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 그리고 사물.세계.사람
조경란 지음, 노준구 그림 / 톨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를 들쳐 업고 제일 먼저 진출한 곳은 녹음이 무성한 공원도, 동물들이 께느른하게 관람객들을 응시하는 동물원도 아닌, 바로 백.화.점.이었다. 

일단 육아에 관련된 돌발상황에 대처하기에 더없이 편리한 곳이었다. 기저귀를 갈고, 젖을 먹이고, 졸려 하면 간이 침대에 재우기도 하고, 그리고 그런 행위들을 하는 엄마를 우호적으로 지켜봐 줄 곳으로는 동네 반경 사 킬로 내외에서 유일한 곳이었다. 내가 홀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특히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는 환각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보너스였다.  

그런데 역시 댓가가 있었다. 그건 욕망이었다. 백화점 안 사물들은 살아 꿈틀대고 있었다. 그 사물들은 벌써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여름 수영복은 호사로운 여름 휴가를. 이쁜 아이의 핑크빛 원피스는 아이와 유원지를 거니는 모습을, 차르르 떨어지는 정장은 '내'가 좀 더 그럴듯하게 사람들에게 나서는 풍경을 만들어 내는 중이었다. 

백화점에 대한 얘기는 그러니 한 뼘의 시공간 안에 갇힌 '나'에 대한 얘기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백화점'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고 저자 '조경란'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어떤 대상에 대한 얘기는 흔히 객관성을 가장한 주관적인 시선 비틀기일 가능성이 농후하고 나 자신에 대한 얘기는 지나치게 솔직한 척 하다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다. 그러니 그 경계에 선 저자의 시도는 산뜻하고 도발적이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 속에 버무리는 솜씨도 탁월하다. 이 책은 작가의 말을 보면 작가 조경란이 내밀한 속내를 가장 많이 털어 놓은 마지막 작품일 될 것도 같다. 알랭 드 보통이 어떤 대상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제공하는 대신 스스로를 너무나 많이 숨겼다면 이 책에 드러난 작가의 담백한 솔직함은 분명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다.   딸 셋의 장녀. 두 동생의 결혼식 날 모두 붉은 원피스를 입고 등장한 큰언니의 얘기. 등단한 작가가 특설매장에서 책을 팔던 얘기. 앵클 부츠의 닳아진 굽을 몇 번이나 갈아 신고 다니는 그녀의 모습. 

   
  불완전하며 부족한 나는 결코 사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물은 나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 즐거움의 순간이 아무리 짧을지라도 그것은 확실하고 분명한 즐거움이다. 나는 구매했다. 여기에 필수적인 요건은 '나는 선택했다'라는 감정이다. 나는 선택했고 그것은 즐거움으로 남는다. 소비에 당위성은 없다. 소비의 이유도 소비의 기쁨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한순간, 우리는 행복했다.  
   

 

소비에 당위성은 없다....그러니 그 어떤 소비도 약간의 죄책감은 남긴다. 저 가방이 없다고 저 옷을 안 입는다고 바깥에 나가 친구를 만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내가 저 가방을 들고 저 원피스를 입고 친구를 만나는 풍경은 아름답다. 나는 내가 선택한 새로움으로 나를 휘감고 한층 더 산뜻한 웃음을 흘릴 수 있다. 어쩌면 나의 그런 모습에 친구도 더 내 이야기를 경청하고 나를 조금 더 가치 있는 주변인으로 인식할 지도 모른다. 살 수도 포기할 수도 있는 지점에서 간당간당하게 서 있다 이윽고 매장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점원의 환대에 우쭐한다. 입어 보고 들어 보고 거울 앞에 선다. 점원이 시선을 잠시 돌리는 순간 가격표 꼬리를 확인하고 좌절한다.  

몇날 며칠을 고민한다. 그 고민 속에는 이미 그 물건을 기다리는 즐거운 마음도 딸려 들어가 있다. 이미 구면인 점원에게서 카드 영수증을 받아 드는 순간 반짝반짝 빛나는 충만감을 맛보지만. 두 번의 외출로 그 사물들이 주었던 환각들은 스러져 버리고 만다. 쇼핑의 도식을 알면 허무하다. 그런데 그 중간 중간 고개를 내미는 찰나의 기쁨은 무시할 만한 것이 못된다. 지리멸렬한 일상 속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새로움'에 대한 환각은 소비로 권장된다.

