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멀어진 생활이 한 해가 지났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이 기존에 해왔던 일상을 잃어버리고 있다. 자신이 생활 습관이 깨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단순히 생활습관만 깨진 것이 아니라 생존에도 위협을 받고 있다. 감염병이라는 것이 우리의 권리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제한하고,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온갖 곳에서는 개인정보보호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에 동의합니다를 요구하면서도, 음식점이나 기타 다른 곳에 들어갈 때는 동의합니다 없이 그냥 개인정보를 적거나 큐알코드를 찍어야 한다.


핸드폰이 없는 사람은 아예 들어갈 수도 없는 상태니, 그런 장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모두 핸드폰을 지니고 있을 거라고 가정하고 펼치는 정책이 과연 올바른 정책인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냥 실행을 한다. 여기에 핸드폰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이것은 문제가 되는 정책이다.


그런데도 그냥 실행이 된다. 코로나19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하게 우리의 생활을 통제하고 있다.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이런 일과 연결을 하면 안 되겠지만, 삶창 125호에 실린 이번 글 중에 소설 '어둠의 공간'이 머리 속에 남았다.


축산농가에서 일하는 사람. 공장식 축산으로, 오로지 사람들의 먹을거리로 제공되기 위해 키워지는 돼지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 외국인노동자들이 있다. 또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도 갈 곳이 없어 그곳을 노동의 장소로 삼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들 삶에 가장 중요한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농장이, 가장 비인간적인, 그곳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보장해주지 않는 모습이 너무도 잘 드러나는 소설인데...


그럼에도 벗어나지 못하고 적응할 수밖에 없는 외국인노동자의 모습. 여전히 그러한가? 이런 의문이 들지만, 여전히 그러하다는 답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


길을 가다 보니, 대규모 단지를 건설하고 있는 대기업 건설현장에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체불임금 지급하라는 플래카드. 아직도 공사중인 그곳, 대기업이 주도하는 공사현장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축산농가에서야 어떻겠는가.


그러니 제목이 '어둠의 공간'이다. 캄캄하다. 이 캄캄함 속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는 돈을 벌어 자기 나라로 돌아갈 꿈을 버리지 않는다. 아니, 이 어둠의 공간에 남아야 하는 자신을 그렇게라도 다독이지 않으면 안 되었으리라.


이 소설의 외국인노동자만이 아니다. 우리 역시 지금 코로나19라는 감염병 때문에 어둠의 공간에 있다. 우리가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데, 우리는 어떤 꿈을 지니고 있을까? 적어도 예전과는 다른,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고, 그것을 정책으로 반영할 수 있도록, 우리 인간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지구, 우주 차원의 공동체가 공생할 수 있는 그런 삶이 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어려운 시대에 더 고통받는 사람들은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의 삶이 개선될 때 우리에게 희망의 빛이 어둠의 공간을 밝혀주게 될 거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적어도 삶창을 읽으면서도 그러한 희망의 빛을 보게 되니, 그것으로라도 위안을 삼아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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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


  식민지 유산을 청산해야 하는데, 해방 된 지 70년이 넘었음에도 문제가 남아 있다. 가해국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은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며, 그런 일본에 책임 묻기를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 상황.


  여기에 식민지로 인해 분단이 되었는데, 통일로 가는 길이 보이기는 커녕 오히려 더 캄캄해지고 있는 현실.


  또 식민지로 인해 세계 여러 곳으로 흩어진 우리 동포들 문제도 남아 있다. 여러 곳으로 흩어졌던 동포들 중에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도, 또 후손들에 대한 관심도 많이 부족한 상황이지 않나 싶다. 이동순이 쓴 이 시집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다 구 소련 땅에 남아 있던 우리 민족 사람들이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삶터를 잃고 쫓겨나는 과정이 형상화되어 있다.


일본 스파이가 될까봐 또는 일본에 협조할까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우리 민족들. 그들 중에는 강제 이주를 비판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다. 또 강제 이주 당해 중앙아시아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도 있는데...


이 시집에는 그런 사람들 중에 홍범도 장군이 나온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임에도 강제 이주의 칼날은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그 역시 극장의 경비원으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데...


엄청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 간에 인류애는 살아 있음을 이 시집에서 보게도 된다.


