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점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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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사람들은 급박한 사정이 있지 않은 한 거짓말을 잘하지는 못하는 법이에요. 게다가 큰 거짓말을 하려면 큰 기량이 필요하지요."
오카쓰도 날카로운 말을 한다.
"그러니 만일 도련님을 거꾸러뜨릴 만한 큰 거짓말쟁이를 만나시거든 대인을 만났구나 하고 소중히 여기도록 하지요."
만약 거짓말 뒤에 절실한 이유가 숨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이유까지 들어 보면 어떨까요? 특이한 괴담 자리의 듣는 이로서는 더없이 뿌듯한 일이 되지 않을까요?"       - '눈물점' 중에서, p.27~28

 

미야베 미유키가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그려내는 시대 미스터리물은 벌써 꽤 많이 출간되었다. 미야베 월드 2막으로 출간되는 시리즈가 이번 신작으로 스무 권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 중에서도 '흑백의 방'에 이야깃거리를 가진 손님을 초대해 괴담을 들어주는 '미시마야 변조괴담' 시리즈는 <눈물점>으로 여섯 번째 작품이 되었다. 2012년에 출간되었던 <흑백> 이후, <안주>, <피리술사>, <삼귀>, <금빛 눈의 고양이>에 이어 이번 작품까지 12년을 이어오고 있는 시리즈이다. 특히나 이번 신작에서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인물이 바뀌면서 새롭게 시리즈가 다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시마초에 자리 잡은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 그곳의 주인장 이헤에의 조카딸인 소녀 오치카가 그 동안 흑백의 방에서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을 했었다. 듣고 버리고, 이야기하고 버리고. 손님은 이름을 대지 않아도 무방하며 세세한 부분을 숨겨도 상관없다는 것이 규칙이다. 한 번에 한 명, 또는 한 무리의 이야기꾼이 가게 안쪽에 있는 흑백의 방에서 독특한 괴담을 풀어낸다. 마주 앉아서 귀를 기울이며 듣는 이도 단 한 명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결코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흑백의 방을 찾아와 괴이하고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이번에 듣는 역할을 맡아 온 오치카가 올해 봄에 시집을 가게 되어, 다음 듣는 이는 이헤에의 차남 도미지로로 바뀌게 되었다. 도미지로는 솔직하고 마음씨가 착하지만, 그 동안은 빈둥빈둥 지내며 부모에게 얹혀사는 한량 같은 인물이었던 터라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이야기는 분위기가 꽤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자부로는 놀라서 숨을 멈추었다. 때마침 안개가 크게 후퇴하자 벚나무 숲이 차례차례 나타난다. 꽃보라가 춤을 춘다. 어제로 매화의 만개는 끝나고, 오늘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다니. 역시 이곳은 이 세상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이 완전히 다르다. 음식이 하룻밤 만에 썩어 버리는 이유도 그 탓이 아닐까. 두려움과 당혹으로 심장이 목구멍을 지나 튀어나올 만큼 세차게 두근거린다. 그런데도 만개한 벚나무 숲의 풍경은 얄미울 정도로 아름다워서 진자부로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곳은 대체 어디일까. 왜 우리는 이처럼 이상한 장소에 갇히고 말았을까.      - '구로타케 어신화 저택' 중에서, p.465~466

 

