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반적인 영화 완성도가 높지는 않지만 대사의 힘이 엄청나게 좋다. 몹시 웃었는데 그 웃음의 진원지를 보면 슬프다. 즉 웃픈 영화. 마약강력반 형사팀이 정의 구현이라는 뜬구름 같은 목표보다는 하나의 직업군으로 설정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박봉에다가 칼 맞을 가능성은 언제나 있고, 근무 환경은 열악하기 이를 데 없다. 잠복근무를 하게 되면 잠을 못 자는 건 말할 것도 없고,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간다. 영화는 추격전으로 시작하는데 전혀 근사하지도 멋있지도 않다. 건물의 창문을 깨고 기습하면 박봉에서 창문 수리비를 걱정해서 창문을 깰까봐 조심하고, 도로에서 추격전 벌이다 16중 추돌 사고를 일으킨 장본인이 돼서 사고 보험료 걱정한다. 기존의 액션 영화들이 깔끔하고 유려한 집단 액션에 집중했다면 영화 초반에 이런 지극히 현실적인 액션으로 루저같은 모습은 재미없을 수가 있지만 유머가 있다. 마땅히 예측할 수 있는 장면을 찌질하게, 실은 극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면서 미친 듯이 웃게 만든다.

경찰 조직의 위계는 어마 무시하고, 실적주이다. 복지 없는 건 당연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범인을 잡아야 능력 있는 형사로 인정받는다. 가정이 있는 형사라면 상황은 더 힘들어진다. 어린 딸의 한때 소원은 용의자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용의자가 되면 범인 잡느라 집에 안 들어오는 아빠를 자주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이런 대사는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현실에 밀착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지 나올 수 있다.

2.

잠복근무지는 손님이라고는 형사들밖에 없는 치킨집이다. 치킨집 사장은 치킨집을 팔고, 잠복근무를 위해 인수한 치킨집을 갑자기 형사들은 운영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아님 전화위복으로, 왕갈비 양념을 한 치킨이 대박맛집이 되어 버린다. 형사들은 칩거한 마약 책 두목을 잡기 위해 치킨을 파는데 매일매일 놀라울 정도로 매상이 오르고, 어떤 직업이든 요구되는 성실함과 책임감을 장착한 형사들은 치킨을 파는데 본의 아니게 최선을 다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웃음 코드인데 닭을 튀기면서 기름에 끊임없이 팔을 데이고, 양파 4봉을 까면서 눈물을 흘리는 일은 마약거래 일당을 소탕하는 일만큼 어려운 점이 많다. 둘 다 극한직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중에 형사반장이 이런 말을 한다. "네가 모르나 본데 우리 소상공인들은 X나 목숨 걸고 하고 있다." 이런 말이 간지나는 액션을 펼쳐야 하는 형사라는 캐릭터 입에서 나오는데 현재의 상황을 담을 수는 있는데 적절한 타이밍에 배치해서 웃음으로 승화하는 시나리오라니...!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에도 모두 진심과 최선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 치킨집 대박은 진심과 최선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목표한 일(범인 소탕)에 능력없어 보이는 이들이 부수적인 일(치킨집)에 매진하는 것 같은 착시. 사람 일은 들여다보면 이런 식이다. 원하는 걸 하다보면 원하지 않는 일로 풀리는 일이 종종 있다. 모두 목표를 성취한다면 이 세상은 유망 직업군에만 쏠릴 것이고, 재앙이 펼쳐질 것이다. 과녁에서 탈락한 이들이 걷게되는 예기치 못한 여러 가지 스펙트럼으로 세상은 다양해지고, 풍요로워진다고 말하면 욕 먹으려나...영화는 해피엔딩이다. 닭집 전국 체인으로 진짜 사업을 해 보려고 할 때, 닭집의 운명이 밝혀진다. 마약운반책으로 사용되는 걸 발견하는데, 이 시점은 바로 닭집으로 흥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을 때이다. 결국 마약거래상을 일망타진하고, 승진도 하고, 사랑도 샘솟는다. 그래, 영화니까.

3.

