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나날들이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

 

이미 실시되고 있던 복지는 없던 일로 되돌리고, 없던 복지는 아예 없던 일로 하고, 안 해도 될 일은 굳이 하려고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현진건의 소설 제목처럼 '술 권하는 사회'가 되었으니, 술이나 마실 수밖에 없는 건지.

 

"삶창 101호"가 왔다.

 

반갑게 읽기 시작.

 

마음이 따스해지고 싶어서 빨리 손에 들었는데... 이거 더 우울하다. 즐거운 소식은 역시 없다.

 

삶이 보여야 하는데, 우리나라 곳곳에 펼쳐져 있는 가림막처럼, 아님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둠의 장벽인 지배 계층의 일들처럼, 삶은 어둠 저편에 있다.

 

어둠 저편에서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 삶창에 실린 내용들도 아직은 어둡다.

 

이 사회를 보여주는 거울같은 역할을 하는 삶창이니, 당연히 어두울 수밖에 없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럼에도 조금 따뜻할 수는 없을까?

 

비록 희망이 사람을 더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희망이 사람을 살아가게 만들고 있듯이 삶창이 무언가 희망을 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 호에서 <오늘>이라는 주제로 쓰여진 글들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잘 짚어내고 있는데, 그게 참 우울한 단면이고, <공간과 환경>에서도 역시 우리 삶을 침해하고 있지만 적절히 대응하고 있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이 글에서는 삶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조금 희망을 가진다면 <다른 세상>에 나온 '공룡'이란 공동체 실험 이야기처럼 아직 희망을 지니고 다양한 삶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세월호에 관해 재판 결과가 나왔다. 그 결과를 두고 말들이 많다. 그 많은 말들 중에 정작 책임져야 할 사람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 이런 상황이 이번 삶창 101호에서 고병권의 글.

 

그가 <노동의 인문학>에서 이야기한 '왕에게는 아무 것도 희망하지 말라. 그에게는 단지 책임만을 물어라. 힘은 바로 당신에게 있다.'(83쪽)는 고병권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에게 시혜를 구걸하지 말라는 말, 그들이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은 시혜가 아니라 책임이라고, 우리는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힘없는 서발턴(하위 주체)들에게 책임을 묻는 왕에게 읍소하는 것이 아니라, 왕, 네가 책임져야 한다고, 책임자는 바로 너라고 당당하게, 힘있게 말해야 한다고 읽힌다.

 

이게 희망이다.

 

그럼에도 마음은 따스해지지 않는다.

 

이상하게 100호를 기점으로 삶창이 가슴에서 머리로 옮겨간 느낌이다. 삶을 살아가는 주체들의 이야기보다는 그런 주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글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마음을 울리는 글보다는 머리에 호소하는 글이 더 많다.

 

이게 삶창을 읽고 나서도 우울함이 가시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삶이 보이는 창, 마음을 울리는 글들이 나에게 삶을 보여주곤 했었는데, 그 점은 아쉽다.

 

그럼에도 논리적 사유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변화가 더 좋을 수도 있겠지.

 

덧글

 

이번 호에서 사실 마음이 가장 따스해진 글은 책 뒷표지에 실린 손별걸 시인의 글이다. 학생들이 쓴 시를 제비뽑기를 통해서 시상했다는. 시인들 답게 왜 아이들 시를 순위를 매겨야지 하는 생각, 그리고 제비뽑기를 통해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고, 뽑히지 않더라도 마음이 상하지 않는 그런 모습. 정말 따스하다.

 

예전 그리스에서는 추첨으로 지도자를 뽑기도 했다는데, 제비뽑기로 뽑은 지도자가 선거를 통해 뽑은 지도자보다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왜일까?

 

이런 따스한 글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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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듣기도, 신문을 펼치기도 싫다.

 

들리는 소리는 다 귀를 씻어도 시원찮을 소리고(허유와 소부의 고사처럼, 귀를 씻은 물이 강물을 오염시킬까봐 두렵기만 한 나날들이다), 신문을 보면 열통이 터지는 기사들만 난무하고 있다.

 

그러다 오늘 본 <한겨레 신문>, 첫 면. 커다랗게 나온 사진. 전봉준.

 

그 눈빛, 끌려가면서도 세상을 꿰뚫을 것 같은 그 눈빛을 지닌 사람, 녹두장군. 그의 사진을 보며 마음이 뭉클했다.

