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지나간 세계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부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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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의 정년퇴직이 인생의 정년퇴직이란 건 너무 슬프지 않나요? 분명히 제게서 일을 빼면 아무런 장점도 없습니다. 이렇다 할만한 취미도 없고, 당장 하고 싶은 일도 없지요. 그런 인간은 이미 존재 가치가 없는 걸까요? 그렇다면 적당히 일하면서 노후를 위해 취미나 꿈을 남겨 둘 걸 그랬군요. 하지만 제게는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한탄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운명에 거역해 봤자 어쩔 수 없지만 내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p.93

 

예순다섯이 된 다케와키는 이번에 정년퇴직을 하게 되면서 회사에서 준비해 준 송별회가 끝나 후배들의 배웅을 받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지하철 안에서 쓰러진다. 현재는 뇌출혈이 심하고 혈압도 높아서 수술을 할 수 없는 상태로 집중치료실에 있는 상태이다. 그는 모범생인 초등학교 반장이 그대로 어른이 된 것처럼 결벽적인 성격으로 고지식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다. 회사 동기가 본사 사장이 되어도 질투심은커녕 자기 일처럼 기뻐했고, 그러면서도 뭔가 도움이 받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의 바로 그런 성격, 중요한 순간에 고집스러울 만큼 양보하지 않는 결벽함을 사랑했다. 평소와 다름 없었던 남편과의 아침을 떠올리며, 퇴직 후 부부가 함께할 시간은 앞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남편은 정말로 죽는 게 아닐까, 아내는 생각한다.

 

병실에 누워 있는 다케와키에게 입사동기인 사장, 아들 같았던 사위, 오랜 죽마고우 친구가 찾아 온다. 방문객들이 저마다 다케와키를 추억하며 다녀간 뒤, 늦은 밤 의식이 돌아온 그는 자신이 어떻게 병원에 실려 왔는지를 떠올린다. 침대 옆 간이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어 아내일까 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이 많은 할머니였다. 자신을 '마담 네즈'라고 소개한 할머니는 아내가 오늘은 댁에 가서 자고 있다며, 다케와키가 꼬박 사흘간 잠들어 있었다고 말해준다. 창 밖으로는 눈이 내리고 있는 밤, 마담 네즈는 맛있는 걸 먹으러 밖으로 나가자고 말한다. 그들은 병실을 빠져나가 도쿄의 밤 풍경을 바라보며 고급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이후 그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과 한여름의 바닷가를 거닐기도 하고, 옆 침대 환자와 같이 목욕탕에 가고, 포장마차에서 따뜻한 정종도 마신다. 다케와키가 겪는 이 모든 것들은 환상이나 환각인 걸까? 아니면 그의 영혼이 육체를 빠져 나와 어딘가로 가기 위한 과정인 걸까?

 

 

내 꿈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소원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내가 그토록 되고 싶었던 평범한 사람 쪽에서 보면 그런 꿈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콤플렉스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할까 봐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평범한 사람이 되도록,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도록.
"제 꿈을 들어 보시겠어요?"
지하철이 다시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을 때, 나는 독이라도 토해 내듯 말했다.   p.353

 

이 작품은 아사다 지로가 2016년에서 2017년까지 1년간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서 연재한 이야기로 '아사다 지로 감동 문학의 결정판'이라는 평을 받았다. 나오키 상을 받았던 <철도원>에 수록된 단편이 국내에는 '파이란'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도쿄에서 고도 경제 성장기를 통과하며 자라 대기업에 근무하다가 정년퇴직을 맞이한 평범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아사다 지로 본인의 삶과도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주인공 다케와키처럼 고도 경제 성장기를 거치며 자랐고, 이른 나이에 부모를 잃은 뒤 남의집살이를 하며 성장했으니 말이다. 작가는 주인공을 '같은 교실에, 같은 직장에, 같은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사람 중에 있었던 인물'로 그리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만큼 다케와키의 삶은 주위를 둘러 보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을 법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밤늦게 퇴근해 녹초가 될 만큼 지쳐서 기절한 것처럼 잠들고, 아침에는 귀찮아하지도 않고 벌떡 일어나 직장으로 향했던', '매일 아침 똑같은 지하철의 똑같은 칸을 20년간 탄' 그런 삶을 살아 가고 있는 것은 수많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니 말이다.

 

소소한 취미 하나 가질 생각도 못한 채 회사와 집만 오가며 살아온 다케와키는 이제야 깨닫는다.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에 평온한 안식 같은 시간은 없었다는 것을, 그렇게 계속 전쟁터에 있어 왔기에 정년퇴직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진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다시 살아나 병원에서 나갈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이후에 어떻게 하면 새로운 인생을 얻을 수 있을까? 이제는 결승점에 도착해 그 자리에 멈춰 섰는데,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렇다 할 취미도,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도 없는 그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당신은 참 열심히 살았어요."

