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 여섯 개의 세계
김초엽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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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내 머리를 스친 그 희망의 크기는 너무나도 거대해 내 뇌와 몸이 감당할 수 없었다. 그 대부분이 허망하게 끝날 것이며 우리는 곧 붉은 점으로 가득한 시체가 되어 끓는 바닷물 속에서 삶아질 것임을 알고 있는데도 그랬다. 하지만 우리는 그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내가 지금 빙산에서 발견한 종이와 연필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나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빙산의 꼭대기에 앉아 얼음 속에서 꺼낸 갈색 덩어리를 먹으며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으리라는 희망의 가능성에 의지해 이 글을 쓴다.      

- 듀나, '죽은 고래에서 온 사람들' 중에서, p.69

 

이곳은 바다의 행성이었다. 대륙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낮 대륙은 모래사막이었고 밤 대륙은 얼음 사막이었기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곳은 바다뿐이었다. 바다에서 살기 위해 사람들은 떠다니는 거대한 섬인 고래 등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고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의 고래와는 닮은 구석이 전혀 없는 생명체로, 폭은 1~2백 미터, 길이는 7백 미터에서 1.5킬로미터에 달했다. 사람들은 고래 위에 집을 세우고, 주변 바다에 농장을 만들고, 그곳에서 아이들을 낳고 교육하며 언젠가 다른 별과 통신할 수 있는 미래를 꿈꾸며 3천 년을 버텨왔다. 그들의 고래는 수백의 개체가 모여 만들어진 군체였고, 개체가 하나씩 늙어 죽어가도 절은 개체가 그 자리를 채웠다. 하지만 개체가 죽는 속도보다 새 개체가 들어오는 속도가 더 느리면 고래는 완전히 죽어 분해되었고, 그 위에 있던 마을은 멸망했다. '고래병'이라 불리는 전염병으로 인해 고래들이 죽어 나갔고, 죽은 고래를 떠나 새로운 터전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이 이야기는 듀나의 '죽은 고래에서 온 사람들'이다. 각각의 작품들 끝에 '작가 노트'가 짧게 수록되어 있는데, 초광속 우주선을 타고 은하계로 진출하는 인류를 그려보고자 했던 듀나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멀리서 보면 인류는 바이러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의 유전자를 복사해 최대한 많이 전파하려는 작은 로봇들." 이라고 했는데, 어쩐지 오싹하지만 너무도 공감되는 말이었다. 김초엽과 듀나는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팬데믹'이라는 현실을 뛰어 넘어 지구 너머 멀리 가는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정소연과 김이환은 팬데믹의 상황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전염의 공포와 확진 이후의 삶을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가장 지금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배명훈과 이종산은 약 백여 년 이후를 설정해 상상해 현실을 통과해 미래로 이어지는 과도기를 모두 담아내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포포에게 가족이란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위해주는 따뜻하고 힘이 되는 사람들인 동시에 삶을 외롭게 하는 타인들이다. 가족들조차 타인이니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무이는 포포의 삶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결혼한 뒤에도 그 불씨가 꺼지지 않을 수 있을까?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포포는 도망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다... 때로는 바깥과 자신의 연결을 끊고 완전히 혼자가 되는 게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막막한 외로움에서 헤어날 수 있게. 내면에 집중하면 혼자라는 사실이 외롭기보다는 편하게 느껴진다.     

- 이종산, '벌레 폭풍' 중에서, p.183~184

 

언젠가는 이 지긋지긋한 팬데믹 상황도 끝이 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시기가 까마득하기만 하다. 최소한 1~2년 이상 길어질 것 같다는 전망도,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고 있다는 소식도 지금의 현실을 버텨내기엔 그다지 희망적으로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다. 누군가 '세계는 이제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로 구분될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세계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왔던 많은 일상들이 대부분 사라져버렸고, 불과 몇 달 사이에 도시의 모든 것이 바뀌고 있으며, 우리는 그 혼란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 코로나가 장기화 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외출을 하지 못하거나 타인과의 교류가 줄어든 사람들이 답답함과 우울함을 느끼며 코로나 블루를 호소하고 있는 세상. 그 속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것들 중에 소설만큼 쉬운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소설 속에서는 공간의 제약도, 시간의 제약도 벗어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김초엽, 듀나, 정소연, 김이환, 배명훈, 이종산 소설가의 개성 넘치는 SF 단편 앤솔러지이다. ‘전염병’을 테마로 한 이 소설들은 멸망Apocalypse, 전염Contagion, 뉴 노멀New Normal 챕터에 각각 두 편씩 묶였으며, 솔직한 고민과 든든한 응원을 담은 작가 노트도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멸망Apocalypse의 순간에도 끝내 사랑하고 꿈꾸는 자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들로 채워진 김초엽과 듀나의 작품. 전염Contagion의 충격 속에서 변화하는 인간의 일상과 관계를 들여다보는 정소연과 김이환의 작품. 새로운 관습과 질서가 자리 잡은 뉴 노멀New Normal의 시대, 약 백여 년 이후를 설정해 상상해보는 배명훈과 이종산의 작품. 이렇게 여섯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낯선 세계를 사는 사람들의 익숙한 이야기, 신인류의 여섯 세계를 만나 보자. 지금의 우리에게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 소설이 우리를 구원해 줄 거라는 희망을 발견하게 될 테니 말이다. 게다가 이것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우리에겐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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