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 험난한 시대에.

 

역사는 진보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역사의 바퀴가 거꾸로 가고 있는지.

 

요즘은 기억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한다.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 기억과 용서가 다른 개념임을, 용서는 해도 기억은 해야 함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상에서 아무 것도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살까?

 

그 사람이 막 살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기억의 힘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기억을 해야 좋지 않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

 

부처가 생각났다. 그의 전생담을 담은 책, "본생경"

 

부처처럼 자신의 전생을 기억한다면, 어떻게 현생을 막 살 수 있겠는가.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이러한 기억에 대해서 명심한다면 자신들의 판단 하나하나에 신중할 수밖에 없을텐데...

 

부처의 삶을, 그의 사상을 생각하면서, 그처럼 이렇게 기억을 한다면 정말 시공을 초월해 세상을 위해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요즘, 기억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막강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들이 기억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힘있는 사람들, 이 "본생담"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JATAKA

                 -出家는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하는 것이다.

 

옛날 자신의 삶을 모두 기억하는 사나이.

 

오늘의 나는 옛날의 나,

옛날의 나,

,

앞날의 나.

 

시공간을 초월해

나를 세상에 보내고

보내, 마침내

영원에 이른 사나이.

 

싯다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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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이 사회를 풍요롭게 한다.

 

동양사상이 꽃 피웠던 시절은 춘추전국시대다.

 

그만큼 세상이 어지러웠기 때문에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사상도 많이 나왔다고 할 수 있지만, 다른 말로 하면 다양한 사상들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했다는 말이 된다.

 

적어도 자신의 사상때문에 죽음까지 이르지는 않았을테니 말이다.

 

이런 사상이 유교 사상이 집권층의 사상이 되면서, 다른 사상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이 되면서 더이상 다양한 사상은 나오지 않게 된다.

 

다른 말을 하면 죽음에 이르는 세상에서 어떻게 다양한 사상이 발전하겠는가. 하다못해 유교에서도 주자학(성리학)만이 절대유일의 사상이 되고, 같은 유교임에도 양명학은 이단으로 취급받고 사문난적이라고 하여 목숨까지도 잃어야 하는 세상이 있었는데...

 

이런 일이 민주화 되었다는 현재에 일어날 줄이야. 물론 옛날 독재시대처럼 사상으로 인해서 목숨을 잃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사상을 펼칠 단체를 만들 자유를 박탈당하고 말았으니.

 

이를 민주주의라 할 수 있을까? 국가의 존립에 위험을 주는 정당이라 해산을 했다고 하지만, 어떻게 9명의 헌법재판관이 그것을 판단할 수 있을까?

 

우리 국민들이 87년 민주화 투쟁을 통해서 기껏 얻어낸 민주주의가 헌법재판소에 판결권을 넘겨주는 일이었다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데...

 

정당은 국민이 심판해야 한다. 정당은 폭력으로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집단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호소해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집권하려는 목적을 지닌 단체다. 그렇게 배웠다. 그런 정당의 강령을 보고, 실천을 보고 국민들은 투표로써 그들에 대한 지지나 반대를 표명한다고 배웠다.

 

이런 정당이 해산되는 때는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할 때다. 그 때 정당은 자연스레 해산되고 소멸된다.

 

그런데 달랑 9명의 헌법재판관이 정당 해산을 결정해 버렸다. 8대1로.

 

그들은 절대 권력이다. 그들이 판결하면 즉시 효력이 발생한다. 뭐 이의고 뭐고 없다. 그냥 최종심이다. 국민들이 행사해야 할 권력을 그들이 모두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들을 누가 뽑지? 국민이? 아니다.

 

이런 그들이 과연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그들의 판결이 국민의 뜻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을까?

 

말이 막힌 사회, 그 사회는 더 이상 발전이 없는 사회다. 같은 말을 하기 위해 모인 정당을 해산하는 나라에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는 기계인간이 될 뿐이다.

 

그러니 술만 마실밖에. 정말 술 권하는 사회다. 오래도 한참 오래된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가 떠오르는 시대가 되다니... 슬프다. 더불어 이청준의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가 생각난다.

 

또 얼마 전에 읽었던 이청준의 "소문의 벽"도 생각나고.

 

이 편이냐 저 편이냐를 강요하는, 그래서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사회.

 

아니지. 지금은 그래서는 안되지. 적어도 다양한 사상들이 함께 해야 하고, 그들의 사상을 국민들이 가감없이 받아들여 판단하게 해야지.

 

우리나라 국민들처럼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어디 있다고? 이들은 가만히 놔두어도 알아서 판단을 할텐데, 왜 이들의 판단을 다른 사람들, 그것도 달랑 9명에게 위임을 하냐고.

