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일문학을 배우고 응용언어학을 공부한 미국인 언어학자 로버트 파우저씨가 ‘한글’로 쓴 도시탐구기입니다.

서울출생으로 도시에서만 살아온 도시인으로서 도시의 여러 인문지리적 현상에 대해 늘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책은 범주를 굳이 나눈다면 인문학자가 쓴 도시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도시학 ( Urban Studies)이나 건축 (Architecture)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평소 살아온 경험이나 인문학적 감성 그리고 이 저자가 보여주는 평소의 식견으로 충분히 훌륭한 도시론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유사한 범주의 책을 읽었는데 서울의 일반 서민들의 살아온 흔적을 답사한 김시덕 작가의 서울 답사기를 꼽을 수 있습니다. 서지학과 전쟁사를 전공한 김작가는 ‘서지학적 방법론’을 도시답사에 적용해 서울과 그 위성도시들, 서울과 경인지역의 관계를 일제시대까지 소급해 살폈습니다 ( 서울선언, 2018 & 갈등 도시,2019)

이 책의 미덕은 이전에 문화재 위주로 조선시대 유적위주로 행해지던 도시답사를 근현대 시기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현재의 서울에 맞춰 현재 서울의 공간을 일반 서민들의 생활과 연관지어 바라본 것입니다.

파우저씨의 책은 서울을 포함한 한국의 도시뿐만 아니라 저자가 살았거나 인연이 있어 자주 방문했던 영어권의 도시들과 일본의 도시를 대상으로 합니다.
제가 인상깊었던 도시를 꼽자면 일본의 가고시마와 아일랜드 더블린입니다. 두 도시는 공교롭게도 방문해 본 적이 없는 도시들입니다. 일본 규슈 남단의 가고시마는 고립된 규수 남부 지방도시이지만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나온 특이한 지역으로 젊은이들이 지역에 남아 일원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더블린은 저자가 언어학 박사학위를 공부한 곳으로 20세기 초 모더니즘 문학가 제임스조이스(James Joyce, 1882-1941)의 고향이자 아일랜드의 수도입니다. 영연방이지만 잉글랜드와 다른 독립국가이고 영국의 오랜 식민지배로 아일랜드어를 잃어버리고 영어를 쓰는 국가입니다.
영국이 아일랜드 지배를 위해 16세기에 더블린에 트리니티 컬리지 (Trinity College Dublin)를 세우고 영국에 협력할 수 있는 지배층을 양성했다는 사실은 일제시대 식민지 조선의 지배층 양성을 위해 경성에 제국대학을 세운 일제의 모습과 겹칩니다. 일본이 영국의 정책을 모방했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특히 각 도시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시간이 지나면서 생기는 도시화와 재개발, 그리고 도시 재생의 문제를 상당한 전문가적 식견으로 설명합니다.
도시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저자가 살아온 여러 도시에서의 삶과 저자가 느낀 점을 적은 에세이이기도 합니다.

살아가면서 사는 공간과 도시의 경관이 정치인들의 의지에 따라 일반 사람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삶의 공간과 결부되어 기억되는 추억과 경험이 얼마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각 도시에 얼마나 괜찮은 헌책방이 존재하는지 이 책에 잘 나와있습니다.

사람들의 삶과 그 공간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각 도시에 대한 나름의 시각을 이렇게 펼치기 여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자가 서울에 거주할 당시 한옥에 살면서 서촌의 한옥보전운동을 한 적이 있는데, 도시개발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영향을 주고 역사의 시간이 쌓인 공간을 배려하고 보존하면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은 반드시 경청해야 할 주장입니다.
부동산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토건세력들과 그에 결탁한 기득권층이 부동산으로 불로소득을 얻고 그 구조가 당연시되는 마당에 원주민의 기존의 삶을 보장하고 공동체의 편익을 위해 도시재생을 하고 재개발을 해야한다는 주장은 이 책에 실린 다양한 외국도시들의 사례를 통해 가능성을 입증시킵니다.

이익을 추구하려고 역사의 흔적을 망치는 우를 또 범해서야 될까요?