지금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된 사람들. 소련 당국에서는 고려인들에게 도움을 주지 말라고 했는데도, 많은 도움을 준 사람 이야기도 나온다. 


밤새도록 가족들과 빵 구워 담은 자루 / 식지 않도록 이불로 덮어 / 나귀 등에 싣고 온 / 카자흐 사내 막심 이크바로브 / 내 가족을 위해 자기 집도 냉큼 비워준 / 친형제보다 더 깊이 정든 / 카자흐 사내 / 원동에서 온 고려인에겐 / 말도 붙이지 말고 / 음식도 베풀지 말고 / 최소한의 접촉도 하지 말라던 / 당국의 지시 묵살하고 / 무엇보다도 인간의 도리 막중히 여기던 / 막심 아크바로브

('내 친구 막심' 중 일부. 96-97쪽)


그렇다. 당국과는 달리 민중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려고 한다. 자신들도 어렵게 살기 때문에 어려운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국적을 떠나서.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집단도 있다. 바로 군대라는 집단. 군인이 되면, 군복을 입는 순간 인간성, 인류애는 군복 속으로 사라진다. 오로지 명령만이 남는다. 그들에겐 명령뿐이다. 명령으로 사람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지금 미얀마에서처럼.


열차 바닥에 / 뜷어놓은 작은 구멍 / 거기 쪼그리고 앉는다는 게 / 죽기보다 싫었다 / 여자니까 / 내가 무슨 짐승인가 / ... / 여인들은 철로 옆 깔밭으로 뛰어들었다 / 하나가 뛰니 여럿이 우르르 / 한꺼번에 들어갔다 / 흰옷 입은 여인들 깔밭 사이로 보였다 / ... / 그때 돌연 총소리 탕탕 들렸따 / 탈주로 착각한 소련 병사 / 따발총 갈겨버린 것/ ('깔밭의 참변' 중. 62쪽=63쪽.)


이렇게 '깔밭의 참변'이란 시를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군인들과, 인간적인 면을 지키려는 여인들 사이에 벌어졌던 비극이 잘 표현되어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들의 존엄은 지키기 위해 참고 참았다가 깔밭(갈대밭)에 들어가 볼일을 보던 여인들.


그런 여인을 탈출하는 것으로 오인하여 총을 쏴버리는 군인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군인들이 인간성을 군복 속에 집어넣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소련 군인들의 만행은 도처에서 나온다. 그냥 사람을 죽이거나, 버려두거나 하는 모습들. 과연 인민의 조국이라고 한때 자부했던 소련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이 민중을 위한 군대라고 할 수 있는가? 소련 역시 우리나라 비극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식민지가 된 조국, 전체주의자에 의해 강제 이주 명령을 받은 힘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인간성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노력마저도 항거로 받아들여지는 현실.


그런 비극. 이 시집에는 그러한 비극이 너무도 잘 표현되어 있다. 나라를 잃는 민족이 어떤 설움을 겪는지, 지금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살아가는 고려인 3세, 4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곳에서 살아가게 되었는지를 이 시집을 읽으면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비극이 왜 일어났던가. 도대체 이 비극에 누가 책임을 졌던가. 아직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그렇다. 책임은 끝까지 지지 않으면 언제고 책임을 다할 때까지 물어야 한다. 그것을 회피하거나 무시하거나 없는 걸로 칠 수는 없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겪은 이 비극. 이동순의 '강제이주열차'를 읽으며 다시 되새기겨 본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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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門)은 여러 역할을 한다. 문이 지닌 아름다움을 논외로 하고, 문이 지닌 실용성을 따지면, 문은 열림과 닫힘이다. 연결이자 끊김이다.


  열어서 외부와 연결할 수 있게 하는 역할도 하지만, 닫아서 외부와의 연결을 끊는 역할도 한다.


  문은 그냥 문이지만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사람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다르다. 그렇게 문은 관계를 맺게도 관계를 끊게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이 있어야 한다. 문이 없는 사람 관계는 없다. 다만 이 문이 잘 열리는 관계가 있고, 전혀 열리지 않는 관계가 있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문을 어떨 때 열고, 어떨 때 닫아야 하는지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은 자신만의 문을 닫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 여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두드릴 때 열어주는 경우도 많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데 열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절이다.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하지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 이러한 마음의 비대칭. 이 비대칭이 관계를 더욱 어렵게 한다.


