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웃 케빈 - We Need to Talk About Ke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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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틸다 스윈톤이 나온다. 틸다 스윈톤은 참 묘한 매력의 소유자시다. 화장기 하나 없이 지치고 주름도 깊은 얼굴에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겸비해서 초췌한 모습을 보여주시는가 하면 립스틱만 살짝 발라도 얼굴이 화려해진다. 게다가 어떤 옷을 입어도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헐렁한 바지와 셔츠같은 작업복을 입으면 원래부터 그런 옷만 입었던 사람같다. 그러나 여성스러운 실크 원피스를 입는 순간 우아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배한다. 이 모두 한 사람이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이 영화는 틸다 스윈톤의 A부터 Z까지 발견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극중 캐릭터가 굴곡있는 인물이라 성격 변화 폭이 큰데 틸다 스윈톤이 변하는 폭의 넓이와 깊이기만 바라봐도 영화 내내 시간가는 줄 모르겠다.  

그리하여 영화 보고 나서 검색을 좀 해 봤더니 원래 모델이었다고 한다. 키180cm! 뭘 입어도 아우라가 풍기는 게 일반인이 아니다. 얼마전 단색 머플러를 사려고 인터넷을 좀 뒤졌더니 수긍할 수 밖에 없는 말을 만났다. 머플러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라고. 같은 머플러를 간지 나게 매는 사람들 보면 고개를 숙이게 된다.ㅜ.ㅜ 아무튼 틸다 스윈톤은 뭘 갖다줘도 간지나는 스타일인데다가 표정도 연기도 한 간지 하신다.  

2. 초췌하고 불안하게 멍한 시선으로 등장하는 에바(틸다 스윈톤). 영화 전체는 피를 상징하는 붉은 이미지로 가득차 있다. 첫 장면도 토마토 축제로 시작한다. 온 몸에 붉은 토마토 즙이 뿌려지고 에바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축제 관객들의 손에서 손으로 누운 채 옮겨진다. 일상도 조각조각 드러난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뺨을 맞고 욕설을 들어도 그녀는 당황하지만 화를 내지도 저항하지도 않는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조차 그녀에게 무관심하거나 냉담하다. 그녀의 과거가 도대체 어땠길래,로 이어진다. 집에서도 쉴 수 없는 건 마찬가지. 악몽같은현재 사이에 플래쉬백이 이어진다.  

케빈이란 아이의 엄마가 된 에바. 자상한 남편과 아이를 키우기 좋은 환경에서 케빈은 엄마와의 관계가 좋지 않다. 케빈의 내재된 폭력성은 유전적이거나 환경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싸이코패스의 어린 시절인데, 이 영화는 서술 관점이 다르다.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총기 사건을 소재로 하지만 기존의 영화들과는 많이 다르다.

많은 매체들이 싸이코패스의 기괴한 행각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 영화는 싸이코패스의 가족, 특히 모성 혹은 엄마한테 초점을 맞춘다. 어린 시절 케빈의 폭력성은 유독 엄마에 대한 반항심으로 나타난다. 병원에서 생물학적 이상이 없다는 말에 엄마는 케빈의 폭력성을 자신의 탓으로만 돌리는 경향이 있다. 모든 엄마는 이성이 없다, 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모성은 아이의 폭력적 성향의 심각성을 간과한다. 아이의 폭력성이 치료를 받을 단계라는 걸 어느 누구도 인식하지 못한 채 그저 좀 난폭한 아이라고, 부모는 여긴다.  

그러나 부모가 양육하면서, 그리고 아이가 사고를 친 후에 겪는 후 폭풍의 고통은, 실제로 아이보다도 더 클 수 있다. 소년원에 있는 아들한테 엄마는 묻는다. 왜 그랬니?하고. 아들은 대답한다. 전에는 이유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런지 모른다고. 이제는 살인자가 된 아들. 엄마는 아들이 불편하지만 여전히 사랑한다. 엄마가 아들을 사랑하는 일이, 자신이 살인자인처럼 사람들이 취급해도 불평없이 겪어내야 하는 일이 돼버린다.  

희망없는 아이와 그 아이를 지켜봐야하는 엄마의 운명. 아이의 감정없는 말은 엄마의 앞으로의 삶도 가망없다는 걸 암시한다. 엄마에게 형벌로 다가온 아들이지만 버릴 수 없는 천륜의 끈을 보게 한다. 답이 안 나오는 문제 제기다. 그래서인지, 케빈에 대해 얘기 좀 해보자, 다. 제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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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치니의 여인 - Puccini and the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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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매력적인 매체라는 걸 다시금 일깨워주는 영화다. 이 영화는 대사가 전혀 없이 편지를 읽는 내레이션과 음악만으로 이루어졌다. 푸치니가 '서부의 여인'을 작곡한 과정을 영상화하는데 19세기 그림들을 카메라로 담아 보여주는 것처럼 회화적이다.  