서울시장으로 두번째 당선되신 오세훈씨가 MB 시절 진행했던 종로 재개발은 제가 생각하는 최악의 개발 중 하나입니다.

광화문 교보문고 건너편에서 시작되던 ‘피맛골’의 옛 흔적은 남김없이 사라지고 고층 ‘쇼핑센터’가 자리잡아 서울이 아니어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상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당시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도 인기가 있던 독특한 피맛골을 흔적도 없이 없애버린 이유는 역사보다 이익만을 우선하는 사고방식이외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토건 원류세력이 정권을 잡을 때 개발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는 지 알 수 있는 사례입니다.

이 개발로 청진동의 옛모습도 모두 사라졌죠.

조선시대 500년은 현재 서울 사람들과 아무 연관도 없는데도 보존한다고 난리면서, 왜 직접적인 연관이 있던 피맛골, 청진동의 흔적이 사라지는 건 괜찮은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한국이 20세기 초부터 경험한 일제시대에 관심이 많은 독자로서 기억해야 할 그 시대 서민의 역사가 그 시대의 건축양식이 단지 ‘왜색 ( 倭色)’ 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헐리는 것은 반대합니다.

부끄럽기 때문에라도 당시 흔적을 알리고 교육해야 하므로 보통사람들이 그 당시 어떻게 살았나 알기 위해서라도 일제시대에 지어진 일본식 주택이 보존되어야 합니다. 싫어도 눈에 보여야 잊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나치게 강박적으로 흔적을 없애려는 세력은 돈때문일 수도 있지만 일제에 부역한 적이 없는지도 의심해야 합니다.

범죄자가 증거인멸을 시도하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눈에 보이지 않아야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치밀한 계산의 결과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저자 파우저씨는 애호가 수준을 넘어서는 수준의 사진가로 알려졌는데, 그의 도시공간에 대한 관찰은 그가 사진을 찍으며 평소 공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서 나온 결과로 보입니다.

사진가는 당연히 자신의 파인더로 보이는 풍경과 피사체에 애정을 가지고 좋아하는 장소는 무수히 방문하게 됩니다. 같은 장소도 아침과 저녁에 다르고 여름과 겨울이 다르며 눈이 오거나 비가 온후와 그냥 활짝 개어 있을 때 다릅니다.

더구나 좋아하는 공간과 경관이 재개발이나 도시재생으로 바뀌게 된다면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육안으로 관찰하는 행위는 피상적일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매우 구체적이고 직관적인 것으로 내공이 깊어지면 단순한 논리 이상을 꿰뚫는 힘을 가집니다.

그리고 공간에 대한 관심은 남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공간의 특징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하는 매우 예민한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이 책에 포함된 사진 상당수가 저자가 오래전부터 직접 찍어 장소를 기록한 사진들이고 글과 함께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고 과거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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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한국의 주거문화에 대한 책입니다. 360여 페이지의 적당한 두께의 책으로 대한주택공사 주택연구실에서 일했던 서울시립대학교 박철수 교수가 입수한 주택공사 내부 자료의 인용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삶의 공간이 해방 이후 특히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소위 ‘고도성장’또는 ‘압축성장’을 추구하면서 어떤 ‘무리’를 가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군인들이 얼마나 ‘무식하게’ 주거정책을 펴오고 그 결과 한국이 얼마나 천변일률적이고 무관심한 사회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이책에 나온 내용 중 강남개발과 강남의 도시성에 대한 내용은 전에 리뷰했던 책에 나온 내용이라 별도 언급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한종수 강희용님의 강남의 탄생(미지북스,2016)

박해천님의 콘크리트 유토피아(자음과 모음,2011)

을 참조하면 될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내용은 오히려 만주국 장교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했던 소위 ‘근대화 작전’의 뿌리가 일제강점기와 만주국에 있다는 사실에 있다는 점입니다.

