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일기 - Akuta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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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일본 영화를 멀리 해 온터라 스즈키 세이준 영화는 처음 봤다. 격정적인 청년의 방황기인데 많은 작가들이 예찬하는 인물이다. 인생이 연소할 대상이라는 한 까뮈의 말씀을 아는 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토고란 청년은 비행이라는 걸 일삼는다. 물론 비행이란 표현은 교육과 기성 세대가 사용하는 말이다. 토고의 입장에서는 끓는 피를 주체할 수 없어서 누군가를 사랑 안 하고는 못 사는 데 말이다.  

이런 청춘 영화를 볼 때마다 늘 궁금한 점이 있다. 누군가를 향해 애정을 바치는 행위를 할 수 있는 유전자도 따로 있지 않을까. 돌이켜보면, 십대 중반부터 연애하기 시작해서 일찌감치 결혼한 친구가 있다. 십대 중반 단짝이었던 친구여서 등하굣길을 함께 했고 방과 후에 오락실에서 갤러그와 너구리를 함께 했고 독서실도 함께 다녔다. 주말이면 롤러장에도 가곤 했다. 친구가 오락실과 독서실에서 연애를 하는 동안 나는 장소 본래의 목적에 충실한 행동을 이행했다. 오락실에서는 오락만 독서실에서는 공부만 했다. 친구한테는 이 모든 곳이 사교장이었다. 나는 이 사교라는 이름을 단 소란스러움을 좀 싫어해서 친구가 사교를 하는 동안 샐쭉해져서 나는 친구를 모른 척 하고 친구의 사교가 다 끝난 후 집에는 또 함께 오곤했다.  

이런 십대를 보낸 터라 어린 나이에 이성에 대한 열렬한 감정을 갖는 인물들을 보면 나와는 다른 별에 사는 종족처럼 추상적으로 보게 된다. 이 영화는 꽤 귀여운 구석이 있지만 십대 후반의 비행 청소년이 얌전한 소녀를 만나 불 같은 사랑을 하는데는 오버스러운 면이 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감정에 충실한 때니 상대를 흠모하는 마음이 깊어서가 아니라 충동을 제어할 수 없는 십대의 팔팔함 때문에 나오는 모습들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이런 격한 감정 라인은 좀 이해 불가 항목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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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베러월드 - In a Better Worl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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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센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이미지화 해 놓은 것 같다. 정의의 딜레마에 관한 성찰을 유도한다. 영화는 두 이야기를 교차시킨다. 내전으로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의사로 일하는 남자는 폭력에는 비폭력과 이해로 대한다는 신념을 지녔다. 어느 날, 내전의 주범인 살인마가 다리 부상으로 의사한테 도움을 요청한다. 의사는 그의 목숨을 구했지만 살인마의 악한 본성에 질려 그가 사람들한테 죽도록 폭력을 방관한다. 살인마가 살아나간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게될 것이다. 그가 신념을 지키는 게 옳은 지 잠시 신념 따위는 잊는 게 좋은 지 혼동스럽다. 그렇지만 그는 인간이 지닌 사고 영역에서 다른 사람들 보다 한 걸음 나아가 노력했다. 그는 누가 봐도 훌륭했다.

그의 아들 엘리아스와 엘리아스의 친구 크리스티안의 세상을 보는 눈이 또 하나의 이야기다. 크리스티안은 엄마를 잃은 상처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을 신념으로 가지기 시작한다. 폭력에는 사랑과 이해가 아니라 더 큰 폭력으로 기선을 제압한다, 가 크리스타안의 세계관이다. 이 어린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왜 이런 폭력을 신봉하며,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 결과를 알려줄 어른이 없다. 반면 엘리아스한테는 폭력은 단지 하찮은 이들의 방어수단일 뿐이라고 알려주는 아빠가 있다. 엘리아스는 폭력에 폭력을 행사하기 전에 적어도 고민을 하고, 뭐가 옳을 지 생각해 본다. 이런 장면을 볼 때, 등골이 오싹해진다. 아이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어른 역시 폭력에 가담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안은 폭력에 대한 보복의 결과를 혹독하게 겪었고 엘리아스 아빠의 도움으로 폭력의 순환 고리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끈을 잡았다.

