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이 있는 삶. 게으를 권리. 그렇다. 우리는 개미가 되도록 교육받았다. 베짱이처럼 살면 안 된다고 어릴 적부터 배웠던 우리는, 개미처럼 그것도 일개미처럼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을 뼛속 깊은 곳에 새겨두었다.


  장시간 노동도, 강도 높은 노동도 모두 미래를 위해서 한다고, 미래에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낮에 열심히 일해야 저녁에 쉴 수 있다고,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낮에 쉬지 못하면, 저녁에도 쉬지 못한다. 낮에 죽어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극한까지 일한 사람은 저녁이 되면 피곤을 이기지 못해 쓰러지고 만다. 


어떤 사람은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하기도 한다. 박은영 시집을 읽다가 '저녁이 있는 삶'이 아닌 '저녁 없는 삶'이라는 시를 읽고 최근, 아니 지속적으로 일어났던 노동자들이 겪은 사고가 생각났다.


그들에게는 저녁이 없었다. 쉬지 못하는 저녁이 아니라 아예 저녁에 집에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많았으니... 언제나 이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이 올 수 있을까.


                 저녁 없는 삶


  작업은 끝이 없었다 기계처럼 움직여 잔업을 마치면 야근이 기다리고 회식이 잡혔다 공휴일은 등산복을 입고 출근하거나 체육복을 입고 퇴근했다


  설명서가 없는 삶이었다


  주름보다 먼저 두통이 왔고 구두 굽보다 먼저 발꿈치가 닳았으며 나보다 먼저 입사 동기가 승진을 했다 지하철에 빈자리가 생기면 보상을 받는 듯도 했다 그 작은 의미를 던져주며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밤은 짧고 낮은 길다는 것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부품 하나가 없어도 움직이는 기계처럼,


  세상은 돌아갔다


  저녁 없이도 돌아가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박은영.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실천문학사. 2020년. 14쪽.


지금도 이런 노동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저녁도 휴일도 없다. 그리고 안전규칙도 지켜지지 않는다. 단순히 저녁이 없는 삶이 아니라, 저녁이 되어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제는 바꾸어야 한다. 어느 때부턴가 우화 '개미와 베짱이'가 바뀌었다. 개미처럼 죽어라 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누릴 줄 아는 베짱이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게으를 권리가 있다. 휴식을 취할 권리가 있다. 오죽했으면 성경에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이 있을까. 이젠 일주일에 5일, 하루 8시간 노동도 많다고 한다. 노동시간을 줄여도 될 때다. 그러니 주4일 노동을 실시하자는 나라도 나오고 있다. 하루 6시간 노동에 주4일 노동, 그렇다면 주당 24시간 일하면 된다. 아마 우리나라는 이 노동시간의 배 이상이 될테니..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저녁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저녁이 있는 삶을 만들어야 한다. '저녁 없는 삶'이 아니라. 그렇게 사람다운 삶에는 반드시 저녁이 필요하다. 우리는 개미도 베짱이도 모두 되어야 한다. 


박은영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시집에는 이런 '저녁 없는 삶'만큼이나 슬픈 시가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오리너구리'라는 시, 마음이 아프다. 여전히 우리 현실은 이렇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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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평론을 읽다가 김남일이 쓴 글(시대와 소설(7)-이대로는 안된다, 통일 결사반대!)에서 이태준이쓴 단편소설 "복덕방"을 다시 만나게 됐다. 너무도 오래 전에 읽어서 무슨 내용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은 소설.


  책을 찾아본다. 분명 읽었으니 책이 있으리라. 책꽂이를 뒤져보니, 구석에서 책이 나온다. "이태준 전집2. 단편.희곡" 있긴 있구나! 


  소설은 짧다. 등장인물도 몇 안 된다. 그 중에 안초시라는 인물이 중심이다. 그가 복덕방에 함께 드나드는 박희완영감에게 들은 말... 관변에 있는 모 유력자가 흘렸다는, 황해연안에 제이의 나진이 생긴다는 말.


  자, 부동산 투자다. 땅값이 두 배 세 배도 아니고 몇십 배 또는 몇백 배 뛴다고 하니, 돈도 없는 안초시지만, 딸에게 이야기해서 삼천 원을 투자한다. 세상에, 자기 안경 다리를 바꿀 돈도 없는 사람이 거금을 땅에 투자하는 것. 결과는 뻔하다.


축항후보지로 측량까지 하기는 하였으나 무슨 결점으로인지 중지되고 마는 바람에 너무 기민하게 거기다 땅을 쌌(샀?)던, 그 모씨가 그 땅 처치에 곤란하여 꾸민 연극이었다(47쪽)고.


