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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열린 책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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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쳐버린 기회, 한마디 말, 몸짓 하나로 인생이 바뀔 수 있다. 모든 걸 망칠 수도, 모든 걸 회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도 그런 말을 하거나 그런 몸짓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떠났고, 그녀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고, 나는 일하러 갔다.   
- '앨버커키의 레드 스트리트' 중에서, p.172

 

십 년 전에 세라는 둔기에 머리를 맞아 무참히 살해당했다. 당시 치과 의사인 애인이 그녀를 죽이겠다고 몇 번이나 위협했었다. 그는 세라보다 열다섯 살 정도 어렸는데, 알코올중독자로 자주 그녀에게 위협을 가한 전력이 있었지만 살해 흉기도, 아무런 증거도 나오지 않아 끝내 기소되지 않았다. 청소부인 나는 원래 매주 화요일에 세라의 아들 에디의 집을 청소했는데, 세라가 죽은 후 에디가 그녀의 집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결국 세라의 집을 청소하게 되었다. 침실을 처음으로 청소한 날에는 너무도 끔찍했는데, 그녀의 피가 튀어 굳은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하다 침대 밑에서 권총과 엽총을 발견하게 된다. 공포로 몸이 얼어붙었지만, 총을 보자 범인을 총으로 날려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새 나는 청소부가 탐정인 드라마 주인공이 되어 버린다. 세라와 친구였던 나는 그녀의 주변 인물들을 많이 알고 있었고, 작정하고 보니 범인인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는 동안 용의자 명단은 계속 늘어났다. 판사, 경찰관에서 유리창닦이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람들이 용의자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나 역시 사건 당일 밤에 대한 알리바이가 없으니 용의자가 되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사실 내가 세라의 죽음에 집착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건 당일에 세라는 여러 차례 나에게 전화해서 애인이 그녀를 위협한다고 말했었다. 비슷한 상황이 너무 많았음에도 그와 헤어지지 않고 끌려 다니는 그녀에게 짜증이 나 있었던 터라 당시 그녀에게 경찰을 부르라는 얘기만 하고 끊었던 것이다. 그때 그녀에게 바로 도움을 주지 못했던 자신에게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죄책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이 책에 수록된 '동생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작품인데, 단 9페이지의 짧은 분량임에도 담고 있는 것들이 풍부해 마치 장편처럼 읽히는 작품이었다.

 

 

오클랜드에서는 날마다 저녁 해가 태평양으로 넘어가면 그건 또다른 하루의 끝을 의미했다. 여행은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살아온 파편적이고 불완전한 직선적 시간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행위다.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과 사건은 소설처럼 우화가 되고 불멸성을 얻는다. 담 위에 앉아 휘파람을 부는 멕시코 소년. 젖소에 머리를 기대는 테스. 그런 정경은 기억 속에 영원히 변하지 않고, 해는 언제까지나 계속 바닷속으로 떨어지는 법이다.     - '초승달' 중에서, p.350

 

이 책은 <청소부 매뉴얼>로 처음 만났던 루시아 벌린의 두 번째 단편소설집이다. 그녀는 평생 77편의 단편소설을 썼는데, 전작에서 43편이 소개되었고, 이번 신작에서 22편을 만날 수 있다. 루시아 벌린은 2004년,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11년 만에 말 그대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등장한 문학 천재라고 불린다. 무명작가였던 소설가 존 윌리엄스가 <스토너>로 사후 20년 만에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루시아 벌린의 작품들은 상당수가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고등학교 교사, 전화 교환수, 병동 사무원, 청소부, 내과 간호보조 등의 일을 해서 네 아들을 부양하는 가운데 밤마다 글을 썼다. 세 번의 실패한 결혼, 알코올중독, 불안정한 생활 반경, 싱글맘으로 네 아들을 부양했던 삶의 경험들이 모두 작품 속에 녹아 들어간 것이다.