후반부는 간지나는 액션이 나온다. 고로 약간 지루하다. 서사는 영화려니 하고 보면 그럴 수 있다. 어차피 코미디물이므로.

4.

균신이 마약거래상 보스로 등장한다. 정보를 전혀 모른 채 봤는데 오랜만에 본 균신은 마르고, 역시나 연기는 신이다. 진지한 표정으로 얄팍한 말투인데 변덕스럽고, 의리 없는 보스의 이미지다. 보디가드가 자신을 위해 열일하고 있을 때 혼자 배 타고 도망가고, 싸움 못하고. 이런 현실 캐릭터에 얍삽한 이미지를 연기한다. 정말 그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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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지적 참견시점>이란 리얼리티 예능쇼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연예인과 로드 매니저의 관계를 밀착한 시선으로 담으면서 파생되는 유머를 생산하는 쇼다. 로드 매니저는 연예인이 임무를 수행하는데 불편한 점이 없도록 종횡무진하면서 허드렛일을 해야 하는 발레 valet 같은 역할을 한다. 현실에서는 갑과 을의 관계인데 각자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수직적 관계는 무너지고, 일시적이지만 수평적 관계가 가능하다는 환상을 준다. 카메라 밖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몰라도 적어도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만이라도 갑과 을의 위치를 벗어버리고 상대의 일에 대한 이해와 배려로 훈훈한 휴머니즘을 선사한다. 각박한 도시에서, 을의 위치가 배려 받을 수 있고, 미디어의 힘이 더해져서 관심의 대상이 되어 로드 매니저 일도 할 만한 일처럼 편집되기도 한다.

2. <그린 북>은 <전지적 참견시점>의 미국 영화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상황은 1962년. 미국 남부에서는 극심한 인종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기였다. 공연을 위해 남부를 투어를 하는 천재 피아니스트와 로드 매니저의 8주간의 해프닝을 담는다. 피아니스트는 흑인이고, 로드 매니저는 백인. 엘리트 백인을 위해 연주 여행을 하지만 정작 천재 피아니스트는 연주하는 무대가 아니면 식당 출입도 제한받고, 호텔도 유색인 전용을 이용해야 한다. '그린 북'은 유색인을 위한 호텔 가이드북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고.

3. 영화는 적절하게 가벼우면서도 따뜻하게 전개되어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마음이 훈훈해져서 가볍게 극장을 나올 수 있다. 흑인으로서의 정체성 혼란, 즉 흑인에도 속하지 못하고, 백인에도 속하지 못하면서 백인의 고급문화 도구로 사용되는 뮤지션의 고뇌를, 백인 로드 매니저의 떡 벌어진 어깨만큼 큰 배짱과 단순한 허풍이 어떻게 상대를 이해하게 되는지 보여준다. 원칙주의자와 좋게 말하면 융통성 있는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큰 갈등을 불러오지만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애정이 서로의 갈등 해결 방식을 타협해 간다. 자신의 방법 내지는 주장을 상대에 맞춰 조금씩 굽히면서 신뢰와 우정이 쌓인다. 갈등 없는 관계는 없다. 사람은 본래 자기중심적이라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많은 훈련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로 엮인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보면서 모든 관계의 원칙은 기본적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4. 각자는 자신만의 색깔과 신념이 있고, 경험이 축적될수록 상대를 수용하기보다는 무시하고 배척하는 심리가 자라기 마련인데 이런 심리의 싹을 발견하고, 이따금씩 잘라낼 수 있으려면 단순함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차 안에서 치킨을 먹을 때, 포크와 나이프가 없어서 안 먹거나 포크와 나이프를 구해오라고 하기보다는 상대가 시키는 대로 손으로 들고 먹어보는 것. 아주 간단한 일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마음으로 이르는 길이라고 했다. 접시 위에서 포크와 나이프가 아닌 손으로 집어 들고 닭 다리를 뜯어도 맛은 똑같다는 걸 그렇게 먹어봐야 알 수 있으니까 이런 비슷한 상황에 부딪히면 닥치고 나도 상대의 방법에 한번 맞춰봐야지, 다짐을 해 본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5. 인종차별 주제는 미국 영화에서 사랑 다음으로 무궁무진한 소재인데 참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한다. 미국 영화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이따금씩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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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이탈리아의 그 로마인 줄 알고, 영화 보면서도 내내 왜 스페인어를 쓰지, 궁금했다. 너무 궁금해서 극장에서 나오자마자 찾아봤더니 멕시코시티 근교에 있는 작은 마을이라고-.- 스펠링도 Rome 아니라 Roma. 아무튼 이탈리아 영화 <자전거 도둑>을 연상시키는 사실주의적 기법을 사용한 영화다.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고.