일제시대에 쓰인 소설이다. 지금과 무엇이 다른가? 땅에 투자하여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 지금도 신도시 개발이 될 예정지들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지 않은가. 이 정보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그 땅을 사놓기도 했고.


또 자신이 아는 사람들에게 그 정보를 넘기기도 했고. 많은 공무원들이 관련되어 수사를 받고, 어떤 사람들은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게도 되었는데...


저축을 통해서는 돈을 모을 수가 없고, 또 그렇게 모았다치더라도 올라가는 집값을 따라갈 수가 없으니, 사람들이 너나 없이 부동산으로 몰리게 된다.


똑똑한 집 한 채라고 해서 몫이 좋은 곳에 있는 아파트 한 채를 수십, 수백 억을 주고 매입하기도 하고, 또 개발 차익을 노리고 땅을 사놓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어김없이 돈을 번다. 적게는 몇 배, 많게는 몇백 배까지.


하지만 있는 사람들은 돈이 돈을 낳는다고 계속 재산을 부풀려 갈 수 있지만, 이 소설에 나오는 안초시 같이 돈이 없는 사람들은 땅이나 집을 사기 위해서는 빚을 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돈이 아니라 빌린 돈으로 투자를 할 수밖에 없다. 투자가 아니라 투기, 모험이라고 해야 하고, 잘못된 투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날리고도 보충할 수 없게 만든다.


안초시가 세상을 뜨게 되는 이유도 이것이다. 그는 땅을 사서 돈을 번다는 환상을 품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파산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현실은 어떤가? 이태준이 이 소설을 쓴 때가 1930년대라고 하는데, 2000년대가 된 지금 이 소설에서 그려진 현실과 얼마나 달라졌는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영끌"이라고 영혼까지 끌어다 빚을 낸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들에게는 돈이 모이지 않고 오히려 빚만 더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니...


오랜 전 소설 "복덕방"을 다시 읽으며 예전부터 있어 왔지만,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방송한 작년부터 벌어진 부동산 광풍, 또 권력 또는 정보를 이용해 부동산을 매입했던 씁씁한 현실을 생각하게 된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면 특정한 개인에게 책임을 묻기보다는 이런 현상을 막을 수 있는 제도 개선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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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평론" 178호를 읽으면서 가슴이 뻥 뚫리기보다는 더 답답해짐을 느꼈으니, 웬일인가?


  "녹색평론"에서 하는 주장들이 계속 허공에만 맴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가?


  아니면 "녹색평론"에서 하는 이야기들이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서인가? 실현가능성? 다른 말로 하면 "대안"이라고 한다.


  지금 사회를 비판하면 "그래서 대안이 뭔데?" 라는 질문이 돌아온다. 대안도 없으면서 비판하지 말라고 한다. 이렇게 현실을 비판하기조차도 힘들어지고 있단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지고 말았다.


"녹색평론"에서 계속하고 있는 주장들을 몇 가지로 정리해보면, 소농이 중심이 되는 농업, 모두에게 돌아가는 기본소득, 그리고 생태와 환경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더 많이 들 수도 있지만 이 정도만 들어도 된다.


이 중에 하나도 이루지지 않았기 때문에... 농업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데도, 소농이 중심이 되는 농업정책은 요원하고, 오히려 기계농을 비롯한 대량생산 체제로 농업도 개편하려고 하고 있으니... 농촌이 공동화되고 있는 지가 오래되었음에도, 여전히 성장 성장 하면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업을 키우려 하지 않는다.


농민들이 또는 농촌에 사람들이 모여 살게 하려면 기본 생활이 보장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농민기본소득 또는 농촌기본소득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음에도, 아직도 멀었다. (송원규, 농 기본소득이 열어줄 미래)


꼭 농촌기본소득만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본소득 논의가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으니, 이번 호에서 다루고 있는 여러 논의들을 참조할 만하다. (이유진, 어떤 탄소중립사회를 만들 것인가, 안효상, 기본소득의 오디세이아, 남기업, 기본소득형 국토보유세, 생태적 전환의 길 등등)


어려운 경제학 지식을 동원해서 논의할 필요도 있지만, 성서에 기반해서 탈성장을 이야기하는 글도 매우 소중하다. (조현철, 탈성장과 상상력, 성서에 길을 묻다)


출애급기를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출애급을 기존 세상과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해석하고,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은, 기존 현실에서 믿고 있었던 잘못된 관념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으로, 그리고 광야에서 40년을 헤매는 이유는, 과거와 단절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음을 생각해야 한다는 글.