도미지로를 찾아온 첫 번째 손님은 그의 어릴 적 친구인 하치타로였다. 어린 시절 두부 가게를 운영했던 집이었는데, 지금은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그의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당시 그의 가족은 스물네 살부터 일곱 살까지 팔남매에 각각의 아내와 남편, 약혼자까지 함께 두부 가게 마메겐에서 함께 일하며 먹고 살았던 대가족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첫째 형수가 둘째 사위의 방에서 몰래 나오는 광경이 목격되고, 이후에는 둘째 형수가 셋째 누나의 남편을 덮치는 일이 벌어진다. 이상한 건 정작 당사자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였는데, 첫째 형수와 둘째 형수의 얼굴에 생긴 눈물점이 의혹의 대상이었다. 크기는 점만 한데 사람의 피부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면 얼른 종적을 감추는, 마치 벌레와도 같은 눈물점에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매년 묘지로 조성된 언덕에서 꽃놀이를 하는 것이 관례였던 벚꽃 마을에서 유일하게 여자들만 그 꽃놀이에 갈 수 없었던 사정, 길 위를 달리는 파발꾼을 뒤따라오는 정체 모를 괴이한 존재의 비밀, 가마카쿠시를 당해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는 대저택에 갇히게 된 각기 다른 신분의 세 사람에게 벌어진 일까지 이 작품에는 단편 세 작품과 중편 한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미야베 미유키는 이번 책으로 31화까지 이야기를 했고, 괴담은 99화로 완결할 예정이라고 하니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녀의 에도 시대물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설레인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호러라는 장르에는 죽음을 의사 체험하게 함으로써 일상의 빛남을 거꾸로 조명하는 효과가 있다고, 자신에게 괴담은 그런 소중한 감정을 환기시키게 만드는 장르'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미야베 월드 2막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오싹한 괴담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스스로를 용서하고 치유 받게 되거나,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이해를 받게 되는 따스하고, 인간적인 느낌을 안겨준다. 가슴 속에 맺혀 있던 이야기를 털어놓고 평온을 얻게 되거나, 누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행위를 통해 안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기분이 뭔가 위로도 되고, 일상에 지친 나를 위로해주는 것 같아서, 이 시리즈를 이리 오래도록 찾아서 읽게 되는 것이고 말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미시마야 시리즈의 다음 편을 이미 올 초부터 월간지에 연재 중이라고 한다. 도미지로가 다음 번에는 또 어떤 손님을 맞아, 어떤 괴담을 듣게 될 지 기대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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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심리의 재구성 - 연쇄살인사건 프로파일러가 들려주는
고준채 지음 / 다른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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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규 사건 후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후 6·25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에 신고되어 드러난 범죄가 없거나, 도시화가 늦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윤리를 중시하는 우리 민족의 유교 문화도 연쇄살인 같은 잔인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1970년대에 이르자 우리나라에서도 연쇄살인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p.30~31

 

범죄 소설을 좋아해서인지 범죄 수사와 프로파일링 관련 책들도 많이 읽어본 편이다. 프로파일러 표창원, 김경옥, 권일용,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 등 사건, 사고가 터질 때마다 언론에서 자주 보게 되는 이들의 저서는 모두 다 읽어보았으니 말이다. 국내에서 실제 활동하는 프로파일러는 약 40명 내외로 그 수가 매우 제한적이다. 이번에 만난 책은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프로파일러 특채 1기로 활동한 프로파일러 고준채 저자가 썼다. 그는 강호순 연쇄살인사건, 오원춘 살인사건 등 굵직굵직한 강력범죄 사건 수사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프로파일링이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과학적인 연구 방법과 심리학적 원리 등을 활용하여 수사관들에게 전문적인 조언을 제공하는 수사 기법이다. 우리나라 경찰에서 현재 프로파일링의 역할은 수사 방향 제시, 용의자 신문 전략 수립,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 신빙성 평가, 용의자 거주 지역 범위 설정 및 동일 수법 전과자 추출, 피의자 심리 면담 등 수사 실무 전반에 다양한 방식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프로파일링이라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벌어진 범죄에 대해 자료를 통해 '사후분석'을 하고,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사건이 발생하면 바로 현장에 투입되어 사건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훼손되지 않은 현장을 관찰하여 현장에 남겨진 물리적 증거뿐 아니라 범인의 행동 흔적을 찾아내고, 범행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하여 범죄자를 분석하는 일을 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사이코패스라고 해서 꼭 연쇄살인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폭행이나 상습 절도, 강도 같은 범죄를 우발적으로 일으켜서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경우가 많다. 거짓말을 잘하기 때문에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나도 곧바로 다른 거짓말을 생각해내기도 한다. 뻔뻔하게 어떤 말이든 아무렇지 않게 내뱉기 때문에, 매우 무식한 사람이라도 아주 박식하고 매력적이며 유능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p.167

 

