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니 부모가 부자에 너그럽고 전적으로 '나'를 신뢰한다. 하나뿐인 여동생은 오빠를 더없이 존경하고 사랑한다. 주변의 모든 사람은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나를 사랑한다. 우연히 방문한 아름다운 저택의 교양 있고 친절한 주인은 나를 처음 보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있고 싶을 만큼 있으며 내부의 온갖 예술 작품을 마음껏 감상하라 한다. 마침 그곳을 방문했던 그의 수양딸과 나는 동시에 서로에게 반한다. 마침내 우리 둘은 맺어지며 양가의 막대한 유산을 상속 받는다.


언뜻 들으면 웹소설 저리가라 할 만한 단편적이고 비현실적인 동화 같은 스토리다. 주인공을 둘러싼 환경이 주인공에게 이렇게까지 끝까지 호의적인 경우는 사실 웹소설도 잘 없다. 어떤 갈등도 분란도 상실도 없다. 우연히 만난 여자와의 가약에도 양가가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 그런데 기이하게 매력적인 깊이를 자랑한다. 심지어 괴테를 계승한 성장소설이라는 평을 듣는다. 처음에는 저자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의 삶이 너무 단조롭고 잘 풀려 이야기도 그런가 싶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저자는 자살했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성장에 대한 대한 짙은 신뢰가 큰 몫을 한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장미로 뒤덮인 리자흐 남작의 아스퍼호프 대저택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물과 예술에 대한 감식안을 가지게 되고 성장을 이루어 낸다. 리자흐는 젊은 시절 자신이 가정교사로 일했던 집안의 딸인 마틸데와의 실패한 사랑의 추억을 가지고 있으나 노년에 다시 남편을 잃은 그녀와 재회하여 그녀의 아들과 딸을 함께 양육하고 가산을 공동으로 돌본다. 주인공은 리자흐의 상실에 대한 하나의 이상적인 대안적 삶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리자흐처럼 사랑에 실패하지도 그것으로 인한 절망을 경험하지도 않지만 리자흐 남작의 이야기를 통해 그것을 대리로 체험한다. 반드시 이러한 것들이 나에게 이 생에서 일어나야 의미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통과함으로써 '나'는 비로소 리자흐 남작이 살지 못했던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름다운 시절의 합일을 이루어 낸다. 


결국 젊은 나는 리자흐 남작의 잃어버린 초여름이 아닌 다시 찾은 "늦여름"을 형상화하는 존재로써 자리한다. 그 모든 순탄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싶었지만 끝내 누릴 수 없었던 삶의 평행우주적 이상화인지도 모른다. '내'가 뇌우를 기다리며 만났던 리자흐 남작이 결국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이 지점이다. 


<늦여름>은 대자연과 온갖 예술 작품에 대한 심미안에서 나온 묘사의 절창이 백미인 작품이다. 인물들이 경험하는 일련의 사건들과 인물 간의 갈등 요소가 아니라 예술과 경이로운 자연의 풍광을 묘사하는 문장들이 전면으로 부각된다. 우리의 삶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쩌면 배경이고 부수적인 배경이라 여긴 것들이 중심으로 나오는 그 자체를 즐기는 읽기는 어떨까. 이런 삶은 머리로만 상상으로만 가능하다고 여기면서도 슈티프터의 <늦여름>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것은 인간이 절망에 함몰되기보다는 미약한 희망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존재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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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10-18 12: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중에서 제일 좋아합니다. 그래 이 페이퍼가 더욱 반가웠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서사는 별개로 하고, 아달베르트 슈티프터가 자연 - 꽃, 나무, 숲, 암석, 화석 등과 예술품을 바라보는 미학적 시선이 정말 좋았었습니다. 읽는 내내 행복했던 기억이 멈추지 않는군요.
점심 잘 먹고와서 블랑카 님 덕분에 한 번 더 기억 속의 호사를 합니다.

blanca 2021-10-18 13:32   좋아요 1 | URL
안 그래도 중간에 지루해서 덮고 싶어지는 걸 풀스타프님 페이퍼 읽으며 참고 읽었어요^^;; 그런데 이 책 참 묘해요. 재미는 없는데 맞아요, 그냥 다 잘 풀리니까 읽는 내내 행복해져요. 판타지와는 다른 차원의 힐링이었어요. 고상한 것, 이상주의적인 것, 아름다운 것을 이렇게 마음껏 누리는 세계가 독서 아니면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읽는 시간 참 행복했습니다. 말씀 대로 저도 덕분에 호사를 누렸습니다...너무 우아한 읽기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