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트리스 - Rest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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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거스 반 산트 님의 영화다. 거스 반 산트 감독은 잡히지 않은 심리를 포착해서 구체화하는데 능하다. 구글 검색으로 몇 건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즉흥적이다. 코엔 형제가 쓴 시나리오를 보면 빛의 각도까지 이미 설정한 채 촬영하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게리>를 제작한 동기를 보면, 옆 집에 벤 애플렉이 살고 맷 데이먼은 자주 자기 집에 놀러왔다고 한다. 그래서 함께 영화를 찍게 됐다고. 거스 반 산트 감독한테 나름의 경애심을 지니고 있던 터라 영화 제작 동기를 읽고 나니 살짝 허무해지기도 했다. 비장한 일상이나 감정보다는 세 사람이 수다 떨다가 시나리오 쓰고 촬영한 영화라니!

사실, 모든 결과가 구체적이어서 그렇지 모든 일은 시작 단계에서는 즉흥적이고 추상적일 수도 있다. 우리가 결과 지향적이라 과정도 계획적일거라고 단정해버려서 오해를 하는 것일 뿐.. 이 영화도 NYU 학생 시나리오로 작업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 뭐랄까..영화를 보면서 내가 기대하고 갔던 산트 님의 감수성이 아주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어쩐지 산트 님이 잘 다루는 근원적 고통보다는 순정만화처럼 고통이며 행복이 추상이 아닌 피상적으로 표현된다. 그렇다고 영화가 형편 없는 건 결코 아니다. 신파로 흐를 수 있는 서사를 어떤 영화적 장치들로 극복해 내는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결론은 거스 반 산트 감독은 어떤 이야기도 영화로 만들 수 있는 초능력자시다. ㅎ 

영화 이야기를 하면,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소년이 있다. 소년은 학교도 그만두고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 유령과 소통하며 지내다 어느 날 한 소녀를 만난다.  소녀는 뇌 종양이 재발해 살 날이 3개월 밖에 안 남았다. 소년 소녀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자체 발광하는 나이인데 각자의 아픔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조금 다르다. 소년이 칩거한다면 소녀는 밖으로 적극적으로 나선다. 아주 강렬하고 애틋한 사랑으로 서로는 조금씩 변한다.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잊고 상처에 딱지가 생겨 단단한 새살이 돋아난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어도 추억만은 마음 속에 남아 미소짓는다는....이런 이야기인데 두 배우가 정말 만화 속 주인공들처럼 늘씬하고 아름답다. 아쉬운 건 느낌은 없고 아름다움만 남는 영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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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티풀 - Biutiful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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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는 무거워서 일단 심호흡을 하고 봐야한다. 한 현상에 대해 누구나 상반된 견해를 가질 수 있다. 이냐리투 감독의 통찰력은 부질없는 희망을 품기보다는 비극적 상황에서도 일상을 버티는 실존적 자세로 나타난다. 아름다움은 섣부른 낙천주의가 아니라 회의적 실존에 있다고 믿는 사람같다. 

이 영화는 바르셀로나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는다.  바르셀로나, 하면 이방인은 대부분 우디 앨런의 영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낡은 건물들이 만드는 골목과 가우디가 주름 잡는 람블라스 가 언저리에서 사랑에 대해 고민해야하는 도시 분위기. 이냐리투 감독은 우디 앨런의 바르셀로나와는 완전히 상반된 이미지를 담는다. 

바르셀로나에서도 저런 일이, 할 정도로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불법 이주 노동자들의 처참한 근무환경과 죽음 속에서 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은 힘겹게 하루하루 살아간다. 이주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해서 집세를 내고 아이들에게 먹일 빵을 산다. 도시만 두 얼굴을 가진 게 아니라 사람도 두 얼굴을 가졌다. 욱스발은 이주 노동자들 브로커지만 자신의 아이들한테는 책임감을 다 하는 가장이다. 암이 온 몸에 퍼져 죽어가는 중에도 죽음의 두려움 보다는 보호자 없이 남겨질 아이들의 암울한 미래를 더 걱정한다. 욱스발이 처한 상황은 불법 이주 노동자들 처지보다 나은 게 없다. 죽어가면서 아이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일 년치 집세를 미리 마련해 놓는 일이다. 그것도 이주 노동자들의 목숨으로 얻었다. 사는 건 뷰티풀하지 않다. 비우티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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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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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읽은 스티브 테일러가 쓴 <자아폭발-타락>이란 책은, 인류학적 관점에서 불안과 소외의 기원을 찾는다. 원시인한테는 없는 불안과 소외는 문명화 이후에 등장했다.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무화과 열매를 먹기 전에 육체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었다. 육체는 육체일 뿐 가리거나 부끄러운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의 성생활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낙원에서 쫓겨나기 전에 그들은 행복했다. 농경 사회의 시작이 모계사회를 부계사회로 바꾸었고 육체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농경 사회 이전에 원시인들은 아담과 이브처럼 육체를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고 비교적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겼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육체는 소유주가 없으며 누구와도 교환 가능한 대상이었다. 육체에 대한 소유 개념이 태어난 것도 타락으로, 저자는 간주한다.   

