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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지나간 세계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부키 / 2021년 1월
평점 :
"직장의 정년퇴직이 인생의 정년퇴직이란 건 너무 슬프지 않나요? 분명히 제게서 일을 빼면 아무런 장점도 없습니다. 이렇다 할만한 취미도 없고, 당장 하고 싶은 일도 없지요. 그런 인간은 이미 존재 가치가 없는 걸까요? 그렇다면 적당히 일하면서 노후를 위해 취미나 꿈을 남겨 둘 걸 그랬군요. 하지만 제게는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한탄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운명에 거역해 봤자 어쩔 수 없지만 내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p.93
예순다섯이 된 다케와키는 이번에 정년퇴직을 하게 되면서 회사에서 준비해 준 송별회가 끝나 후배들의 배웅을 받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지하철 안에서 쓰러진다. 현재는 뇌출혈이 심하고 혈압도 높아서 수술을 할 수 없는 상태로 집중치료실에 있는 상태이다. 그는 모범생인 초등학교 반장이 그대로 어른이 된 것처럼 결벽적인 성격으로 고지식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다. 회사 동기가 본사 사장이 되어도 질투심은커녕 자기 일처럼 기뻐했고, 그러면서도 뭔가 도움이 받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의 바로 그런 성격, 중요한 순간에 고집스러울 만큼 양보하지 않는 결벽함을 사랑했다. 평소와 다름 없었던 남편과의 아침을 떠올리며, 퇴직 후 부부가 함께할 시간은 앞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남편은 정말로 죽는 게 아닐까, 아내는 생각한다.
병실에 누워 있는 다케와키에게 입사동기인 사장, 아들 같았던 사위, 오랜 죽마고우 친구가 찾아 온다. 방문객들이 저마다 다케와키를 추억하며 다녀간 뒤, 늦은 밤 의식이 돌아온 그는 자신이 어떻게 병원에 실려 왔는지를 떠올린다. 침대 옆 간이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어 아내일까 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이 많은 할머니였다. 자신을 '마담 네즈'라고 소개한 할머니는 아내가 오늘은 댁에 가서 자고 있다며, 다케와키가 꼬박 사흘간 잠들어 있었다고 말해준다. 창 밖으로는 눈이 내리고 있는 밤, 마담 네즈는 맛있는 걸 먹으러 밖으로 나가자고 말한다. 그들은 병실을 빠져나가 도쿄의 밤 풍경을 바라보며 고급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이후 그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과 한여름의 바닷가를 거닐기도 하고, 옆 침대 환자와 같이 목욕탕에 가고, 포장마차에서 따뜻한 정종도 마신다. 다케와키가 겪는 이 모든 것들은 환상이나 환각인 걸까? 아니면 그의 영혼이 육체를 빠져 나와 어딘가로 가기 위한 과정인 걸까?
내 꿈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소원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내가 그토록 되고 싶었던 평범한 사람 쪽에서 보면 그런 꿈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콤플렉스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할까 봐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평범한 사람이 되도록,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도록.
"제 꿈을 들어 보시겠어요?"
지하철이 다시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을 때, 나는 독이라도 토해 내듯 말했다. p.353
이 작품은 아사다 지로가 2016년에서 2017년까지 1년간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서 연재한 이야기로 '아사다 지로 감동 문학의 결정판'이라는 평을 받았다. 나오키 상을 받았던 <철도원>에 수록된 단편이 국내에는 '파이란'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도쿄에서 고도 경제 성장기를 통과하며 자라 대기업에 근무하다가 정년퇴직을 맞이한 평범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아사다 지로 본인의 삶과도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주인공 다케와키처럼 고도 경제 성장기를 거치며 자랐고, 이른 나이에 부모를 잃은 뒤 남의집살이를 하며 성장했으니 말이다. 작가는 주인공을 '같은 교실에, 같은 직장에, 같은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사람 중에 있었던 인물'로 그리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만큼 다케와키의 삶은 주위를 둘러 보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을 법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밤늦게 퇴근해 녹초가 될 만큼 지쳐서 기절한 것처럼 잠들고, 아침에는 귀찮아하지도 않고 벌떡 일어나 직장으로 향했던', '매일 아침 똑같은 지하철의 똑같은 칸을 20년간 탄' 그런 삶을 살아 가고 있는 것은 수많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니 말이다.
소소한 취미 하나 가질 생각도 못한 채 회사와 집만 오가며 살아온 다케와키는 이제야 깨닫는다.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에 평온한 안식 같은 시간은 없었다는 것을, 그렇게 계속 전쟁터에 있어 왔기에 정년퇴직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진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다시 살아나 병원에서 나갈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이후에 어떻게 하면 새로운 인생을 얻을 수 있을까? 이제는 결승점에 도착해 그 자리에 멈춰 섰는데,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렇다 할 취미도,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도 없는 그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당신은 참 열심히 살았어요."
극 중 마담 네즈의 한마디에 다케와키는 마음이 흔들린다. 이는 어쩌면 작가가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싶다. 다케와키가 경험하는 이차원의 세계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잇달아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과거와 상처를 들여다보고 치유해주는 특별한 시간이 되어주기도 한다. 꿈도, 망상도 아닌, 현실처럼 느껴지는 그 모든 과정이 그리고 있는 이야기는 쓸쓸하면서도 뭉클했다. 아사다 지로의 30년 문학 인생을 관통하는 주제인 '인간의 선의'에 대한 믿음과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한 메시지가 빛을 발하는 작품이었다.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겨울을 통과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가 되어줄 만한 작품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