 우리가 읽는 모든 글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읽고 쓰는 행위는 저마다 다른 의미다. 치유하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위로하는 사람, 독서를 통해 새로운 세상에 눈뜬 사람 등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독서와 글쓰기를 자기 삶을 위한 방편으로 활용한다. 모든 읽기는 쓰기를 위한 전제이고, 모든 쓰기는 읽기가 바탕이 된 자기표현이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 열려 있지 않다면, 타인과 세상의 소리를 경청할 수 없고 자신의 망막에 투영된 세계가 전부라고 믿을 수도 있다. 쉼 없는 의심과 질문이 자기 성찰과 내일의 변화를 위한 성장을 이끈다. 그때는 옳고 지금은 틀리거나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말의 무게는 때때로 감정에 휘둘린다. 논리적 근거보다 중요한 게 태도이며, 합리적 생각보다 감정이 앞서는 게 인간이 지닌 한계라는 사실 자체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될 수 없지 않은가. 결국 톨스토이는 고슴도치 같은 여우가 여우 같은 고슴도치와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했던 게 아닐까.

톨스토이의 현실 감각은 마지막 순간까지 너무나 통렬해서, 뛰어난 두뇌로 세상을 잘게 쪼개 얻어낸 단위들에서 재조립해낸 어떤 도덕적 이상과도 양립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이런 사실을 부인하는 데 평생 동안 온 힘을 쏟아 부었다. 지독히 자존심이 강하면서도 자기 증오에 시달렸고, 박식하면서도 모든 것을 의심했으며, 냉정하면서도 넘치도록 열정적이었고, 남을 경멸하면서도 자기비하가 심했으며, 심한 고뇌에 시달리면서도 초연했고, 가족과 헌신적인 추종자들에서 사랑받고 온 문명 세계에서 찬사를 받았지만 거의 언제나 홀로였던 톨스토이는 위대한 작가 중에서 가장 애초로운 사람이었고, 콜로누스에서 눈을 가린 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해 자포자기한 노인이었다. -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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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에 대하여 - 아무도 말하지 않은 인생의 다른 이름
베벌리 클락 지음, 서미나 옮김 / 현암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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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할 결심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도 좌절과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매일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가 뗄 수 없는 동반자라는 사실을 잊고 산다. 인생은 마치 제로섬 게임 같아서 어느 쪽에 몰입하면 다른 부분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양손에 떡을 움켜쥐면 타인에게 손을 내밀기 어렵다. 잃어야 얻고 비워야 채울 수 있다. 이런 평범한 삶의 지혜를 몰라서 지옥을 경험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능력이 있고, 경험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습성이 있다. 이론과 실제가 달라 온몸과 마음으로 겪어보지 않는 감정은 혼란스럽다. 거울에 비치는 사물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고 남의 일같이 보이던 실패와 상실은 어느새 내 곁에 머물러 있다.

익숙함은 실패한 사랑의 주연이 되기 쉽다. 실패를 통해 시행착오의 교훈을 얻고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대개 인간은 귀인이론의 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인과관계가 없는 대상이나 원인을 지목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고 상황을 외면하거나 회피함으로써 정신승리를 택한다. 상처는 쉽게 아물고 같은 실수를 반복해도 우리에겐 리셋 버튼이 없다. 초기화 기능 없는 인간에게 실패와 상실은 익숙해지지 않는 삶의 굴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은 마음이라는 데, 베벌리 클락은 “상실과 실패의 순간에 우리는 존재의 본질과 마주한다. 이 경험으로 진정 중요한 것에 다가갈 기회를 얻는다. 틸리히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고통스러운 경험이 없다면 삶의 표면만 건드린 채, 인간의 피상적 의미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고 강력하게 말한다. 그의 표현은 시적인 느낌마저 든다.”라고 어깨를 다독인다. 꺾이지 않는 마음만 있으면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삶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철학적 위로는 달콤한 감정적 격려, 대책 없는 희망, 무기력한 긍정과 어떻게 다른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실패의 본질과 의미뿐만 아니라 실패의 속성과 과정을 살핀다. 근본적인 원인을 따져보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두 번째 기회를 얻어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쉽다. 흔히 말하는 회복 탄력성은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기 쉽다. 사회 안전망이 견고한 사회에서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법이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정책과 제도적 뒷받침이 마련되야 하지 않겠는가.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는 공동체의 울타리는 개인이 가진 의지 혹은 신념의 단단한 버팀목이다.

현실적인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 대체 불가한 성별(여성혐오), 나이(노인 빈곤), 학력(임금 격차), 종교(대체 군복무), 출신(지역 차별) 등에 기인한 것이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빈부 격차(육아, 출산, 수월성 교육, 입시 제도, 사교육비, 대학 서열)는 개인의 노력이나 열정과 무관하지 않은가. 모든 게 다 노무현 탓이라던 한 시대의 비극적 유행어를 뒤집어보면 모든 게 다 정치 탓이라는 은유가 성립한다. 우리는 ‘기득권’을 재해석하는 놀라운 리더를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했다. 여기에 동참하며 호응하는 사람들의 속내는 사다리를 걷어차고 밥그릇을 빼앗는 사람들의 의도와 무관하다. 무지는 참담한 현실을 초래하고 무의식적 분노와 감정적 혐오가 불러올 파장은 개인적 실패가 아니라 공동체의 실패로 귀결될 것이다.

베벌리 클락의 초점은 주로 개인에게 맞춰져 있으나 여성, 죽음, 불안의 문제는 철저하게 삶의 조건들, 즉 공동체의 태도와 환경에 기인한다. 성공에 대한 욕망, 실패에 대한 두려움보다 우선 ‘좋은 삶’에 대한 정의와 기준이 중요하지 않을까. 어떻게 좋을 삶을 실현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논의를 시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좋은 삶은 철저한 경쟁과 승자독식 자본주의다. 시장에게 자유를 허하라는 말에 동조하는 90퍼센트 가난한 국민들의 태도가 놀라운 건 무지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10퍼센트가 될 수 있다는 욕망 때문이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되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가학적 시장주의적 태도 때문이다. 이미 시장이 정치를 지배한 지 오래지만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고민이 없는 한 좋은 삶은 불가능하다는 철학자의 조언은 이념과 무관하지 않은가.

좋은 삶의 대척점에 놓인 경고는 ‘삶의 모든 영역에 시장원리가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삶의 불확실성이 오로지 경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언젠가 세상에서 사라진다. 저자는 좋은 삶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점검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묻는다. 타인과 세계와 연결된 삶을 위해 좋은 관계가 필요하다. 새로운 관계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상실이 생긴다. 삶을 쉽게 통과할 방법은 없다고 단언하는 이 책의 미덕은 멈출 때 삶이 공간이 생기고, 지금-여기에서 열정을 다하며, 걷는 행위를 통해 다르게 사는 법을 익히라는 충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상실이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수용과 동행이라는 조언이다. 명확한 해법을 제시하고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아 좋다.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가 새로운 관점의 출발이다. 실패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우선 나와 타인의 관계 그리고 세상을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감정적 태도를 버려야 다른 삶, 보다 좋은 삶을 위한 고민이 시작되리라.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세상에서 아무도 실패와 상실을 피하지는 못한다. 우주는 우연과 변화, 성과 쇠, 성장과 부패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인간은 이것의 일부다. 삶은 필연적으로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오르막과 내리막, 성공과 실패를 모두 담고 있다. - 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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