 

극 중 마담 네즈의 한마디에 다케와키는 마음이 흔들린다. 이는 어쩌면 작가가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싶다. 다케와키가 경험하는 이차원의 세계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잇달아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과거와 상처를 들여다보고 치유해주는 특별한 시간이 되어주기도 한다. 꿈도, 망상도 아닌, 현실처럼 느껴지는 그 모든 과정이 그리고 있는 이야기는 쓸쓸하면서도 뭉클했다. 아사다 지로의 30년 문학 인생을 관통하는 주제인 '인간의 선의'에 대한 믿음과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한 메시지가 빛을 발하는 작품이었다.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겨울을 통과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가 되어줄 만한 작품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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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곤충도감 - 150여 종 이유가 있어서 살아남았습니다
이즈모리 요 그림, 곽범신 옮김, 스다 겐지 외 감수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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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는 다양한 동물이 살고 있다. 포유류, 조류, 파충류, 양서류, 어류, 곤충류 등이다. 그 중 포유류가 약 6,000종, 조류가 약 9,000종이고, 곤충은 약 1,000,000종에 달한다. 지구상의 생물 중 약 4분의 3이 곤충이라는 말이다. 게다가 이 100만 종도 과학자들에게 정식으로 확인 받아 이름이 붙여진 숫자이고, 해마다 약 3,000여종의 신종 곤충이 꾸준히 발견되고 있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곤충의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생활 방식'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곤충은 약 4억 년 전에 탄생했다고 한다. 공룡이 탄생하기도 훨씬 전에 나타난 이 작은 존재들은 살아남기 위해 적응과 진화를 되풀이하며,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를 거쳐 현재까지 인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사실 동물에 비해서 곤충들은 그 크기가 너무 작아서 일상에서 무심코 알아차리지 못한 채 함께 생활하곤 한다. 숲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곤충들 외에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파리나 모기 들도 우리 들이 모르는 곤충들의 작은 세계에 속하는 생명체들이니 말이다.

 

세상을 지택하고 있는 가장 작은 존재들인 곤충은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고 해로운 생물의 수를 조절하고 식물의 종자를 퍼뜨린다. 그리고 인간에게 필수적인 꽃가루받이, 유기물 분해, 토양 형성에는 곤충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니 곤충은 이 세계가 돌아가게 해주는 자연의 작은 톱니바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만약 곤충이 사라진다면 식물은 싹을 틔우지 못하고, 동물은 먹이가 사라지고, 낙엽이나 나무가 분해되지 못해 숲은 죽음의 산으로 변할 테니, 그런 환경에서는 인간도 살아갈 수 없다.

 

 

곤충계의 천하장사인 '헤라클레스장수투구벌레', 성미가 사납고 끈질긴 종합격투기 선수 '코카서스투구장수풍뎅이', 로켓의 원리로 엄청난 고온의 방귀를 분사하는 '폭탄먼지벌레', 특제 산소통으로 물속을 차지하는 '물방개', 5밀리미터의 몸으로 4미터나 되는 집에서 지내는 '짱구개미', 수명이 10년 이상으로 꽤나 장수하는 '흰개미', 눈을 깜빡이는 속도보다 빠르게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집파리', 코끼리에게 밟혀도 끄덕 없을 만큼 딱딱한 곤충인 '별박이보석바구미' 등등... 익숙한 곤충도 있고, 처음 이름을 듣게 되는 곤충들도 있었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150여 종의 곤충들은 모두 귀여운 일러스트와 함께 소개되어 있어, 곤충에 대해 거부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곤충들에 대한 특징과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소개되어 있고 '어마무시 등급'이라고 해서 힘, 기교, 속도, 기술 방어력에 대한 도표가 각 곤충마다 표시되어 있다. 곤충들을 꼭 게임 캐릭터처럼 소개하고 있어 아이들이 더 호기심 있게 살펴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등급 별로 ‘살짝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해’, ‘꽤나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해’, ‘완전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해’로 구분되어 있으니, 누가 더 힘이 세고 무시무시한지 바로 알 수 있어 더 재미있을 것이다. 별도로 곤충 등급 카드가 수록되어 있어서 책을 다 읽고 나서 곤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놀이를 할 수도 있다. 가지고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곤충의 특징을 익히기에도 좋을 것이다. 놀랍고, 신기하고, 흥미진진한 곤충들의 세계를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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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삶과 책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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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이렇게 표현할까요. 소설이란 쓸 때나 읽을 때나, 상상력의 행위라고요. 판타지는 결국 가장 오래된 서사 방식이며, 가장 보편적인 서사입니다. 소설은 경험 없는 사람에게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최고의 수단을 제공합니다. 아니, 소설이 경험보다 훨씬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소설은 감당할 수 있는 크기에 이해할 수 있는 허구인 반면 경험이란 그냥 사람을 뭉개고 지나가서 수십 년 후에야 그게 어떤 일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이해하면 다행이죠. 소설은 사실에 기반한 심리적 도덕적 이해를 제공하는 데 탁월해요.     p.46~47


