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대해서 엄청난 폭격을 하고, 이제는 지상군까지 투입했다고 한다.

 

홀로코스트라고 해서 그들이 당한 지가 이제 겨우 반세기가 넘었을 뿐인데, 그들은 자신들이 힘이 생겼다고 다른 민족에게 그와 비슷한 행위를 한다.

 

유엔 사무총장도 교황도 당장 전쟁을 멈추라고 하지만, 이스라엘은 들은 척도 안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폭격이, 침공이 정당하다고 한다. 오로지 팔레스타인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들, 이들이 전투원이면 모른다. 전쟁에서, 폭격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전투원보다는 비전투원, 즉 민간인이 더 많다.

 

민간인 중에서도 힘이 없는 여자와 아이들이 가장 많이 죽어간다. 그런 사실은 역사를 통해 알려져 왔고, 또 전쟁을 하고 있는 당사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폭격을 멈추지 않는다.

 

왜?

 

폭격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 때 재미있게 보았던 일본 만화 "원피스"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니코 로빈이 잡혔을 때 과거를 회상하고 현실로 돌아와 버스터 콜이라고 하는 해군 군함을 불러 폭격을 하는 일이 일어났을 때 로빈은 '지도상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절규한다.

 

지도만 보고 폭격을 결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지도에 존재하는 공간만이 중요하지 그 공간을 장소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렇게 쉽게 폭격을 결정하지.

 

특히 이 책 "폭격의 역사"를 읽으면 이런 폭격이 주로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인종, 민족, 집단에게 잘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그렇다고 일본이 피해자로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가해자로서의 위상이 더 크다)과 이슬람을 믿는 이라크, 아프카니스탄, 그리고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을 보면 폭격이 주로 어디에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

 

물론 간혹 같은 백인끼리, 서양인끼리도 일어나지만 그것은 좀 열들하다고 믿는, 또는 지도상에서 그들의 존재를 부정할 때 일어난다.

 

지도상에서 보이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그곳에 없지는 않는다. 그들은 지도에서 단지 공간으로만, 목표지점으로만 존재하는 그곳을 자신들의 삶의 거주지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폭격이라니... 정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한 번에 삶의 터전을 잃는 사람들, 무엇인지도 모르고 목숨을 잃는 사람들... 그들은 결코 지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지도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엄연히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을 보아야 한다. 그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전세계의 평화를 위해 존재한다는 유엔의 사무를 총괄한다는 사무총장의 말, 교황의 말이 아니더라도 전세계 곳곳에서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의 말을 이스라엘은 들어야 한다.

 

그들이 당한 것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신은 분노의 신이기도 하겠지만, 사랑의 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의 신을 섬기고 싶다.

 

자신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종교를 진정으로 이 땅에서 실현시키고 싶다면 이젠 폭격을, 전쟁을 멈추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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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년 중학교 입학생부터 소프트웨어 수업 의무화

 

  내년도 중학교 입학생부터 소프트웨어 교육이 의무화되는 등 초,중,고 교육과정에서 소프트웨어 교육이 대폭 강화된다. 

- 한겨레신문 2014년 7월 24일자. 20면에서.

 

뉴스에서 이 소식을 듣고, 뭐야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신문 기사를 읽으며 과연 이것이 소프트웨어 산업을 살리는 길이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본말이 전도된 대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어쩌면이 아니라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대책일 뿐이다.

 

어떻게 우리나라 소프트산업의 위축을 국민공통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초중고 교육과정에 책임을 떠넘길 수가 있는지.

 

하드웨어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지만, 그 하드웨어를 작동시키는, 또는 하드웨어를 더욱 쓸모있게 하는 소프트웨어는 다른 나라의 것을 쓰고 있다고, 막대한 부의 손실과 세계적인 추세에서 뒤쳐지고 있다고 호들갑들이다.

 

그래서 초등학교에서도 중학교에서도 하다못해 고등학교에서도 소프트웨어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한다. 아니, 한다고 한다. 내년부터.