 

'사람들은 이따금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때가 무엇무엇의 시작이었다, 라거나 그때, 또는 그 전에, 또는 그 후에 우리는 행복했지, 라고 한다(p.218)' 라는 문장처럼 루시아 벌린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삶을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그녀가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도시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희극과 비극이 뒤섞인 이야기들이 우리의 삶과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모습으로 공감과 이해를 불러오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루시아 벌린 특유의 반짝이는 유머와 통찰력, 담백하지만 아름다운 문장들이 더해져서 근사한 재미를 안겨 준다. '레이먼드 카버의 근성과 그레이스 페일리의 유머에 루시아 벌린만의 독특한 위트를 더한 기적 같은 일상을 만날 수 있다'는 소개 문구를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건져 올린 보석 같은'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면, 루시아 벌린의 작품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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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1~3 세트 - 전3권
류츠신 지음, 이현아 외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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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하늘 아래 서 있으니 갑자기 우주가 작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작아서 혼자만 그 속에 갇힌 것 같았다. 우주는 심장이나 자궁이었고 자욱하게 깔린 붉은빛은 그 안을 채우는 반투명한 혈액이며 그는 혈액 속에 둥둥 떠 있는 듯했다. 불규칙적으로 반짝이는 붉은빛은 심장이나 자궁이 박동하는 것 같았다. 그는 거기에서 인류의 지혜로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하고 거대한 존재를 느꼈다.     - 1권, p.145

 

당신은 인생에서 중대한 이변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당신의 인생을 단숨에 송두리째 바꿔버리고 세상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달라지는 일 말이다. 세상에는 변화무쌍한 요소들이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신의 삶에 그런 이변이 아직 없었다면, 그 삶은 일종의 우연이다. 하지만 행운도 결국에는 끝나는 법이다. 이 작품은 바로 거기서 시작한다.

 

 

 

 

<삼체>는 중국 과학 소설의 3대 천왕이라 불리는 류츠신의 작품으로 아시아 최초로 휴고상을 수상했다. 중국 과학 소설이 국내에 정식으로 번역, 출간된 것이 <삼체> 1권이 소개되었던 2013년이었다. 그리고 2권이 출간된 것은 2016년, 대망의 3권이 2019년에 출간되었다. 게다가 분량 또한 전체 3권을 합하면 거의 이천 페이지 가까이 되는 압도적인 페이지라 엄청난 분량의 압박을 견뎌야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에 개정되어 나온 리커버 세트는 양장본이라 튼튼하고, 고급스럽고, 아름답다. 기존 버전에서 다소 복잡했던 표지 이미지가 이번 개정판에서는 아주 심플하게 디자인되어 인상적이다. 

 

 

 

 

이렇듯 많은 사람이 인류 문명에 철저히 절망해 자신의 종을 증오하고 배반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과 자손을 포함한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은 것이 지구 삼체 운동의 가장 놀라운 부분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이미 인류 외부의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했다. 인류 문명은 자기 내부에 강력한 분열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     -1권, p.357

 

1권에서는 과학자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줄줄이 자살하고, 환경 보호론자들의 활동이 지나치게 왕성해지기 시작하고, 과학 연구 기관과 학술계 범죄가 급증하면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그런데 범죄 동기가 모두 이상하다. 돈이나 복수를 위해서도 아니고 정치적 배경도 없고, 그저 단순한 파괴였던 것이다. 신소재를 연구하는 과학자 왕먀오는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경찰과 군인을 통해 현재 과학계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에 대해 알게 되고, 그것을 조사하던 중 삼체라는 가상현실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세 개의 태양이 존재하는 기이한 “삼체 세계”는 기온이 온화하고 태양 운동이 규칙적인 항세기와 하루에도 혹한과 폭염이 번갈아 휘몰아치는 난세기가 불규칙하게 교차하면서 문명이 멸망하고, 또 새로 시작하고 있었고, 가상현실로만 치부했던 그것이 진짜 현실 세계와 이어지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규모가 커진다.