영화는 이런 문제들을 심각하고 탄탄하게 끌어간다. 언제가 아이를 키우는 친구가 좋은 엄마 되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교가 있었으면 좋겠다, 고 했다. 이 말에 웃고 말았지만 아이의 길을 이끌어야하는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힘겹고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다. 그저 먼저 태어나서 축낸 밥 그릇의 숫자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어른이 되고 어른은 어떤 식으로든 문제나 상황에 대해 자신만을 대처법을 구축해나간다. 대처법이 옳고 그른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태초에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없었듯이, 어린 시절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은 없고 어른 세계를 보고 모방하면서 선과 악을 학습한다. 선도 학습되지만 악도 학습된다. 어른 역시 무언가를 보고 선과 악을 학습했을 거고 여전히 학습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알게 모르게 내 행동이 모방되어 더 좋은 세계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도 있고 더 나쁜 세계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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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개 - Poongsa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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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전 정보 없이 포스터만 보고 김기덕 감독 영화인 줄 알았다가 영화가 시작하면서 각본만 쓰고 감독은 다른 사람인 걸 알았다. 또 김민선이란 배우가 이름을 바꿔서 김규리가 되었다. 얼굴은 같은데 이름이 달라진 배우가 출연한다. 영화 외적으로 이렇게 좀 헷갈리는 요소들이 있는데 영화 내적으로도 착각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가 들어있다.  

2.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은 사람을 불쾌하게 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영화 미학적인 것과 별개로 감독의 정신 세계는 악만을 들여다본다. 세상에는, 사람한테는 악만 있는 게 아니라 선도 공존하는데 김기덕 감독은 왜 유독 악에만 집착하는 걸까. 선을 간직한 인물은 언제나 소외되고 앞으로 나서지 않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위기의 순간에는 영웅으로 돌변한다. 영웅으로 나서는 이유는 아주 개인적인 이유, 대체로 한 여자에 대한 순정 때문인데 이 순정이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섬뜩하다. 사랑, 혹은 순정이라고 부를 만한 행위들한테는 사회적 기호가 녹아있지 않다. 이 말은 사랑이나 순정하면 떠올릴 수 있는 보편성이 없다는 말이다. 김기덕 감독이 만들어낸 인물들 속에는 보편성이 없어 공감이 안 되고 당혹스럽고 때때로 불쾌하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감성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이유다.

또 하나 인상적인 건 위기의 순간에 영웅으로 변하는 인물이 언어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말은 사회적 보편성을 대표하는 기호체계다. 사회적 보편성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단순히 감독의 아킬레스 건일지도 모른다. <그랑 블루>를 만든 뤽 베송이 학창시절 작문을 못한 게 트라우마로 남아 대사에 자신이 없어 인물들이 대체로 침묵하는 것처럼. 

3. 엄밀히 말하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아닌데도 김기덕 감독 영화로 다가온다. 김기덕 표 기시감이 많이 있다.'풍산'이란 닉네임을 가진 남자 역시 영화 내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한 마디 비명은 지른다. 게다가 풍산이란 남자가  인옥한테 바치는 순정 역시 익숙하다. 풍산은 홍길동처럼 남과 북으로 헤어져서 살고 있는 가족들의 한을 풀어준다. 김기덕 감독식 영웅주의다.  

그러나 풍산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은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한다. 이 영화에서 말이란 도구는 믿을 게 못 되고 상황에 따라 쉽게 번복할 수 있는 편리한 도구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데올로기 대립을 하는 데 말에 대한 신뢰성이 문제가 된다. 말이 행동보다 우선시하는 게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작위적인 부분이긴 하지만 가장 공감가는 장면이기도 하다.

액션 씬이나 잔인한 장면(피가 얼굴에서 여러 가닥으로 흘러내린다)은 상업영화로서 꽤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진지한 상황에서 웃기기까지 하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김기덕 감독이 연출했다면 이렇게 말랑말랑하게 가지 않았을 거 같다.   

4. 누군가는 개연성을 따지는데 개연성 없는 영화를 꼽자면 수도 없다. 영화가 꼭 사실에 기반을 둘 필요가 없다. 사실을 소재만을 제공할 뿐이고 그 소재를 변형시키고 가공시키는 게 영화가 할 일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참 영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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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루셔니스트 - The Illusio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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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더니티 담론이 한창이던 때 자크 타티는 소비주의에 의심을 눈초리를 보냈다. 개인은 익명으로 묘사되고 도시는 차가운 거대한 금속이처럼 움직인다. 언제나 꿈의 도시인 파리조차도 그의 영화에서는 찬바람이 쌩쌩분다. <윌로 씨의 휴가>에서는 (한국인한테는 로망인) 프랑스인들의 의무적 바캉스를 통해 단조로움을 조롱한다. 그가 딸한테 쓴 편지를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인데 타티의 영화들처럼 거의 대사 없이 음악과 인물의 움직임만으로 감성을 깨운다. 마치 타티가 살아돌아와 직접 감독하고 지휘한 영화같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이 영화 역시 기계문명과 소비문화 속에서 개인은 소외되고 변두리에서 알콜 중독이 되거나 구걸을 한다. 삼류 마술사의 사정도 마찬가지여서 가수들이나 본 쇼 공연 막간에 잠깐 시간을 때우기 용으로 사용된다. 그래도 그는 어디든 간다. 스코틀랜드 지방을 여행하면서 어린 소녀를 만나고 마술사는 어린 소녀의 소비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키다리 아저씨가 된다. 어린 소녀가 신발, 외투를 받고 기뻐하는 모습에 마술사는 잠시지만 진짜 마술사라도 된 기분이다.  

