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인 강원대 장경호 박사의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한 책입니다.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1896.2-1897.2)만큼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고종은 재위시 경운궁에 기거하면서 경운궁 주위의 외국 공관 특히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 공사관에 파천에 대한 문의를 많이 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힘없는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이 때로는 정치적 이유때문에 때로는 본인의 신변 안전을 위해 외국 공사관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사실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미국과는 1871년 발발한 신미양요( 辛未洋擾)를 통해 적대적인 관계로 처음 접했고, 그 이전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가 1866년 대동강에서 평양군민에게 불탄 사건이 있었습니다.

즉 쇄국정책 시기 조선은 미국을 양이(攘夷)로 인식하고 결코 미국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청의 주일 참사관이었던 황준헌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을 통해 조선에 전한후 미국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가 영토확장 야심을 보인다고 본 청의 외교관은 먼 곳에 있는 미국은 아시아에 영토적 야심이 없다고 보았으며 중립적이고 평화적인 나라로 보았습니다.

이후 고종은 미국과 구미국가 최초로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1882)을 체결합니다.

1880년대까지 러시아의 동진과 러시아의 연해주 식민지 추진은 청에게도 일본에게도 안보 상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해양세력인 신흥국 미국과 연대해서 러시아의 남진을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공사관이 설치된 이후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해 처음엔 모호한 태도로 일관했으나 점차 친일로 기울게 됩니다.

청일전쟁으로 청국과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진주하게 되고 심지어 일본군은 경복궁에 군사를 둘러싸고 사실상 고종을 경복궁에 가두어 버린 일이 발생합니다 ( 경복궁 점령사건,1894).

청과의 텐진조약에 따라 동학혁명군을 진압하러 온 청군과 함께 조선땅에 온 일본군은 무단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에게 무력시위를 하며 침략을 본격화합니다.

1894년 일본의 경복궁 점령에 대해서는 단독 저서가 있습니다.

나카츠카 아키라 지음, 박맹수 옮김,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푸른역사,2002)

아무튼 일본의 무력시위에 위협을 느낀 고종의 신하들은 고동을 경복궁에서 피신시키기 위해 춘생문 사건(1895)을 일으켰지만 탈출 시도는 실패로 끝납니다.

이 사건을 통해 미국이 미국공사관으로 도피하려 했다는 주장은 사실 직접적 정황이나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이후 일어난 아관파천의 전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도피 이후 친일내각을 구성했던 김홍집이 군중에 살해되고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고 친러파와 친미파가 득세하게 됩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불행하게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한 아관파천 이후에도 특히 미국공사관에 파천에 대한 문의를 지속하고 조선의 중립화 방안에 대해 미국의 거중조정(居中調停)을 요구했다는 점입니다. 한미수호통상조약위 제 1조인 미국의 거중조정 조항을 고종은 진심으로 대하고 낙관적으로 해석한 것이었으나 미국은 단지 의례적 조항으로 보았습니다.

1898년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은 고립주의( isolationism)에서 벗어나 점차 아시아의 이권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이미 아관파천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영향력 아래 조선이 들어가게 된 것을 안 미국은 조선이 중립화를 위해 미국을 끌어들이자 이를 반대하고 미국의 이익을 위해 오히려 일본과 더 밀착하게 됩니다.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열강은 1890년대 당시 모두 조선에서의 이익을 가져가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였습니다.

미국은 러일전쟁이후 더욱더 일본과 밀착되었고 사실상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게 되고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미국의 이권이 개입된 중국을 전쟁터로 하지 않기로 일본과 외교적 합의를 하는 치밀한 전략을 추진합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이권은 중국에서 더 크고 조선은 크지 않아 조선 땅이 전쟁터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인종주의자로 알려진 대통령으로 조선은 미개하고 일본은 선진적이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하등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제국주의적 대통령이었습니다. 미국은 러일전쟁의 종전을 위해 포츠머츠 회담을 주선하고 협정을 추진하여 철저한 친일로 일관했습니다.

고종이 미국을 너무 선의(善意)로만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이 결국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예상은 했었지만 고종 당시 조선에 와 있던 미국인들은 모두 이 미지의 나라에서 철저히 이권을 추구했습니다.