이 책의 서두를 여는 것은 최초의 연쇄살인범 질 드레, 런던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살인광 잭, 영화 '양들의 침묵' 속 버펄로 빌, 미국 역사에서 '세기의 재판'으로 불리는 찰스 린드버그 아들 납치 사건 등 세기의 범죄들이다. 이어지는 것은 그에 못지 않은 우리나라의 강력 범죄 사건들이다. 사건 발생 33년 만에 극적으로 범인을 검거한 화성연쇄살인사건, 올해 12월 출소를 앞두고 있는 조두순 사건과 최근 이슈가 되었던 n번방 등 텔레그램 관련 디지털 범죄들을 짚어본다. 이렇듯 일반적인 정서와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게 되면 사회는 그들의 동기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로 인해 범죄 심리학이 발달하게 되고, 프로파일링이라는 최첨단 수사 기법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저자가 10여 년 동안 프로파일러로 일하며 겪은 수많은 실제 사건의 사례들을 통해서 범죄 수사 현장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 흥미로웠다. 끔찍한 범죄 현장을 다니며 마음속 괴물과 싸우는 사람들, 범죄 현장에 남긴 흔적을 분석해 범행 동기와 수법을 파악하고 그들의 심리를 분석해 다시 같은 범죄가 생기지 않도록 막는 사람들이 바로 프로파일러이다. 우리가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유명한 사건들이 어떤 식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또 어떤 과정을 거쳐 범인이 검거되고 사건이 해결되는지 보여주고 있어 범죄 수사에 관심이 많다면 매우 도움이 될 것 같다. 프로파일러뿐 아니라 과학수사요원, 피해자케어요원, 형사, 최면수사관, 진술분석가, 위기협상요원 등 사건 수사를 위해 다양한 역할을 하고 직업들에 대해서도 알려 주고 있어 해당 분야로 진로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도 유익한 정보가 되어 줄 것이다. 끔찍한 범죄 사건에 대한 뉴스 보도를 접하면 생각한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어떻게 한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이토록 완벽하게 상실할 수 있는가. 왜 이런 사건이 반복될까? 우리는 이러한 괴물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끔찍한 범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오늘도 현장에 가서 참혹한 죽음과 마주하는 이들의 노고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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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여자가 말하다 - 여인의 초상화 속 숨겨진 이야기
이정아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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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방에서 소녀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을 때, 화가의 얼굴은 경탄으로 바뀌었다. 불쾌한 생각과 걱정에 둘러싸여 내내 찡그리고 있던 차였다. 아침부터 열이 있었고 돈은 끝없이 부족했으며, 빚 때문에 여관을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아내의 다그침이 있었다... 현실에서 화가는 언제나 이런 종류의 지난하고 지루한 일상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몇 달째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한 소녀를 만났다. 조용하고 나이에 비해 성숙해 보이는 소녀였다.    p.131

 

이 책은 화가들이 그린 여인의 초상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양한 명화들 중에서 여인이 등장하는 작품의, 그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만을 담고 있는 특별한 미술책이다. 명화를 보면서 한 번쯤 '그림 속 저 여인은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면, 이 책을 통해 다양한 배경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젊은 두 여자의 모습을 파격적이고, 생생한 터치로 그려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라는 그림을 누구나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붉은 피가 하얀 침대 위로 줄줄 흘러내리고, 남자의 목을 관통하고 있는 긴 칼, 걷어 올린 소매와 의연하고 냉정한 표정의 여자들까지 우연히 보더라도 절대 뇌리에서 잊혀질 수 없는 강렬한 작품이다. 아마도 미술사에서 살인의 순간을 이토록 잔인하고 생생하게 묘사한 그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이 그림을 그린 이는 바로크 시대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이다.

 

 

 

 

아르테미시아는 남성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바탕으로 유디트를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해서 그렸다고 한다. 시간이 갈수록 살인의 묘사는 점점 구체화됐고 잔인함의 농도는 짙어졌다. 그러한 그림 속에 담긴 잔혹성은 남성들의 세상에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얻게 된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에 소개된 1612년 로마에서 벌어졌던 그 사건과 이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알고 나니, 왜 그런 그림을 그려야 했는지 이해할 것도 같았다. 그 사건 이후 아르테미시아는 다시는 그 일이 있기 전으로, 순수와 낙관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저 잔인하고 무서운 그림이라고만 생각했던 그림이 그려지기까지의 배경 이야기를 들으니, 작품 자체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페르메이르는 마치 자신의 소명이 일상을 영원으로 가두는 데 있는 것처럼 그림을 그렸다. 말라비틀어진 레몬 껍질, 누렇게 색이 바랜 벽, 컵에 부딪히는 빛, 아무렇게나 놓여진 책들로 조심스럽지만 단단하게 그림을 채웠다. 구체적 일상 속에 깃들어 있는 고유한 생의 순간들과 그 속에 깃든 신비와 감동은 그의 캔버스에서 아름다운 빛으로 충만한 시적 순간이 됐다.    p.139

 