경제개발계획과 한국의 압축근대화에 관련된 역사를 읽으면 1960-1970년대 당시 일제에 의해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얼마나 별고민 없이 일제가 시행했던 정책을 가져다 썼는지 보여줍니다.
일제가 당시 경성에 시행하려 했던 ‘조선시가지 계획령 ‘을 해방이후 그대로 가져와 서울의 도심 정비에 사용하고 일제가 경성의 하층민인 토막민들을 ‘미관’을 이유로 경성 밖으로 몰아낸 것처럼 군사정부도 청계천의 하층 빈민들을 광주대단지로 강제로 몰아냈습니다.


얼마전 일제 강점기에 교육받은 학자들이 일본 자료만을 인용하는 지극히 ‘나태한’학문태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1960년대 5.16 군사정변의 주역들은 군인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1960년대 초 근대화를 위해 ‘국토 개발’을 한다며 국토개발단을 모집하고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을 ‘군인’취급하고 예비역 군인들을 고용해 ‘어용군대’처럼 운영하는 황당한 일을 저지릅니다. 군사정권이 사실상 합법적으로 ‘강제노동’을 시킨 이 헤프닝은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아 1년이 지나 중단됩니다. 이는 사실상 일본제국주의가 1930년대 말 총력전 시기 국민을 강제동원한 ‘근로보국단’의 판박이로 일본군 출신 쿠데타 세력은 결국 자신이 아는 걸 다시 써먹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제의 영향이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대에 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깝습니다.

두번째로 언급하고 싶은 건 한국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서양에 대한 ‘열등감’과 ‘비민주적 ‘통치 스타일입니다.

미군정기를 거쳐 한국전쟁을 지나 서울을 재건할 때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을 비롯한 서양 세력들에게 서울의 치부가 보이는 걸 싫어했고 이를 가리기 위해 고층 상가주택을 서울의 관문에 짓기를 원했고, 또 (쓸데없이) 빨리 짓기를 원해 외국의 설계를 의뢰했고 육군 공병대에게 공사를 맡겼습니다. 본인을 왕으로 알고 영구집권를 꿈꾸던 구한말 이래의 노 정치인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 대통령은 정작 그 상가주택에 살 국민들의 의사는 물어보지 않습니다. 이상하죠.
그리고 그 프로젝트가 본인의 입맛에 맞는지만 고려하니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 아니라 전제적 왕권국가의 독재자 노릇을 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독재자인데 서양 열강에 ‘콤플렉스’를 가진 독재자입니다.

그 후대의 박정희 대통령도 이승만 대통령과 거의 차이를 보이지 못합니다.

그는 경제개발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계획을 새운 것이 아니고 군사정변을 통해 무너뜨린 장면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장면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장준하로 대표되는 ‘사상계’ 계통의 지식인들이 입안한 것으로 이들은 거의 대부분 서울 다음으로 경제가 발달했고 조선시대 이래 중국과의 무역을 독점해왔던 평안도 출신들이 주축이었습니다.
1950년대 활약한 서북지역 (평안도 지역) 출신 지식인들에 관해서는
김건우 교수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느티나무 책방,2017)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반공을 기치로 내건 한국 우익의 본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극우로 치달리고 있는 한국의 기독교 본류가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1945년 이후 마지막 학병세대의 관점에서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세운 계획의 실행은 박정희 군사정부에서 하게되고 전쟁에서 전투하듯 어주 급하게 진행됩니다. 도시와 농촌과의 균형발전보다 도시 중심의 불균등 발전 전략을 택해 개발 초기부터 농촌인구의 이촌향도 현상이 나타나고 서울로의 인구집중으로 주택난이 심화됩니다.

군사정권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단지 ‘빠르다’는 이유로 일률적인 아파트 공급에 올인을 하게 되고 체제 경쟁중인 북한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강 이남의 경기도 광주 지역을 개발하게 됩니다.

한국의 부동산 불패의 시작이 군사정권과 건설업자의 결탁으로 이루어집니다.