 

 

 

 

지구 삼체 운동은 인류 문명에 철저히 절망해 자신의 종을 증오하고 배반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과 자손을 포함한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활발히 활동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인류가 이미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광기를 억제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의 힘을 빌려 인류 사회를 강제적으로 감독하고 개조해서 전혀 새로운 문명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인류는 이미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광기를 억제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의 힘을 빌려 인류 사회를 강제적으로 감독하고 개조해서 전혀 새로운 문명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얼핏 사이비 종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지극히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지식들로 중무장되어 있어 그 모든 것들이 너무도 합리적인 결론처럼 느껴진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발전하는 과학문명이 정작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재난을 불러온다면 정말 아이러니 아닐까. 류츠신 역시 여기에 주목한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정상이거나 심지어 정의라고 생각되는 인간의 행위 중에도 전체 생태계에서 볼 때 사악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극중 예원제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살충제 사용은 그저 정당하고 정상적이며 적어도 중립적인 행위일지라도, 대자연의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문화 대혁명과 별 차이가 없다'고. 그것이 세계에 끼치는 폐해는 그만큼 심각한 것이라고 말이다.

 

1960년대 문화 대혁명부터 시작해 텐안먼 사태, 양탄 공정 등 중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거쳐 수백 년 후 외계 함대와의 마지막 전쟁까지 이어지는 '지구의 과거' 3부작 시리즈인 <삼체>가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의례히 SF라는 장르를 떠올렸을 때 상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엄청난 역사 속의 정보가 흘러 넘치는 기이한 가상현실 게임부터, 웬만한 스릴러 뺨치게 숨 막히는 군사 첩보전도 있고, 천체 물리학과 수학이라는 학문의 매우 리얼한 자료들에 현대사의 광기와 폭력, 그리고 격정이 휘몰아치는 시대적인 배경에다 너무도 설득력 있는 외계 문명 탐사에 이르기까지 스펙타클하게 아우르고 있으니 말이다. 류츠신은 작가의 말에서 "과학소설이 다른 환상문학과 다른 점은 그것이 진실과 가늘게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과학소설이 현대의 신화이지 동화가 아닌 것이다" 라고 했다. 나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가 이 작품을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 SF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위대한 소설'이라고 평가 받는 작품의 진면목을 만나 보자!

 

덧. 알라딘에서 <삼체> 개정판 세트 구매시 <삼체> 스테인리스 텀블러를 받을 수 있으니 이번 기회에 세련된 텀블러도 받고, 멋진 표지로 옷을 갈아입은 양장본 박스 세트로 소장하면 더 좋을 것 같다!

 

https://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207046&start=pba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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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디테일 -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한 끗 디테일
생각노트 지음 / 북바이퍼블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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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올 때부터 나갈 때까지 고객의 맥락을 파악해 준비해 둔 디테일이 참 대단해 보였습니다. 물통의 물방울이 떨어질까 봐 수건을 깔고 물통을 올려놓는 섬세함, 다른 손님 때문에 방해되지 않도록 간이 칸막이를 쳐 주는 센스, 갑작스럽게 내린 비에 손님이 당황하지 않도록 우산을 준비해 놓은 배려. 하나같이 감동 포인트였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던 동네의 한 조그만 식당에는 고객을 향한 따뜻한 배려가 가득 놓여 있었습니다.    p.155

 