미국은 특히 러시아의 남진에 대비하고 청국에서의 이권을 담보하기 위해 평안도의 의주와 용암포의 개항을 요구하였고, 러일전쟁 와중에 고종은 이를 허가합니다. 평안도에는 미국이 운영하는 운산 광산을 비롯해 많은 미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미 19세기 말부터 살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고종이 미국에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역이용해 이권을 추구했습니다. 미국인들의 이런 성향은 기본적으로 2023년 현재도 변함이 없다고 봅니다.

한국에서 특히 구한말의 중요한 친한인사로 구분되어 온 미국 선교사이자 외교관 알렌 ( Horace Allen)에 대해서는 재평가가 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애서 나온 인용으로 봐서 그는 철저하게 미국 국무부의 지침을 따르는 미국의 이익을 충실하게 대변하는 외교관일 뿐입니다. 결코 친한인사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금 한국의 직업 외교관들이 국가이익에 철두철미하게 봉사하는 이 미국 외교관의 모습을 본받았으면 합니다. 현재 한국 외교관들이 정말 국익을 위하는 건지 의심이 됩니다. 대통령부터 국익이 아니라 일본의 이익을 두둔하고 있어 이해가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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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좋은 근대외교사 관련서를 읽었습니다. 재미역사학자이신 故 김기혁(1924-2003)선생의 박사학위 논문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이신 김범선생께서 옮겨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본문 427쪽에 달하는 이 책은 원래 영문으로 쓰여져 1975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데이비스 캠퍼스( University of California,Davis)에 제출된 박사학위 논문을 기반으로 하고 1979년 캘리포니아 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된 책을 다시 한글로 옮긴 것입니다.

아무래도 박사학위 논문이다보니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지 전 흥선대원군의 집권기와 고종의 전기 치세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외부적으로 청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을 침탈을 받기 시작한 시기이고 러시아가 동진(東進)을 계속해 시베리아를 식민지로 만들고 청과 재정 러시아의 국경분쟁이 지속되고, 러시아의 연해주 영향력 행사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군항이 만들어지던 시기였습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하고 서양식 정치 경제개혁을 시작하고 적극적으로 서양의 국제관계인 조약체제를 받아들입니다.

일본은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인 중국을 우위에 두는 조공(朝貢)체제에 도전하고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와 사할린 관련 협상을 진행하고 타이완을 침공합니다.

일본이 중국의 전통적 질서에 도전한 또 한 예는 메이지 일본이 류큐(琉球)왕국을 일본에 합병한 것입니다 이 섬나라는 중국과 반조공 관계에 있었고 메이지 이전 사쓰마(薩摩)번에 복속되었지만 일본이 중앙집권 정치체제를 구축한 후 합병해 버린 겁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많이 강조되지 않지만 메이지 일본은 이미 1910년 조선을 병합하기 이전 류큐와 에조치(蝦夷地, 형 홋카이도)를 병합하고 타이완에 부대를 보내 침공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일본은 청과 청일수호조규(淸日修好條規,1871)을 맺어 전통적인 조공관계가 아닌 조약관계로 청과의 국제관계를 다시 시작하며 청과 대등한 위치에 섰으며, 이후 전함을 이끌고 조선에 나타나 문호개방을 요구합니다.

조약의 관점에서 이 책의 중심은 그래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1875)입니다.

미국의 페리제독의 통상요구로 개항해 불평등한 조약을 맺었던 일본은 그들이 서양 당했던 그대로 조선에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고 그들이 서양에서 배운 그대로 전함을 끌고 나타나 무력시위를 합니다.

대원군 집권기는 이 보수 정치가의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매우 부정적인 인상을 독자에게 주는데 이는 조선왕조의 말기 상황을 알아야 이해가 되는 정책입니다. 대원군은 19세기를 온통 지배했던 외척의 세도정치( 勢道政治)에 염증을 느낀 인물로 양반의 과도한 힘이 욍권을 짓누르는 걸 졸 수 없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양반들의 근거지인 사원을 철폐하고 양반들의 특권을 불리는 정책을 편 이유고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어 있던 경복궁을 중건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철저하고 보수적인 왕족으로 유교주의자인 대원군은 18세기부터 조선에 들어온 서학(西學)과 천주교를 이단시했고 조선의 전통을 망친다고 생각한 인물입니다. 외교에서 중국과의 전통적 조공책봉관계를 중시한 대원군과 유교세력들은 따라서 조선이 개항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 고종은 생각아 달랐고 청의 이홍장(李鴻章)의 조언에 따라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확장을 경계하며 사실상 그가 주도한 협상에 따라 미국 영국 독일 등 서구 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해 외세의 조선침탈을 막기 위한 외교적 장안을 마련 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가지 주목할 사안이 있습니다.