여기에 또 안식일이라는 개념... 그렇다. 일만 죽어라 해서는 안 된다고, 쉴 때 쉬어야 한다고, 성장만을 추구하지 말고 적당한 노동을 해야 함을 그렇게 찾아내고 있으니... 엄청나게 많은 수의 기독교 신자가 있는 우리나라, 과연 그들은 성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여전히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자랑하고, 중대재해처벌법이 유명무실해서 많은 사람들이 노동현장에서 죽어나가는 현실. 이런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장논리를 극복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녹색평론" 178호는 기후위기에 대응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어 "녹색평론"이 지속적으로 제기한 이 문제들이 또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기는 하지만, 그래도 문제제기를 꾸준히 하고 있는 잡지가 있다는 생각에 위안을 삼기도 한다.


이번 호에 실린 박남준의 글(안테나 켰습니다)과 이병철의 시(그 죽임의 삽질을 내려놓아라)는 아직도 우리가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마음으로도 느끼게 해주고 있다.


"대안이 뭐냐?"는 질문에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공멸하고 만다는 사실은 확실하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만, 공멸을 막기 위해서는 이렇게 꾸준히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이 있다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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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나와서 살아가면서, 세상이 점점 좋아진다고 느낀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면서 자신에게 덧씌워진 온갖 습속들로 인해, 고집만 더욱 세지고, 자신만 알게 되어 오히려 세상이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진다고 느끼지 않을까?

 

  세상은 진보한다고 하는데, 진보라는 말과 다르게 삶에 대한 통제가 더욱 많아진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알면 알수록 오히려 지식이 힘이 되고, 지식이 삶을 더욱 행복하게 해야 하는데, 그와 반대로 가고 있지는 않은지. 그런데 이것이 개인의 앎에만 해당할까?

 

그렇지 않다. 진보라는 말에 과학기술을 포함한 앎의 발전이라는 말도 들어있다면, 세상 지식 총량은 늘고 있는데, 우리들 삶은 더욱 옭죔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지식의 총체들이 우리들의 시각을 굴절시키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의 관점으로 보고, 그렇게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았을까? '인권'이 존중되어야 하는 세상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인권'도 자신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면서 또 많은 것을 알아가면서 오히려 '있는 그대로'에서 점점 멀어져, 내 삶이 행복에서 더 멀어지고, 사회 역시 그 많은 지식 속에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라는 말이 정말로 내 삶에서 많이도 멀어졌다는 생각을 하는데... 손택수 시집을 읽다가 '있는 그대로, 라는 말'을 읽고 아, 그렇지! 하고 감탄하게 됐다.

 

   있는 그대로, 라는 말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뭐냐면 있는 그대로더라

나이테를 보면서 연못의 파문을, 지문을,

턴테이블을, 높은음자리표와 자전거 바퀴를

연상하는 것도 좋으나

그도 결국은

나이테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만은 못하더라

누구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평화 없이는 비둘기를 보지 못한다면

그보다 슬픈 일도 없지

나무와 풀과 새의 있는 그대로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어졌나

세상에서 제일 아픈 게 뭐냐면,

너의 눈망울을 있는 그대로 더는

바라볼 수 없게 된 것이더라

나의 공부는 모두 외면을 위한 것이었는지

있는 그대로, 참으로

아득하기만 한 말

 

손택수,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2020년.15쪽.

 

그래, 나에게 씌워졌던 많은 것들을 걷어내려는 노력을 해야겠다. 내 주변에 있는 존재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다는 생각. 그래서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지 않았을까?

 

'있는 그대로'라는 말에는 자신을 먼저 내려놓는 법을 익혀야 한다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지식부터 시작해서 온갖 습속들을 걷어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나 아닌 존재들을 내 관점이 아니라 그들 존재 자체로 먼저 볼 수 있는 눈, 마음. 그런 마음들이 대다수를 이룬 사회라면 수많은 갈등들이 해결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손택수, 이번 시집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에는 이 시 말고도 여러 가지 생각할 것들이 많은 시들이 실려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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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스럽다'는 말이 생각났다. 정일근 시집을 읽으며. 자연스럽다. 순리를 거스리지 않고 살아간다. 꾸미려고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렇게 자연스럽다라는 말에는 인간이 꾸며낸 것이 없다는 뜻으로 들린다.


  '자연스럽다' 요즘 쓰기 힘든 말이다. 방송을 보면 사람들 모습이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소리를 듣는다. 있는 그대로 방송에 나와라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방송에 나오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할 정도로 고친, 꾸민,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다는 말을 들을 지경이다. 그러니 자연스럽다는 말도 뜻이 바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하더니, 온갖 좋은 말들이 왜곡되어 사용되는 지금.