젊은 마케터이자 기획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도쿄의 모습을 소개했던 <도쿄의 디테일> 생각노트 작가의 신작이다. 이번에는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접점의 도시 교토 편이다. 저자는 2017년 12월 도쿄를 여행하며 발견한 아이디어와 영감에 대한 이야기를 전편에 풀어냈었고, 2019년 2월 교토를 여행하며 곳곳에서 고객에게 감동을 선사하며 감각을 깨우는 디테일들을 발견했다. 거대하고 빠르게 변하는 도쿄와 달리 교토는 작고 고요한 도시이다. 당연히 도쿄의 디테일과 교토의 디테일은 확연하게 달랐다. 도쿄의 디테일이 세련되고, 기발하며, 뜨는 것이었다면, 교토의 디테일은 담백하고, 은은하며, 유지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기획'에 의해 드러나는 디테일과 '태도와 맥락'에 의해 드러나는 디테일을 비교해보면서 읽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저자는 전작에서 '디테일은 결국 전달의 문제'라고 말했다.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또는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잘 파악한 뒤 혜택이 느껴지도록 잘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저자가 순수한 여행객이자 고객으로 받았던 그러한 사소한 배려들을 담고 있어서 누구라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최신 트렌드를 가장 먼저 전달하는 콘텐츠나 여행을 위한 지침서가 아니라고 서두에 밝혀져 있지만, 책에 수록된 장소와 요소, 문화와 트렌드를 읽게 되면 자연스레 교토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것이다. 영수증, 재활용우산, 유심케이스, 신발장의 숫자들, 화장실 실내지도, 껌통 안의 종이 등 정말 사소하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디테일 들이 감동을 안겨주고, 배려와 진심을 느끼게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 제게 '여행법'을 묻는다면 저는 '시간을 버리는 시간'을 갖는다고 말씀드립니다. 물론 각자가 선호하는 여행법이 있으니 제 여행법이 정답은 아니지만, 고객 중심의 사례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버린 채 멍 때리면서 관찰하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합니다. 가이카도처럼 실내를 가득 채운 원목과 식물, 중간중간 놓여 있는 금속공예품들이 조화를 이루는 매력적인 공간이라면 더 많은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p.207~209

 

누군가에겐 보잘것없는 부분일 수 있지만, 누군가는 오로지 그것 때문에 비행기 티켓을 끊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 그게 바로 '디테일'이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디테일에 강한 사람이란 '생각은 정교하게, 행동은 과감하게 하는 사람' 이며, 디테일에 강한 사람이 결국 유능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저자인 생각 노트가 정교하게 생각하고 성실하게 기록한 공부 노트를 담고 있어 디테일 감각이 필요한 마케터, 기획자, 디자이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가 직접 시간을 들이고, 몸으로 경험해 본 디테일들이 가득해 실제 교토에 갈 예정이거나, 교토라는 도시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도 유용한 정보가 되어줄 테고 말이다.

 

교토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사찰 중 한 곳인 기요미즈데라에 있는 골목 구석의 커피 트럭이 고객을 끌어오는 방법, 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입장권 등 그곳을 찾는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아이템들이 인상적이었다. 일본 전통종이를 색다르게 해석해 인기를 끌고 있는 공예품 가게, 뜨개질의 모든 것을 판매하는 로컬 실 브랜드 아브릴의 판매 방식이나 공간 구성, 고객이 직접 뜨개질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아이디어도 흥미로웠다. ‘향기 나는 알람시계’도 기억에 남는데, 시끄러운 소리로 잠을 깨우는 방식이 아니라 향으로 잠을 깨워주는 향기 알람이라니 너무도 신선했다. 후반부에 수록되어 있는  '마케터를 위한 생각노트', '기획자를 위한 생각노트', '디자이너를 위한 생각노트'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각 직업군에 맞게 영감이나 정보가 될만한 부분, 다시 생각해볼 만한 지점을 별도로 수록하고 있어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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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작은 아씨들 (1896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디럭스 티파니 민트 에디션) - 합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박지선 외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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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집 안의 벽난로가 탁탁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타오르는 12월의 어느 해 질 녘에 네 자매는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낡았지만 안락한 응접실에는 빛바랜 양탄자가 깔려 있고 매우 소박한 가구가 놓여 있다. 벽에는 멋진 그림이 한두 점 걸려 있고 벽감에는 책이 잔뜩 꽂혀 있으며 창가에는 국화와 크리스마스로즈가 피어 평온한 가정 특유의 유쾌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p.17

 

<작은 아씨들>은 너무나 다양한 판본으로 출간되었고, 나 역시 여러 판본으로 만나 왔지만 이번에 만난 버전은 너무 예뻐서 소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 스토리의 초판본 시리즈로 나온 이번 버전은 1896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의 디럭스 티파니 민트 에디션이다. 게다가 표지의 은은한 민트 컬러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은장 에디션이다.