카메라는 클레오란 가정부의 일상을 밀착해서 따라가면서 중산층 가정을 들여다본다. 계급을 뛰어넘는 여성 연대를 보여주는 영화라서 뭉클한데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계급을 뛰어넘는 게 가능하지 않다는 쪽에 더 무게 중심을 두는 편이라 이 영화는 감독의 판타지로 읽히기도 한다. 클레오의 일은 집안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다. 다행히 주인 부부는 갑질을 안 하는 품격 있는 사람들이다. 클레오가 계획 없는 임신을 하고, 남자친구는 임신 사실을 알고 행방을 감춰버리는데 클레오의 임신 사실과 출산을 지켜주는 건 주인집 여자들이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아기 침대를 사러 자신의 아이들의 가구를 샀던 가구점으로 하녀를 데려가는 주인이라니...하지만 배가 불러서도 쉬지 않고 일해야 하는 장면은 모두 생략되었으며 이런 미담들만이 카메라에는 담겼다.

클레오 개인의 급격한 환경 변화는 아마도 내전, 그리고 주인님 남편의 바람으로 혼자 남겨진 안주인의 심리 묘사가 함께 진행되는 이중 플롯이다. 쿠아론 감독은 내전의 혼돈과 안주인이 남편의 배신으로 겪는 혼란을 미니멀하지만 그 효과는 커다랗게 담는, 탁월한 묘사를 한다. 가령, 아기침대를 사러 갔을 때 경찰이 시위대를 쫓아서 가구점 안으로 들어와 쑥대밭을 만들면서 클레오의 양수가 터진다. 시각적 스펙터클을 심리적 스펙터클로 대체하는 장면인데 시위 장면을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더 극적이다. 또 남편이 바람이 나 젊은 여자랑 살러 집을 나가자 그 집의 상징인 커다란 차(갤럭시)가 좁은 주차장을 들어올 때, 이리저리 박아버린다. 남편이 차를 애지중지해서 주차의 달인 실력을 보여주는 장면과 아주 대조적이다. 남편에게 소중했던 것을 파괴하려는 욕구로 대체하는 장면이다.

역시나 눈물을 흘렸던 장면은, 바닷가 장면이다. 높은 파도에 아이들이 떠밀려 가면서 수영을 못 하는 클로에는 아이들을 구하러 파도를 넘어간다. 자신의 아이를 사산한 후였다. 차분하고 말이 없던 클로에는 햇빛을 받아 아름다운 파도를 헤치고 나와서 숨을 몰아쉬면서 안주인에게 말한다.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어요, 하면서 울음을 터뜨린다. 이럴 때 여성으로서의 연대는 빛을 발한다. 안주인은 우리는 너를 사랑해. 클로에게 가족이 생겼고, 안주인은 남편은 가족에서 이제 빠졌지만 여전히 가족은 건재하다는 걸 아는 강인한 사람이다. 써 놓고 보면 흔한 이야기를 쿠아론 감독은 담담하게 일상을 잡아내면서 살아가는 것의 위대함에 대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 살아가는 일은 가까이서 보면 참 힘겹지만 토막 단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어떤 사건도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인다. 물론 마음에 상처의 흔적은 강하게 새겨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상처에는 새 살이 돋고, 희미해지는 날이 올테니 그때까지 잘 버티는 자가 장땡이다. 버티는 데는 사람의 온기가 필요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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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때 극장에서는 <체실 비치에서> 한 편 밖에 못 봤다. 극장에 가는 일도 체력을 몹시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요즘이라니..대신 집에서 누워서 <4월 이야기>, <사과>를 봤다. 책 좀 봐야지 했던 연휴는 수다로 점철되고, 매일 몇 시간씩 수다를 떨다보니 체력은 한없이 방전되고, 내 체력 방전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연휴는 끝이 났다. 친구들을 많이 만나기는 했는데 몹시 허무한 연휴라고 할 수 있겠다.

