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 여섯 개의 세계
김초엽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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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내 머리를 스친 그 희망의 크기는 너무나도 거대해 내 뇌와 몸이 감당할 수 없었다. 그 대부분이 허망하게 끝날 것이며 우리는 곧 붉은 점으로 가득한 시체가 되어 끓는 바닷물 속에서 삶아질 것임을 알고 있는데도 그랬다. 하지만 우리는 그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내가 지금 빙산에서 발견한 종이와 연필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나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빙산의 꼭대기에 앉아 얼음 속에서 꺼낸 갈색 덩어리를 먹으며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으리라는 희망의 가능성에 의지해 이 글을 쓴다.      

- 듀나, '죽은 고래에서 온 사람들' 중에서, p.69

 

이곳은 바다의 행성이었다. 대륙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낮 대륙은 모래사막이었고 밤 대륙은 얼음 사막이었기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곳은 바다뿐이었다. 바다에서 살기 위해 사람들은 떠다니는 거대한 섬인 고래 등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고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의 고래와는 닮은 구석이 전혀 없는 생명체로, 폭은 1~2백 미터, 길이는 7백 미터에서 1.5킬로미터에 달했다. 사람들은 고래 위에 집을 세우고, 주변 바다에 농장을 만들고, 그곳에서 아이들을 낳고 교육하며 언젠가 다른 별과 통신할 수 있는 미래를 꿈꾸며 3천 년을 버텨왔다. 그들의 고래는 수백의 개체가 모여 만들어진 군체였고, 개체가 하나씩 늙어 죽어가도 절은 개체가 그 자리를 채웠다. 하지만 개체가 죽는 속도보다 새 개체가 들어오는 속도가 더 느리면 고래는 완전히 죽어 분해되었고, 그 위에 있던 마을은 멸망했다. '고래병'이라 불리는 전염병으로 인해 고래들이 죽어 나갔고, 죽은 고래를 떠나 새로운 터전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이 이야기는 듀나의 '죽은 고래에서 온 사람들'이다. 각각의 작품들 끝에 '작가 노트'가 짧게 수록되어 있는데, 초광속 우주선을 타고 은하계로 진출하는 인류를 그려보고자 했던 듀나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멀리서 보면 인류는 바이러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의 유전자를 복사해 최대한 많이 전파하려는 작은 로봇들." 이라고 했는데, 어쩐지 오싹하지만 너무도 공감되는 말이었다. 김초엽과 듀나는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팬데믹'이라는 현실을 뛰어 넘어 지구 너머 멀리 가는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정소연과 김이환은 팬데믹의 상황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전염의 공포와 확진 이후의 삶을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가장 지금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배명훈과 이종산은 약 백여 년 이후를 설정해 상상해 현실을 통과해 미래로 이어지는 과도기를 모두 담아내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포포에게 가족이란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위해주는 따뜻하고 힘이 되는 사람들인 동시에 삶을 외롭게 하는 타인들이다. 가족들조차 타인이니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무이는 포포의 삶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결혼한 뒤에도 그 불씨가 꺼지지 않을 수 있을까?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포포는 도망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다... 때로는 바깥과 자신의 연결을 끊고 완전히 혼자가 되는 게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막막한 외로움에서 헤어날 수 있게. 내면에 집중하면 혼자라는 사실이 외롭기보다는 편하게 느껴진다.     

- 이종산, '벌레 폭풍' 중에서, p.183~184

 