첫째, 일본과 관련하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일본의 공사관이 부산의 왜관이 아닌 한성과 인천에 새워졌다는 건 일본의 조선 침탈에 큰 의미를 지나는 사실입니다.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일본의 모든 외교업무는 부산에서 이뤄졌고 조선은 일본 외교관의 한성 주재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부산만이 일본과의 유일한 교류 창구였습니다.

하지만 임오군란(壬午軍亂,1882)을 계기로 일어난 대원군의 정권 찬탈시도와 청군과 일본군의 조선 상륙을 계기로 일본은 조선을 협박하다시피 하며 한성에 일본공사관을 설치하고 부산이외 원산과 인천을 개항시킵니다.

전통적으로 쓰시마(對馬)가 부산의 동래부사를 상대로 진행된 일본 막부와 조선의 통상관계는 구한말에 이르러 조선 중앙정부와 메이지일본과의 조약관계로 바귀었고 청과의 조공관계의 의미가 퇴색했습니다. 일본은 수백년동안 접근이 허용되지 않은 한성과 인천 그리고 원산에 접근하게 되며 결국 조선을 식민지로 만듭니다.

두번째는 이홍장이 추진한 조선과 미국 영국 독일과의 수교조약 조인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국제관계에 무지한 조선의 관리들은 사실상 이홍장의 조언에 따라 구미각국과 수교를 진행했고 조미수호조약의 경우 초안까지 이홍장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여태 단 책에서 보지 못한 내용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이홍장과 조선 그리고 미국을 중재한 어윤중과 김윤식들 초기 개화파의 역할은 너무나 수동적이었습니다.

청은 조공체제하의 종주국으로서 여태까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깨고 적극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해 조선의 개항을 위한 조약을 구미각국과 체결한 것입니다.

아무리 명목상의 사대이고 중국을 상국으로 받들어도 조선은 자체적으로 통치될 수 있다고 한들, 결국 조선은 구한말 힘이 없어 청의 내정간섭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조선의 사대부가 중국을 섬기고 일을 안하고 힘을 기르지 않아 생긴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19세기 조선을 주무른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일가 등의 책임이 가볍지 않습니다. 명가가 아니고 조선의 멸망에 일조한 가문이기 때문입니다. 축재를 하기 위해 군대를 기르지 않고 서학신자라는 이유로 반대파인 남인의 싹을 잘라버린 결과의 여파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추측컨데, 한국사학계에서 변방에 속하시는 해외의 연구자의 글이기 때문에 40여년이 지나도록 한국어 출판이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직장생활하시다가 늦은 나이에 공부를 하신 것도 그렇고 전형적인 역사학자로 사신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과거에 고등학교 교과서에 배운 내용과 비교해보면 솔직히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 있어 낯설었습니다. 무척 밀도가 있는 내용이어서 구한말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가 없으면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김범 선생이 옮긴 또 다른 재미 역사학자의 책을 소개합니다.

조선 변방과 반란,1812년 홍경래 난(푸른역사,2020)

저자인 김선주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을 옮긴 책입니다. 조선 양반들의 서북지역( 평안도지역) 차별로 왜 그 지역 지배층이 중앙에 반란을 일으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서북 지역은 청으로 가는 연행사가 지나는 길목이고 오랜세월 조선의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외세의 영향도 많이 받아 한국의 기독교 중심세력들이 원래 처음 자리잡았던 곳이도 합니다. 교육열이 높은 지역이라 해방이후 한국의 주류세력에게도 그리고 지식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 지역입니다. 단순히 북한의 수도가 있는 북한의 중심지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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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근대건축물에 대한 보존문제가 제기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1990년대까지도 일제시대나 군사정권 시절의 건축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습니다.

