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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서재 - 그리고 그들은 누군가의 책이 되었다
한정원 지음, 전영건 사진 / 행성B(행성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어떻게든 정호 오빠의 집을 들를 구실을 마련해야 했다. 거기에는.
노란 계림문고의 <소년소녀세계명작문고> 전집이 완비되어 있는 서가가 정면으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걸핏하면 이 구실 저 구실로 책을 빌려가는 게 고작 아홉 살 먹은 계집아이를 영 당당하게 못 만들었다. 그래서 괜시리 여동생을 대동하고 딴 소리를 해대며 그 집을 드나들었다. 오빠는 지금 생각하면 깜찍하게도 대여 장부를 만들어 동네문고의 사서처럼 관리를 하기 시작했다.
하여튼 그런 기억들 투성이다. 저 아이는 내가 미처 가지지 못한 계몽사의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의 반절 삼십 권을 가진 아이구나. 심지어 저 아줌마는 좋겠다. 책이 많아서. 나는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너무 참지 않아도 되는 경제력을 가지기를 소망했었다. 책을 사랑했고 사랑하고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 것같다. 하지만 그게 다다. 그 지점을 넘어서는 경계선에는 독서가 더 무르익고 내가 더 숙성해야 하고 내 삶이 조금 더 많은 깨달음을 품고 나아가야만 뛰어 넘을 수 있는 뜀틀이 엉버티고 있다. 그러고 보니 체육시간에 걸핏하면 뜀틀 위에 앉아 버리는 기염을 토했던 기억이 난다. 훌쩍 넘어 착지를 하는 상상과 그러지 못한 데에 대한 좌절감과 웃어버리고야 마는 또래들에 대한 수치심 같은 것들이 뒤엉켰던 그 기억들. 지금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런 나, 그리고 비슷하거나 그닥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좋은 구름판이다. 그냥 맨땅에서 발을 굴러 저 높은 뜀틀을 넘어 보려 했던 우리들에게 법학자 조국, 자연과학자 최재천, 섬진강 시인 김용택, 북디자이너 정병규,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 사진작가 배병우, 건축가 김진애, 승효상, 출판 문화인 김성룡, 영화감동 장진, 바이올리니스트 조효범, 전통 공연예술 연출가 진옥섭, 소셜 디자이너 박원순 들이 손을 내민다. 그 손을 잡고 구르는 기분은 정말 금방이라도 하늘 천장에 손을 뻗어 구름을 만질 수 있을 것 같다. 기대 이상이었다. 일면식도 없이 누가 나에게 자신의 서재를 속속들이 보여주고 자신의 유년을 고백하며 눈물짓고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었던 책의 목록을 기탄없이 건네 줄 것인가. 게다가 그 사람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이다. 적어도 자신이 살아온 삶에 자족하고 스스로에게 떳떳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먼저 걸어간 길을 더듬어 보는 것은 내가 앞으로 걸어갈 거친 길들을 조금은 부드럽게 매만지는 일과도 같다. 책을 읽는 일과 삶을 사는 일을 혼동하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저 다 용서받고 용인받을 수 있을 것 같은 활자 박아 넣기도 무모하거나 어떤 한 곳으로 치우쳤을 때 양날의 검이 될 수 있음을 소스라치게 깨달을 수도 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껍질과 벽을 깨어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하는 독서의 힘에 대해 얘기한 조국. 책이 책을 사도록 만드는 경계선까지 가야 비로소 독서의 재미를 깨달을 수 있다고 조언하는 북디자이너 정병규. 책만 보고 사람과 소통하지 않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한 이효재의 손가방에는 놀랍게도 항상 <천재유교수의 생활> 만화가 들어있단다. 사진작가 배병우는 피사체의 본질을 알지 않고는 사진을 찍을 수 없기에 독서에 천착한다고 한다.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책과 미친듯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이 반가웠다. 인생의 궤적과 독서의 궤적이 묘하게 오버랩되는 자신들의 서재를 기꺼이 열어 젖히고 독자들을 기꺼이 환대하는 모습이 참 따사롭기도 했다. 책을 열고 또 서고를 두드리고 서가에 손가락을 얹어 먼지 얹은 책 등을 매만지는 느낌은 또 어떠한가. 항상 책을 펼치는 그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자세가 이미 되어 있고 자신들의 말과 삶이 언제나 정답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너그러운 조언들. 귀에 거슬리지 않고 바로 가슴으로 들어와 박히는 얘기들. 사람들은 대꽃을 좋아하지만 대꽃이 피면 대나무는 모두 죽기에 유년시절 고향에 핀 대꽃은 가슴에 박힌 대못이 되었다는 진옥섭의 회환어린 고백에 결국 주르륵 줄을 그음으로써 너저분한 간지들은 옹색해 보이게 됐다. 처음부터 그래도 되었을 것을 괜시리 책에는 함부로 줄을 치지 못하는 그 설명하기 힘든 주저는 내가 책에, 또 삶에 가지는 하나의 망설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