언젠가는 이 지긋지긋한 팬데믹 상황도 끝이 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시기가 까마득하기만 하다. 최소한 1~2년 이상 길어질 것 같다는 전망도,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고 있다는 소식도 지금의 현실을 버텨내기엔 그다지 희망적으로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다. 누군가 '세계는 이제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로 구분될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세계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왔던 많은 일상들이 대부분 사라져버렸고, 불과 몇 달 사이에 도시의 모든 것이 바뀌고 있으며, 우리는 그 혼란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 코로나가 장기화 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외출을 하지 못하거나 타인과의 교류가 줄어든 사람들이 답답함과 우울함을 느끼며 코로나 블루를 호소하고 있는 세상. 그 속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것들 중에 소설만큼 쉬운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소설 속에서는 공간의 제약도, 시간의 제약도 벗어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김초엽, 듀나, 정소연, 김이환, 배명훈, 이종산 소설가의 개성 넘치는 SF 단편 앤솔러지이다. ‘전염병’을 테마로 한 이 소설들은 멸망Apocalypse, 전염Contagion, 뉴 노멀New Normal 챕터에 각각 두 편씩 묶였으며, 솔직한 고민과 든든한 응원을 담은 작가 노트도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멸망Apocalypse의 순간에도 끝내 사랑하고 꿈꾸는 자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들로 채워진 김초엽과 듀나의 작품. 전염Contagion의 충격 속에서 변화하는 인간의 일상과 관계를 들여다보는 정소연과 김이환의 작품. 새로운 관습과 질서가 자리 잡은 뉴 노멀New Normal의 시대, 약 백여 년 이후를 설정해 상상해보는 배명훈과 이종산의 작품. 이렇게 여섯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낯선 세계를 사는 사람들의 익숙한 이야기, 신인류의 여섯 세계를 만나 보자. 지금의 우리에게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 소설이 우리를 구원해 줄 거라는 희망을 발견하게 될 테니 말이다. 게다가 이것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우리에겐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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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 1
스티븐 킹.피터 스트라우브 지음, 김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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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디 할아버지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잘 길들인 가죽처럼 온화하고 위안을 주는 목소리였다. 잭은 때로는 눈살을 찌푸리고 때로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귀를 기울였다.
"네가 백일몽이라고 부르는 것이 뭔지 아니?"
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꿈이 아니란다, 방랑자 잭. 백일몽도 아니고 악몽도 아니지. 네가 본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야. 어쨌든 현실이란다. 이쪽 세계와는 많이 다르긴 하지만 현실이지."      p.93

 

열두 살 소년 잭 소여는 적막하고, 무기력하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토미 삼촌이 사고로 돌아가셨고, 몸이 아픈 엄마도 죽어가고 있을 지 모른다. 3개월 전 잭의 엄마는 집을 정리하고는 작은 해변에 있는 이곳 리조트로 도망치듯 옮겨 왔다. 학교에 갈 수 없는 잭의 일상은 바다처럼 정처 없이 떠다니고 있었고, 엄마는 아빠의 동업자인 모건 아저씨와 다투지 않기 위해 숨어 있는 중이다. 엄마는 20년 동안 B급 영화의 여왕이었던 여배우였지만 지금은 그저 늙고 지친 여인일 뿐이다. 엄마가 얼마나 아픈 건지, 모건 아저씨는 무슨 짓을 꾸미는 건지, 그들 모자는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아 잭은 매일 밤 끔찍한 악몽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스피디 파커라는 노인에게 이쪽 세계와는 다른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현재와 공존하는 또 하나의 세상, '테러토리'라는 곳은 물리학 대신 마법이 존재하는 곳이다. 두 세계를 넘나들 수 있는 사람들은 테러토리에서 트위너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쪽 세계의 10만 명당 한 명 꼴로 저쪽 세계의 트위너가 있는 셈이다. 잭의 아빠 역시 저쪽 세계에 트위너가 존재했고, 엄마의 트위너가 저쪽 세계의 여왕이라는 스피디 할아버지는 잭은 특별한 존재라 트위니가 없이 한쪽 세계에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테러토리로 가서 죽어가는 여왕을 구해야 현실에 있는 잭의 어머니를 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잭은 할아버지가 건네준 마법 주스를 마시고, 그 부적을 찾기 위해 저쪽 세계로 향하게 된다. 그렇게 잭의 파란 만장한 모험이 시작되는데, 갖은 방해물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어린 소년은 과연 그 모든 것을 어떻게 극복해낼까. 특히나 한쪽 세계에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세계에 참혹한 일을 일으킬 수도 있고, 실제로 두 세계를 이동하는 과정에 벌어지는 일들이 소년 잭을 힘들게 만들고 있어 앞으로 이어질 여정이 순탄하지 만은 않을 것아 2권이 더 궁금해졌다.