토스카 지방의 토레 델 라고 마을이라는데 옆집에는 숟가락이 몇 개있는지 다 알 거 같은 조그만 마을이다. 저녁이면 마을의 작은 바에서 음악이 흐르고 얼마 안 되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기도 한다. 푸치니의 저택을 중심으로 펼쳐진 평민의 집에는 소박한 일상이 살랑이는 바람에 드러난다. 집앞에 빨랫감이 걸려있는 그림처럼 평온한 장면에 한 여인이 빨랫감을 걷으러 나오고 들어갈 때까지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는다. 서사에 필요없을 것만 같은 장면도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라니. 여자가 빨랫감을 안고 문을 닫고 안으로 사라지고 미풍이 나뭇가지를 쓰다듬는데 이런 장면에서도 눈을 뗄 수 없다.   

푸치니의 연인이라고 의심받은 한 젊은 하녀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잔인한 이야기가 이 아름답고 평온한 마을을 배경으로 일어난다. 푸치니의 아내가 하녀를 질투하는 장면 역시 시적으로 표현된다. 격정이나 질투, 분노가, 대사가 아닌 단호한 걸음걸이나 옷자락이 펄럭일정도로 휙 돌아서는 움직임, 또 몰래 숨어서 하녀를 응시하는 시선들로 격하게 전달된다. 최소한의 언어적 정보와 인물들의 극적인 동작들과 음악과 더불어 시각적인 비언어적 정보들로 미스터리같은 줄거리를 흥미롭게 따라가고 마지막에는, 아, 하는 감탄사를 지르게 만드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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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치니의여인 2011-11-28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 마이 갓! 리뷰 최고에요.. 눈물이 나오는 감사합니다.

넙치 2011-11-29 12:05   좋아요 0 | URL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가 최고여서요.^^
 
캔자스 시티 - Kansas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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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캔자스 시티를 배경으로 만 하루동안 일어난 일을 그린다. 헤이헤이 클럽에서는 영화내내 재즈가 울려퍼진다. 흑인 갱단의 아지트기도 하지만 대공황 당시 캔자스 시티는 번영했다고 한다. 마약, 술등 검은 돈에 개방한 정책 도시라고 하는데 감독은, 캔자스 시티 출신으로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영화 속에 촘촘이 짜냈다고 한다. 헤이헤이 클럽 장면은 귀도 흥겹고 눈도 흥겹다. 밖에서 사람이 죽어 개 밥이되든, 안에서 보스가 뭘 하든 색스폰 연주자들은 색스폰을 부는데 열중하고 피아니스트는 피아노에만 춤을 추는 이는 음악에따라 몸을 열심히 움직인다. 클럽 안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넘실거리며 흥에 겨운 사람들의 움직임과 섞인다.    

걸쭉한 재즈 선율과 달리 줄거리는 섬뜩하다. 흑인 갱한테 잡혀간 남편을 구하기 위해 대통령 고문의 부인을 블론디가 납치한다. 납치범 블론디가 인질 캐롤린을 데리고 다니면서 동네를 한바퀴 돌면서 캔자스 시티의 이모저모가 퍼즐조각처럼 드러난다. 주유소, 극장 밖, 두 여인의 의상은 에드워드 호퍼 그림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 호퍼의 공간이 공허와 쓸쓸함으로 채워졌지만 영화 속 공간은 계급과 인종에 대한 차별, 선과 악의 혼재, 부정한 선거와 정치 부패로 채워진다. 알트만 감독이 주로 다루었던 주제들로 두 여인의 동선을 따라 배경으로 차오른다.  

흥미로운 건 납치범 블론디와 인질 캐롤린의 관계다. 블론디는 로맨티스트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장기 기관의 일부라고 여긴다. 캐롤린은 백인 상류층이고 짐작건대 공허함 때문에 아편중독자가 되었을 터라 블론디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 몽롱한 눈빛을 보낸다. 두 사람은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친구처럼 대화를 주고 받는다. 나중에 캐롤린은 오히려 대화 상대자들을 만나 즐거운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블론디는 납치범으로서 마음가짐도 점점 희미해지면서 자신의 속마음을 캐롤린에게 털어놓는다. 잠시 두 사람은 진짜 친구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캐롤린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층은 친구도 기회가 닿으면 죽일 수 있는 법이라고 말하는 것같다. 캐롤린은 블론디를 죽이고 냉랭한 얼굴로 유유히 블론디의 집을 빠져나온다. 헤이헤이 클럽에서는 아무일 없다는 듯이 여전히 재즈 가락이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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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볼 - Money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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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기 전에 스포츠 영화에 실화라니...게다가 할리우드에서 만들었으니 얼마쯤은 지레짐작했다. 결국 그저그런 휴먼 드라마겠거니하고. 그러나 야구는 소재일 뿐이고 자본주의에 대한 메타포를 뿜어내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야구사를 알면 좀 더 흥미롭겠지만 야구사는 물론 야구 룰을 몰라도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이 영화는 흔한 감동의 스포츠 드라마가 아니다.  

