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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의 갱들 - A Fistful Of Dynamit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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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어제 EBS영화를 오랜만에 집중해서 봤다. EBS 세계명화 프로그래밍에 늘 경의(!)를 표하지만 같은 시간대에 경박한 리얼리티 오락 프로그램에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석양의 갱들이야 구하기 힘든 영화도 아니고, 아트씨네마에서 주기적으로 상영하는 영화기도 하다. 그러니 어제 EBS에 채널이 고정된 건 요즘 내 심리 상태를 암시한다고 하겠다.  

십대 때, 일요일 밤 10시에 불 끄고 누워서 명화극장과 함께 행복으로 충만한 두 시간 가량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일방적 프로그래밍을 수혈받는 수동적 입장이었고 영화도 지금보다 훨씬 귀했던 때지만 행복 지수는 그 시절이 더 높은 것도 같다.  

이 영화도, 기억 속에 뒤죽박죽 섞인 서부영화 중 한 편이다. 한동안 서부영화를 줄기차게 해주던 시절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군사독재 시절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도 싶다. 영웅중심주의, 선과 악의 대결구도는 반공시절과 접합점이 많기 때문에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르이기도 했을 것이다.

<석양> 시리즈들이 모두 생각나는 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서부영화하면 떠으르는 획일적 서사와 달리 이 영화는 멕시코 혁명에 녹아든 개인의 비극을 다룬다. 은행이나 털어서 띵가띵가하게 사는 게 꿈이었던 후안이 혁명군 존을 만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혁명군 핵심에 있게 된다. 혁명으로 자식을 잃고 친구도 잃는 후안에게 혁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중얼거린다. 결국 혁명이란 똑똑한 놈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 위에서 잘 사는 거 아니냐고. 어쩌면. 아무리 위대한 대의명분도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없다면 혁명이 아니라 폭정이고 억압이다. 후안은 혁명에서 영웅이 되었지만 즐길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혁명을 위한 대의명분은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고 초심은 변한다. 다이너마이트 전문가인 존은 이렇게 말한다.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많은 것을 믿었다. 이제 나는 다이너마이트만 믿는다." 그가 우수에 잠길 때, 회상장면에 인서트 컷들로이 사용된다. 이 장면들을 통해 그 역시 사랑하는 연인을 잃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가 혁명에 회의를 품지만 중단할 수 없기에 계속하는 심정을 엿볼 수도 있다.  

인간의 운명이란 존과 후안이 겪은 것 처럼,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길을 따라 걸어가야하는 거 같다. 피곤함 속에 이따금씩 피어나는 미소에 힘을 얻고서 신발끈 고쳐 매고 오늘은 어제와 다르겠지하는 희망을 껴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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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SE (슈퍼쥬얼 케이스) - 2007년 인디영화 최고의 화제작!감독, 주연배우 음성해설수록
존 카니 감독, 글렌 한사드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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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난 금요일, 바람 불며 비가 사선으로 내렸다. 우산은 뒤집어지고 비는 고스란히 옷에 와 닿았다. 출시되기 전에 주문해서 출시되자마자 받고 뜯지도 않고 지내다 금요일...드디어 개봉했다. 감독의 말대로 비오는 날 뮤직 비디오처럼 틀어놓고 차도 마시고 뒹굴거렸다. 이런 순간을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극장판과는 조금 달랐다. 내 기억이 맞다면 가이의 회상 장면이 극장판에는 없었는데 디비디에는 들어갔다. 내러티브상 큰 변화가 아니었고 음악이 흐르고 영상이 나오는 그런 정도였다. 여전히 영화는 달콤했고, 파란색 후버 청소기를 끌고 더블린 시내를 누비는 걸의 모습은 다시 봐도 인상적이다.  손 때묻은 기타에서 풍기는 잔잔한 여운처럼 음악은 격렬하면서도 서정적이어서 마음을 적신다.   