 

 

 

 

알람브라 호텔 방에 홀로 앉아 있는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옆에는 엄마가 잊어버리고 재떨이에 올려 둔 담배가 타고 있다. 엄마는 울고 있다. 잭을 위해 울고 있는 것이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엄마가 그리워서, 엄마가 보고 싶어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터널에 아무것도 없고, 남자한테 맞아 울면서 그걸 사랑이라 여기는 여자도 없고, 소변을 보는 동안 자신의 발밑에 토해 놓는 남자도 없는, 그런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엄마한테 돌아가고 싶었고 서쪽으로 향하는 이 끔찍한 여정에 발을 들여놓게 한 스피디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p.295

 

이 작품은 미국을 대표하는 두 호러 작가, 스티븐 킹과 피터 스트라우브가 공저하여 1984년에 출간한 작품이다. 당시에 두 작가가 함께 소설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큰 화제였고, 꽤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1위를 지키며 단기간에 100만 부의 판매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2001년에 후속작인 <Black House>가 나왔고, 현재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도 기획 중이라고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30여 년 동안 영화화를 위해 공을 들여올 만큼, 오락성과 대중성을 잡은 작품으로 평가 받아왔다. 국내에서는 아주 오래 전에 해적판으로 3권짜리가 나왔었는데, 정식 계약본으로는 첫 출간이다.

 

1권이 560여페이지, 2권이 730여페이지로 분량이 엄청난데, 스티븐 킹의 모든 작품들이 그러하듯 가독성이 뛰어나서 매우 잘 읽힌다. 현재의 세상과 마법이 공존하는 또 다른 세상 '테러토리'라는 두 개의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판타지는 수십 년전에 쓰였다는 점이 믿기지 않을 만큼 세월의 갭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도 이 작품의 장점일 것이다. 미국에서 최근 그래픽노블로도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그래픽노블로 그려지는 세계의 모습도 매우 궁금하다. 그리고 현재 할리우드에서 마이크 바커 감독에 의해 영화화 진행중이라고 하니, 조만간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이 작품은 스티븐 킹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에서 주인공에 대한 영감을 얻었기에, 주인공 이름이 '잭 소여'이다. 소년 잭 소여의 파란만장한 모험은 1권보다 훨씬 더 두꺼운 2권으로 계속된다. 자, 2권으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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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별이 만날 때
글렌디 벤더라 지음, 한원희 옮김 / 걷는나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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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된 적 없어요."
"알아요. 언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도의 수단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린 여전히 소통하고 싶은 생각들은 뇌 속에 가둬 두고, 꿀꿀대는 거로만 표현하는 유인원에 불과하죠."
"영문학 교수 아들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네요."
"아버지로부터 문학적인 유전자는 물려받지 못했나 봐요."     p.196

 

조는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유리멧새의 부화 성공률에 대해 조사 중이다. 키니 교수님의 산장을 빌려 그곳에서 지내면서 연구에만 몰두하던 그녀는 어느 날 숲에서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파리한 얼굴에 헐렁한 후드 티와 바지를 입고 있는 소녀는 자신이 바람개비 은하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지구에 집이 없다는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 새벽 4시부터 열세 시간 이상 들판과 숲 속을 헤매고 다니며 일을 했던 조는 아이의 장난을 받아주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이름도, 집도 없다는 소녀의 부모를 찾아주고 싶지만, 경찰에 신고하면 도망가겠다는 아이의 몸에 긁히고 멍든 자국이 발견된다.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던 조는 달걀 파는 남자 게이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두 사람은 번갈아 가며 아이를 돌보게 된다.

 

사실 조는 암으로 투병 중인 엄마를 간호하기 위해 대학을 휴학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도 같은 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두 가슴과 난소를 모두 제거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 남자친구는 그녀를 외면했고, 2년 뒤 다시 대학으로 돌아온 그녀를 남자 대학원생들은 어색하게 대했다. 외진 곳에서 달걀을 팔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의 게이브는 대학 2학년 때부터 신경쇠약과 우울증, 광장 공포증으로 치료를 받아 왔다.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엄마를 돌보며 살고 있는 그에게는 어린 시절에 목격한 부모의 충격적인 사생활에서 받은 상처를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조숙하고 똑똑한 모습을 보이는 소녀는 다섯 개의 기적을 보기 전까지 지구에 머물러야 한다고, 그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소녀는 정말 외계의 존재인 걸까? 각자 세상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상처 받아왔고 몸의 병과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는 한 여자와 남자, 그리고 자신이 외계인이라 말하는 정체 불명의 소녀까지 세 사람이 함께 지내면서 펼쳐지는 드라마는 잔잔하면서도 뭉클한 감동을 안겨준다.