놀라운 사실은 한국의 주택정책이 전제적 왕권주의자인 이승만 대통령 당시만 해도 국민들의 복지와 후생을 증진시키는 한방법으로 고려되어 ‘사회정책’으로 다루어지고 자금의 보건복지부가 담당이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1950년 당시만 해도 한국정부는 국민들에게 ‘공공주택’을 공급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일제 당시의 조선주택영단을 계승한 대한주택영단이 실제 주택 건설의 일선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국가의 기반이 불안정한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현재 싱가포르나 유럽의 주택 정책과 유사한 정책방향을 가졌었다는 점을 보면서 건국 초기 지식인들이 그래도 나라의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정책이던 주택정책이 사적 경제의 영역으로 넘어와 주택이 건설회사의 돈벌이 수단이 된 때는 1960년대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대통령 때입니다.

현역 육군 장교 출신이던 장동운이 대한주택공사 총재로 취임하면서 서민주택 공급애서 중산층 주택 공급으로 방향을 바꾸고 단지 빠르고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주택을 아파트로만 공급하기 시작합니다.

이 군인 출신인사는 최초의 중산층 타겟 아파트인 동부이촌동 한강매션 아파트를 분양하면서 한국 최초로 ‘선분양제 ’를 도입해 상품을 보지도 못하고 상품을 구매하는 주택건설업계의 희안한 거래관행을 만들었고 주택에 민간자본이 들어가게 되는 길을 열어놓아 결국 부자와 빈자가 결정적으로 다른 삶을 살게되는 길을 열었습니다.

양극화의 씨앗이 군인에 의해 뿌려진 것입니다.

이후 건설회사는 한강을 매립한 부지에 선분양 대금으로 저금부담없이 아파트를 지어 팔고 국민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아파트에서만 살게 됩니다. 군인들처럼 똑같은 공간에서 살게 된 겁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남의 돈으로 장사를 해오던 주택건설업계는 자신들이 망한다는 이유로 당시까지 강제되었던 분양가 상한제 폐지를 요구하게 되고 이는 관철됩니다 . 이후 2000년대 초반 서울의 부동산 가격은 폭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한국의 주택정책은 건국이후 군사정권에 의해 퇴행적인 방향으로 나아갔고 초기 강남으로 이주했던 중산층은 이후 군사정권의 지지자가 되고 이들이 지금 상당수 한국 보수 극우 진영의 거대한 기반이 됩니다.


생소할지 모르겠지만 2021년 현재 부동산 폭등의 기원은 결국 1960년대부터 시작된 주택공사의 공적 책임 방기와 직접 관련이 있습니다.
최근 논란이 된 LH 직원의 농지투기도 LH의 전신인 주택공사가 공적인 역할을 오랫동안 해오지 못했고, 건설부 관료들이 대단히 건설회사에 우호적인 현 상황을 감안하면 오랫동안 물밑에서 이루어졌던 잘못된 관행이 수면 위에 떠오른 것으로 추정합니다.

주거나 공간에 대한 다른 논의를 찿기가 무척 어렵고 주택에 대한 논의가 모두 부동산 시장과 시세로만 연결되는 현 세태가 결국 성급한 군인들의 ‘서양 따라잡기’에 있다는 사실에 있다는 걸 확인하는 건 무척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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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한 일본 일러스트레이터, 호즈미 가즈오가 쓴 책을 번역한 책입니다.

철저히 일본 쇼와시대 (昭和時代,1926-1989)을 살아낸 작가의 관점에서 메이지의 수도, 도쿄의 생활풍속과 경관변화, 근대적 교통수단의 발달을 고증을 통해 재구성한 책입니다.

도쿄는 결혼 전 제가 가장 많은 가보았던 도시이기도 하고, 메이지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바로 그 일본이기도 해서 자연스럽게 메이지의 도쿄가 어떠했을지는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더구나 제 고향이자 현재 살고 있는 서울의 현재 모습은 과거 일제강점기의 ‘경성’을 그 밑바닥에 깔고 서 있습니다.

