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영화를 보면서 서글픔의 쓰나미가 밀려왔다. 정말 화려한 출연진들인데, 조지 클루니, 틸다 스윈튼, 프랜시스 맥도먼드, 심지어 스칼렛 요한슨까지 죄다 늙었다. 프랜시스 맥도먼드 얼굴의 주름을 보는 순간, <파고>에서 독특한 발성으로 사투리를 구사하던 보안관의 목소리의 희미한 잔영은 있는데 얼굴이...


아무튼 나는 인물들이 모두 독특하게 말하는 코미디를 보고도 슬픔을. 찬바람이 계속 이어졌던 회색 도시 서울에서 봄볕이 제 역할을 하면서 개나리, 목련, 벚꽃이 사이좋게 무채색 도시를 물들이는 요즘이다. 길을 걸으면서 마치 꽃을 처음 보는 것처럼 유심히 꽃잎을 본다. 멀리서 보면 무채색 도시를 파스텔톤으로 바꾸는데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목련 꽃잎은 갈색빛을 띤 것도 있고 바닥에 떨어진 꽃잎은 흉하기까지 하고 벚꽃 역시 바람에 흩날려 꽃잎이 떨어진 자리가 듬성듬성 비어있다. 꽃을 보면 이쁘다는 생각과 함께 덧없다는 생각에 자꾸 서글퍼지는데, <헤일, 시저!>에 출연진 모두 봄날의 꽃같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2

영화는 1951년을 배경으로 텔레비전이 등장하는 시기다. 텔레비전이 처음 등장했을 때 영화는 비극을 맞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극장은 극장이고 텔레비전은 텔레비전이다. 카메라의 출현으로 그림이 초상화에서 풍경화로 방향을 틀었듯이 영화는 스케일이 다른 방향으로 노를 저었고 아직도 건재하다.


하지만 텔레비전 등장 초기에 맞서야하는 영화 제작자들의 두려움을 이 영화는 다룬다. 코엔 형제답게 영화가 과연 예술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며 공장에서 제작하는 하나의 공산품으로 바라본다. 배우는 돈을 위해 납치 자작극을 꾸미고 제작자는 밤낮으로 일하면서 격무에 시달린다. 시끌벅적하고 다혈질의 감독들과 콧대높은 배우들과의 트러블은 코믹한 일상으로 묘사된다.


어찌보면 메타 영화인데 영화 속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장면을 꽤 정교하고 화려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잠깐씩 <헤일, 시저!>란 영화를 보고 있다는 걸 잊고 영화 속 영화를 보고 있게 된다. 영화의 힘은 이런 거다. 현실은 문제도 많고 번잡하지만 문득문득 삽입된 영화촬영 장면을 보다보면 웃기도 하고 현실을 잊을 수 있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계속 제작되고 존재하는 이유다. 여전히 마음이 위안이 되는 매체다. 적어도 내게는. 어두운 극장 안에 앉아 있는 두 시간 남짓은 크나큰 안정감을 준다. 봄꽃을 보면 덧없어 슬픈데 영화는 영원할 거 같은 착각에 심한 위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 깡패 같은 애인 - My Dear Desperado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줄거리를 읽고 비디오 클립을 봤을 때 안 봐도 될 거 같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요즘 한국영화는 나를 극장으로 이끌지 못한다.-_-; 소재와 구성만 보면 식상하다. 88만원 세대 여자와 찌그러진 건달 남자. 이런 구성이라면 대충 머리속에서 그려지는 그림이 있다. 티격태격하다 순애보로 발전하는 그저그런 멜로 영화겠거니...

 

영화는 고정관념을 비껴간다. 동철과 한세진의 관계가 티격태격하는 건 맞지만 두 사람이 미래를 함께 하기 위한 걸 알려주는 목적이 아니다. 두 사람은 그저 옆방 세입자로 딱 세입자의 거리를 유지한다. 라면 값 2500원도 받아내는 동철을 보면 옆방 여자한테 폼 잡거나 잘 보이려는 마음이 없어보인다. 남자가 여자한테 보이는 애정은, 일종의 동료 의식 혹은 연대 의식이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거 없는 남자가 역시 가진 것 없고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취직 못하는 이유를 사회의 구조적 모순 때문이라고 말했듯이. 남자는 여자 뿐 아니라 미래가 열려있는 십대가 자신과 닮은 삶을 사는 걸 원치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한편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가지 못한 길에 대해 로망을 가지고 있다. 동철 역시 자신이 잘 아는 바닥 세계보다는 다른 세계에 대한 로망이 있다.