 
이 책은 어슐러 르 귄이 2000년부터 2016년에 걸쳐 쓴 강연용 글, 에세이, 서평, 서문, 그리고 1994년 여성 작가들만의 칩거처 '헤지브룩'에서 창작을 하며 보낸 일주일의 기록을 담고 있다. 지난 번에 만났던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에 비해서 조금 더 책과 관련된 글들을 수록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2010년부터 5년 동안 블로그를 통해 남긴 40여 편의 글이 르 귄의 세심하고 담백한 유머, 늙음과 삶에 대한 사려 깊은 사색들로 개인적인 부분이 강했다면, 이번 신작은 작가로서의 목소리가 더 드러나 있다.

 

평소에 서평을 찾아 읽는 편은 아닌데, 작가가 쓴 서평은 흥미롭게 읽는다. 작가들이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고 쓰는 서평은 줄거리 요약이나 감상평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글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르 귄의 서평들이 꽤 많이 수록되어 있어서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도덕적 혼란>, 로베르토 볼라뇨의 <팽 선생>, 이탈로 칼비노의 <완전판 우주만화>,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 도리스 레싱의 <클레프트>, 돈나 레온의 <서퍼 더 리틀 칠드런>, 데비비드 미첼의 <뼈 시계>, 조 월튼의 <타인들 속에서> 등등 이미 읽어본 책도 있고, 그렇지 않은 책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르 귄은 '서평은 흥미롭고 부담스러운 글'이라고 말한다. '서평을 읽을 때는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글이 최고지만, 잘 쓰고 잘 맞는 악평도 귀하게 여긴다며, 형편없는 책에 대한 죽여주는 평을 읽으면 죄책감 없이 즐겁다'고 한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공감할 것이다.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지만, 거짓말이 아니에요. 소설은 사실 파악이나 거짓말이 아닌 다른 층위의 현실로 넘어가죠. 상상과 소망 충족의 차이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요, 둘 다 글쓰기에서나 삶에서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소망 충족은 현실에서 잘라 낸 생각이고, 어린아이 같을 때가 많지만 위험할 수 있는 방종이에요. 상상은 아무리 마구잡이일 때라 해도 현실과 떨어져 있죠. 상상은 현실을 알고, 현실에서 출발하고, 돌아가서 현실을 풍성하게 만들어요.    p.192

 

2002년 오리건 문학 예술 모임에서 한 강연에서는 '상상력이 인류가 가진 가장 유용한 도구'라는 말이 기억에 남고, 2005년의 강연에서는 '판타지가 결국 가장 오래된 서사 방식'이라는 점을 배운다. 2008년 하퍼스에서 발표한 글에서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며, 내구성이 있고, 무한히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가치재'로서의 책이라는 물건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고, 2013년 창작 문예 축제의 강연에서는 작가가 '거의 평생을 보낸 방법, 이야기 지어내기'에 대한 소중한 팁들을 배웠다. 르 귄이 쓴 책의 서문들을 모아 놓은 장도 흥미로웠다. '감탄스럽지 않은 책에 서문을 쓰거나, 강한 흥미를 느끼지도 않는 작가에 대해 길게 쓰거나 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으므로,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작가가 어떤 소설을 좋아하는지,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에 수록된 일주일의 기록은 작가의 창작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일기 같은 글이라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었다. 그전에는 어떤 종류의 작가 집단 거주지에도 살아 본 적이 없었던 르 귄에게 그 일주일의 시간은 '인생에 한 번뿐인 놀라운 선물'이었다고 한다. 일주일 동안 장보기도, 청소도, 저녁식사 준비도 없이 매일 온종일, 하루 24시간 이상 혼자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니 말이다. 르 귄은 그 시간 동안 산책을 하고, 미뤄둔 독서를 하고, 중편 하나를 쓴다. 이 책에 수록된 모든 글들이 너무도 근사했다. <어스시 연대기>를 비롯해 어슐러 르 귄의 대표 작품들만큼이나 훌륭한 산문집이 아니었나 싶다. 판타지 소설 장르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어슐러 르 귄의 작품을 읽어 보지 못했더라도 상관없다. 당신이 소설을 사랑한다면, 책이라는 존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이 작품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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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허밍버드 클래식 M 4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윤도중 옮김 / 허밍버드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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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큰 감명을 받는지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종종 이야기를 하다가 중요하지 않은 세세한 부분은 내가 지어내기도 하는데, 같은 이야기를 다시 들려줄 때 그것을 잊어버리고 빼먹으면 아이들이 즉각 먼젓번에는 달랐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이제는 이야기에 멜로디를 붙여 틀리지 않고 실타래에서 실을 뽑아내듯 줄줄 암송하려고 연습한다. 이 일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 작가가 원래 이야기를 고쳐서 개정판을 낼 경우 개정판이 설령 문학적으로 제아무리 개선되었다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원작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이다.    p.89