그러나 소녀를 기쁘게 하는데 삼류 마술사의 수입은 형편이 없어 대형 백화점 윈도우에 갇혀 신상품을 소개하는 마술 쇼를 벌이는 일을 잠시한다. 거대한 소비문화 속에 꿀꺽 잠식당한 영혼을 마술사는 견디지 못한다. 결국 그는 마술사는 없다는 메모를 남기고 소녀를 떠나지만 시골에서 대도시로 온 소녀는 또 다른 마술사를 만난 것처럼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 물건을 사도 사도 허기진 도시에서 소녀는 잠시 허기를 잊을 수 있는 사랑이라는 마법에 걸릴 것이다. 마법은 언젠가는 풀리기 마련이지만.  마술사는 마술이 필요한 또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선다.  마술사는 없지만 마술사 같은 마음을 지니고 누군가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게 그의 일이다.

2. 이런 쓸쓸한 이야기를 동화적 감성을 더해 아름답게, 말그대로 그려냈다. 부활한 윌로 씨의 걸음걸이나 등이 구부러진 각도, 머리를 숙일 때 목이 기우는 각도, 바지단과 신발 사이에 보이는 양말..영화를 보는 것 같다. 또 기차 여행을 하면서 차창 밖을 보며 감탄하는 표정에 감탄 또 감탄. 정처없이 기차에 올라 탄 마술사가 떠난 에딘버러 도시는 하나 둘 불이 꺼진다. 더 이상 마법이 없는 도시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회색빛으로 남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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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카피하다 - Certified Co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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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상이 예술품이라는 판정은 누가 내리며 그 기준은 뭔가. 찾아 보는 이가 많고 보면서 감흥을 얻는 모든 것은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다. 원본보다도 더 그럴듯한 복제의 풍요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철 지난 담론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예술품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결국 예술은 삶의 파편일 뿐이다. 그렇다면 원본인 삶과 사랑도 원본과 복제가 있을까. 영화는 원본과 시뮬라크르에 대한 지루한 대화 사이에 한 남자와 여자의 삶에 관한 대화를 끼워넣는다. 여자가 예술품이라고 여기는 삶은, 남자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는 삶이다. 남자한테 예술적 경지의 삶은 자신의 영역을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게 굳건하게 막는 일이다. 길을 걸으면서 두 사람의 삶을 막 시작한 신혼부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중년부부, 걸음을 옮기는데 서로의 팔이 필요한 노부부를 카메라에 담는다. 그 누구의 삶도 가짜가 아니지만 누구의 삶이 예술적인지 알 수 없다. 누구의 삶이 예술의 경지라고 말하는 건 순전히 구경꾼의 입장이므로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주체는 예술의 조건 따위 보다는 그 순간의 소소한 즐거움에 더 관심이 있을 터이다. 문 밖에 놓인 의자에 앉아 함께 볕 쬐며 지나가는 사람들 보는 즐거움은 예술품을 보는 것보다 더 가치있을 수 있다.  

영화 속 남자와 여자는 일상에 대한 근본적 시각의 차이를 좁히지 못한다. 남자는 사소한 습관도 버릴 수 없으며 여자는 남자의 그런 점이 못마땅하지만 지친 마음을 내려놓을 곳이 남자라고 여긴다. 두 사람이 실제 부부였는지 아님 처음 만난 사람인지 모호한 경계 속에서 여자의 고단한 삶이 퍼즐처럼 조금씩 드러난다. 
 

2.

처음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영어로 대화를 한다. 마을 광장에 있는 조각상을 보고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여자의 모습에서 숭고한 예술적 기품이 들어있다고 여자가 말한다. 한 중년 남자가 남자에게 슬그머니 충고를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든 지금은 그저 여자의 어깨에 손을 가만히 얹어주기만 하면 된다고..남자는 주춤거리며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그리고는 두 사람의 대화는 여자의 모국어인 불어로 바뀐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다시 의견을 달라지는 지점에서 남자는 자신의 모국어 영어로 여자는 불어로 대화를 한다. 사람의 관계는 이런 게 아닐까. 어느 순간에는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에 친숙해졌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은 낯선 외국어가 돼버리는. 아무리 친근한 사람 사이에도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에 존재하는 극복할 수 없는 뉘앙스의 벽이 늘 존재한다. 두 언어 간에 존재하는 뉘앙스의 벽이 무너지는 건 인간 세계에서 가능하기는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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