 

 

특별한 점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오리지널 일러스트를 수록한 특별판이라는 것이다. 고전 작품에서는 삽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 높은 편이었다. 현대의 작품들에서는 에세이가 아닌 소설 작품에 삽화를 넣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이 작품을 통해서 삽화가 이야기에 어떻게 채색을 하는지 느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1896년 판본의 오리지널 일러스트라서, 당시의 시대상과 분위기들을 물씬 느낄 수 있다. 150여년의 시간을 넘어 여전히 현대의 독자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고전의 매력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일주일 동안 마치 가족의 낡은 집에는 선함이 넘쳐흘러 이웃에 나눠줄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 놀라웠다. 모두 천국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마음가짐으로 행동했고 자제력을 발휘하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다. 하지만 맨 처음 아버지 소식을 듣고 걱정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안도하게 되자, 그동안 칭찬받아 마땅할 정도로 노력하던 자매들은 차츰 긴장을 풀고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좌우명을 잊지는 않았지만 희망을 품고 바삐 움직이자는 다짐은 점점 느슨해졌다. 게다가 엄청난 노력을 하고 난 뒤라 그 정도로 애썼으면 쉴 자격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껏 쉬었다.     p.366

 

<작은 아씨들>은 1868년 처음 발표된 이래, 수 차례 영화로 리메이크되며 오래도록 사랑 받고 있는 작품이다. 자매들에겐 의지가 되는 큰언니이자 엄마에겐 믿음직한 큰딸인 메그,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자매들 중 가장 개성이 강한 작가 지망생 조, 몸은 허약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넓은 셋째 딸 베스, 그리고 아름답고 귀여운 용모에 다소 엉뚱한 면도 가지고 있는 사랑스런 막내 에이미. 마치 가문의 사랑스런 네 자매 이야기는 지금 읽어도 여전히 아기자기하고, 소소한 재미를 안겨 준다. 메그는 허영심이 살짝 있지만 책임감이 강하고, 작가를 꿈꾸는 조는 매우 열정적인 스타일이었고, 베스는 얌전하고 속이 깊었으며, 막내 에이미는 사고뭉치이기도 하다. 이들 네 자매의 일상은 잔잔하게 흘러가기도 하고, 좌충우돌 사건들이 이어지기도 하며 다채롭게 펼쳐진다.

 

 

외모도, 성격도 너무 다른 네 자매가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언제 다시 꺼내 읽어도 설레이는 마음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그리고 어른이 된 지금의 나에게 여전한 재미와 소소한 기쁨을 안겨주는 작품이니 말이다. 특히나 이 작품은 어린 시절에 읽었을 때보다 지금 다시 만났을 때 더 와 닿고, 공감하게 만드는 부분이 분명 있다. 내가 잊고 살고 있던 무언가를 깨닫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1860년대 남북전쟁 중의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간접체험을 하게 해준다. 내가 절대로 경험해볼 수 없는 시대의 공기를 느낄 수 있게 해주고, 더 이상 존재하지 시간을 넘어 그곳에,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고전 문학의 힘일 테니 말이다.

 

이 작품은 출간 당시에도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비평가들에게는 그저 감상적인 소설로 평가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 여전히 살아 숨쉬는 문학으로서 우리 곁에 이 작품이 있다는 점만 보아도 그 가치는 충분히 인정받을 만 할 것이다. 이 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도 너무나 유명해서 누구나 다 아는 캐릭터들과 이야기이지만, 이번 기회에 이 멋지고 특별한 에디션으로 원작 소설을 읽어 보면 어떨까. 150여 년의 시간을 넘어 여전히 사랑 받는 고전의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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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고 아리고 여려서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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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리고 아려서 차마 마주볼 수 없는,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을 노력이나 신념으로 이루려 하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수함, 하지만 그게 가슴에 아리게 느껴지는 것은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녀를 이른바 '관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거의 그런 나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단순히 멀리서 바라보는 것뿐이라면 유유히 바보구나, 라고 넘겨버리면 끝날 일이다. 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그 순수함을 마주하자 내 쪽에서 그녀를 무시한다는 것은 적어도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p.24~25

 

대학 신입생 다바타 가에데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는 것도, 자신이 상대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도 싫어 되도록 타인에게 다가가지 않고 대학 생활을 보내기로 마음 먹는다. 수강 신청도 끝이 나고 드디어 본격적으로 강의가 시작되는 날, 일반교양 과목인 '평화구축론' 시간이었다. 의욕과는 달리 금세 따분하게 느껴지는 강의라 창문 너머를 내다 보던 중이었는데, 그를 비롯한 학생들을 집중하게 만든 것은 한 여학생이 강사에게 질문하는 목소리였다.