이 책은 훈계하거나 모든 것을 머리로 판단하라고 조언하지 않는다. 그냥 백화점 층마다 권장하고 난무하는 욕망들을 있는 그대로 응시한다. 때로는 그 욕망의 주체가 저자가 되기도 한다. 오히려 우리의 욕망을 이해받고 때로 존중받는다는 느낌이다. 욕망의 반성, 조절, 통제는 없고 욕망에 대한 이해, 분석, 통찰 만을 제공한다고? 그것이 바로 이 책만의 장점이기도 하고 이 책을 읽지 않을 나머지 사람들의 이유가 되기도 할 것 같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1-06-08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군요, 블랑카님!
책 참 좋았죠? 말씀하신 것 처럼 이 책은 백화점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조경란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그러나 또 백화점에 가서 소비를 하는 그 찰나의 순간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죠. 이제는 조경란이 본인이 말하는 과거의 시절과는 달리 넉넉해진 것 같아서, 그걸 깨닫게 될때마다 저는 약간 멈칫 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도 이 책이 좋았어요. 저는 블랑카님처럼 별을 다섯개를 주지는 못했지만 말이죠.

blanca 2011-06-08 21:2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이 지금까지 읽은 에세이 중 가장 좋았다고 하셔서 바로 질렀죠^^ 그리고 정말 그 말씀이 맞았고요. 저는 조경란 단편 몇 편만 읽어 보고 단발머리에 좀 차가운 인상이라 선입견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제가 생각했던 모습이랑 너무 달라 놀라기도 했어요. 굉장히 솔직하고 담백하더라구요.

양철나무꾼 2011-06-08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 조경란은 뭐랄까...좀 탐욕스럽고 섹시하게 느껴져요.
전 백화점은 아니고, 아울렛이란 이름 붙은 상설 할인매장이요.
혼자 밥도 못 먹고, 영화도 못 봤었는데...꼭 쇼핑은 혼자 했었어요~^^

blanca 2011-06-08 21:23   좋아요 0 | URL
저도 조경란에 대한 비슷한 선입견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제가 생각했던 모습과 너무 달라서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더라구요. 경제적으로도 참 많이 힘들었고 참 다감하고 넉넉한 이모의 모습도 보이고. 쇼핑을 같이 하는 건 참 부담스러운 것 같아요. 혼자 내밀하게 해야 하는 작업 같아요^^

비로그인 2011-06-09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읽으셨군요. 전 이 책에서 저를 읽었어요.브이넥 원피스나 스키니 진에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그 아래엔 검은색 페디큐어를 칠하고, 흰색의 탠디 스트랩 샌들을 신고,아, 그런 다음에는 어찌할까. 저는 제 스스로가 욕망의 주체였으면 했어요. 제 스스로가 제가 사랑하는 이의 욕망의 대상이자 근원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더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어요. 한번씩 거울을 아주 오랫동안 응시하고, 이 옷 저 옷을 대어보고, 그런 과정 없이는 나를 알기가 어려웠습니다.그래서 나이먹는 것도, 내가 변하는 것도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켜요. 그러나 그것은 내가 늙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했던 내 모습에서 내가 멀어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에요.그리고 백화점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입니다.


사족-저는 가격표도 안보고 아예 계산하면서 `어머 그런데 이거 얼마에요?'라고 묻든지, 아니면 아예 물건을 집어들자 마자 `이거 얼마죠?' 부터 먼저 묻곤 해요. 제가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충분히 짐작 가능한 곳만 들락거리기 때문입니다.


blanca 2011-06-08 21:25   좋아요 0 | URL
아, 쥬드님 좋은 리뷰도 아주 잘 읽었답니다. 쥬드님은 항상 시각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글을 쓰시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늙는 게 두려워요. 어려 보인다,는 공치사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지금이 늙어가는 거겠지만요. 저는 수시로 가격표를 몰래 몰래 끄집어 내어 확인한답니다.^^;;

비로그인 2011-06-08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인지 자꾸 우선 순위에서 멀어지고 마는 책.
하긴, 읽지 않은채 곳곳에 누워있는 다른 책들도 무기력하게 손길을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요.

그런데 새로운 책을, 이렇게 다른 분들의 인상을 접하고 읽는 건 또 다른 느낌을 전해 주더라고요. 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낯을 살짝만 봤는데 좀 알게 되면 다시 이 페이퍼와 이 책에 관한 다른 분들의 얘기를 들어봐야겠습니다.

blanca 2011-06-08 21:26   좋아요 0 | URL
그런 시기가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마지막 책이 어떤 실망감을 준 경우. 저는 한동안 책을 멀리 하게 되더라구요. 그러다 또 드문드문 좋은 책을 만나게 되면 다시 책에 빠지게 되고. 그리고 책 대신 세상을 열심히 관찰하고 계시잖아요. 그걸로도 충분할 것 같아요^^

2011-06-08 2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9 1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1-06-08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지 않을 나머지 사람들의 이유, 그것이라면 전 읽지 말까 싶기도 하고
이거 무지하게 갈등이네요. 하지만 읽고싶은 쪽으로 확~ ㅎㅎ
여러 리뷰에서 평이 좋으네요.

blanca 2011-06-09 18:14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참 괜찮아요. 저는 그냥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백화점의 역사와 조경란의 삶과 그리고 나의 삶을 함께 놓고 찬찬히 둘러보게 되더라구요.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