모두 어두운, 기억하기 싫은 역사와 연관되어 그런 경향이 생긴 것이고, 결국 왕조의 유산인 조선시대 궁궐은 보존할 가치가 있어도 일제시대 관청건물이나 수탈기구들은 보존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일본 근세 전문가이신 김시덕 교수가 처음으로 낸 서울의 근대건축과 도시계획에 관 책 ‘서울선언(열린책들,2018)’에서 처음 일제시대 지어진 보통사람들의 집, 흔히 말하는 일제식 적산가옥의 흔적을 찿고 , 일제의 신도시인 영등포와 노량진을 답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 근대건축물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오래전 서울경관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왜 서울은 도시의 건물을 무조건 다 부수고 새로 지을까?’라는 의문이 들 때였습니다.
역사는 흔적과 함께 기억되는 법인데, 왜 멀쩡한 건물을 모두 때려부수고 몰역사적이고 개성도 없는 천편일률적인 건물로 무미건조하게 공간을 채울까 하는 의심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천박하게 돈만 밝힌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과거의 흔적을 없애버려야 하는 긴박한 이유라도 있나?

지금은 위의 두가지가 모두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중앙정보부 남산 예장동 청사의 철거와 옛 조선총독부인 ‘중앙청’철거가 대표적인 예라고 봅니다.

한국근현대사를 대표하는 일제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건물(중앙청)과 군사정권의 국가폭력의 상징( 중앙정보부 예장동 본관)이 그 실체를 현재 알 수 없습니다.

건물의 흔적을 지운다고 사라지지 않는 역사의 기록을 건물을 없애서 자위를 하고 싶은 마음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일제시대에 관심을 가진 독자로서 일제 식민통치의 유산인 건물을 보전해야 일본의 사죄를 받을 때 더 효과적일 것일텐데, 그리고 후세의 역사교육에도 도움이 될텐데, 현재까지 한국의 위정자로 군림해온 친일세력이나 그 후예들은 선조들의 죄를 묻어버리려고 식민통치의 유산인 건축물을 없애버리고싶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드는 건 합리적 추정이죠. 조국근대화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가지고 말이죠.

박근혜 정부 당시 위안부 협상을 위해 일본에서 특사가 청와대로 직행해 소위 한국의 정계원로들과 일본어로 밀담을 나누는 모습을 목격하며 과연 역대 한국정부의 성격은 무엇인지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상하던 일과 실제로 난 기사를 보는 입장은 완전히 다르죠. 친일세력이 권력에 없어도 일본이 저렇게 무례하게 행동할까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일 외교 정상화를 이룬 고 김종필 전 총리 역시 일본에서 교육받은 정치군인으로 일본과 불완전한 상태로 외교를 정상화해 이후 모든 한일관계 파탄의 원인을 제공한 정치인이니까요.

해방이후 한국전쟁이 나서 일제 때 지어진 많은 건물들이 부서지고 철거되어 시야에서 사라진 것도 정치적인 이유와 패권적인 이유에서 일본에게 전쟁 범죄를 묻지 않은 미국이 한국땅에서 일제의 잔재가 사라지도록 방치했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1945년 이후 남한에서 정부가 수립하기까지 자그마치 3년의 혼란기를 미군정이 통치했고, 한국전쟁 중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일제의 군사기지였던 용산구와 중구를 집중 폭격한 것도 미국에 대한 이런 의혹이 드는 이유입니다.

한일관계가 꼬이게 된 근본원인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공산주의 봉쇄정책이었기 때문이고 유감스럽게도 2023년 현재도 미국은 영향력이 커진 ‘중국의 부상’을 정치적, 인종주의적으로 봉쇄하려 합니다.

다소 비약이 있긴 해도, 저는 흔적을 없애는 이들은 그들이 그래야 할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의심합니다.

건물의 물리적 구체성때문에라도, 서구의 경우 건물을 모두 흔적도 없이 파괴하는 경우가 더더욱 드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순히 돈을 더 벌겠다는 것이상이라고 의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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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그린블랫(Stephen Greenblatt)하버드대 교수의 2011년 저작입니다.

한국에는 2013년 까치출판사에서’1417년 근대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입니다.

제가 읽은 2011년 출판된 영어판으로 총 11장 본문 260여 페이지에 이르는 책입니다. 모두 로마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책’On the Nature Of Thing’이라는 시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책을 찿는 과정과 책의 내용 그리고 이책의 영향을 모두 포괄해 담았습니다.

15세기 초 교황청에서 각종 문서를 필사하는 교황의 수석비서인 포지오 브라치오리니(Poggio Bracciolini)가 독일의 한 수도원에서 잠자고 있던 루크레티우스의 책을 찿아내서 로마시대 이후 수천년간 잠들어있던 이단적인 내용이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으로 퍼져나가고 그내용이 결국 유럽의 근대를 가져오게된다는 내용입니다.