1. 영화를 보면서 가장 놀랐던 점은 선수들을 트레이드하는 모습과 그 과정이었다. 어제까지 보스턴 레드 삭스에서 뛰던 선수가 다음 날엔 오클랜드 아틀랜틱스 유니폼을 입을 수 있다. 선수가 어떤 구단에 속할지 선수 스카우터한테 일방적 통보를 받는다. 구단의 단장general manager은 팀을 하나의 생산라인으로 보고 선수들은 주요 부속품으로 본다. 선수들이 연봉 만큼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면 부진한 기량을 감가삼각비처럼 팀을 운영하는 원가에 포함시켜 계산한다. 선수의 수명은, 경제학적 원리에 따라 신제품이 될 수도 있고 출시되자마자 중고시장으로 직행할 수도 있다. 일반적 노동시장 보다 더 가혹한 것처럼 느껴졌다.   

2. 이 영화는 야구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팀의 이야기가 아니라 빌리 빈이라는 한 개인한테 초점이 맞춰진다. 빌리 빈은, 유망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거액 연봉을 받고 프로팀에 스카우트 된다. 야구의 승리를 9회말까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듯이, 빌리 빈의 잠재력은 그야말로 잠재력으로 끝난다. 그의 잠재력의 가치를 기꺼이 사고자했던 구단들은 이제 그의 가치를 믿지않는다. 시장에서 상품의 잠재적 가치는 가시화될 때 그 상품성이 있다. 빌리 빈은 시장 경제의 논리에 상처를 입었지만 시장 경제의 논리를 직접 야구계에서 실험한다. 모두가 승률에 집착해 승률을 올리는데 필요한 비용을 간과하는 점을 꿰뚫는다. 선수의 장점을 정확한 수치로 기록해 모든 선수를 확률로 시뮬레이션한 후 포지션을 맡긴다. 확률의 정확성을 믿을지 말지는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의 몫이다. 영화 중간에 나온 해설자의 말처럼, "야구는 숫자로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한다. 숫자가 할 수 없는 걸 해야한다." 이 말은 사실이기도 하고 사실이 아니기도 하다. 경제 이론이나 확률은 많은 데이터의 통계로 사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로 미래를 예측할 때 비논리적 주관성이 개입돼야한다. 그러므로 미래 승률 예측은 아무리 예일대 경제학 출신의 머리도 무기력해보일 수 있다.  

3. 이런 이론적 토대를 밀고 나가는데는 꿋꿋한 신념과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 빌리 빈이 자신의 과거 트라우마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불굴의 신념을 마주하게 된다. 과거 시장에서 개발비용을 아끼지 않았던 최상품이었다가 출시된 후 별 반응을 얻지 못한 그저그런 상품으로 바뀐 과정에서 자본의 상징적 가치를 깨닫는다. 가치는 함께 원하는 이가 있을 때 생긴다. 아마존 밀림에 사는 부족한테 5만원권 지폐 다발을 아무리 많이 가져다줘도 소용없듯이 가치는 관계에서 파생된다. 빌리 빈은, 야구 시장에서 무의 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무시를 받지만 신념으로 관계를 이루어낸다. 결국 그가 자신의 가치를 올리는 걸 목적으로 하지 않았더라도 경영비 절감을 위해, 시장은 그를  원한다.  

