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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의 운명 (반양장)
문재인 지음 / 가교(가교출판)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아이는 어른들이 앉아 저마다 지금 가장 자신에게 절실한 것들에 해답이나 위안을 줄 것 같은 책들에 고개를 박고 있는 곳으로 가서 냉큼 앉아 열심히 스티커를 붙이기 시작했다. 몇 번씩 주변을 둘러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나온지 3년이 지나면 자신이 재미를 느끼는 것에 열중하는 것이 곧 사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마나 보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데 책 대신 핸드폰으로 의미없는 검색질을 하다 베스트셀러 수위에 있는 책을 한 권 뽑아 들고 건성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단 몇 분이라도 혼자 있고 싶었다. 누군가 차를 한잔 갖다 줬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찻잔에서 문득 그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그를 만나 차 한 잔 앞에 놓고 얘기를 나누던 바로 그 날, 우리는 눈부시게 젊었다.
-p.22
우. 리. 는. 눈부시게 젊. 었. 다.
이 한 문장으로 이 책은 나를 사로잡았다. 플래쉬백의 휘장에 박아 넣기에 가장 찬란하고도 눈물겨운 문장. 그 누구의 삶인들 안 그랬겠는가. 더군다나 '우리'가 노무현과 문재인이었다면.
2009년 5월 23일 토요일. 나는 여전히 힘들었다. 그가 대통령이 되던 날 노란풍선에 둘러싸여 활짝 웃던 모습과 젊은 검사들과의 대화에서 울뚝불뚝 성을 내던 모습, 퇴임 후 봉화에 내려가 찍은 다큐에서 참 행복하다며 하회탈 같은 미소를 짓던 모습은 어이없는 마침표 속에 스러지고 말았다. 내가 힘들어서 울었고 그의 치열했던 삶의 허망한 종착점이 서러워서 아이를 업고 울었다. 때로 저돌적이고 때로 충동적으로 국민들 앞에 자신의 권위를 내려 놓으려 했던 그의 시도들이 언론의 조롱거리가 되고 차차 나도 역시 기대 만큼은 아니었다,며 그를 응원하기를 그만두었을 때. 그가 추구했던 가치들, 어떻게든 그 가치에 가 닿으려 분투했던 모습을 알지 못했고 때로 그 과정에서 불거졌던 각종 해프닝, 또는 세간에서 악의적으로 조작된 정황 들에 눈감았다. 나는 비겁하고 무지했다.
문재인의 고백은 눈부시게 젊었던 시절, 노변호사와의 첫만남에서 시작된 인권변호사 활동, 민주화 운동, 청와대 입성, 그리고 귀향, 슬픈 최후의 목격자로 석별하기까지 노무현과 함께 한 역정에 대한 것이었다.
문재인은 학생 시절 유신 반대 시위 전력으로 연수원 차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판사 임용이 못 되어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 좌절이 노무현과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향하는 길목이 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부산에서 노변호사와 동업하게 되어 차츰 노동, 인권 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의욕적이고 치열하게 소외된 이들을 위해 변론 현장을 누비고 그들의 권익을 지켜 주기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았던 두 젊은 변호사의 모습의 복기가 참 생생하고 아름다웠다.
결국 두 변호사가 대통령과 민정수석비서관으로 나란히 청와대에 입성하게 되고 현실의 강고한 벽에 끊임없이 부딪히며 그럼에도 불고하고 끝내 놓지 않으려 했던 가치들, 대의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라크 파병, 한미 FTA에 대한 솔직한 입장, 정황 들에 대한 얘기도 인상깊다. 참모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한 노대통령의 재신임 발표와 대연정 제안에 대한 아쉬운 심정에 대한 토로도 있다.
힘이 모자라거나 시운이 안 돼면 패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패배하더라도 우리의 가치를 부둥켜 안고 있어야 다음의 희망이 있는 법이다.
-p.366
지금도 당신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성공한 대통령이어서가 아니다. 아마 이것 때문이었던 것 같다. 모두 당신을 비난하고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 너머의 대의를 응시하는 당신의 눈빛. 그것은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이기도 하다.
실패한 대통령, 실패한 정부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청와대를 떠났다. 진보진영으로부터 진보를 망친 장본인인 것처럼 비난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가 우리를 정당하게 평가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중략>
대통령은 모든 걸 혼자 안고 떠났다. 인간의 법정을 거부하고 역사의 법정을 선택했다.
-p.433
한때 함께 그를 비난했던 진보 진영의 시사 주간지의 표지에서 그는 홀로 외롭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표지의 그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공범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는 유서의 첫 문구는 마지막에 추가로 입력된 것이라고 한다. 문재인은 그답다고 표현한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자신이 쓴 유서를 손보고 찬찬히 문구를 수정하고 추가하는 모습. 문재인은 대통령이 마지막 얼마동안 유서를 머릿속에 담고 지낸 시간들을 떠올리면 견딜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유서는 아직도 청춘을 함께 했던 후배이자 친구의 수첩에 간직되어 있다.
남기고 간 숙제. 남은 자들의 부책감. 때로 실패한 것들, 미완의 것들, 반발을 일으키고 숙어져 버린 것들. 그런 것들이 그의 실패, 진보 진영의 실패로 뭉뚱그려져 그 가치와 지향마저 부정되는 현실이 서럽다. 정략적인 술수 속에서 희생되는 정작 중요하고 시급한 것들. '사람 사는 세상'은 분명 통치자 한 명이 근사하게 완성하여 내밀 수 있는 하나의 선물 같은 것이 아닐 거다. 모두의 염원, 역량의 에너지가 하나가 되어 정말 사람 사는 세상이 오는 그 날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을 때 조금씩 더 가까워지는 지점. 그 때쯤이면 장구한 역사 속에서 숱한 실패와 좌절, 세상의 냉대를 맛보고 미완의 과제를 남기고 떠난 수많은 그들의 해원의 굿 한 마당을 보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