 

 

아이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 입을 떼었다. 조는 아이가 쉽게 말을 꺼낼 수 있는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미동도 않고 숨도 거의 쉬지 않았다. 그녀는 얼사가 중요한 사실을 말하려고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얼사는 어두운 숲속을 응시할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니?"
조가 묻자, 아이가 눈을 돌렸다.
"만약 내가 진짜로 다른 세상에서 왔다면? 언니는 단 한순간이라도 내 말을 믿은 적 있어?"       p.275

 

숲과 별이 만난다는 근사한 제목과 그 이미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설레이는 표지를 한 이 작품은 글렌디 벤더라의 데뷔작으로 아마존 작가 랭킹 1위를 비롯해서 여러 매체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의 배경은 도시에 사는 우리가 거의 접해볼 수 없는 숲이다. 주인공은 셀 수 없이 많은 새알과 아기새를 보고, 어미 사슴과 새끼 사슴이 함께 있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하고, 표범개구리를 잡고, 꿀물을 마시는 벌새를 본다. 하천의 무성한 덤불과 쐐기풀을 헤치고 지나가서 둥지를 살피고 관찰하는 일을 하는 그녀의 시선으로 우리는 회색 빛의 어두운 숲 속을 느끼고, 후두두 산장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다. 작가는 글을 쓰기 전에 멸종 위기 조류 전문가로 활동했던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조류학을 전공한 전문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디테일과 묘사가 이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암 수술 이후 젊은 나이에 여성성을 잃었다는 상실감으로 이성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게 된 조, 어머니의 외도로 태어났기에 아직도 누나의 경멸과 멸시를 견디며 살고 있는 게이브, 외계인 행세를 하며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소녀 얼사, 이들 세 사람은 각자의 상처를 홀로 끌어안고 살아 왔다. 그들 곁에는 꼭 필요한 순간에 아무도 없었다. 가끔은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이 남보다 못한 존재가 되기도 하고, 또 가끔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타인으로부터 위로를 받게 되기도 한다. 오히려 나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이라는 것 때문에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봐 주는 경우도 있고 말이다. 그렇게 살아온 환경도, 성격도, 생각하는 것도, 취향도 완전히 다른 세 사람이 서로의 흉터를 통해서 가까워지게 된다. 만약 지금 외롭다면, 누군가 의지할 곳이 필요하다면, 이 작품이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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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얼굴이 있다면 너의 모습을 하고 있겠지
고민정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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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을 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삶을 구원할 수 있다는 착각. 사랑의 힘이 그렇게 세다는 착각. /그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었고 받는 사랑에 움츠렸고 주는 사랑에 인색했다. /그럼에도 나는 어쭙잖은 경험으로 사랑이 충만한 내가 그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만이었지.      p.106~107

 

티비 프로그램을 잘 챙겨보는 편은 아니라 <연애의 참견>도 가끔 지나가다 본 게 전부이지만, '본격 로맨스 파괴 토크쇼'라는 기획 의도에 맞게 사연 속 커플의 연애들은 지지하고 싶다기 보다, 이어가면 안 된다고 말리고 싶은 것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막장 드라마보다 더 막장 같은 연애도 있었고, 황당하고 어이없는 스토리도 있었고, 너무 바보 같고 한심해서 정신 차리라고 말해주고 싶은 이야기도 있었다. 분명 누군가의 사연을 토대로 만들어진 드라마이니, 현실감이 있어야 할 것인데, 화면 속 그들의 연애는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왜냐하면 사랑할 때만 가능한 온도들이 그 바깥에 있을 때는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고, 그 속에 있을 때는 죽을 것 같던 감정도 다 끝나고 나면 내가 왜 그랬나 싶을 만큼 객관적으로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연애에 정답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타인의 연애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보는 것일 테고 말이다.