 

그 9명이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들이냐고. 공화국을 다스리는 철인, 그런 철인 정치는 플라톤 때나 하는 말 아니냐고. 우리 국민들이 어리석은 백성들(즉, 중우)이냐고. 그래서 지금이 중우 정치 시대냐고... 아니지.

 

우리 국민들은 현명하다. 공화국은 국민들이 주인이다. 판단을 국민들이 해야 한다. 누구에게 국민들의 권한을 위임해서는 안된다.

 

적어도 우리는 플라톤이 말한 "국가"시대에 살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이제 아무리 사회가 술을 권해도 술 속에 빠지지는 말아야겠다. 말을 막아버린 사회에서 말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다양한 말들이 춤추는 사회, 그런 사회... 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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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12-21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이런 시대를 살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추운날이다.

 

날이 추워지면 어려운 사람들에겐 더 힘든 나날이 된다.

 

따뜻한 일들이 일어나 사람들 마음과 몸이 훈훈해졌으면 좋겠다.

 

시집을 이리저리 넘기다 아, 이 시구나, 예전에 보았던 시인데...지금 이 시대 아버지들이, 청년들이, 아니 우리들 보통 사람들이 겪고 있는 현실 아니던가.

 

시에 너무도 적절하게 표현되어 있는 이 현실을... 시를 읽으며 공감하고.

 

  아버지 경제

 

한 방안이

점점 좁아지는구나

내가 밀려서 잠을 깨다 보면

요놈들은

키도 크고

넓어졌구나.

 

쌀도 한 말이면

일주일을 먹는데

요사이는 며칠 못 먹으니

아버지 경제는

찬바람이 불구나.

 

엄마는

추운데 밖을 나가고

아버지는 눈을 감고

몸부림치는구나.

 

봄이 오기 전에

모든 물가는 뛰고

아버지 경제는

더 더욱 적자운영으로

가득 채운 먹구름

주름살이

늘어만 난다.

 

이 시대는

식구들의

한 달 먹을 것이

벌써 걱정이니,

 

아버지의 경제는

어쩌자는 건가.

 

박봉우, 황지의 풀잎, 창작과비평사, 1979 3판. 14-15쪽.

 

춥다.

 

그렇다고 늘 움츠리고만 있을 수도 없는데. 그래,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온다. 우리들에게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이 시. 다시 한 번 읽는다. 아버지의 경제를 어쩌자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우리들이 모두 편하게 발 뻗고 잘 수 있는 사회가 되게 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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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어버리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다.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마음은 답답하고, 무언가가 가슴에 콱 들어박힌 것 같은데...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 거야?

 

이제는 좋아져야 하는 것 아냐?

 

그게 발전이고 진보 아냐?

 

민주화 되었다고, 절차적 민주주의는 나름대로 정착되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민주주의지.

 

힘없는 사람이 힘든 세상이 민주주의 사회인가? 그것은 아닌데... 많은 일들이 터지고 있는데,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이 세상에, 그런 것들, 정말 쓸어버리고 싶다.

 

모두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

 

오래 된 시집을 뒤적이다가 "쓰르라미"라는 시를 발견했다. 이 쓰르라미에 발음이 비슷한 말들을 엮어서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시.

 

강창민의 "물음표를 위하여"라는 시집에 실려 있는 시다.

 

 

쓰르라미

 

 

비가 내려도 울어쌌고

작년 늦봄부터

뭐가 그리도 싫은지, 싫어라미

왼종일 싫다고 울어댔제.

매운 6월

성난 광장마다 사람들이 모여

외침 낭자히 피 흘릴 제

무얼 쓸어라는지, 쓸어라미

아침부터 쓸라고만 소리쳤제.

올 여름 쓰르라미는

나무 꼭대기에 올라 앉아

무얼 새로 하라는지

칠 년 동안의 쌓인 울음을

뉘 들어라 울어쌌는지, 새로라미

누가 그 소리 귀에 담고 있노?

 

 

 

강창민, 물음표를 위하여, 문학과지성사, 1991년 2쇄. 53쪽.

 

 

절말 이렇게 외쳐댔던 그 많은 외침들이, 그 많은 소리들이 마음 속에 하나도 담기지 않고 다 날려가 버렸는지.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 마음에 와닿아 사라지지 않는다.

 

민주화 시대라는데, 왜 살기는 더 팍팍해지고 있는지...  이런 때 시인은 이렇게 자괴감을 표출한다. 물론 이 시는 80년대의 시라는 점을 명심할 것. 다만 시는 한 시대에서 머물지 않고, 시대를 넘어 계속 살아남는다는 것.

 

이 땅의 수많은 박사들, 이 시 한 번 읽어보면 어떨지... 하나라도 제대로 잘 박았으면, 그랬으면, 이렇게 많은 말들이 쌓이지 않고 사라지지는 않을텐데... 

 

 

                       박사 이후

 

                                  1

                        학위 축하해요, 강선생.

건배합시다, 쭈욱.

