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의 그림책 장인 키티 크라우더가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에서 추천한 책은 의외로 한국인 소설가 이승우의 <식물들의 사생활>이다. 그녀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주변인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고 했다. 키티 크라우더의 부모로서 아이들 양육에 관련한 조언도 참 좋았지만 유럽 그림책 작가가 아시아의 그것도 한국의 소설가의 작품을 주변인에게 추천한다는 이야기가 참 인상적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안 읽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난 그의 원작을 대면할 수 있지 않은가. 


















이승우 작가의 <식물들의 사생활>은 작품성도 작품성이지만 일단 이야기 자체가 단숨에 읽힐 정도로 몰입감이 좋다. 끊임없이 긴장감이 유지되고 그 사이를 촘촘하게 사유 깊은 문장들로 채워간다. 사실 사창가를 배회하는 주인공의 도입부에 좀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화자 기현이 그 사창가에 가게 된 연유를 짚어나가다 보면 작가가 여성을 도구화하기 위해 그 장면을 초반부에 배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에게는 군에서 사고로 두 다리를 잃게 된 사진 찍기를 좋아하던 형 우현이 있었다. '나'는 매사에 나보다 뛰어난 형에게서 열등감을 느꼈고 그의 여자 순미에게 몰래 연정을 느끼게 된다. 형의 삶이 무너진 데에 나는 본의 아니게 역할을 하게 되고 그 죄의식에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나는 저도 모르게 형의 삶 속으로 속죄처럼 들어가게 된다. 그의 헤어진 연인을 찾아내고 그의 진짜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형의 것들을 욕망했었고 그것을 가진 형을 때로 질투하다 마침내 다 잃어버린 형 앞에 채무자처럼 서게 된다. 나의 삶은 그것의 상환의 과정이 된다. 


이야기는 어머니의 좌절된 사랑과 중첩된다. 언뜻 장애인이 된 아들을 사창가에 업고 가는 그 처절한 비애의 정조로서만 자리할 것 같았던 기현의 어머니는 비극적인 사랑과 남천이라는 성소의 중심에 서 있게 된다. 여기에서는 신체의 훼손으로 욕망 자체에서 탈출하여 나무가 되고 싶어하는 형의 마음과 좌절된 사랑의 염원과 경배를 담은 욕망의 현현으로서의 남천의 야자나무와 이 모든 것들을 초탈하여 자신의 친아들이 아닌 형을 기꺼이 사랑으로 받아준 아버지의 물푸레 나무가 있다. 이 식물들의 사생활은 무력하거나 무생물적이거나 배경에 그치는 것들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좌절들을 승화시키고 포용시키는 해원의 장이자 화해의 지대를 품은 너른 수목의 품에 관한 이야기다. 이승우의 결말은 그래서 허무하거나 형식적이지 않다. 


햇살은 바다 위에 떨어져서 눈물이 된다. 보석처럼 빛나는 눈물. 그러나 나는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이승우 <식물들의 사생활>


마지막 문장. 극적인 화해도 재회도 없지만 가족이 한데 모여 식사를 하는 장면으로서 끝을 맺는 작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들 앞으로 여전히 험로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현실과 분투하며 살아나가는 삶의 공통의 장을 공유하는 그 식탁에서 생은 스러지지 않는다. 작가의 그런 긍정의 여지가 자칫 어둡게 침잠하기 쉬운 이야기를 끌어올린다. 키티 크라우더가 주변인들에게 이 책을 권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국경과 언어를 넘어 시간성과 생의 온갖 질곡과 충돌하여 좌절되는 인간의 욕망과 사랑을 다른 차원에서 승화시킨 이야기가 보편의 공감을 자아낸 듯하다. 절망하기는 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지점에서 이야기를 밀고 나간 작가의 저력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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