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삶과 책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니면 이렇게 표현할까요. 소설이란 쓸 때나 읽을 때나, 상상력의 행위라고요. 판타지는 결국 가장 오래된 서사 방식이며, 가장 보편적인 서사입니다. 소설은 경험 없는 사람에게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최고의 수단을 제공합니다. 아니, 소설이 경험보다 훨씬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소설은 감당할 수 있는 크기에 이해할 수 있는 허구인 반면 경험이란 그냥 사람을 뭉개고 지나가서 수십 년 후에야 그게 어떤 일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이해하면 다행이죠. 소설은 사실에 기반한 심리적 도덕적 이해를 제공하는 데 탁월해요.     p.46~47


 
이 책은 어슐러 르 귄이 2000년부터 2016년에 걸쳐 쓴 강연용 글, 에세이, 서평, 서문, 그리고 1994년 여성 작가들만의 칩거처 '헤지브룩'에서 창작을 하며 보낸 일주일의 기록을 담고 있다. 지난 번에 만났던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에 비해서 조금 더 책과 관련된 글들을 수록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2010년부터 5년 동안 블로그를 통해 남긴 40여 편의 글이 르 귄의 세심하고 담백한 유머, 늙음과 삶에 대한 사려 깊은 사색들로 개인적인 부분이 강했다면, 이번 신작은 작가로서의 목소리가 더 드러나 있다.

 

평소에 서평을 찾아 읽는 편은 아닌데, 작가가 쓴 서평은 흥미롭게 읽는다. 작가들이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고 쓰는 서평은 줄거리 요약이나 감상평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글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르 귄의 서평들이 꽤 많이 수록되어 있어서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도덕적 혼란>, 로베르토 볼라뇨의 <팽 선생>, 이탈로 칼비노의 <완전판 우주만화>,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 도리스 레싱의 <클레프트>, 돈나 레온의 <서퍼 더 리틀 칠드런>, 데비비드 미첼의 <뼈 시계>, 조 월튼의 <타인들 속에서> 등등 이미 읽어본 책도 있고, 그렇지 않은 책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르 귄은 '서평은 흥미롭고 부담스러운 글'이라고 말한다. '서평을 읽을 때는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글이 최고지만, 잘 쓰고 잘 맞는 악평도 귀하게 여긴다며, 형편없는 책에 대한 죽여주는 평을 읽으면 죄책감 없이 즐겁다'고 한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공감할 것이다.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지만, 거짓말이 아니에요. 소설은 사실 파악이나 거짓말이 아닌 다른 층위의 현실로 넘어가죠. 상상과 소망 충족의 차이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요, 둘 다 글쓰기에서나 삶에서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소망 충족은 현실에서 잘라 낸 생각이고, 어린아이 같을 때가 많지만 위험할 수 있는 방종이에요. 상상은 아무리 마구잡이일 때라 해도 현실과 떨어져 있죠. 상상은 현실을 알고, 현실에서 출발하고, 돌아가서 현실을 풍성하게 만들어요.    p.192

 

2002년 오리건 문학 예술 모임에서 한 강연에서는 '상상력이 인류가 가진 가장 유용한 도구'라는 말이 기억에 남고, 2005년의 강연에서는 '판타지가 결국 가장 오래된 서사 방식'이라는 점을 배운다. 2008년 하퍼스에서 발표한 글에서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며, 내구성이 있고, 무한히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가치재'로서의 책이라는 물건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고, 2013년 창작 문예 축제의 강연에서는 작가가 '거의 평생을 보낸 방법, 이야기 지어내기'에 대한 소중한 팁들을 배웠다. 르 귄이 쓴 책의 서문들을 모아 놓은 장도 흥미로웠다. '감탄스럽지 않은 책에 서문을 쓰거나, 강한 흥미를 느끼지도 않는 작가에 대해 길게 쓰거나 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으므로,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작가가 어떤 소설을 좋아하는지,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에 수록된 일주일의 기록은 작가의 창작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일기 같은 글이라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었다. 그전에는 어떤 종류의 작가 집단 거주지에도 살아 본 적이 없었던 르 귄에게 그 일주일의 시간은 '인생에 한 번뿐인 놀라운 선물'이었다고 한다. 일주일 동안 장보기도, 청소도, 저녁식사 준비도 없이 매일 온종일, 하루 24시간 이상 혼자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니 말이다. 르 귄은 그 시간 동안 산책을 하고, 미뤄둔 독서를 하고, 중편 하나를 쓴다. 이 책에 수록된 모든 글들이 너무도 근사했다. <어스시 연대기>를 비롯해 어슐러 르 귄의 대표 작품들만큼이나 훌륭한 산문집이 아니었나 싶다. 판타지 소설 장르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어슐러 르 귄의 작품을 읽어 보지 못했더라도 상관없다. 당신이 소설을 사랑한다면, 책이라는 존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이 작품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