일제에 의해 시행되었던 경성의 ‘시구개정계획’은 도쿄를 포함한 당시 일본제국의 도시계획 중 일부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경성이 일제의 수도 도쿄의 영향을 받았고, 도쿄의 경관이 이들이 당시 본받으려 했던 프로이센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전진성,2015).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유럽의 후발주자였던 프로이센은 이상적인 건축양식을 ‘ 그리스 고전주의’적 건축양식으로 보고 중부 유럽의 변방이던 베를린에 이를 이식했다는 점입니다.


메이지 초기,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를 위시한 일본의 견미사절단이 유럽과 북미를 돌아보고 일본을 서구와 동등한 ‘문명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서양을 따라하기 시작합니다.

서구의 기술자를 초빙해 철도와 건축기술을 배우면서 도쿄 긴자에 최초의 서양식 거리를 만듭니다.

그리고 도쿄대학과 각쿠슈인 등을 비롯한 서양식 근대 고등교육기관을 만들어 철저하게 일본 제국주의의 국가 및 식민지 경영을 맡길 수 있는 엘리트들을 길러내기 시작합니다.

실제 이들 일본의 제국대학 출신 졸업생들은 한국의 고도성장기를 지나 2000년대까지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자와 동년배인 1930년대 생들은 지금까지도 ‘국가원로’ 그룹으로 또는 ‘헌정회’의 일원으로 아직도 한국의 국가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책은 청일전쟁 당시 일본의 조선주재 공사이던 전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 (井上馨)를 열렬한 서구주의 추종자로 소개하는데, 그가 메이지 당시 유명한 연회장이자 사교장이던 로쿠메이칸 (鹿鳴館)의 건립을 주창해서 실제로 세워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도쿄의 도시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 1923년 간토대지진(関東大震災)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고, 당시 조선에서 살 수가 없어 일본에 건너간 재일 조선인에 대한 언급이나 이 지진으로 학살당했던 조선인에 대한 언급은 이책에 일절 없습니다. 아마도 메이지 시대만 다루다 보니 쇼와시대의 대사건인 이 지진을 언급만 한 것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가볍게 읽으려고 집어든 책이지만 의외로 일본인들의 세시풍속과 관련된 설명이 상당하고 메이지 시대의 도쿄의 경관변천을 삽화로 보여주는 건 ‘도시공간’의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꽤 유용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번도 혁명이 없었던 나라 일본의 수도 도쿄에 어째서 그렇게 많은 시니세 (老舗)가 번창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이해가 되었습니다. 조선에도 분점을 냈던 미스코시 (三越)백화점도 에도시대부터 유명한 3대 포목점 중 하나였다는 설명도 그렇고 긴자(銀座)의 유명한 제과점으로 단팥빵을 처음 만든 기무라야 (木村屋)에 대한 설명이 긴자의 시작인 ‘긴자벽돌거리’와 관련되어 언급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10여년 전 긴자에 갔을 당시 늘 이 빵집에서 단팥빵을 사먹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의 구한말과 일본의 메이지 시대는 한국이 다시는 식민지 시대를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세심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시대입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라는 아픈 역사로 인해 더욱 그렇습니다.

가깝지만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나라가 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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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의 도시 모습은 식민지 시기 도시의 경관이 직접적으로 이어내려온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 한국의 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 당시 도시계획과 그 개발양상을 추적하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인천대학교 일본문화연구소에서 기획한 이 논문집은 크게 두부분으로 실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과 조선에서 어떻게 도시가 계획되고 개발되었는지를 고찰한 전반부와 천황제 국가이데올로기를 전파시키고 식민지 조선인들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조선에 국가신사를 지은 이유를 추적한 후반부로 나뉘어집니다. 물론 후반부에는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어떻게 일제가 기념공간을 조성했는지도 추적합니다.

하지만 주목하는 부분은 4개의 논문입니다.

1. 1920년대 경성의 도시계획과 도시계획운동

2. 식민지 도시 인천의 도시계획과 도시공간의 확장

3. 조선신궁과 식민지 동화주의의 공간정치

4. 인천대신궁의 공간변용과 재인천 일본인


모두 일본보다는 식민지 조선의 공간변화에 관한 글로 특히 첫번째와 세번째 논문은 1910년 한일병합이후 서울의 공간이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해방이전 서울의 공간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보여줍니다.