                        어이, 아가씨 박사가 뭔지 아나?

                        박는 데 도사라는 게야.

 

                                  2

                       그게 아니다.

                       한 가지만 빼고는 잘 박지도 못한다.

                       그 한 가지도 결국 빼고

                       언제나 뺀다.

                       자유를 위해, 민주화를 위해

                       몸 박지 못하고

                       늘 뺀 채로

                       얼도 뺀 채로

                       이 가을을 맞는다.

 

 강창민, 물음표를 위하여, 문학과지성사, 1991년 2쇄.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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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가리고, 세상을 가리고, 진실을 가리고 있는 장막. 요즘은 자꾸 이 장막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장막...

 

어느 사회에서든 없지는 않았을테지만, 요즘은 이런 장막이 많아도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드는데...

 

예전에 역사를 배울 때 철의 장막, 죽(竹)의 장막은 배웠는데... 인(人)의 장막은 배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데 혹 배웠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중에 어떤 장막이 가장 강하고 질길까?

 

철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녹이 슬고, 대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다지만 그래도 식물성이니 한계가 있는데, 사람은 정말로 시류를 따르기도 하고, 거스리기도 하는 그야말로 능동적인 존재이니, 가릴 사람의 의중에 따라서 잘도 변하니, 이 중에 가장 강한 장막은 인의 장막이지 싶다.

 

오죽하면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그런데 요즘 중국에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는 '십상시'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런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는 말은, 무언가 비슷한 일이 있다는 얘기다. 일명 유추다.

 

사실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지만, 유추는 그냥 생기지 않는다. 비슷하니까말해진다.

 

굳이 옛말을 들먹이면 경어인(鏡於人)이라고 사람에 자신을 비추어 보라고 했으니,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좋지 않은 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분명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야 한다.

 

그런 판단을 잘하는 사람이 인사(人事)를 잘하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에게는 만사(萬事)가 편안해질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꾸 안 좋은 일에 거론이 되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한다면 그 때 인사는 만사가 아니라 망사(亡事)가 된다.

 

답답한 나날들인데... 시집이 몰려 있는 도서관 서가에서 시집들 제목을 하나하나 살펴보다 이 시집을 골랐다.

 

시인은 처음 듣는 이름이다. 나름 시들을 읽었다고 자부하는데도, 처음 듣는 시인도 많은데, 이 도서관이 시집의 겉표지를 다 떼어버려서 시인에 대한 설명을 볼 수가 없다. 그래 시를 읽는데 시인을 알면 좋겠지만, 몰라도 시를 느낄 수 있으니 뭐...

 

이 시집을 고른 이유가 바로 인의 장막과 관련이 있다.

 

박용재 시집,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민음사

 

이 말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대상만큼, 또는 대상처럼 산다는 얘기다. 그러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 만큼, 내가 사랑하는 사람 처럼, 산다는 얘기다. 사람으로 치면...

 

자, 나는 어떤 사람들을 사랑하는가?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존재들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것이 바로 내가 사는 모습인데... 인의 장막 속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그 순간에 이미 자기 주변의 사람을 바로 바라보게 되는데... 인의 장막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인의 장막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그런 사람은... 딱... 그 만큼만... 살고 있는 것이다.

 

딱...그 만큼...만... 사는 사람을 믿고 사는 사람은...

또 딱 그...만큼...만... 살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내 주변 사람들을 다시 보자. 그들을 감시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말들을 듣고 사는지 안다면, 바로 나를 알 수 있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내 삶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은데...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저 향기로운 꽃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만드는 나무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을 사랑한 만큼 산다

외로움에 젖은 낮달을 사랑한 만큼 산다

밤하늘의 별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한 만큼 산다

홀로 저문 길을 아스라이 걸어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그네를 사랑한 만큼 산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를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만큼이 인생이다

 

박용재,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민음사. 2003년 1판 1쇄. 13쪽    

 

시인에게는 죄송하지만 1연으로 되어 있는 시를 4연으로 나누어 적었다.

 

내가 발 딛고 사는 세계의 존재들, 즉 자연의 식물들을, 그 다음에는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보는, 내가 추구하는 이상인 우주의 천체들을, 그리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그래서 마음을 서로 나눌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사랑한 만큼 우리의 삶의 부피와 넓이와 깊이가 정해질테니...

 

그렇게 이해하기 쉽게 그냥 편의상 나누어보았지만, 원래 시는 연 구분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

 

바로 이 만큼이 산다는 것이다. 내가 사랑한 만큼.

 

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사랑을 넓혀야 겠다. 아래로도 위로도, 그리고 옆으로도. 그것이 바로 내가 잘 사는 일이 될테니.

 

적어도 남을 위한다는 사람은 인의 장막에 갇혀 있지 말고, 수평으로, 수직으로 그리고 사람의 마음까지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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