다양한 그림 속 여인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림이 그려진 배경, 화가와 모델의 관계, 역사적 맥락 등 여러 흔적들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이 책에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클로드 모네의 <카미유, 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 에드가 드가의 <다림질하는 여인>, 빈센트 반 고흐의 <슬픔>, 폴 세잔의 <푸른색 옷을 입은 세잔 부인>, 마르크 샤갈의 <생일> 등등 매혹적인 명화들이 수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화를 감상할 때 그림이 주는 분위기나 기법, 색채 등에서 오는 보여지는 면에 치중하게 마련이다. 전공자가 아니라면 작품의 배경을 일일이 알 수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명화가 탄생하게 된 계기와 화가가 활동할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 그리고 그림 속 모델 과의 관계와 뒷 이야기까지 알게 되고 나니, 앞으로는 작품을 감상할 때 완전히 다른 감상을 느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면적으로 바라보고 느끼는 일차원적인 감상에서, 조금 더 깊이 있는 진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술가 주변에서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여인들의 존재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지난 1000년의 여정 속에서 그림 속 많은 여인들이 시대를 넘어 오늘날의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명화를 보면서 '그림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당신은 누구인지' 궁금해 본 적이 있는 당신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그림을 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책을 가이드 삼는다면 그림 속 그녀들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될 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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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이별 열린책들 세계문학 252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김진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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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웨이드 부인." 마침내 내가 말했다. "내 의견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런 일은 날마다 일어나니까. 정말 터무니없는 사람이 정말 터무니없는 범죄를 저지르죠. 인정 많은 할머니가 온 가족을 독살하기도 해요. 단정한 젊은이가 몇 번이나 강도질을 벌이면서 총질까지 해요. 20년 넘게 완벽한 근무 기록을 자랑했던 은행 지점장이 알고 보니 오랫동안 공금을 횡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죠. 그리고 성공해서 인기도 많고 마냥 행복해 보이는 소설가가 술에 취한 채 아내를 때려 입원시키는 일도 있어요.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왜 그런 짓을 하는지는 짐작하기 힘들어요."     p.156

 

이 작품은 15년 전에 6권짜리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으로 출간되었을 때 읽었고, 이번에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로 다시 출간이 되어 정말 오랜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필립 말로> 시리즈는 1939년 <빅 슬립>을 시작으로 <안녕 내 사랑>, <하이 윈도>, <호수의 여인> <리틀 시스터> 그리고 1954년 <기나긴 이별>로 이어진다. 그 뒤로 1958년에 출간된 <Play back>과 같은 해에 집필하기 시작했지만 그가 1959년에 생을 마감하면서 미완성작이 된 <Poodle Springs>가 있다. <플레이백>은 영화 시나리오로 썼다가 영화화되지 못하고 나중에 소설로 고쳐 쓴 것이라 분량도 짧고, 문체도 단순하며, 말로도 좀 가볍게 행동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어 독자들과 평론가들에게 반응이 좋지 못했고, <푸들 스프링스>는 단 네 챕터만 쓰고 이후에 다른 작가가 완성 시켜 한참 뒤에 출간되었다.

 

사실상 <기나긴 이별>이 필립 말로 시리즈의 마지막인 셈인데, 그래서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인 이 작품이 전작들에 비해 페이지 수도 두툼한 편이고, 필립 말로의 개인적인 내면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한다. 아마도 챈들러가 이 작품으로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와의 이별을 보여주려고 작정하고 쓴 것처럼. 사건의 플롯들을 전체적으로 짚어 보자면, 필립 말로가 친구와, 여자와, 의뢰인들과 '기나긴 이별'을 고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필립 말로는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빅 슬립>에 등장할 때 33세의 나이였다. 지방검사 수사관으로 일하다 명령불복종으로 해고 당했고, 사무실을 운영하며 제대로 사설탐정으로서 일하게 되는 것이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하이 윈도>였다. 다섯 번째 작품인 <리틀 시스터>에서는 38세, 그리고 여섯 번째 작품인 <기나긴 이별>에서는 42세로 나온다. 냉소적이고 혈기 넘치던 청년에서 이제는 40대 중년 탐정의 원숙한 모습이 된 것이다. 물론 냉소적이고, 고집 세고, 강자에겐 강하고, 할 말 다하는 시니컬한 모습은 여전하지만 말이다.

 

만약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가 궁금하다면, 그런데 시리즈가 6권이나 되어 고르기가 어렵다면, 바로 이 작품을 읽으면 된다. <기나긴 이별> 한 권만 읽더라도 전설적인 탐정 필립 말로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될 것이다.