녹색평론 11-12월호에서도 전봉준에 대해서 다루었는데, <한겨레 신문>에도 그의 사진이 나오다니... 이게 우연일까?

 

아니라는 생각. 그만큼 이런 인물이 필요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전봉준은 허균의 말대로 한다면 '호민'에 해당할 터.

 

항민들이 그냥 그대로 순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탐학이 겹치니 이러한 항민이 원민이 되어 버린 시대. 원민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사람, 그가 바로 호민이다.

 

그 호민을 따라 원민도 항민도 함께 일떠섰던 일, 동학 혁명.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던 그런 혁명.

 

전봉준에 겹쳐 허균이 떠오르고, 허균의 호민이 생각나니, 자연스레 홍길동이 나타나게 되고. 홍길동, 그는 호민이었음에 분명하지만, 전봉준이 농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 아니 모든 사람이 평등한 인내천(人乃天) 세상을 꿈꾸었다면 홍길동은 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으되, 그것이 자신에 대한 차별 철폐에 그치고 만 한계가 있는데, 이는 시대적 한계이겠지만, 적어도 허균은 사람들이 신분으로 차별받는 세상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그의 유재론을 보라)

 

무상급식을 없애고 누리교육과정에 돈을 써라. 정부에서 3-6개월은 양보할 수 있다. 절충안 제시.

 

이상하다. 절충안은 교육청에서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

 

누리교육과정은 대통령 공약이고, 조례든 법령이든 이는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이를 교육청에 넘기면서 무상급식을 폐지하란다.

 

말을 한 번 잘못 썼더니 이런 일을 당한다. 무상급식이 아니라 의무급식이다. 의무교육에는 학생들의 심신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학교에 학생을 보내지 않으면 부모에게 과태료를 물게 할 정도로 학교에 꼭 보내라고, 그것이 의무교육이라고 하면서 왜 학교에서 밥을 책임지지 말라고 하는지, 그것은 부모가 알아서 할 문제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교육기관도 아니고 보육시설로 되어 있는 어린이집을 교육기관인 교육청에서 책임지라니, 우리나라 보건복지부는 뭐하는 부서인지.

 

세월호법 역시 유가족들의 뜻과는 멀게 정리가 되어 가고 있고, 무상급식이 아닌 의무급식은 자꾸 하지 말라고 해서 아이들을 굶주리게 하거나, 아니면 남 눈치 보면서 밥 먹게 하면서, 비정규직은 차별을 견디지 못해 힘들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나라 학생들의 만족도, 행복지수는 선진국 가운데 꼴찌라는데...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부모들도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치는데... 공무원연금법은 개정한다고 하는데, 당사들과 또 제3자들과의 합의도 없이 먹고살기 편안한, 아니 지들은 너무모 편하게 세비를 받아 쓰고 있는 족속들이 나서고 있는데...

 

우리나라 국민들이 항민에서 원민으로 넘어가고 있는 상태 아닌가? 힘들다고 힘들다고, 이건 아니라고 아니라고 외치고 있는 상태 아니던가. 

 

여기에 호민이 나서기만 한다면, 그렇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 호민, 그리워지는 시대다.

 

갑자기 정여립이 생각났다. 요즘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이렇게 정여립처럼 팽당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가 꿈꾸던 대동세상은 어쩌면 허균이 말하던 호민이 나서서 건설하려던 세상과 같은 세상이 아니었을까? 녹두장군이 꿈꾸던 세상 역시 대동세상 아니던가.

 

그 때보다 모든 면에서 풍족해진 시대. 그럼에도 왜 이렇게 살기 힘들다는 말이 나오는 걸까? 아직도 국민은 졸인가? 호민이 필요한가? 국민은 졸이 아니라 주인이라고 외치는. 그렇게 함께 외치는.

 

그런 호민.

 

제발 국민들을 원민으로 만들지 말라. 원민이 많아지면 홍길동, 녹두장군같은 호민이 나타난다. 호민을 사람들이 부른다. 호민은 그 자체로 호민이 아니다. 세상이 만들고 세상이 부를 때 나타난다.

 

오늘 본 전봉준의 사진. 그 눈빛.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슬프다. 그의 눈빛이 아직도 내 가슴에 파고드는 이 현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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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꾸준히 정기 구독을 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책 가운데 하나.