이야기의 구조가 일단 돌아가신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미의 이름(열린책들,2009)’과 매우 유사해 놀랐습니다. 1980년대 소설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지의 책이 미스터리를 푸는 실마리가 되었다면,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이 책에서는 고대의 물리학을 기술한 루크레티우스의 신성부정의 내용의 책이 이후 중세 유럽의 카톨릭교회의 교리에 도전하게 되고 초기 르네상스 시기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쳐, 이후 나타나는 르네상스 예술과 17세기 유럽의 과학혁명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겁니다.

철저하게 유럽 서구 중심적 이야기이고 따라서 고대 그리스 로마의 라틴어 고전이 강조됩니다. 고대라틴어로 쓰여진 고대로마의 물리학에 관한 시집을 찿는 이야기이며 15세기 로마 교황청내의 궁정 정치와 카톨릭신학과 이단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와 관련된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 영향에 대한 라틴어 문헌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21세기 한국 서울에서 이책을 제대로 읽는 일이 쉬운 일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철학적, 문헌학적 이야기이므로 전문적인 영역은 피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유일신으로서의 서양의 신이 기본적으로 얼마나 폭력적인 신인지 감안하고 읽어야 합니다. 독자로서 간단히 인상비평 정도를 남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유럽의 중세가 생각보다 자연스럽지 않은 매우 억압된 사회였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가 정치적 그리고 신앙적으로 전 유럽을 지배하면서, 원죄를 당연시하고 후세(afterlife)의 영광을 기약하며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 타락이 극에 달해 있었고, 예수의 수난을 따라한다는 명목으로 수도사들에게는 극한의 고통이 주어지는 걸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스스로 몸에 채찍질을 가하는 등 상상이 안되는 끔찍한 일들이 태연히 자행되었습니다.
15세기 문화의 중심이었던 이탈리아에서 수도원 도서관에서 발견된 이단적 문헌을 보는 건 카톨릭 교회에서 파문을 각오해야 할 뿐아니라 종교재판에 넘겨져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어서 공개적 주장은 하기 힘들었습니다. 이 시기가 유럽의 종교개혁(the Reformation)시기와 겹쳐있고 스페인에서는 이슬람이 물러가고 이단재판(the inquisition)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던 참혹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둘째, 소수의 엘리트들이 모든 문서와 대화를 라틴어로만 소통했고 정치와 교회의 중심은 이탈리아 로마였고, 영국과 독일등 근대 서구국가들은 당시 유럽의 변방에 불과했습니다. 지식인들은 모두 그리스 라틴어에 정통했고 이책의 주인공인 포지오는 교황청에서 필경사를 하고 교황을 보좌하던 측근으로 고대 라틴어에 정통한 라틴어고전 전문가였습니다. 이런 배경때문에 그는 독일 변방의 수도원 도서관에 잠들어있던 루크레티우스의 시집을 찿을 수 있었습니다.

셋째, 루크레티우스의 시집은 그 내용이 결국 세상은 모두 원자 (atom)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물리학 내용으로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고 카톨릭 교회에서 교리로서 주장하는 죽음 이후의 삶을 부정합니다. 또한 가톨릭 신학에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인생의 즐거움(pleasure; 여기에는 성적인 쾌락도 포함됩니다)을 삶의 목표라고 주장하는 내용도 이단으로 몰릴 수 있는 한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흔히 쾌락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를 로마에서 계승한 사람이 바로 루크레티우스 입니다. 이러니 카톨릭교회가 이 책을 이단시하고 공개적으로 책 내용을 거론한 이들을 종교재판에 넘겨 처형을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절대적 교황의 권력과 카톨릭 신앙의 기반을 흔들 수 있다고 본 겁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교황의 최측근이던 라틴어 필경사 출신 포지오에게 발견되어 수천년 만에 다시 유통이 됩니다.

초기 소수의 지식인들이 라틴어 판본으로만 돌려보다가 점차 영어 불어본이 유통되어 17-18세기 유럽의 근대 철학자와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보수적 카톨릭 교회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중세 유럽에 죽음이후의 다른 삶은 없으며 세상은 원자와 빈 공간(void)밖에 없다는 로마시대 철학자의 시는 매우 그 자체로 이미 너무 급진적이어서 카톨릭 교회의 수용한계를 넘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짧지만 서양의 인문학적 전통에 대해 상당한 배경지식이 없이는 읽어나가기 쉽지 않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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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루저의 나라 - 독일인 3인, 대한제국을 답사하다
고혜련 지음 / 정은문고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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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동아시아예술사를 공부하신 고혜련 박사의 책입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당시 외국인이 본 당시 조선에 대한 책들도 주로 영미권에 치중되어 있고, 간혹 러시아 외교관이 본 대한제국에 대한 책은 보았지만 독일인이 본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조선은 일단 호기심을 자극할인한 요소가 있습니다.