 

이 책은 [연애의 참견]을 기획, 제작한 고민정 작가의 첫 에세이이다. 시즌1부터 시즌3까지 연애에 관한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하루에도 수십 통씩 오는 사연들을 접하며 자연스럽게 들었던 물음, '사랑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오랜 통찰과 사랑의 본질에 대한 생각들을 담고 있는 사랑에세이이다. 작가는 그 사연들을 보면서 매번 이렇게 생각했다. 사랑 하나 하자는데, 왜 이렇게 힘이 들까. 바로 거기서 이 책이 시작된 것이다.

 

 

어쩌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것보다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키우는 것보다 빨간불의 고장 난 타이머를 고치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당신의 빨간불이 적절한 타이밍에 작동하는지, 빨간불이 들어왔을 때 발길을 멈추고 돌아볼 수 있는지가 다른 무엇보다 먼저 돌아봐야 하는 '문제'이지 않을까.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당신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은 빨간불 속에 있다고 믿으면서.      p.164

 

기약 없는 장거리 연애를 더 하자고 할 수가 없어 끝낸 5년의 사랑은 2년의 이별을 남기고, 가난한 대학생의 시간을 쪼개 쓰는 피곤한 일상이 그를 만나면서 순간순간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되지만 점점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되는 욕심은 결국 그들을 이별로 데려가기도 한다. 확신이 없었던 사랑에 고민하다가 다른 사람을 만나보고 나서야 진짜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큰 싸움도 없이 그저 사랑에 수명이 다해 헤어진 이별 조차 쉽게 정리가 안 되기도 한다. 사랑에 빠져 있는 순간에는 누구나 그 감정이 영원할 거라 믿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믿을 수 없게 쫙 갈라져버린 관계의 금은 이해할 수 없음으로 답답하게 만들고, 상처받고 좌절하게 만든다. 하지만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계절이 떨어지듯,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자고 나면 새날, 자고 나면 새 바람, 자고 나면 떨어지는 계절.. 그 영원하지 않음에 용기를 얻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 책에는 <연애의 참견>에서 보여졌던 그렇게 독하고,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는 없다. 조금 더 담백하고, 잔잔하게 어른스럽게 풀어 나가는 사랑에 관한 여러 단상들을 담고 있다. 다양한 사랑의 이야기들을 접해 왔던 경험으로 수많은 감정을 일으키는 연애의 순간들에 대해 풍부한 사유를 보여준다. 사랑에 정해진 룰이나 정답은 없다고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 한가지는 어떤 순간에도 '나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사랑을 하며 나를 지키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랑이 끝난 어제도, 사랑에 괴로워하는 오늘도, 이 책을 읽고 있는 순간에도, 우리의 페이지는 차곡차곡 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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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쉬는 기술 -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최고의 휴식법 10가지
클라우디아 해먼드 지음, 오수원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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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념, 다시 말해 두서없는 생각은 휴식이 아니라 뇌의 자연스러운 상태다. 뇌는 뭔가를 찾아 떠난다. 끊임없이 뭔가 탐색하고 다른 생각을 떠올리며 또 다른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모색하는 것이다. 고단하겠다는 생각이 드는가? 고단한 것은 끊임없이 이런 생각을 뒤쫓을 때, 혹은 질서를 부여하려 애쓸 때뿐이다. 잡념이 진행하는 상태대로 내버려둘 때는 피곤할 일이 없다. 접이식 의자에 앉아 쉬면서 마당을 뛰어다니는 아기나 강아지를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p.95

 

얼마 전에 하루 잠자는 시간이 6시간이 못 되면 기억력 등 인지기능이 떨어질 위험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인지기능이란 기억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실행하는 능력이다. 수면 시간이 6시간이 못 되는 사람이 6시간 이상 자는 사람보다 인지기능이 저하될 위험이 2배 이상 높다는 연구 결과였다. 사실 늘 잠자는 시간을 쪼개어 가면서 생활하는 편이라.. 수면 시간이 충분했던 적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가슴이 뜨끔해질 수밖에 없는 기사였다. 사실 충분히 수면 시간을 확보하기는커녕, 평상시에도 늘 뭔가를 하며 바쁘게 사느라 제대로 휴식을 가져본 적이 언제인지도 까마득하다. 그나마 이번 명절 연휴는 코로나로 인해 북적거리지 않는, 집콕 연휴를 보내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제대로 된 휴식이란 무엇인가, 잘 쉬는 방법은 어떤 건지 이번 기회에 좀 알아보고 싶어졌다.