 

 

사설탐정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딱히 평범한 날은 아니었지만 아주 특별한 날도 아니었다. 사람이 이런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부자가 될 수도 없는 데다 재미도 별로 없다. 때로는 두들겨 맞거나 총질을 당하거나 유치장에 처박히기 일쑤다. 드문 일이지만 죽기도 한다. 두 달에 한 번씩은 이 일을 그만두고 그럴싸한 직업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리가 제멋대로 흔들거리기 전에. 그런데 그때마다 초인종이 울리고, 내실 문을 열고 대기실로 나가면 새로운 얼굴이 새로운 골칫거리와 새로운 슬픔을 한 아름 안고 나타나서 약간의 돈을 내민다.    p.238~239

 

필립 말로는 고급 클럽 <댄서스> 앞에서 테리 레녹스를 처음 만나게 된다. 그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상태라 함께 온 여자에게도, 클럽의 주차원에게도 무시 당하고 있던 참이었다. 말로는 그를 자신의 집에 데려다 재워줬고 그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가끔 만나며 우정 비슷한 것을 나누는 관계가 된다. 레녹스는 억만장자의 딸과 결혼했다 이혼한 상태였는데, 곧 재결합했다는 소식을 들려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레녹스는 장전된 권총을 들고 와 간밤에 아내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고 말하며 말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말로는 그를 멕시코의 국경 도시까지 차로 데려다 주고, 집에서 그를 기다리던 경찰과 맞닥뜨린다. 하지만 경찰의 무례한 태도와 엄포에 말로는 그들에게 아무런 진술도 하지 않겠다고 버티고, 결국 구치소에 수감되는 신세가 된다. 친구를 밀고한 탐정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이유로, 레녹스를 배신하지 않은 대가로 갖은 고역을 당하지만, 사건이 갑자기 종결되어 버려 석방이 된다. 레녹스가 자술서를 써놓고 권총으로 자살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건은 어쩐지 찜찜한 구석이 있었고, 변호사, 조폭 등 관련자들이 말로에게 사건에서 손을 떼는 것이 좋다는 경고를 하는데, 말로의 고독한 싸움은 계속된다.

 

대실 해밋, 로스 맥도널드와 더불어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레이먼드 챈들러는 8편의 장편소설과 21편의 단편소설을 남겼다.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 로스 맥도널드의 <움직이는 표적>, 그리고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이 하드보일드 3대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들이다. 챈들러의 작품들은 불필요한 수식을 배제한 간결한 문체, 냉혹하고 비정한 현실 묘사, 생생한 거리의 언어로 이루어진 거친 대사들과 시니컬한 유머 등을 특징으로 한다. '말로도 늙어 가고, 독자들도 나이를 먹어 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로는 지나치게 많은 (수상쩍은) 돈을 변함없이 거절하고, 부자들의 허영과 기만을 부러워하지 않고, 어차피 더 강하고 높은 자들에게 굽실거릴 것이 분명한 권력자들의 허세 앞에서 기죽지 않고, 누군가와 가정을 꾸려서 뒤늦게라도 <남들처럼> 살아 보겠다는 희망을 품지 않고, 혼자서, 천천히, 비열한 밤길을 걸어간다.(작품 해설)' 는 표현이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게 아닐까 싶다. 독자들이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를 오랜 시간 동안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고 말이다. 언젠가는 챈들러의 미완성작인 <Poodle Springs>도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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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이 떠난 거리 - 코로나 시대의 뉴욕 풍경
빌 헤이스 지음, 고영범 옮김 / 알마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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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이 팬데믹 시대의 한복판에 있는데 지난 행적을 되짚어보며 내가 그때 이 팬데믹 시절의 어느 시점, 어느 곳에 있었나, 전염의 위험에 노출돼 있었던가 아니었던가, 하는 식으로 생각해보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짧은 기간 동안에 너무 많은 것들이 너무 빨리 변했다. 2020년 달력을 들여다본다... 나는 지구상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랬듯이 1월과 2월 내내 완벽하게 정상적으로 살고 있었다. 헬스클럽에 가고, 1.5킬로미터씩 수영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나는 얼마나 한 치 앞도 못 보고 있었던 건가. 불과 며칠 안에 삶 전체가 완전히 바뀔 수도 있다는 걸 우리 모두 얼마나 모르고 있었던 건가.  p.37~38

 