온몸을 던져도 안 열리고, 다른 것들을 보내도 안 열리고,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기도 힘들고... 참 사람들끼리 맺는 관계는 힘들다.


어쩌면 시를 읽는 것도 이렇게 문을 여는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시라는 문을 두드리는 일. 시가 문을 열어줄 때도 있고, 아예 안 열어줄 때도 있는데...


박소란 시집을 읽으며 많은 시들에서 문이 나오는데, 그 문이 이상하게도 닫혀 있단 생각이 들었따. 시집 제목이 된 시 '감상'에 나오는 구절인 '한 사람의 닫힌 문'이라는 구절이 강하게 다가와서 그런지 몰라도.


        감상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한 사람이 내 쪽으로 비질을 하였네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

내 모두가 쏠려갈 것 같았네

그러나 어디로도 나는 가지 못했네


골목에는 금세 굳고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아


리코더를 부는 한 사람이 있었네

가파른 계단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들었네

뜻 없는 선율이 푸수수 귓가에 공연한 파문을 일으킬 때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박소란, 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 2019년. 64-65쪽.


과연 그 문이 열렸을까? 이상하게 시에서 한 사람과 나는 자꾸 빗나간다. 한 사람이 내게 몸을 던졌을 때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인지 아닌지가 불분명하다. 우리는 나를 온전히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진정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라고 착각되는 그 무엇을 사랑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또 그 사람에게 나를 온전히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나는 그대로 나인채로 있다. 마치 한 사람의 비질에 쓸려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듯이.


나를 움직이는 것은 이러한 움직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한 사람을 향해 다가갔을 때 그는 문을 닫고 있다. 나 역시 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의 문을 열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


도대체 무언가를? 어떻게 해야 문이 열릴까? 답은 없다. 다만, 그 사람과 내가 함께 할 수 있는 무엇을 찾아야 한다. 그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 때 문이 열린다.


하지만 그 함께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어떻게 찾을까? 여기서 질문은 제자리로 온다. 우리는 그렇게 미로 속에 들어간 것처럼 문을 열기 위해 헤매게 된다.  


그렇지만 문이 있으면 열림의 가능성은 늘 있다. 그 가능성을 향해 가는 것, 그것은 우리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다시 문을 두드린다. 열리지 않더라도 두드리는 행위 자체에서 이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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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수경의 이 시집 제목을 보다 요즘 언론에서 들리는 막말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이 아니라, 빌어먹을 쓸모없는 말들, 아니 해로운 말들, 해서는 안될 말들.


  빌어먹을, 빌어먹을, 제길, 제길. 그렇게 문장이 아니라 단어들이 나를 습격한다. 쓰레기, 중증 치매환자. 세상 안 좋은 말들이 방송을 타고 돌아다니고 있다.


  그것도 시민들을 대표한다는, 또는 대표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하는 말이 겨우 이 정도다.


  말들이 고생이 많다. 그 사람들 입에서 나와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고, 그들 마음에 상처를 주는지. 


허수경 시인은 '문장의 방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직 아무도 방문해보지 않은 문장의 방문을 문득 / 받는 시인은 얼마나 외로운가' (허수경, '문장의 방문' 중 1-2행)


새로운 문장의 방문을 받은 시인은 그 문장을 써야 한다. 문장, 단어들의 방문은 시인을 통해 우리들에게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장이나 단어는 낯설다. 쉽게 인정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시인은 그 문장을, 그 단어를 써야만 한다.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반대로 정치인들은 남들이 쓰지 않아야 할 말들을 쓴다. 그들이 쓰는 문장은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그런 말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천연덕스럽게 쓴다. 외로움이란 걸 천성적으로 모르는 족속들이다.


말들이 지닌 힘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들이 지닌 힘을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쓴다. 그러니 그들은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다. 문장이나 단어는 오로지 수단일 뿐이지.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수단. 무기. 그렇다. 그들의 말에는 외로움이 아니라 피가 묻어 있다. 오로지 살벌함과 역겨움만을 담고 있다.