 

교사 충원 고민도 없이, 학교 현장의 시설에 대한 고민도 없이...

 

무엇보다도 그런 교육이 왜 국민기본공통교육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없다.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산업이 외국에 비해 뒤떨어진 것, 잘 생각해 보라. 우리나라가 과연 기초 과학에 투자를 하는가? 연구원들에게 투자를 하는가? 이런 것들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이 무조건 모든 국민이 소프트웨어에 대한 교육을 받으면 소프트웨어 강국이 자연스레 된다고 생각하는지.

 

오히려 소프트웨어는 창의적인 몇몇이 생계 걱정을 하지 않고 거기에 전념할 때 나올 수 좋은 프로그램이 나올 수 있는 것 아닌가?

 

전국민에게 별 관심도 없는 소프트웨어 교육을 하기보다는 이 분야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맘 놓고 연구하고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우리나라에서 공부 잘한다는 학생들이 이공계, 특히 자연과학 또는 순수학문 분야로 나아가지 않고 의대로 진학하는지 고민을 해봤는지...

 

순수학문이 바탕이 되면 그 바탕 위애서 다양한 과학적, 기술적 성과들이 집적될 수 있을테고, 또한 연구원들이 생계 걱정을 하지 않고, 직장에서 떨어져 나갈 걱정을 하지 않고 연구 실험할 환경이 조성된다면 자연스레 소프트웨어 산업은 발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초중고 교육과 상관이 없다. 왜 억지로 갖다 붙여서 애꿎은 초중고 학생들 학습량만 늘리려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니 학교 교육은 촘스키가 책의 제목에서 말한 대로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기껏 사회에 나가 쓰지도 않을 소프트웨어 교육에 몇 년을 허비하게 만드는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도대체 교육을 통해 어떤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건지...

 

계속되는 교육의 실패로 우리나라 학생들은 세계에서 가장 학교를 싫어하는 학생들이 되어 있고, 공부는 학교에서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배움이 평생간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하루라도 빨리 대학에 들어가기만을 고대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학생들에게 한 과목을 더 추가한다니... 누구를 위해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잘 취업하게 하기 위해서? 아님, 우리나라 국가 경쟁력을 위해서? 아님, 소프트웨어 산업을 위해서?

 

다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소프트웨어 산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순수학문을 하겠다는 학생들이 늘어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하고, 연구원들이 마음 놓고 연구하고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도록 정부가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그게 먼저다. 그리고 그게 다다. 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고통을 전가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촘스키.. 방향은 다르지만 그 역시 미국의 교육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었는데... 우리 교육, 마찬가지다.

 

어째서 이런 방안이 나왔는데, 교육 분야에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 무엇이 우선인지 그들은 잘 알텐데...

 

아님,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적어도 이런 문제는 정말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다음에 대책을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학교 교육과정에 적용하려면. 이렇게 즉흥적이어선 안된다. 그리고 소프트웨어 산업을 진작시키는 해결방법으로 이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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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간의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상.

연약한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위로하는 방편으로 종교를 만들었는지, 아니면 신이 인간을 위해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종교가 존재하는지 논란은 있지만, 종교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특히 갑작스런 죽음을 경험하거나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거나 할 때 우리는 종교에 귀의한다. 그리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세상에 참으로 많은 종교가 있다.

엄청나게 많은 종교. 그런 종교로 인해서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고.

그럼에도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 평화를 얻기도 한다.

그런 종교 중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믿는 종교가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이다.

이 중에 불교는 우리의 역사에서 참으로 오래동안 우리와 함께 했던 종교인데.

 

세상이 그 많고 많은 교회와 성당과 절과 모스크들이 있는데 왜 세상은 평화로와지지 않을까?

세상에 악인도 많고 안 좋은 일도 많으니,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이런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헌책방에서 불교 관련 책장을 둘러보다 지장경을 발견했다. 한 번은 꼭 읽겠다고 작정했던 경전.