 

감수성 풍부한 청년 베르테르는 도시에서 한 시간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발하임이라는 마을에 갔다가 한 여인에게 첫눈에 반하고 만다. 그녀의 이름은 로테로, 이미 알베르트라는 약혼자가 있는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트르는 이 사랑스러운 여인에게 완전히 마음을 사로잡히고 만다. '그토록 총명하면서도 그토록 소박하고, 그토록 심지가 굳으면서도 그렇게도 너그럽고, 참된 삶을 살고 활동하면서도 영혼의 평온을 유지한다'고 그녀에 대해 표현하며 천사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을 정도니 말이다. 이야기 전체가 서간체 형식으로 베르테르가 절친한 벗에게 편지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고 있어, 실제로 로테가 어떤 여인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저 사랑에 빠진 베르테르의 눈에 비친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을 뿐이니 말이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상대가 단 한 번 바라봐 주는 눈길을 간절히 원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이렇게 이미 다른 짝이 있는 상대를 홀로 사랑하고 있는 경우에는 그 간절함이란 더할 나위 없이 목마를 것이다. 그러한 열망은 로테의 눈에서 자신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읽을 수 있었다고 자신하며 점점 그녀를 향한 감정을 키우도록 만든다. 이 세상에서 사랑만큼 인간을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로테 역시 자신을 잃고 싶어 하지 않는 듯 보인다고 생각하는 베르테르에게 절망과 고통, 불행의 감정들이 휘몰아치듯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그토록 찬란한 사랑의 감정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극단적인 선택을 강행하게 된다.

 

 

 

베르테르가 그 불행한 사람을 구하려는 헛된 시도는 꺼져 가는 불꽃이 마지막으로 반짝 타오른 것과 같았다. 그는 더욱더 깊이 고통과 무기력 상태로 빠져들기만 했다. 게다가 이제 범행을 부인하고 나서는 그 사람의 반대 증인으로 어쩌면 자기를 소환할지 모른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기이한 감정, 사고방식, 끝없는 열정에 온몸을 맡기고 그 사랑스럽고 사랑하는 여인과의 서글프고 단조로운 교제를 일방적으로 끝없이 이어 가면서 그녀의 마음의 평화를 깨트리며 목표도 가망도 없이 기력을 소모하면서 점점 더 슬픈 종말에 다가갔다.     p.180~181

 

주요 뮤지컬과 오페라에 바탕이 된 서양 고전 문학들을 엄선한 <허밍버드 클래식 M>시리즈 중에서 먼저 만나본 것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이 작품은 여러 판본으로 꽤 여러 번 읽어 보았고, 뮤지컬로 만들어진 작품도 오래 전에 보았던 기억이 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스물 다섯 살의 청년 괴테가 7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 폭풍처럼 써 내려간 작품이다. 이미 약혼자가 있던 여인을 사랑한 자신의 경험과 남편이 있는 부인을 사랑하다가 자살한 친구의 이야기를 토대로 쓰였다. 1774년 출간 당시 젊은 세대에게 큰 공감을 얻어, 작품 속에서 베르테르가 입었던 옷이 인기를 끌고, 베르테르를 모방해 자살 신드롬까지 생겨났다.