올리버 색스의 연인으로 알려진 뉴욕의 작가이자 사진가인 빌 헤이스는 팬데믹의 정점을 지나는 도시 뉴욕의 풍경들을 글과 사진으로 포착해냈다. 미국 전체 확진자 수의 3분의 1이 뉴욕에서 나왔을 정도로, 다른 주에 비해 인구 밀도가 높고, 대중교통 이용자가 많은 도시이다. 교통체증도 심하고, 유동인구도 많고, 관광객도 많았던 곳이다. 이 책의 표지 사진이기도 한 8번 애비뉴의 풍경은 2020년 4월 6일에 찍었다. 낮 시간인데도 거리가 턴텅 비어 있고, 가끔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수술용 마스크로 얼굴을 덮고 있다. 저자가 거주하고 있는 18층짜리 아파트 건물도 반 이상이 비었다. 많은 입주민들이 별장으로 떠났고, 젊은 사람들은 부모와 같이 지내려고 떠났고, 몇몇 이웃들은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거의 매일 누군가가 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팬데믹 이후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왔던 많은 일상들이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다시 여행을 하게 될까, 낯선 사람과 악수를 하고, 헬스클럽에 가고, 영화관에 가고, 아무 두려움 없이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를 거닐고, 아무 걱정 없이 마스크를 끼지 않고 밖에 나갈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은 대단한 의지를 가지고 행할 수 있던 것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평범한 일상들의 기억이 까마득하기만 하다. 불과 몇 달 전이었는데도 말이다. 이 책은 코로나의 상처가 가장 큰 도시 뉴욕에서 사태가 시작된 후 백 일까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저자는 한 사람의 삶이 문자 그대로 하룻밤 새에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전하고 싶었고, 지금의 이 끔찍한 상황으로부터 의미 있고, 아름답고, 솔직하고, 보편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당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중인 것 같아.”
“아냐. 안 잃어버렸어. 난 여기 있어.” 내가 말한다.
우린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부두에서 만나기로 한다. 우린 어떤 규칙도 어기지 않는다. 사람들이 걷고, 운동하고, 공공장소 에서 만나는 건 허가된 일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키는 한. 기다리고 기다린다. 마침내 그가 블록 저쪽 끄트머리에서 후디에 코트를 걸쳐 입고 발을 끄는 듯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인다.    p.118

 

발 밑에서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는 마른 풀들을 모아 화환 모양을 만드는 젊은 여자, 위기 상황에 대비해 뉴욕으로 와서 운동 중인 미국육군사관학교의 위생병들, 한 명도 타지 않아 텅 빈 러시아워의 지하철 풍경, 팬데믹 초반 코로나에 걸렸다가 항체가 생겨 연구용으로 혈장을 기부한 뉴욕대학병원의 마취과 레지던트들, 한순간에 동료를 잃은 야외관리업체 직원, 소독제와 장갑을 지닌 채 거리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은 노숙인 등 이 책에 수록된 흑백 사진 속 풍경들이다. 저자가 사진을 찍고, 이 책에 수록될 글을 쓰고 있었던 올해 3월에서 5월 중순 사이의 어느 날, 뉴욕에서는 며칠째 하루에 800명씩 죽어가고 있었다. 사망자들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계급이 몰려 있는 브롱크스와 퀸스 구역에서 나왔다. 800명이라는 수치는 구체적으로 체감되기 어려운 숫자이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도시의 모든 것이 바뀌고 있으며, 우리는 그 혼란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

 

전대미문의 팬데믹 이후 우리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세계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살아있는 동안 삶을 조금씩 잃어버리는 이상한 시절'인 셈이다. 카메라를 들고, 마스크를 쓰고, 손 세정제를 주머니에 넣고, 이 사태의 증인이 되고자 거리로 나선 빌 헤이스의 사진과 글들이 뭉클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바로 그 혼돈의 중심에서 일상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구의 거의 절반이 죽었던 14세기 유럽의 흑사병처럼 언젠가 2020년을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시대로 기억하게 될 거라는 사실이 슬프다. 그래서 더욱 이런 책이 필요하다. 이 시기를 함께 통과하면서 우정과 존중을 나누고, 연대를 모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서로에게 다정한 안부를 건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거기, 당신 잘 지냈나요? 요즘 지낼 만한가요? 그리고 강요된 고독과 고요 속에서, 우리 생애의 어떤 순간들을 돌이켜보자. '말해진 것들과 말하지 않은 것들, 행해진 것들과 행하지 않은 것들, 표현된 사랑과 표현되지 않은 사랑, 네가 받은 그 모든 감사한 일들, 네가 느낀 그 모든 감사함.(p.880' '의지와 노력만으로 언제든지 누릴 수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송두리째 흔들리면서' 불안과 우울의 날들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바로 그런 당신을 위한 안부와 위로를 안겨주는 근사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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