<쓰리>란 영화는 이런 원시인의 생물학적 상태로 돌아가자는 조금 황당한 주장을 한다. 생물학적 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안녕을 고하라고 한다. 문제의 주인공은 양성애자에 이름도 아담이고 직업도 줄기세포 연구가다. 아담에게 세포는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있도록 확장할 수 있는 최소 단위다. 이런 믿음을 실생활에서도 직접 실천한다. 영화 시작부분에서 "미학적 지식은 자기반영적이고 경험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아담은 자신의 연구 미학을 실천하고 경험하는 인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20년 동안 동거 후 이별이 아닌 결혼을 선택한 부부가 있다. 20년 간의 함께 산 이들은 권태 속에서도 제도권에서 인정하는 안정을 선택하는데 아담을 만난 후 부부는 원시인이 누렸을 육체적 해방을 누린다. 그런데 영화가 기대는 진화론적 관점은 인간한테는 쉬운 게 아니다.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다. 원시인보다 뇌가 몇 배나 커져 받아들이는 정보와 처리하는 정보량이 말할 수 없이 복잡해졌다. 게다가 문화란 비유전자적 요소는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도 있다. 생물학적 성을 무시하는 게 아담한테 간단한 데 부부한테는 간단할 수 없다.  

여기서 영화는 결말을 향해간다. 진화론적 결말을 택한다. 그러나 진화론은 수긍하기에는 허점이 많다. 이 영화 역시 그렇다. 인물들이 감정 때문에 고민한다. 그런데 이 감정이란 게 이 영화에서는 전적으로 성적 쾌락이다. 쾌락은 뇌 중추에서 담당한다는데 영화 속 인물들은 뇌의 여러 영역 중에서 쾌락 중추에만 집중한다. 흥미로운 건 인물들 모두 소위 배운 이들이다. 사유나 사고 위에 육체적 쾌락을 두는 형식이지만  진화론은 뭔가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이들이 생물학적 성 개념을 이탈하면서 얻는 게, 그러니까 동물스러워보인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내 이런 생각도 타락이고 불안하게 사는 근원일테지만 원시 상태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한 거 아닌가. 원시상태를 흠모하고 모방하는 밀교 집단을 만들지 않는 한. 정신을 배제한 신체냐 신체를 가두는 정신이냐, 선택은 각자의 몫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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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인 - The Cli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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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 때문에 개봉하자마자 봤다. 하정우, 박희순. 이 두 배우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행복하다.ㅋ뭐 한국형 법정 스릴러인데 실망스럽네...하지만 난 아주 재밌게 봤다. 리처드 기어와 에드워드 노튼이 출연한 <프라이멀 피어>를 봤다면 당연히 <의뢰인>은 모작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은다. 그러나 모방도 창조의 과정이다. <프라이멀 피어>가 싸이코패스의 섬뜩한 인상을 진지하게 풀어간다면 <의뢰인>은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는 영화다. 

자칫 지루하기 쉬운 평이한(?) 스토리를 훌륭하게 살린 요소들이 많다. 쇼트 배치 속도가 빨라서 인물들이 같은 장소에 있지 않아도 서로 대화를 주고 받는 걸 보고 있는 것 같다. 영화를 이루는 요소는 많다.  그 중 어떤 영화적 요소들 사용하면 평범함이 비범함으로 바뀌는 지 실험해가는 과정이 한 편의 완성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인물들의 개인기와 편집을 잘 배치해서 재미를 이끌어내는 영화다. 

범인이 누구인지 반전에서만 드러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화가 아니라 추리 소설을 기대하는 것이다. 영화는 영화지 소설이 아니다. 난 스릴러가 범인을 꼭 숨겨놨다가 추리해가는 과정을 관객과 함께 해야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영화 속에 잔재미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미덕이 될 수 있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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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Silenc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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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고 이러쿵 저러쿵 감상문을 쓰는 게 망설여졌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말해야하나...혼자 며칠 고민하다 기록은 나의 힘, 이란 생각에, 본 지 열흘이 지나 불콰함도 잦아들어 몇 자 적는다. 

먼저 이 영화는 아주 많이 불편하다. 실화라 불편한 진실이기도 하지만 재현하는 태도나 방식이 자극적이다. 성추행이나 폭행 장면을 아이들의 구술로 끝내지, 하면서 감독을 탓했다. 아이들이 수화를 하고 공유가 통역을 하는 형식으로 내레이션이 깔리면서 플래시백으로 이어진다.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장면들을 이미지화된다. 이미지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애인이 바람 핀다고 주변 사람들한테 말로 전해 들을 때는 애인에 대한 신뢰는 금이 가긴 하지만 불신이 순도 높은 강도는 아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있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다면 그 사람이 바람 피는 상대가 아니라도 불신의 강도와 분노는 극에 달해서 지옥으로 걸어들어가게 된다. 그러니 이 영화가 재현하는 플래시백의 힘은 심리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온다.

피디 수첩과 소설에서 이미 다뤄졌지만(난 둘 다 보지 못했고 영화만 봤지만) 영화가 만든 이미지 만큼 현장을 목격한 기분은 아닐 것이다. 감독이 표현 수위를 높인 건 상업적 목적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비난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이 표현 수위 때문에 관객이 분노하고 사회적 담론이 일어났다. 결국 인화학교 폐교와 도가니 법을 제정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처음 의도가 칸트적 목적에 맞는 순수한 동기는 아닐지라도 이 영화는 충분히 한 시대의 부패의 일면을 고발하는 역할을  했다. 사실 칸트의 목적론은 이상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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