 

두 달에 한 번 나오지만, 그 동안에 내가 살아온 방식을 반성하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게 하기도 하는 책이기도 하고.

 

근본주의자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근본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세상은 더 좋아질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근본을 추구하되, 다름을 인정하고, 근본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고,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는 일.

 

그것이 지식인의 역할이고, 지금 녹색평론과 같은 책이 해야 할 역할이다.

 

이번 호는 " 대안학고, 희망의 교육을 위하여"이다.

 

녹색평론이 생태주의를 표방하고 있는데, 이 생태주의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교육을 간과할 수가 없다. 교육은 생태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어떤 교육이냐가 중요한데, 이런 교육에 대해서 우리는 제도권 교육이나 학원 교육으로 대표되는 사교육에 대해서는 이야기도 많이 하고, 고민도 많이 하지만, 대안교육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다.

 

대안교육. 말 그대로 이것이 아닌 저것을 추구하는 교육. 이곳이 아닌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교육이 대안교육이라고 해야 할텐데, 지금 수많은 대안학교들 중 대안교육을 실질적으로 행하고 있는 학교는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이다.

 

이번 호에서 대담에 참여한 분들도 우려하고 있는 것이 대안이라는 이름으로 전혀 대안적이지 않은 기관까지 묶여 있으며, 정부에서는 대안교육을 인가라는 무기로 간섭하고 통제하려 한다는 점이다.

 

대안교육은 그냥 놓아두어야 한다.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대신 대안교육이니 너희들 맘대로 할 것이니 우린 모른다 하는 자세가 아니라, 너희들이 꿈꾸는 교육을 해라, 그런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뒷받침해주겠다 하는 자세를 지녔으면 하는데...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처럼 대안교육이 들불처럼 일어나지도 않았겠지.

 

그럼에도 대안교육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대안교육이 제도권 교육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좌담에서도 나오지만 혁신학교가 만들어지고 나름 성과를 거두게 된 데에는 대안학교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육은 죽었다. 학교는 죽었다는 말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지금 이 시대, 대안 교육은 여전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제도권 교육과 대안 교육이 함께 가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제도권 교육과 대안 교육이 함께 가는 사회, 이런 사회는 생태적 사회가 될 수 있다.

 

생태적 사회라는 이야기는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 다양성을 이루는 사회일테니 말이다.

 

이런 대안 교육에 대한 글과 더불어 배병삼의 글이 마음에 와 닿았다. 한자어를 풀이하는 과정에서, 아니 유교 경전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늘 다가왔던 말, 인(仁). 이 말을 이야기하면서, 배병삼은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도대체 지식인으로서 감정을 숨기기에는 지금 우리 사회가 너무 저열하다. 그들에게 고급스런 단어(이런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사교적인 언어라고 하지)를 쓸 수가 없는 상태라는 사실을 이 글을 읽으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단장의 슬픔을 애써 외면하려는 그런 집단에게 인(仁)이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는 그런 족속들이니, 어찌 고운 말이 나올 수 있겠는가.

 

이런 애타는 마음이 날것 그대로 글에 드러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공부한 사람들이 지닌 마음의 자세 아닐까.

 

공부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일텐데, 이기적이기 위해서는 이타적이어야 하듯이, 공부는 남과 나를 잇는 다리가 되어야 할텐데,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공부를 하는 집단. 오로지 제 말만 하는 집단. 그런 집단들에게 이번 호 배병삼의 글을 그대로 들려주고 싶다.

 

"불인하도다, 이 땅이여. 잔인하도다, 이 땅 사람들이여. 아! 슬프다." (71쪽)

 

이 땅, 이 땅 사람들. 누구를 말하는지 꼭 짚지 않아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알 터.

 

두 달에 한 번 여전히 내 생각보다 앞서 간 책을 읽는 재미는 단지 재미로 그치지 않는다. 나를 되돌아 보게 한다. 내 삶을 성찰하게 한다. 내가 어떤 삶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보여준다.

 

그래.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책의 역할이다. 책은 시간을 때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책은 단지 시간을 때우게 해서는 안된다.

 

한 사람의 영혼에 자리잡아 그 사람의 삶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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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11-09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녹평 독자를 만나면 언제나 반가워요!!
그나마 녹평이 있어 이 사회가 이 정도라도 유지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안전, 보호, 간섭, 감시, 통제, 위험, 재난

 

이런 낱말들을 나열해 본다. 말에는 힘이 담겨 있고, 그 힘은 사람들을 구속하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는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낱말이 바로 "안전불감증"이란 말이 아닐까 싶다.