시인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 그들은 문장의 방문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단어, 문장들을 일부러 방문해 데려 온다. 그리고 그들을 맘껏 사용한다. 그러니, 다시 허수경 시인의 시이자 시집 제목이 된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이름 없는 섬들에 살던 많은 짐승들이 죽어가는 세월이에요


이름 없는 것들이지요?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고 말하던

어느 백인 장교의 명령 같지 않나요

이름 없는 세월을 나는 이렇게 정의해요


아님, 말 못하는 것들이라 영혼이 없다고 말하던

근대 입구의 세월 속에

당신, 아직도 울고 있나요?


오늘도 콜레라가 창궐하는 도읍을 지나

신시(新市)를 짓는 장군들을 보았어요

나는 그 장군들이 이 지상에 올 때 신시의 해안에 살던

도룡뇽 새끼가 저문 눈을 껌벅거리며

달의 운석처럼 낯선 시간처럼

날 바라보는 것을 보았어요


그때면 나는 당신이 바라보던 달걀 프라이였어요

내가 태어나 당신이 죽고

죽은 당신의 단백질과 기름으로

말하는 짐승인 내가 자라는 거지요


이거 긴 세기의 이야기지요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의 이야기지요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문학과지성사. 2005년. 126-127쪽


막말은 이렇게 다른 존재를 말살한다.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니, 그를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이지 않으니, 무조건 배척할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긴 세기를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말뿐이 아니라 이제는 행동으로, 그렇게. 하지만 차가운 심장은 멈출 수밖에 없다. 지속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뜨거운 심장이 필요하다. 시인이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심장은 뛰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가장 뜨거운 성기가 된다. 그곳에서 가장 아픈 아이들이 태어난다. 그런데 그 심장이 차가워질 때 아이들은 어디로 가서 태어날 별을 찾을까'라고.


아이들만이 아니라 차가운 심장은 이미 태어난 사람도 죽게 만든다. 그들을 어루만져줄 문장은, 단어는 오지 않고 오로지 비수가 될 문장, 말들만 온다. 그러니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자, 이제 다시 심장을 뜨겁게 하자.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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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한아 시는 대체로 어둡다. 무언가 무거운 분위기를 풍긴다. 축제날이라고 할 수 있는 시 제목 축일도 끝부분에 가서는 반전이 일어난다.

 

  축일인데 네가 죽어야 할 날이 이런 날이라니... 어쩌면 이것은 우리들에게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삶이 축제이듯, 죽음도 축제여야 한다. 장자를 예로 들 필요도 없다. 포레스트 카터가 쓴 "제로니모"에 보면 '죽기에 좋은 날'이라는 구절도 나온다.

 

  죽기에 놓은 날, 그날 죽는다면 그건 축제다. 행복이다. 그렇게 우리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살아간다.

 

죽음 이후는 도무지 알 수 없으므로. 죽음 이후를 기억할 수도 없으므로. 그러므로 기억을 통해 과거를 현재에 불러오지만, 미래를 불러올 수 없다. 기대, 예측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은 아니다. 그러니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현재를 보라. 자연은 그 자체로 살아간다. 동물도 그 자체로 살아간다. 이들은 그날을 산다. 그들에게는 그날이 바로 삶이고, 축제다. 그게 다다. 더 무엇을 이야기하랴.

 

하지만 우리 사람에게는 오늘이 그날이 아니다. 우리는 그날을 기다린다. 오지 않을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을 소모한다.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 이 얼마나 큰 낭비랴.

 

축제에 가서 다음에 올 축제를 기다리며 지금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축제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사람에게 과연 행복이 올까?

 

정한아 시 '축일 祝日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축일(祝日)

 

꿀벌들이 붕붕거린다

희고 붉은 꽃들이 재빨리 피어난다

까치가 귀가 아프도록 짖어댄다

대기는 부드럽고 따뜻하다

 

너는 오늘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그렇게

아름다운 네가 죽어야 할 날은 이런 날이다

 

정한아, 울프 노트, 문학과지성사. 2018년 초판 2쇄. 25쪽.

 

지금은 삶이다. 지금은 오늘이다. 오늘은 축제날이다. 그런 축제날을 두고 오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하고, 축제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바야흐로 좋은 날들이다. 축일이다. 이제 나도 오늘을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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