4. 그의 선택은? 여기서도 영화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야구단장으로서 몸 값이 야구사상 최대로 치솟았지만 그는 시장에 팔리는 상품이 되길 거부한다. 그의 마음은, 영화에서 표현되는데, 최상품 가치를 계속 유지해야하는 압력을 피하고 싶어한다. 그럼 그는 루저일까. 영화는 12살 난 빌리 빈의 딸이 수줍게 부르는 노래로 끝을 낸다. "아빠는 루저...그저 쇼를 즐겨요", 하고. 시장에는 최상품의 물건만 나와있다면 소비자의 선택 폭은 줄어들어 시장은 위축될 것이다. 허접한 물건들도 있고 중간인 물건도 있을 때 최상품은 그 가치가 올라갈 것이다. 소비는 활성화되고. 빌리 빈의 역할이란 바로 이런 야구 시장 활성화를 위한 것이자 세상에 많은 루저들이 꼭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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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 오브 라이프 - The Tree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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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과학관을 갔을 때 어떤 웅장함을 느꼈다. 사방은 하얀 벽이고 둥근 돔 천장을 올려다 보는 자세로 앉았다. 불은 꺼지고 둥근 돔 때문에 소리는 울렸다. 스피커에서는 에코 가득한 고요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곧 별자리들이 둥근 천장에 등장했고 슬라이드 필름이 바뀔 때마다 내가 돌고 있는 환각을 체험했는데 불이 켜지니 초라한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웅장함은 물리적 장치들과 분위기에 압도돼서 겪었던 것이지 진짜 웅장함이 아니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장엄함과 숭고함을 느꼈다. 그런데 이 장엄과 숭고함이 기분 좋은 느낌이 아니라 불쾌했다. 장엄하고 숭고한 영화를 보고 왜 불쾌했나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리고는 어릴 시절 기억 속에서 만들어진 장엄함을 찾아냈다. 

영화는 분명히 범작은 아니다. 시종일관 압도하는 아우라가 있는데 이 실체가, 나는 마뜩잖다. 그 이유는 많은 기술적 조작 탓이다. 

첫째, 이 영화의 웅장함을 만드는데 카메라 움직임의 힘이 크다. 사소한 장면도 카메라는 일반적 방법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가령, 손을 잡는 일상적 장면도 빠르게 카메라가 줌인으로 달려들어와서 클로즈업을 잠깐 해주고 바로 위로 트랙 아웃해버린다. 화면에서 눈이 포착하는 건 손을 잡는 행위나 손의 실체보다는 카메라가 훑고 지나가는 잔상이다. 거의 모든 피사체들을 줌인과 아웃을 빠르게 사용해서 왜곡으로 인한 착시를 만든다. 카메라의 렌즈는, 어떤 한 절대자의 시선처럼 느껴진다. 이 절대자같은 시선으로 카메라는 사람, 풍경을 바람처럼 스치며 아래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자유자재로 본다. 근데 이게 이상한 게 보통은, 내 시선이 카메라 렌즈와 일치해서 프레임을 지배하는 체험이 일어나야 하는데 이 영화는 카메라의 렌즈로 프레임이 관찰당하는 느낌이 묘하게 든다. 

둘째, 음악의 과다 사용이다. 이 영화에 사용된 음악은, 아주 아주 좋다. 눈을 감고 음악만 들어도 경건하고 무언가 마음이 일렁일 정도로 흡입력이 있다. 조용하고 묵상적이며 그래서 종교음악 같기도 하다. 엄청난 파워를 가진 이미지들 뒤로 흘러나오는 음악의 힘은 폭발적이고 내내 집중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 영화에서 음악은 양날의 검이다. 음악으로 감정을 움직이는 영화는 비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셋째, 메시지가 너무 설득적이다.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가정에 한 아이의 죽음이 닥친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고통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아이 어머니는 "당신은 어디계시나요? 대답해주세요"하면서 20여분 동안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볼 수 있는 황홀한 이미지들이 군무를 춘다. 빅뱅부터 공룡 시대를 거쳐 바다와 지상의 만물들이 생명을 얻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대체 저런 이미지에 대한 상상력의 원천은 어디일까, 궁금할 정도다. 죽음과 탄생을 동일시하고 원죄 혹은 속세의 삶에 대한 구원을 지향하는 쪽으로 영화는 결론을 내버린다. 마지막 장면은 환상적이며 이런 메시지를 응축하고 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합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불멸로 이르는 낙원처럼 빛으로 넘쳐나고 땅도 하얗다. 사람들은 웃으며 바람결에 따라 발걸음을 옮겨 마치 기쁨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모든 장치들이 내겐 너무 설득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아주 엄청난 영화지만 감동보다는 조작된 감동을 강요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게다가 난 내세에 대한 열망이나 환상이 없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 사과 나무를 심겠다는 말처럼 자신의 일을 하는 게 죽음을 대하는 자세라고 믿는 편이다. 우주의 전체적 흐름이나 알수 없는 초자연적 힘은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많은 부분이 절대적 힘이 아니라 개척 가능하며, 인생에서 마주치게 되는 시련이나 크고 작은 선택들도 자신한테서 비롯된다고 여기는 편이다.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힘은 있지만 화해나 용서같은 정서적 문제는 모두 각자의 그릇이 있고 그 그릇에 뭘 담을지는 자신이 결정한다고 믿는다. 이런 내게, 이 영화는 지나치게 숭고해서 반감이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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