 

심리학자이자 대중적인 글쓰기로 인정받은 저자 클라우디아 해먼드는 자신이 진행하는 BBC 라디오 4 <마음의 모든 것> 프로그램을 통해 ‘휴식 테스트’(Rest Test) 실시했다. 이 프로젝트는 135개국의 1만8천 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역사가, 시인, 예술가, 심리학자, 뇌과학자, 지리학자, 심지어 작곡가까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이 모여 2년 동안 진행되었다. 이 책은 바로 그 조사 결과 사람들이 ‘가장 휴식이 된다고 여기는 상위 10가지 활동’을 추려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1위부터 10위까지의 목록들을 참고해, 곧 다가올 추석 때 해보고 싶은 휴식을 골라봐도 좋을 것 같다.

 

 

세계인이 최고의 휴식으로 꼽은 상위 다섯 개는 대체로 혼자서 하는 활동이다. 많은 이들에게 타인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휴식의 중요한 요소라는 뜻이다. 그런데 책 읽기야말로 혼자 하는 활동이라는 점에 더해 보다 특별한 것이 있다. 독서는 타인을 피하는 동시에 친구를 제공해준다는 점이다. 독서가 제공하는 친구는 실제 세계의 사람들보다 더 흥미롭고 휴식이 될 수 있는 친구, 원할 때는 아무 해명 없이 제쳐둘 수 있는 친구다.    p.343~344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어려운 휴식 결핍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제대로 쉬기 위한 방법은 꼭 필요하다. 휴식의 양뿐 아니라 질도 문제이니 말이다. 우리에게는 휴식이 더 필요하고, 질 높은 휴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휴식 테스트 상위 10위권에 들어가는 목록들이 궁금해질 것이다. 특히나 흥미로웠던 것은 최고의 휴식 방법 10위에서 1위를 소개하면서 이러한 활동들이 휴식이 되는 까닭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심리학자, 뇌과학자, 예술가 등 연구에 참여했던 전문가들이 열 가지 휴식법 각각의 효용을 입증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목록들 중 9위에 있는 텔레비전과 8위의 잡념이라는 항목이 다소 의외였다. 텔레비전을 보는 게 휴식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사실 우리가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동안 머리를 쓸 필요도 없고, 신체적인 노력도 전혀 들지 않는 게 사실이니 말이다. 이 책을 읽다 보니 긴장을 풀고 텔레비전도 휴식을 취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휴식 형태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리고 잡념도 휴식이 될 수 있다니 궁금했는데, 저자에 따르면 잡념이 휴식처럼 편안하다고 말할 때의 의미가, 어차피 뇌는 활동을 절대로 중단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뇌 활동을 통제하지 말고 그저 생각이 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는 거라고 한다. 저자의 설명을 듣고 보니 목적 없는 잡념에 빠지는 것도 휴식의 또 다른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에도 명상, 목욕, 산책 등의 항목들이 있었는데, 사실 가장 의외였던 것은 1위에 오른 '책을 읽는 시간'이었다. 응답자가 가운데 58퍼센트가 책 읽는 시간을 최고의 휴식으로 골랐다니 말이다. 독서는 수동적인 취미가 아니라 꽤 많은 노력을 요하는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왜 과반수 이상의 사람들이 이를 휴식이라고 여겼을까 궁금해졌다. 책을 읽는 시간이 큰 휴식이 되는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직접 만나 보길 추천한다. 한가지만 미리 말하자면 3천여 명 이상의 사람들을 10년간 추적한 결과, 책을 읽은 사람들이 신문과 잡지만 읽은 사람들보다 평균 2년 가까이 오래 살았다는 점이다. 독서처럼 가만히 앉아서 하는 정적인 활동이 건강에 이토록 긍정적 영향을 끼치다니 놀랍지 않은가. 책 읽기라는 특별한 휴식법의 비밀이 궁금하다면, 평소에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 적이 있다면, 당신에게 이 책이 꼭 필요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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