한일병합이후 일제는 시구개정사업울 추진하는데 특히 경성의 경우 조선왕조의 수도로서 조선의 정치적 정통성을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에 한성부의 공간을 식민권력애 맞게 재조정해서 그들이 생각하는 문명적 공간을 만들어 경성이 가진 정통성과 저항성을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런 정권의 전시적 목적 이외에 한강의 수해로 일본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용산 일대의 치수대책이 필요했습니다.

식민당국은 급격한 도시화로 경성에 조선인 빈민뮨제가 삼삭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경성을 식민지 수도로서 개조하는데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식민관료들은 도시빈민문제를 도시의’미관’문제로만 바라보고 ‘복지’의 문제는 간과해 왔습니다. 이 불합리한 전통은 21세기 서울의 관료들 사이에서도 아직 살아 있습니다.
20세기 초 일제 식민관료들이 빈민들을 도시외곽으로 집단이주시켰듯이 현재 한국의 관료들도 빈민들을 끊임없이 도시 외곽으로 몰아냅니다. 오랜 전통입니다.

이런 연유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전통적 거주지인 북촌에 총독부 건물을 짓고 관사를 짓는 방식으로 이 곳을 침략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항하여 건설업자 정세권이 북촌에 소형개량한옥을 대량으로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정세권의 개량한옥건설사업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2017)’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궁궐등 공유지에 관사를 짓고 총독부와 같은 공공건축물울 지으며 북촌을 침탈해 온 일제를 당시 건축업자인 정세권 선생이 어떻게 이들의 공간침탈을 막았는지 보여줍니다. 익선동과 북촌의 개량한옥촌의 숨은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식민관료들은 1920년대 내내 ‘대경성’이라는 허황된 도시계획을 수립하고 탁상공론으로 일관했으며, 도시계획운동에 따라 도시계획의 법제화의 계기는 마련했으나 실제로 이를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일제는 1926년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완공하고 1925년 조선신궁을 건립해 식민지 동화정책을 본격화할 뿐 조선의 도시빈민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1920년대 실현되지 못했던 경성도시계획은 1934년 <경성시가지계획령>과 1936년 <대경성계획>으로 그 체계를 갖추게 됩니다.

일제가 경성도시계획을 세우면서 도입한 ‘토지구획정리사업’은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박정희 정부의 ‘강남개발사업’에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한국이 일제의 영향을 해방이후에도 받았었다는 실례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랐습니다. 일제 만주군 출신 전직 대통령은 본인이 일제 강점기 얻은 지식을 해방후 그대로 적용한 겁니다.

일제는 경성의 남산 아래 일본인 밀집거주지역이었던 충무로와 명동 그리고 남산에 그들만의 공간을 조성합니다.
개항이후 최초의 일본영사관도, 그리고 조선통감부도 남산아래 있었고 일본인들이 건립한 최초의 신사인 경성신사 ( 또는 남산대신궁)도 조선 거류 일본인들이 남산에 지었습니다.

이후 1930년대부터 본격화되는 식민지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국가신사를 남산에 건립하기 시작해 1925년 조선신궁을 완공합니다.

이미 을사늑약이후 최초의 현충원이던 장충단을 파괴하고 신사를 건립한 일본인들은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립해 일본색을 강하게 남산에 이식합니다.

일제는 1930년대들어 적극적 황민화정책을 시행해 강제적으로 신사참배, 궁성요배, 창씨개명 등을 단행합니다.

조선신궁이 초기 단순한 통합의 장소로서 기능했으나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해서 집단의례를 통한 대중동원의 거점으로서의 기능이 강화됩니다.

조선신궁은 1940년대 일제 말기 일상생활에 엄숙주의와 금욕주의를 강요하면서 식민지 전체를 집단적 규율화로 몰아가는 전시체제의 공간적 거점이었습니다.