 

안전불감증.

 

이 말은 우리 사회가 안전하지 않은데도 사람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산다는 말로 들린다. 그리고 이런 안전불감증이라는 말을 연일 언론에서 뱉어내고 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이 안전불감증이라는 말에는 우리 사회가 위험사회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도처에 위험이 있는데 그 위험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사회가 이토록 위험하니 학생들의 안전에 만전을 기해라. 아이들을 위험에서 구출하라. 일반 시민들도 한 순간에 환풍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조심해라. 불이 나면 대피할 수 있도록 해라. 지하철, 버스, 비행기, 배 사고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조직해라 등등.

 

세상에 이 많은 방법들을 머리 속에 넣고 다니다가는 정작 위험에 닥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어떤 때는 어떻게 라는 시험을 볼지도 모르겠다. 시험하면 또 우리나라 아니던가. 시험에 나온다고 하면 기를 쓰고 외워버리지 않는가.

 

그런데 이번 "민들레 95호"에서는 이런 '안전불감증'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예전보다 더 위험해졌는가?

 

왜 언론은 이 상식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까? 굳이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대답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또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하여 보호라는 이름으로 감시를 하고, 위험이라는 말로 통제를 정당화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이 매뉴얼의 문제가 아니었음에도 매뉴얼을 지키지 않아서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외면하려는 모습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 사람들의 자율성을 보호라는 이름으로 빼앗아가고 있는 본질을 가리기 위한 꼼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래서 이번 "민들레 95호"의 특집은 '보호와 감시 사이'다. 우리는 보호라고 생각하겠지만, 보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기득권을 지닌 집단, 이미 권력을 지닌 집단이고, 이 보호를 감시라고 생각하는 집단은 기득원이 없는 집단, 권력이 없는 집단일 수밖에 없다.

 

하여 보호는 통제의 다른 이름이고, 감시를 감추기 위한 보호색일 뿐이다.

 

학교라는 공간을 생각해 보자. 학교가 딱히 더 위험해 진 것이 없는데, 세월호 이후에 학생들의 수학여행이나 체험활동이 전면 금지되기도 했고, 또 학교에 엄청나게 많은 안전에 관한 공문이 온다고 하고, 안전교육을 실시하라는 압박이 많다고 한다.

 

학교는 예전과 다름이 없는데, 아니 오히려 예전에 비하면 더 안전해졌다고 할 수 있는데, 안전! 안전! 하는 것은 학생들을 더 통제하려는, 시키는 대로만 하는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그런 의도라고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매일 매일 모든 행동이 부모에게 통보되는 아이와 가끔은 부모 몰래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아이, 둘 중 누가 더 행복하겠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안전은 어느 지점에 있어야 하겠는가.

 

이번 호에 이런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진정한 안전이란 무엇인지. 도대체 우리는 보호와 감시 사이에서 어떤 관점을 취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이번 호에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저런, 안전에 관한 신화. 또는 통제에 대한 감추기. 이런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만든 민들레였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학교나 아이들에 대한 안전을 강조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식으로 기계적 통제, 보호를 하려는 모습이 잘못된 점이고, 우리 사회가 위험한 것은 학교나 아이들뿐이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에게 해당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호에서도 나오지만 우리 사회는 핵발전소, 썩어가고 있는 4대강, 난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산과 들. 그리고 올림픽이다 뭐다 해서 훼손되고 있는 숲들, 생계조차 힘들게 하는 신자유주의 물결로 인한 비정규직 확대, 최저 임금도 받지 못하고 있는 일용직 노동자들, 이제는 노후 걱정까지 해야될지도 모르는 중하위직 공무원들, 졸업해도 도대체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대학생들, 자유무역협정이다 뭐다 해서 자신의 생산지와 생산물을 버려야 할지도 모를 수많은 농민들, 국민의 안위와 복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정치인 계급들 등등.

 

공연히 이런 위험을 감추려고 학교, 학생, 어린이에게 안전! 안전! 하면서 기계적인 통제, 법적인 통제를 하려고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진정한 위험은 여기에 있고, 우리를 안전하게 할 방법은 이런 사회의 모습들을 바꿔가려고 노력하는 데서 나온다.

