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읽은 스티브 테일러가 쓴 <자아폭발-타락>이란 책은, 인류학적 관점에서 불안과 소외의 기원을 찾는다. 원시인한테는 없는 불안과 소외는 문명화 이후에 등장했다.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무화과 열매를 먹기 전에 육체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었다. 육체는 육체일 뿐 가리거나 부끄러운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의 성생활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낙원에서 쫓겨나기 전에 그들은 행복했다. 농경 사회의 시작이 모계사회를 부계사회로 바꾸었고 육체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농경 사회 이전에 원시인들은 아담과 이브처럼 육체를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고 비교적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겼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육체는 소유주가 없으며 누구와도 교환 가능한 대상이었다. 육체에 대한 소유 개념이 태어난 것도 타락으로, 저자는 간주한다.
<쓰리>란 영화는 이런 원시인의 생물학적 상태로 돌아가자는 조금 황당한 주장을 한다. 생물학적 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안녕을 고하라고 한다. 문제의 주인공은 양성애자에 이름도 아담이고 직업도 줄기세포 연구가다. 아담에게 세포는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있도록 확장할 수 있는 최소 단위다. 이런 믿음을 실생활에서도 직접 실천한다. 영화 시작부분에서 "미학적 지식은 자기반영적이고 경험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아담은 자신의 연구 미학을 실천하고 경험하는 인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20년 동안 동거 후 이별이 아닌 결혼을 선택한 부부가 있다. 20년 간의 함께 산 이들은 권태 속에서도 제도권에서 인정하는 안정을 선택하는데 아담을 만난 후 부부는 원시인이 누렸을 육체적 해방을 누린다. 그런데 영화가 기대는 진화론적 관점은 인간한테는 쉬운 게 아니다.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다. 원시인보다 뇌가 몇 배나 커져 받아들이는 정보와 처리하는 정보량이 말할 수 없이 복잡해졌다. 게다가 문화란 비유전자적 요소는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도 있다. 생물학적 성을 무시하는 게 아담한테 간단한 데 부부한테는 간단할 수 없다.
여기서 영화는 결말을 향해간다. 진화론적 결말을 택한다. 그러나 진화론은 수긍하기에는 허점이 많다. 이 영화 역시 그렇다. 인물들이 감정 때문에 고민한다. 그런데 이 감정이란 게 이 영화에서는 전적으로 성적 쾌락이다. 쾌락은 뇌 중추에서 담당한다는데 영화 속 인물들은 뇌의 여러 영역 중에서 쾌락 중추에만 집중한다. 흥미로운 건 인물들 모두 소위 배운 이들이다. 사유나 사고 위에 육체적 쾌락을 두는 형식이지만 진화론은 뭔가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이들이 생물학적 성 개념을 이탈하면서 얻는 게, 그러니까 동물스러워보인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내 이런 생각도 타락이고 불안하게 사는 근원일테지만 원시 상태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한 거 아닌가. 원시상태를 흠모하고 모방하는 밀교 집단을 만들지 않는 한. 정신을 배제한 신체냐 신체를 가두는 정신이냐, 선택은 각자의 몫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