따라서 해방이후 이 공간들이 그동안 억압받아온 조선인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파괴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입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인 국가신사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경성 공간통치, 특히 대표적 관가인 광화문 일대의 공간변화를 세밀하게 추적한 책이 이순우 작가의’광화문 육조앞길(2012)’입니다. 조선 말기 이후 한양의 육조앞길이 어떻게 일제의 경성부 ‘광화문통’이 되어가는지 특히 북촌지역의 변화를 위주로 상세히 추적한 책입니다.

일제 패망이후 조선을 ‘점령 (occupied)’한 미군정당국은 광화문통의 조선총독부 중앙관가를 사실상 그대로 유지한 체 미국대사관을 이 자리에 건립합니다. 미군정 입장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조선은 일본 땅이었고, 일본이 점령된 상황에선 한국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팩트는 냉정하게 봐야 합니다.

앞으로도 구한말이후 시작된 서울의 공간변화가 현재에 미친 영향을 지속적으로 읽어나갈 생각입니다.

현재 상황을 알려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도 과거를 추적하기 위한 최근 특히 해방 이후의 자료는 찿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요즘 1980년대 말 1990년대에 발행된 책을 찿아보려 하지만 겨우 30여년 밖에 안된 책을 구하기가 어려워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현대의 기록에 대해 사람들이 무심하다는데 매우 놀랐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겠지만 아무튼 충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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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 중 한분인 정세권은 일제강점기인 1920-1930년대 경성에서 활약하신 부동산 디벨로퍼( Real Estate Developer)입니다.

부동산 디벨로퍼란 말 그대로 토지를 싼값에 사들여 그 토지를 시장 활황시 그대로 매각하거나 그 토지에 건물을 지어 부사가치를 올린후 그 건물을 매매하거나 임대하는 것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자를 말하지요.

2017년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김경민 교수가 쓴 이 책은 200여 페이지 내외의 짧은 책이지만 흔히 ‘집장사’로 폄하되어온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의 일생을 당시 신문기사, 정세권의 아들, 딸, 외손녀 등 후손들을 인터뷰해 다시 재구성하고 알려지지 않은 그의 삶을 재조명한 책입니다.

도시공간이나 도시의 역사, 도시계획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이 분야가 토지의 경제적 측면을 보는 부동산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한국에서 이런 부분에 촛점을 맞춘 경우는 이 책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작년에 읽었던 김시덕교수의 ‘갈등도시 ( 열린책들,2019)’에서 이 책을 처음 소개하셨고, 현재의 서울이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최근 일독을 한 것입니다.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된 이책의 1부와 2부는 정세권의 부동산 개발과 1920-30년 당시 경성의 일본인 진출상황에 관련된 내용이고 3부는 정세권이 본업인 부동산 개발 이외 참여한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조선어학회 후원 관련된 내용입니다.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숭리한 이후 사실상 서구의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조선의 지배를 공인받고 인천지역인 현재의 명동과 충무로 지역에 진출하여 남산 아래 통감부를 세우고 최초의 현충원인 장충단을 공원으로 바꾸고 조선신사를 세우고 일본인들의 거주지를 마련하여 사실상 남촌을 장악했습니다.

‘명동길거리문화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2019)’에서는 일본인의 남촌 정착과정과 명동에서 일본 백화점들이 진출해 일제시대 어떻게 이곳이 소비의 중심으로 떠올랐는지 그리고 당시 명동의 메이지좌 ( 현재 명동예술극장)가 북촌의 조선인과 남촌의 일본인을 관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그리고 처음에 명확하던 남촌의 일본인 관객과 북촌의 조선인 관객의 경계가 시간이 지나면서 불분명해지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조선과 일본의 관객들이 남촌과 북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불분명해지는 것은 이 당시 일본인들의 북촌 진출과 무관하지 않은 사실입니다.


1926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경복궁에 완공된 것을 기회로 일제는 여기서 일하는 일본인들을 위한 관사를 짓는 수법으로 지금의 북촌과 서촌일대 그리고 서소문 경희궁을 비롯한 관화문 주위의 ‘북촌지역 ‘에 그들의 거주지를 확대해 갑니다.