금강경이나 법화경, 화엄경 등이 너무도 어렵다면 지장경은 그리 어렵지는 않다.

지옥에 머물면서 또는 세상을 돌면서 사람들을 구제한다고 하는 지장보살.

그가 건 서원이 바로 모든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것이었다지.

그는 모든 사람이 구제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고 했다지.

하여 그의 이름을 외는 순간, 그를 믿는 순간 우리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지.

지옥에 떨어졌더라도 그가 구제해준다고 하지.

 

얼마나 마음이 편한가.

지장보살과 함께 있으면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이를 현실에 맞게 재구성하면 좋은 일, 착한 일, 착한 마음을 지니고 세상을 살라는 얘기가 아닐까.

지장경에는 아주 자그마한 선행을 한 사람도 그 선행에 의해서 지옥을 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니.

지장보살을 믿는 사람들은 지장보살만 믿고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장보살이 낸 서원에 따라 우리 모두가 선업을 쌓도록, 해탈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교를 믿는 이유이기도 하다.

믿음과 실천이 함께 가는.

지장보살이 지옥을 두루 다니며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은 바로 사랑일텐데, 이를 자비라고 하기도 하니, 이 자비는 바로 우리들이 모두 지니고 있어야 할 삶의 태도 아니던가.

자비가 넘치는 사회, 그 사회가 바로 천당이고 극락이 아니겠는가.

지장보살을 다시 불러내는 사회. 그 사회는 아직도 지옥에서 헤매는 사회가 아닐까.

 

내가 지장경을 꼭 읽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바로 현실이 지옥처럼 느껴질 때 그 지옥에서도 벗어날 길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지옥 속에서도 사람을 위해서 노력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것이 신이든, 우리 사람이든 그런 존재는 반드시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 지장경을 읽고 싶었던 것이리라.

 

어려운 시대다. 정말로 앞이 꽉 막힌, 캄캄한 시대다. 그런 시대, 지장보살이 필요한 시대다.

지장보살. 마음 속에만 있는 보살이 아니다. 지장보살은 행동하는 보살이다. 직접 움직이는 보살이다.

요즘, 그립다. 그런 지장보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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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보이는 창"

 

우리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가끔은 자신의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삶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 거릴 뿐이다. 더이상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그 삶에서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제 삶에 빠져 있을 뿐이다.

 

가끔씩만 그러면 괜찮을텐데, 너무도 자주 그렇게 된다. 그렇기에 자신의 삶을 보게 만들어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 무언가의 역할을 "삶이 보이는 창"이 한다.

 

내 삶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행복일지도 모른다.

 

한 번도 제 삶을 보지 못하고 제 멋에 겨워 살다가 가면 그 얼마나 불행한가.

 

따라서 삶창을 통해 내 삶을 볼 수 있다는 것, 삶을 볼 수 있는 창이 있다는 것, 그 삶이 보이는 창을 갖고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이다.

 

잊고 싶은 일들, 감추고 싶은 일들, 외면하고 싶었던 일들, 또는 잊고, 감추고, 외면하던 일들을 삶창을 통해 대면하게 된다.

 

그 대면은 곧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깨달음이 행동으로 나아갈 때 힘이 된다. 그 힘은 나를 바꾸고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삶창 99호"

 

세월호가 침몰한 지 90일이 넘어 100일 되어가고 있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해결할 의지가 있는 건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세월호 특별법'은 6월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고 7월 국회로 넘어 왔으며, 책임자는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누구도 제대로 진상규명도 책임지지도, 그렇다고 실종자에 대한 완전한 해결도 되지 않은 상태다.

 

그런 상태... 도대체 '세월호는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특집으로 삶창 99호가 시작된다. 세월호는 나에게 무엇인가? 이 말은 계속 우리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물음을 가슴 속에 지니고, 대한민국이라는 더 큰 '세월호'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세월호에 대한 생각이 사회를 바꾸는 힘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냥 또 하나 과거의 사건으로 넘어가서는 안된다.