 

동철은 별 볼 일없는 여자를 취직시키는 데 자신만의 방식으로 공로를 세운다. 여자는, 가장 좋을 때 남자친구를 만났고 가장 힘들 때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동철(연인으로서는 아니지만)을 만났다. 같은 세입자로 이어지는 친분은 세입자 딱지와 함께 영원히 과거 속에 기억 한자락으로 자리잡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 멜로 드라마의 진정한 변화는, 라스트 씬에 있는 것 같다. 주인공 남녀는 이별을 한다. 그리고는 다시 만나고 거기서 끝난다. 동화처럼(그렇담 고전으로 회귀가 아닌가?). 결말을 관객을 위해 열어둔다.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할지 말지는 관객의 마음이다. 감독들은 정말 관객을 위해서 결말을 열어두었을까? 무언가를 책임지기 두려워서 두 사람을 다시 출발선상으로 되돌려놓은 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흐 이전의 침묵 - The Silence Before Bach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개봉했을 때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놓쳤는데 아트시네마에서 볼 기회를 가졌다. dvd가 나와 있어서 dvd로 볼까 했는데 극장에서 안 보면 dvd로는 끝까지 안 보거나 봐도 건성으로 볼 영화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하얀 벽과 마루 바닥을 따라 카메라가 유연하게 움직이면서 바흐의 곡이 이어진다. 영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봤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인가 궁금했다.

 

제목이 말해 주듯이 바흐 이전에도 세계는 존재했지만 공허한 울림이라는 목소리를 담아내는 영화다. 바흐와 그의 음악을 중심에 두고 시간을 횡단한다. 대형 트럭을 운전하는 현대인들에게 지루한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바흐는 고속도로를 연주회장으로 만든다. 또 바흐의 무덤을 찾고 바흐의 작업실을 찾는 관광객들한테 바흐는 마음의 향수다. 또 비기독교인이 합창단에서 성가곡을 부르면서 신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되는 자연스러운 교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한때 바흐의 칸타타를 자장가로 삼았던 때가 있었는데 가사를 보고 깜짝 놀랐었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애절하게 때로는 차분하게 부르는 노래가 신이여 사랑합니다, 이런 내용이어서. 가사는 간결해서 독어가 아니었다면 가사 때문에  칸타타를 좋아할 수 없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또 무반주 첼로곡들은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을 대신할 수도 있다.

 

바흐가 죽은 지 50년이 지나서야 푸줏간 주인이 바흐의 악보로 고기를 싸면서 바흐가 재발견되었다는 전설이 있단다. 푸줏간 주인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바흐를 영영 모를 수도 있었을테니 푸줏간 주인의 무지함이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다.

 

내가 아주 유심히 본 건 (아무래도 요즘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 중이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프렐류드를 가르쳐주는 장면이었다. 감정없이 음표대로 건반을 눌렀을 때랑 음표의 진행을 이해하면서 어떤 이야기인지 이해하면서 건반을 누를 때랑은 아주 소리가 다르다는 걸 보여준다. 또 파이프 오르간은 그 울림을 지속하려고 페달을 사용하는데 페달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서 손과 발이 함께 연주해야한다. 페달도 건반과 거의 유사해 보였다! 베토벤이 피아노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넓은 음역대를 사용했다면 바흐는 손의 엇갈림을 사용했다. 손이 크로스돼서 손가락이 날개달린 듯이 가볍게 건반 위를 날아다니는 장면은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라고 해도 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르 아브르 - Le Havre
영화
평점 :
현재상영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탄 소년>과 비슷한 소재를 다루지만 그 시선은, 진부한 표현이지만 하늘과 땅 차이다. 한 소년이 영국으로 밀입국하다가 르 아브르에서 잡히지만 탈출한다. 르 아브르 소시민들은 밀입국 따위는 모른다. 소년은 어린이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밖에는. 구두 닦이 할아버지의 일상은 아주 단조롭다. 구두를 닦을 손님을 기다리다 점심 샌드위치를 먹고 저녁이 되면 동네 카페에 들러 와인 한 두 잔 마시며 소소한 잡담을 카페 주인과 나눈다. 헤진 외투를 입고 동네 식료품점과 빵집에 외상 천지지만 할아버지는 소박하고 정갈한 밥상을 차려주는 아내(할머니라고 하기에는 젊다)랑 행복하다. 자의든 타의든, 무소유를 실천하시는 부부처럼 세간도 단촐하다.