이 글은 저자가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 도서관에서 찿아낸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조선을 여행한 세 독일인의 조선 답사기입니다.

세편의 답사기는 각각 독립적으로 아무 순서없이 읽어도 무방합니다. 첫번째 프러시아 제국의 산림청 공무원 크노헨하우어의 강원도 당고개 금광 답사기로 대한제국 당시 제국주의 열강세력에게 고종이 광물채굴권을 주고 이익의 25%를 상납받아 고종의 비자금인 내탕금(內帑金)을 조성하고 고종은 이 돈으로 헤이그 밀사를 파견(1907)하고 의병 지원을 합니다. 즉 대한제국 당시 고종이 열강에 이권을 나누어줘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었던 사실이 이 구체적 사례로 보아 재정여건이 열악한 대한제국의 궁여지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프러시아의 일개 공무원인 크노헨하우어는 25%수익 상납을 부정적으로 보고 고종이 탐욕스럽다고 평가합니다. 그건 그들 독일인의 시각이고 내탕금의 존재를 몰라 가능한 생각이죠.

이 찻번째 답사기는 사실 그냥 답사기가 아니고 크노헨하우러가 프러시아로 돌아간 이후 1901년 베를린 독일 식민지협회에서 강연한 내용입니다.

두번째는 독일의 동아시아 예술사가 에쎈의 답사기로 1913년 조선의 경성과 이왕가박물관 등을 둘러본 글입니다. 이책의 저자와는 학문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저자는 이 글을 소개하기 전 독일의 동아시아 예술사의 학맥 계보를 설명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책의 제목에 들어간 ‘유아한 루저’라는 말은 이 두번째 글에서 나온말로 에쎈은 경제활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담배나 피우는 양반 계급을 ‘우아한 루저’로 생각했습니다. 독일제국의 동아시아 예술 특히 공예분야가 전문인 에쎈은 당시 조선에서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들이 사회의 최하층인 천민이라는 사실에 문화적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지배계급인 양반은 아무런 경제활동을 하지 않은 체 성리학적 질서에만 순응해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는 의미로 ‘우아한 루저’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냉소에도 에쎈은 조선의 문화가 일본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조선의 우월한 문화가 이어지지 않는 걸 안타까와 합니다.

세번째 글은 독일의 지리학자 라흐텐자흐의 백두산여행기입니다. 1933년도 글입니다. 이베리아 반도를 연구하는 지리학자인 라흐텐자흐는 한반도의 지리와 이베리아를 비교연구하기 위해 조선을 찿아 한반도 전역의 자리를 탐사했는데, 책에는 이 중 백두산 탐사기만 실려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강도’라고 표현된 백두산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만났다고 하는데 조선의 독립군의 일부가 아닐까 저자는 추정합니다.

저자가 각 답사기 앞에 설명한 각 시기에 대한 배경설명은 간략하지만 꽤 밀도가 높은 글입니다. 특히 머리말의 ‘대한제국의 낯선 이방인’은 독일 위주로 정리되어 있지만 대한제국의 근대화노력에 독일인들이 어떤 기여를 했는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구한말의 독일인 뮐렌도르프는 중국 텐진에 주재하던 독일 외교관 출신으로 대한제국이 구미국가들과 조약을 맺고 외교협상을 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비록 독일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상황에서 외교적 중립을 지켰지만 말입니다.

또 하나 유럽인들이 조선에 대해 잘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아는 경우는 20세기 초 구미에 밀어닥친 일본문화의 영향으로 일본의 시각을 통해 조선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이 책의 번역판본에 대한 정보는 일러두기에 나와있고 각종 인용출처는 본문에 병기되는 방식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도판목록이외 관련 출처도서목록이 없는 건 의외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총 313쪽으로 쉽게 읽히는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21세기의 일본은 과거처럼 선진국이라고 할 수도 없고 별로 생산적인 나라라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과거에 얽매인 나라라는 생각이 더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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