광화문 일대 관청가가 일제강점기를 통해 어떻게 변해 왔는지 이순우 작가의 ‘광화문 육조앞길 (하늘재,2012)’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경성에 사는 일본인들을 위한 소위 서양식 ‘문화주택’의 개발에만 집중하고 조선인 중하층 인구에 대해 관심을 전혀 가지지 않아 토막민(土幕民)으로 불리는 영세민들이 열악한 토굴과 같은 오두막에 사는 등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심각한 사회갈등의 요인이었는데도 일제는 그냥 무시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세권은 1920년대 북촌에 ‘개량한옥’을 개발해서 중하층 조선인들에게 싼값으로 공급했습니다. 일본인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열세였던 조선인들이 고급주택을 살수는 없어 기존의 한옥을 규모가 작고 생활이 편리하도록 개량해서 공급한 것입니다.

그는 북촌과 익선동, 봉익동,성북동, 혜화동, 창신동,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을 개발했습니다.

우리가 전통한옥마을로 알고 있는 북촌한옥마을이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익선동의 풍경은 모두 정세권이라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어린시절 보았던 개량한옥으로 이루어진 골목길이 생각납니다. 혜화동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저는 1980년대까지 존재했던 명륜동의 한옥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미아리 고개를 넘어 삼선교로 가는 길목에도 한옥들이 가득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근래 익선동이 힙한 카페들로 다시 뜨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의 인식도 무조건 새것보다 세월의 때가 묻은 아름다움을 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나마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살기 불편한 집이라고 다 밀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짓은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은 조선을 계승한 나라가 아닙니다. 헌법에 임시정부를 계승한 나라라고 명시되어 있고, 서울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호불호와 관련없이 일제강점기 때 이루어진 그 구조를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더구나 일반 시민들의 삶은 어쩔 수 없이 일제시대 가옥과 공간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를 일제 유산 청산이라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밀어버리는 것은 무식하기 짝이 없는 처사인 것 같습니다.

일부라도 보존해 일제가 한국에 어떤일을 벌였는지 증거로서 남겨두어야 하고 그래야 잊혀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자비한 철거는 과거의 위정자의 친일 행적에 대해 이들이 증거를 인멸하려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합니다.

3부에서 정세권이 안재홍과 벌인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이극로와 함께 동참한 조선어학회 관련 내용이 나옵니다.

소위 먹물이라는 지식인들이 노선투쟁이나 하고 뜬구름잡는 이론을 잡지에 내면서 조선물산장려운동을 말아먹다가 정세권의 합류로 이 운동이 되살아나는 모습은 보기 상당히 안쓰럽습니다. 물산장려화관을 지어서 후원금으로 충당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아 결국 정세권 사비로 건축비를 츙당했다는 에피소드는 지식인들의 ‘허위’를 그대로 마주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도 정세권을 ‘집장사’라고 폄하했다니 황당했습니다. 조선시대 사농공상 의식이 아직도 그대로 살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책의 미덕은 단순히 당시 신문기사 등 일차사료를 인용한 것이 아니라 정세권의 딸 아들 등 후손들과 직접 인터뷰해 당시 상황을 좀더 다른 각도에서 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끝으로 현재 서울의 공간이 일률적으로 모두 아파트라는 공동주거형태로 재편되고 있는데, 과거 1970년대 이전, 그리고 그보다 더 이전인 일제강점기 서울의 주거형태가 어떠했는지 알아보는 것은 우리 부모님, 조부모님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를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한가지 방법입니다. 그리고 좀더 넓은 의미에서 일제강점기 일본인들과 그 이후 한국을 통치한 이들이 수도 서울의 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집장사라고 폄하되었던 정세권의 일생을 되짚어 보는 것도 그래서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1926년 완공되고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에 의해 1990년대 초에 철거된 것 만큼 서울에 존재하던 수많은 개량한옥들이 1920-30년대 건축왕 정세권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한옥들이 필요에 위해 헐려나갔기 때문에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정말 필요한 것이 맞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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