 

슬픔이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으로 전환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삶이 바뀌어야 한다.

 

삶을 바꾸는 일, 그것이 바로 세월호에 대한 우리의 질문일 것이다. 또한 삶창을 보는 이유이기도 하리라.

 

다시 한 번 "삶창"을 통해 내 삶을 본다. 내 삶... 그 속에 매몰되지 않고, 나를 객관적으로 보고, 실천할 수 있도록 나를 채찍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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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과 끈기.

 

이를 우리나라의 특성이라고 한 사람이 있었는데...

 

녹색평론을 보면 이 말이 꼭 들어맞는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은근이라는 말보다는 직설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만, 나서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끊임없이 하는 잡지가 녹색평론이니 은근과 끈기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서 생태와 환경,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만큼 집요하게 끈질기게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 있을까 싶기도 한데, 민주주의가 좀 생뚱맞다는 느낌을 주지만 민주주의는 우리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서 자연과 하나가 되는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민주주의는 적어도 인간 하나하나를 주체로 세우는 이념이자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인간이 하나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자연을 객체로 돌려서는 안된다. 내가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타자 역시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민주주의는 자연히 생태의 문제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하여 녹색평론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얼핏 다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이들은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행복하게 자족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바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역시 '세월호'를 비껴갈 수가 없다. '세월호'는 아직도 진행중이기 때문이다.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고(오래된 배를 무리한 증축을 하고, 수평수를 적게 넣었으며, 화물들을 제대로 고정시키지 않았고, 승무원들이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는 등등의 말들은 많으나,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대로 밝히고 있지 않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으니, 우리는 언제나 '세월호'의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세월호'와 관련지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돈'이면 우선이 되는 풍조로 바뀌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돈보다 사람이다라는 말을 외쳐야 하는 시대가 되었는데, 그런 사회 풍조를 막기 위해서는 다당제 사회로 변해야 하고, 또 '인권경제'(송기호의 글)를 확립해야 한다고 한다.

 

다당제... 우리나라는 여러 정당을 허용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양당제 국가이다. 지금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거대 양당이 우리나라 정치를 이끌고 있다. 나머지 정당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나타내기에도 급급한 형펀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선거에서 승자독식주의가 횡행하기 때문인데, 승자독식주의를 막고 실질적인 다당제로 가기 위해서는 정당비례대표제를 확대하는 길밖에 없다. 그런 운동에 대해서, 또 다당제 사회가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데 얼마나 효율적이고 유리한가에 대해서는 최태욱의 글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득권을 쥐고 있는 정치인들이 정당법과 선거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리가 없다.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시민들의 힘이고, 이런 시민들은 돈이 움직인다는 경제분야에서도 인권이 우선이 되게 하는 '인권경제'에 대해서 자각하고 강제하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다음 국회의원 선거까지는 선거법을 개정하겠다는 운동을 한다고 하는데, 이 제도의 필요성에 대해서 공감한다면 이 사이트를 참조하면 좋겠다.(http://reform2014.net)

 

이번 호에서 가장 핵심은 바로 '인권 경제'란 말이 아닐까 싶다. 인권이 경제분야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 아니, 인권은 어떤 분야에서든지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 인권이 꼭 사람의 권리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권리라고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번 호의 핵심이지 않을까 싶다.

 

돈보다 사람이다. 사람의 안전이 우선이고 돈은 그 다음이다. 사람과 자연의 지속, 안전이 우선이고 발전은 다음이다. 이렇게 바꿔도 무방하겠다.

 

'인권 경제'라는 말이 사람들 마음 속에 자리잡을 때, 그래서 인권경제를 강제할 수 있는 힘들이 모아질 때, 이 때는 우리 사회도 양당제 사회가 아니라 다당제를 향해 가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로 변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한다. 

 

이렇게 또다시 두 달만에 따끔하게 나를 깨우치는 죽비...녹색평론 1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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