<체실 비치에서>는 이언 매큐언의 소설이 원작이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은 안 읽어봤는데 영화 <어톤먼트>도 그렇고, 감정 전달력이 약하다. 남녀가 서로 만나서 끌리는데 별 이유가 없고, 헤어지는데도, 어쩌면 별 이유가 없을 수 있다. 나는 아는 상대방의 단점을, 정작 상대는 단점으로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인지조차 못할 때가 많다. 체실 비치에서 사랑하는 젊은 남녀가 결혼식을 올리고 체실 비치로 신혼여행을 간 첫날 헤어진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여자의 집안은 아버지가 회사를 운영하는 신흥 중산층에 속하고, 남자의 집안은 그림에 미쳐있고, 자연과 교감하겠다고 나체로 집마당을 돌아다니는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의 존재는 어머니이므로 남자와 뗄 수 없는 관계였으나 여자를 만나면서 어머니와 남자는 동일체라는 강박을 벗어날 수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주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포용한다. 어색한 분위기마저도 마법처럼 친화력을 발휘한다. 남자의 집을 찾아 기차역에서 숲을 통해 걷는 기나긴 길도 조금만 가면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한다. 남자 역시 역사학을 전공했지만 여자의 아버지 회사에서 맞지 않은 일을 하기로 한다. 여자를 위해서. 서로의 미래를 서로를 위해 희생하려는 굳건한 믿음이 있던 커플이 아름다운 체실 비치에서 헤어지고 만다. 남녀의 사랑이라는 건 얇은 유리같아서 언제든 쉽게 깨질 수 있는 걸 보여준다.

그 이유는 첫날밤, 여자가 섹스에 대한 혐오감을 참지 못해서고 남자는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남자는 분노로 심장이 터질듯해서 말도 안 되는 여자의 제안에 더욱더 화를 낸다. 아름다운 비치에서...싸우는 장면마저 아름답게 담긴 화면, 영화 내내 흐르는 바흐의 파르티타 곡.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너무 젊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원래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이해 못하도록 태어난 종인가...아무튼 이 아름다운 커플이 깨지는 이야기인데 이언 매큐언 소설도 안 읽고, 영화도 두 편 밖에 안 봐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형식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울림이 별로 없다. 플래시백으로 두 사람의 가정 환경과 학교에서 성격 등이 드러나는 방법도 구태의연해서 좀 답답하고.

특히 결말은 더더욱 마음에 안 든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여자는 첼리스트랑 결혼해서 자식과 손주들까지 낳고 바이올리니스트로 연주를 하는데 그곳에서 남자는 회환의 눈물을 흘린다. 청년과 장년의 시간을 압축해서 넣은 장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 오랜 시간동안 두 사람의 감정을 잇는 그 무언가를 관객이 느끼기에는, 너무 젊다. 청년기의 사랑이 노년기에 돌아보면 아릿할 수 있을까. 궁금하네. 감정도 근육이 생기고, 상처난 가슴에는 새로운 살도 솟는다. 한때 찢어진 가슴은 이어지고 살다보면 흔적은 남지만 통증은 바래고 아팠던 기억만 남아있는 거 아닌가. 아무튼 영화는 별로였다는 말이고, 이언 매큐언의 소설에는 전혀 손이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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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영화 재미없다는 네티즌들의 반응 때문에 안 볼 뻔했는데 친구가 보자고 해서 봤다. 기대를 하나도 안 하고 봐서 그런지 무척 재미있었다. 딸 찾는 이야기라 뻔하겠지 했는데 안 뻔하다! 추리물로는 자극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SNS의 속성을 스크린을 통해 잘 묘사했을 뿐 아니라 인간관계 왜곡된 시선도 잘 담았다. 특히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 대한 입장차이도 잘 담았다. 그래서 무척 흥미로운 텍스트다.