 

 

"이 세계에 폭력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로 시작된, 질문이라는 형식만 빌린 그녀의 주장은 초등학교 도덕 시간에나 나올 듯한 이상론이어서 듣고 있는 이들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든다. 가에데는 그녀를 보며 '세상에 저렇게 자신감 과잉에 바보같이 순진하고 둔감한 사람도 있구나' 싶어 어이없어 한다. 하지만 가에데는 먼저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는 야박한 짓은 못하는 성격이라, 어쩌다 보니 문제의 여학생, 아키요시와 말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어 버린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채로 어느새 그녀를 만나고 두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그러다 보니 아키요시의 번거로움 속에서 한 가지 순수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되고 나니 자신이 먼저 그녀를 무시한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렇게 친구로서 관계를 이어가다 보니 점점 그녀에게 휘말려 거창하게도 세계 평화를 위해 지금 당장 모든 무기를 내려놓자는 동아리 ‘모아이’를 결성하게 된다. 단둘만의 비밀결사로 시작했던 모아이는 가에데가 4학년이 되어 한창 취업활동으로 바쁘게 다닐 때 즈음에는 규모도 커지고 취업용 인맥 쌓기 동아리로 변질되고 만다.

 

 

지금의 모아이는 범용한 인간들이 취업 활동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도록 철저히 '나 자신이 아닌 것'을 가르치고 있을 뿐이다. 세속에 영합하고 자기 자신에게 베이킹파우더를 섞어 한껏 부풀리는 방법. 이상적인 나 자신을 지향하는 것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그 자체를 모두 부정하려는 건 아니다. 나 역시 그렇게 했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그런 자세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원래의 모아이가 아니다, 라는 것뿐이다. 백 명 단위의 강의실에서 단 한 명의 특출한 개성이었던 그 친구가 이상으로 삼고 만들었던 그 조직이 아니다.    p.196

 

현재의 모아이는 설립 멤버가 없어진 지금도 여전히 그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처음에 생각했던 조직과는 완전히 형태가 달라져 학교 안에서 득세하는 거대 단체가 되어 버렸다. 가에데는 취업활동으로 인해 파김치가 되어 있다가, 최종 면접을 보고 온 한 회사로부터 합격 소식을 전해 듣고는 그제야 잊고 있었던 모아이에 대해서 생각한다. 처음의 이상과는 너무도 멀어져 버린 왜곡된 단체를 없애고, 다시 한번 이상이 머무는 곳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모아이에서 밀려난 이후 그쪽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던 가에데는 악의 단체와 싸우는 비밀결사라도 된 듯 모아이와 싸워 보기로 한다. 과연 졸업 전에 그는 '이상을 추구하는 순수한 동아리'를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

 

이 작품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화제의 데뷔작을 썼던 스미노 요루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그는 데뷔작이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키던 시기에 이 작품을 처음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인공이 거대해진 모아이를 향해 투쟁에 나서는 것처럼 자신의 데뷔작에 대항해서 그 작품에 감동한 독자를 포함한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싶었다고, 작품의 의도를 밝히고 있다.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아이였을 때 가지고 있었던 순수함을 잃어 버리고, 대신 세상살이에 필요한 처세술을 배우게 된다. 그러니 대학 생활이라는 것이 아마도 그 순수성을 간직하게 되는 가장 마지막 시기가 아닐까. 졸업 후 취업을 하게 되면서 마주하게 되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어른'이 되기 위해 이상 따위는 점점 자취를 감추게 마련이니 말이다. 청춘의 찬란함과 잔인함을 치열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도 한때 있었을 그 순수함과 우리가 이미 겪고 지나온 그 시절을 다시 한번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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