환경을 생각한다면서 녹색성장이라는 형용모순인 말을 자연스러운 말인 양 쓰는 이런 때에... 도대체 무엇이 자연스러울까 하는 생각을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제는 가상화폐를 가지고 투기(투자라고 하기엔 좀 뭐하다)를 하는 지경에 이른 상황. 화폐는 목숨을 건 비약을 통해 자기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데, 이제 화폐는 물질이 아니라 온라인에 존재하는 가상의 존재를 넘어서, 그것들이 기존 물성을 지닌 화폐를 끌어모으는 역할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런 흐름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기후 위기, 기후 재앙이라고 하면서도, 내놓는 정책들이란 것이 도대체 어떻게 기후 위기를 막겠다는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고 있는 이때... 청소년들이 기후 위기를 해결하라고 시위를 해도, 너희는 아직 어려서 몰라 하고 무시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그레타 툰베리는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정책입안자들은 있는 공항도 부족하다고 다른 공항을 더 짓겠다고 난리를 치니, 사람들을 많이 실어나르는 비행기는 기정사실이고, 그것들이 더 편리하게 이착륙할 수 있는 공항을 건설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인지...


발전에 대해서, 성장에 대해서 무어라 말하면 시대를 역행하는 사람이니, 시대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니, 또는 과거에 사로잡힌 근본주의자니, 꼰대니 하는 소리를 하는 시대에, 그래, 자연은 그냥 인간이 무시해도 되는 존재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코로나19가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초래한 재앙임이 분명한데도, 그것을 또 기술로 이겨내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도대체 무엇이 자연스러운 것인가? 헷갈린다.


그래서 다시 정일근 시를 생각한다. 자고로 시인이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니 이 세상이 아니더라도 어떤 존재, 비존재에게도 민감한 마음을 투사하는 존재가 시인인데... 그런 시인이 종이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자연스럽다는 말이 어떠해야 할지 생각할 수 있다.


백지의 피


그 시인 출판 기념식장에서 구겨진 백지 묶음 주웠다

처녀시집 묶어온 자리에 덧댄 고급 종이였다

시가 난무하는 세상, 시 한 줄 몸에 받지 못한

백지, 나무에서 종이가 될 때까지의 빛났던

운문 정신이 꾸깃꾸깃 어둡게 구겨져 있었다

깊은 밤 그 백지 한 장 한 장 다려 펴며 물었다

백지가 휴지 되어 버려지는 시대에 나는 시인인가?

종이의 날 선 귀퉁이에 시들이 우수수 베이고

태어나지 않은 시의 깊은 곳에서 피가 스며 나온다


정일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3쇄. 63쪽.


요즘 이런 말이 있다. 학교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절대로 책을 훔쳐가지 않는다고... 교과서! 수능이 끝난 고등학교에 가보라. 교과서들을 어떻게 하는지... 아니 고등학교만이 아니다. 초·중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학년말이 되면 교과서들이 어떻게 버려지는지.


아예 업체를 불러 폐휴지로 분리수거를 하는 학교가 태반이니.. 종이를 우리는 이렇게 다룬다. 공부를 하는 학생조차도. 그래 학생들은, 특히 우리나라 학생들은 배움이 아니라 입시를 위한 공부밖에는 하지 못했기에, 그 지긋지긋한 교과서를, 원수같은 교과서를 버린다치지만... 시인은? 왜 시인은 출판 기념식을 하고, 자신의 시집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종이들을 그렇게 버리고 마는가? 그것이 자연스러운가? 아니다. 이것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이런 모습이 자연스러워서는 안된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바로, 보이든 보이지 않든 모든 존재들을 소중하게 아끼는 마음이다. 그런 존재들로 인해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조심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정일근 시인의 시, '자연론'을 본다.


자연론


풀 한 포기 밟기 두려울 때가 온다


살아 있는 것의 목숨 하나하나 소중해지고


어제 무심히 꺾었던 꽃의 아픔


오늘 몸이 먼저 안다


스스로 그것이 죄인 것을 아는 시간 온다


그 죄에 마음 저미며 불안해지는 시간 온다


불안해하는 순간부터 사람도 자연이다


정일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3쇄. 57쪽.


이래야 자연스럽다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랬으면 좋겠다. 허랑방탕한 말들이 난무하는 세상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잃고 있는 이 '자연스럽다'는 말. '꺾었던 꽃의 아픔을 몸이 먼저 아는' 그런 사람이라면 어찌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우리, 이렇게 자연스러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자연스러운 체하는 삶이 아니라.


정일근 시집을 읽으며 '자연스럽다'는 말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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