2.  딸의 실종으로 아빠는 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닫는다. 딸이 피아노만 보면 죽은 엄마 생각이 나서  6개월 전에 피아노 레슨을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딸이 없어진 후에 알게 된다. 딸과 아빠의 관계여서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안다고 말하는 일은, 지극히 경계해야한다. 내가 어떤 이에 대해 안다는 가정은 단지 그가 내게 보여준 단면만을 아는 것이라는 걸을 인정해야 한다. 이걸 인정하는데 꽤 오래 걸렸다. 온전히 한 사람을 이해하고 아는 건 불가능하고,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그렇지만 가까울수록 안다는 착각에 빠져서 나중에 자신이 모르는 모습을 발견할 때, 우리는 상대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고 왜 그랬는지 추궁하고, 어떻게 니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니, 하고 반문한다. 아빠 역시 딸의 물리적 실종으로 딸과 자신과의 사이에 씽크홀sinkhole같은 커다란 구멍을 발견한다.

첫 반응은 충격이고 딸을 찾아야하기에 딸에 대해 더 서치를 해나가면서 딸이 피아노만 보면 엄마 생각이 나서 괴로워서 피아노 레슨을 그만두었고, 친구가 없이 늘 혼자 점심을 먹고, 어느 호숫가 혼자 앉아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 걸 알게 된다. 16세가 되어가는 딸은 세상과 점차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는 걸 딸이 없어진 후에나 알게 된다. 애착 대상이 부재 후에나 성찰적 태도를 지니게 되는 건, 안타깝게도 사람의 속성이 아닐까.

딸에 대해 이렇게 상세하게 알게 되는 과정이 바로 SNS 서치를 통해서다. 딸의 각종 SNS 계정, 페이스북부터 텀블러, 인스타그램, 유캐스에 로그인하자 딸의 진짜 세계가 쭉 펼쳐진다. 현실 세계보다 더 진지하고 진짜 딸을 볼 수 있는 넷의 세계다. 영화를 보면서 무서웠다. 누군가 내 블로그나 SNS 계정을 추적하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물론 나를 특정 목적으로 추적하는 누군가가 있을리 없을테지만(그러리라 믿고 싶은데 이따금씩 방문자 USR를 들여다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수상한(?) 기록을 발견하고 잠시 불안하긴 하다)

가상세계는 자신에 대한 편집이 가능해서 거짓을 꾸며내기 좋은 수단이기도 하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진짜 자신을 노출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해서 받아들이는 일은 상대의 몫으로 남겨진다.아빠는 딸의 가상세계에서 진실을 본다.

3. SNS의 속성이 영화에서는 딸의 행방을 추적하는데 쓰여서 긍정적으로 기능하는 편이지만 한없이 가볍고 속이기 쉬운 속성도 집단 심리를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 2백 명이 넘는 친구들에게 전화했을 때, 모두 딸과 안 친하고 잘 모른다는 반응을 보였던 이들이 미디어에 공개수사로 노출되면서 SNS에는 딸을 그리워하는 친구들의 피드가 올라오고 댓글과 감정이모티콘들이 쌓인다. 사람이 사라져도 손가락으로 슬퍼요를 누르고, 보고싶어, 하는 친절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데 여기에 담긴 진심의 깊이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슬퍼요, 보고싶어, 하는 댓글을 달지 않으면 안 걱정하는걸까? 현실세계에서 무관심이 넷상의 군중심리로 표현되는 장면을 포착하고 있다.

4. 담당 수사관은 아들을 키우는 엄마다. 실종된 딸과 아빠의 관계와 대립항으로 볼 수 있다. 엄마는 아들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가정하는 오류를 범한다. 아이가 사회에 약간 부적응한 예민한 성격이라는 단정이 지나친 모성을 발휘하게 한다. 엄마의 적극적 개입이 없었더라면 아들은 어땠을까? 누군가를 잘 안다는 단정은, 아주아주 위험하다는 걸 알려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5. 영화는 해피엔딩이라 나오는 마음 가볍게 극장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제 나는 해피엔딩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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