 

이것이 우리가 '세월호'를 잊지 않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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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소설 제목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인데, 요즘은 70-80년대 그 많던 지식인, 사회변혁, 사회정의를 꿈꾸던 지식인들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갔을까 하는 생각이 난다.

 

누가 먹어치운 것도 아닌데... 설마 자본이 지식인까지도 먹어치웠나?

 

사회가 어지러울수록 지식인의 역할이 커져야 하는데, 어지러운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지식인은 지식인이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영리만을 추구하는 소인배에 불과하다.

 

그런데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이상하게도 민중과는 멀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면 많이 배울수록 자신의 지식을 이상한 쪽으로 이용해 먹는다는 생각이 든다.

 

인정할 것을 온갖 현학적인 논리를 동원하여 합리화하려 하지 않나, 그 때의 관행이라는 둥, 시대적 한계라는 둥 하면서 지식인 개인의 책임은 모면하려 하고, 오로지 시대나 사회에 책임을 전가하려고 하고 있다.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고매한 생각을 우매한 민중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만 하고 있다고 되려 큰소리를 치고 있다.

 

머리 속에서는 세상을 바꿀 지식이 들었으니 현실에 적용하려니 자신에게 다가올 불이익이 두려워 차라리 아무 말 안하고 입닥치고 살겠다거나, 또는 현실은 현실이고 이론은 이론이라고, 오히려 현실에 적극적으로 자신을 맞추는 사람도 있으니...

 

이런 사람들이 지식인이랍시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위치에 있어서 온갖 여론을 주도하고(이를 황색언론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자신들의 침묵을, 자신들의 지행불일치를 합리화하고 있으니... 이런 세상이 어떻게 좋은 세상이라고 하겠는지.

 

사회를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 구조적인 면, 개인적인 면? 지식인들은 온갖 처방을 내놓지만, 오래 전에 읽었던 소설 "트레버"의 소년보다도 못한 처방들일 뿐이다.

 

트레버는 이야기한다. 내가 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주고, 그 조건으로 그 사람들도 각 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계속 된다면 세상은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트레버는 그렇게 실천한다. 소설 속에서 트레버는 비운의 죽음을 맞지만 그가 제시한 일들은 꼭 수학적인 산술대로 되지는 않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실천되기 시작한다.

 

이게 바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법이다. 지식인들의 온갖 화려한 문구들보다도 훨씬 현실적이고 직접적이다. 그리고 현재적이다.

 

이 발상을 거꾸로 하면 지식인들, 제발 사회에 해가 될 일을 하나씩만 하지 마라. 그리고 다른 지식인들에게도 하나씩만 하지 마라고 이야기 해라. 그러면 세상은 아마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워 지리라.

 

여기에 반대로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조나단 갈매기가 있다. 그는 지식인 갈매기라고 할 수 있다. 갈매기들의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갈매기의 모습을 꿈꾼다. 그러다 비웃음을 받고 무리에서 쫓겨난다. 쫓겨난 후 그는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집단과 자신을 이끌어줄 스승을 만난다. 그리고 예전 동료 갈매기와는 다른 갈매기가 된다.

 

여기서 끝났으면 그의 성공담으로, 지식인의 성공담에 불과했을텐데, 이 책은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렇게 다른 존재가 된 조나단, 그는 예전 무리들에게 돌아간다. 왜냐? 자신이 깨우친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어야 했으니까.

 

이게 바로 지식인이다. 지식인은 민중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을 먼저 깨달았다고 보면 된다. 그러면 그들이 할 일은 민중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민중들도 함께 깨닫게 해야 한다.

 

이것이 그람시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이기도 한다. 자신의 깨달음에서 멈추고 자신의 세계 속에서 살거나 또는 자신의 생각을 지지해주는 집단 속에서만 살거나, 아니면 자신을 더 높은 이끌 사람들에게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 속으로, 자신의 원존재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런 유기적 지식인... 이것이 바로 조나단 갈매기다. 그리고 '트레버'다. 무슨 무슨 학위가 있다고 지식인이 아니란 얘기다.

 

그렇다면 그런 지식인, 지금 우리 사회에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암흑기라 할 수 있던, 엄혹했던 70-80년대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지식인들이 큰역할을 했는데...지금은?

 

정말, 지금은?

 

이 질문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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