삶을 살아간다는 게, 또 사랑을 하는 게 꼭 극적인 게 아니라 가랑비처럼 주어진 시간을 서서히 메우는 거라는 걸 영화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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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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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십 분 거리에 있는 집 앞 멀티플렉스는 유난히 커플들이 많이 오는 극장이다. 오늘 발렌타인 데이고 토요일이며 저녁이라 왠만하면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짬나는 시간이 아까워 극장으로 향했다. 영화 시작 30분 전에 도착했고 역시나 커플들이 득실거렸으며 <벤자민 버튼>은 딱 1좌석 남아있었다. 좌석이 나쁘면 다시 돌아오려고 했는데 남아있는 좌석은 '명당'이었다. 예매했던 누군가가 커플들 꼴보기 싫어 취소한 건 아닐까 상상했다. 한 가운데 좌석은데 양 옆으로 커플들의 대화까지 엿들으면서 기나긴 영화를 봤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로 적절한 감동과 교훈이 곳곳에 드러난다.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해, 그러니까 부러워할 것도 없고 슬퍼할 것도 없어. 그저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다해 살아가면 돼, 하고 말한다.

거꾸로 가는 생체 시계를 가지고 태어난 벤자민. 늙은 모습으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나이들수록 젊어지는 벤자민의 일생 주기는 어쩐지 처절하다. 나이드는 게 그러니까 꼭 나쁜 것만은 아니고, 젊다는 게 꼭 좋은 게 아니야,하고 역설하고 있지만 나이들어가고 있는 내 입장에서, 맞아하고 맞장구가 잘 쳐지지 않는다. 세월의 두께가 눈가를 비롯한 얼굴 곳곳에 드러나는 요즘은, 흥분도 덜하고 욕심도 적어졌지만 동시에 감동도 덜하고 희망도 절망도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계속 살아가도 좋지만 다른 삶을 살아도 괜찮아(평소에 이렇게 생각했는 데 세상에나, 이 말이 영화 속에 나온다!)하는 태도는 젊음이 사라져가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태풍 태양>에 이런 대사가 있다. 젊음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과거를 돌아보지도 않는다. 이십 대에 가졌던 자신감은 사라진지 오래고 그 자리를 체념으로 채워 넣는다. 체념은 자신의  좌표가 어디에 있든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다. 젊은 외모를 잃어버려서 슬픈 게 아니라 어린 시절에나 가질 수 있는 무모한 열정을 잃어버려 나이든다는 건 슬프다.  

이렇게 심각한 영화는 아닌데, 혼자 심각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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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2-20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풍태양의 대사를 기억하고 계시군요. ^^

넙치 2009-02-25 00:59   좋아요 0 | URL
요 대사만 인상적이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자벨 아자니의 포제션 - Possessio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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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대의 이자벨 아자니를 볼 수 있는 영화다. 내면 묘사 선이 크게 출렁대는 캐릭터들을 주로 연기한다. 이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광녀의 모습으로 몰입한다. 아름다운 두 눈과 가날픈 몸으로 스크린 가득, 내면의 고통을 뿜어내서 가끔 질식할 것 같다. 그녀가 힘들어할 때 스크린을 통해 전해져오는 것 같다.  

2. 안드레이 줄랍스키의 정신 세계, 독특하다. 이 영화를 만들었을 때 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이라고 했는데 그 고통을 영상을 통해 옮겨 놓는 재주. 요거 부럽다. 어떤 특별한 내러티브가 아니라 사람이 하루에 가질 수 있는 오만 생각을 영화로 만들 수도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루 종일 한 가지 생각만 하는 사람은 드물게다. 오전에 심드렁했다가 커피 한 잔에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누군가의 사소한 말 한 마디에 짜증이 나기도 하고...뭐 이렇게 생각은 하루 종일 바이오 리듬 그래프를 그린다. 이런 생각들은 파편적이고 일시적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에 정신 건강에 크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한 찰라를 돋보기로 확대해서 분석하자면 안드레이 줄랍스키가 만든 영화처럼 보일 거 같다.  자신의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 채 내뱉기도 하고 거울을 통해 본 표정과 머릿속에서 실제로 짓는 표정이 다르기도 하면서. 무의식과 의식을 오가며 이성이 숨겨진 악을 지배하고 때로는 악이 이성을 누르는 이런 무의식의 과정을 영상으로 표현했다.  

3. 영화를 감싸는 분위기의 색조는 군청색이다. 핏기가 없어서 서늘하지만 늘 단정한 색이어서 주변에 녹아들 수 있는 색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는 이런 군청색 빛깔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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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2-10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혹적인 이자벨 아자니의 뒷모습이군요.
보고싶은 영화로 가져갑니다.^^
군청색 분위기의 영화라니..

넙치 2009-02-10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안한 영화는 아니지만 매력있는 영화입니다.^^

비로그인 2009-08-02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척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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