 

사실 너무 유명한 작품이고,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장르로 아직도 변주되고 있는 작품이라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조차도 내용과 배경에 대해서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괴테의 시적인 문장들은 원작을 통해 직접 만나는 것과 내용만 알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고전치고는 가벼운 분량에다, 딱딱하고 어려운 내용도 없고 진입장벽도 없다. 게다가 사랑을 이루지 못해서 기어코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되는 한 젊은이의 상심은 가볍게 연애하고, 쉽게 이별하는 요즘의 사랑법과는 다르게 너무도 우아하고, 순수하게 느껴진다. 뮤지컬 베르테르를 좋아한다면, 이번 기회에 고전 원작의 매력에 빠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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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허밍버드 클래식 M 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한에스더 옮김 / 허밍버드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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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야 상관없겠죠. 남자의 이름은 하이드였습니다."
"자네가 보기엔 어떤 사람이었나?"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겉모습이 이상하고 쳐다보기만 해도 불쾌하고 역겨웠습니다. 그렇게 혐오스러운 인상은 처음인데 이유를 정확히 알 수도 없고, 어딘지 모르게 기형이라는 느낌도 강하게 들었습니다. 아주 특이하게 생겼지만 어디가 이상한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질 못하겠어요. 그렇다고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도 눈앞에 서 있는 것처럼 생생하거든요."       p.17

 

사람들이 모두 잠든 고요한 거리, 키가 작은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열 살 정도의 어린 여자아이가 힘껏 달려 길을 건너오다 그 남자와 부딪히고 만다. 그런데, 남자가 넘어진 아이를 태연하게 짓밟다가 그냥 가버리는 게 아닌가. 아이는 쓰러져 일어나지도 못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 장면을 목격한 남자가 달려가 남자의 뒷덜미를 잡아 현장으로 데려왔지만, 그는 태연하고도 냉혹한 모습으로 그를 쳐다본다.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이 말이다. 사람들은 아이의 가족에게 줄 위로금을 요구했고, 그는 수표를 꺼낸다. 그런데 수표에 서명되어 있는 이름은 신문에도 자주 나올 정도로 유명한, 훌륭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유복한 가문에서 태어나 현명하고 선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아온 지킬 박사. 그에겐 남들이 모르는 단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쾌락에 쉽게 빠진다는 거였다. 그는 스스로 세운 높은 이상에 갇혀 병적인 수치심으로 욕구를 숨겨 왔지만, 인간의 두 가지 본성인 선과 악을 가르는 실험을 통해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하이드를 발견한다. 도덕적이고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지킬 박사와 괴물 같은 외모로 오로지 쾌락만을 추구하는 하이드가 동일 인물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드는 지킬 박사가 가지고 있었던 제2의 자아임에는 분명하다. 결국 하이드의 힘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마침내 지킬의 영혼을 잠식하게 되는데...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이중성을 발견한 것도 도덕적인 나였지. 하지만 두 가지 본성 중 어느 한쪽만이 진정한 나라고 인정하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 역시 그 둘 모두가 진정한 나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네. 의학적 발견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부터 나는 기대에 차 있었지. 내 안에 존재하는 두 자아를 분리하게 될 기적이 가능하리라 믿으면서 기뻐도 했고. 두 개의 나를 두 개의 전혀 다른 자아에 가둘 수만 있다면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리라 나 자신을 설득했네. 사악한 나는 정직한 내가 느끼는 죄책감을 잊고 자유로이 살 테고, 정직한 나는 기꺼이 선행을 베풀며 정상을 향해 안정적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나.    p.102~103

 

대부분의 고전이 그러하지만, 이 작품 역시 원작보다는 다른 매체를 통해 먼저 만나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만큼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영화와 뮤지컬, 연극, 오페라 등을 통해 수없이 변주되어 온 작품이니 말이다. 누구나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 외에 또 다른 면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두 인격은 다소 극단적인 모습이긴 하지만, 선과 악이라는 대비를 보여주기에 이만큼 매력적인 선택도 없었을 것이다. 타락을 향한 욕망으로 터질 듯한 내면을 철저히 억누른 채 겉으로는 점잖은 척 교양과 아량을 두른 지킬의 이중적 면모를 분열된 두 인격 간의 갈등으로 그려낸 이 탁월한 작품은 분량이 길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많은 여운을 남겨 준다.

 

선과 악의 경계는 현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불분명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공권력이 항상 선한 것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고, 폭력, 범죄 집단에도 그들 나름의 사정이란 것이 있고, 아무리 선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악한 면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 악한 부분을 죽을 때까지 내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짓는 다는 것이 어쩌면 애초에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모두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사소한 욕망이나, 나약한 이기심에 굴복하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고, 태어날 때부터 선한 것이 인간이라 하여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있어 조금은 물들게 되는 순간도 올 수밖에 없고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만큼은 선과 악이 너무도 자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물론 그것이 한 사람의 내면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지만 말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작품이 오랜 시간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싹한 고딕 추리소설이자 뛰어난 심리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과 선과 악의 대립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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