 

할아버지는 소년의 밀입국한 이유가 영국에 있는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는 소년을 런던으로 밀입국 시키는 걸 돕는다. 동네 사람들도 기꺼이 동참한다. 경찰이 걸림돌이기는 하지만 르 아브르 경찰은, 경찰 이전에 르 아브르 마을 사람이다. 경찰은 소년이 영국으로 밀입국하는 걸 돕고 승진을 포기한다. 아주 훈훈한 결말이다. 관객 중 어떤 이는, 이 영화 아니면 이 영화를 보는 날, 무슨 일이 있어도 웃기로 작정하고 온 것처럼 별 장면 아닌데도 크게 웃곤 했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 어떤 이의 웃음 소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의미 심장하게 내게 다가왔다. 그는 웃을 작정을 했고 웃음을 줄 어떤 매개체가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영화는 촉매 역할을 했다.

 

현실이라면 소년은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경찰 손에 넘겨져서 본국으로 추방당하거나 물 속에서 얼어죽어 항구에서 시체로 떠올랐을 것이다. 소년은 엄마를 만나기는 커녕 세상의 혹독함만을 간직한 채 눈을 감았을 것이다. 이렇게 영화를 만들었다면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 사회면 기사 같았을 것이다. 영화는 전혀 사실을 묘사하지 않았지만 사실을 담았다. 로맨티시트인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자신만의 로맨티시즘으로 숨겨진 사실을 그려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전거 탄 소년 - The Kid with A Bike
영화
평점 :
현재상영


<자전거 탄 소년>은 다르덴 형제가 만든 영화들의 변주다. 클로즈업과 함께 인물이 내쉬는 거친 숨소리가 음악 대신 깔린다. 핸드헬드 카메라로 인물이 달리면 카메라도 같이 달린다. 기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카메라와 공간이 공모를 해서 공간 속에 위치한 인물의 쇼트들로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감독들이다. 아날로그식 영화처럼 느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르덴 형제처럼 인물의 심리적 긴장감을 잘 잡아내는 건 다른 감독들이 흉내낼 수 없다. 자칫하면 답답하기만 할 수 있는데 영화 내내 두 발로 달리거나 자전거 타고 질주하는 소년의 속도감을, 카메라가 따라가면서 관객도 같이 달리고 있으며 공감으로 이끄는 신비로운 힘을 발휘한다. 우리나라 독립영화들을 보면 지나치게 무겁고 카메라는 정적이어서 보고 나면, 한숨이 쉬어진다. 다르덴 형제는 전형적인 한국 독립영화의 대안으로, 좀 삼았으면 좋겠다. 무거운 사회적 문제 제기를 해도 영화적 문법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다르덴 형제의 관심은, 늘 사회적 문제다. 이주 노동자들의 현실 속에 녹아 있는 어린 아이의 미래, 자기의 아이를 팔아 먹을 정도로 도덕성도 잃어버린 참담한 88만원 세대, 꿈을 이루기에는, 이기심으로 가득한 현실이 다르덴 형제 영화의 화두다. <자전거 탄 소년>도 이런 사회 고발적 시선의 연장선상에 있다. <약속>에 어린 소년으로 출연했던 제레미 레니에르가 이제는 성년이 돼서 아들을 버린 아버지로 나온다. 영화와 현실이 교묘한 접점을 이룬다.

 

시릴은 아버지(제레미 레니에르)를 찾아 헤매고 신뢰를 되찾고 싶어하지만 현실은 척박하기만 하다.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게 우선이다. 시릴은 아버지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는 동네 건달을 위해 강도 짓까지 하지만 강도 짓이 실패로 돌아가자 시릴을 욕한다. 시릴의 미래를 위해서는 잘 됐지만 한편으로 시릴은 어른의 이기심에 더 깊은 상처를 받는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시한 폭탄같았던 시릴은, 어른의 이기적 세계를 일찍 겪는다. 그래도 사만다라는 위탁모는 마지막 보루다. 사만다가 아이를 끝까지 보호하려는 의지는, 가차없는 부성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세상에 어머니같은 모성이 있어서 아이는, 모든 것에 불구하고 성장한다, 같다. 아이의 미래가 여전히 위태로워보이지만 절대적 믿음을 아이에게 보여주는 어른이 있는 한, 아이는 성장이란 외줄타기를 끝마칠 수 있을 듯도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