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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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우리는 모두, 각자 세대의 공기를 숨쉬며 그 고유한 중력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의 경향 안에서 성장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마치 요즘 젊은 세대 사람들이 부모 세대의 신경을 일일이 곤두서게 하는 것처럼.    p.62~64

 

1950년대 후반, 하루키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쯤이었다. 당시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 살았던 하루키의 가족은 항상 고양이와 함께 살았다. 형제가 없는 하루키에게 고양이와 책은 가장 소중한 친구였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하루키는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 한 마리를 버리러 해변에 간 적이 있다. 왜 고양이를 버리러 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를 담은 상자를 해변에 내려놓은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은 아직 남아 있다. 그들은 집에 도착해서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하는 기분으로 문을 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조금 전에 버리고 온 고양이가 살갑게 그들 부자를 맞았다.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어리둥절했지만, 웬지 안도하는 기분이 들어 그 고양이를 계속 키우게 되었다고 한다.

 

소년 하루키의 고양이에 얽힌 수수께끼 같은 회상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그의 아버지 '무라카미 지아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가장 '사적인 이야기'이자, 언젠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서 문장으로 정리해봐야겠다고 오래 전부터 마음 먹고 있었던 글이다. 이 작품은 가제본 원고로 먼저 만나봤었는데, 문장들이 딱딱하고, 접속사도 쉼표도 더 많고, 평소의 하루키 작품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낯설게 느껴졌었다. 분량이 짧은데 비해 난해한 어휘들도 자주 등장해 읽기에 수월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천천히 읽게 되는 인상적인 작품이기도 했다.

 

 

만약 아버지가 병역에서 해제되지 않아 필리핀이나 버마 전선으로 보내졌다면.... 만약 음악 교사였다는 어머니의 약혼자가 전사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생각해가다 보면 정말 기분이 묘해진다. 만약 그랬다면, 나라는 인간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 결과, 당연히 나라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내가 쓴 책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소설가로서 이렇게 살아있는 나의 삶 자체가, 실체가 없는 덧없는 환상처럼 여겨진다.     p.88~89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세 번이나 전쟁에 소집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거대한 혼란과 빈곤 속에서 있는 힘을 다해 기를 쓰고 살아남아야만 했던 불운했던 세대였던 것이다. 하루키는 '무라카미 지아키'라는 개인의 역사를 담담하게 되짚어 나간다. 유년기의 입양과 파양, 청년기의 중일전쟁 참전, 중장년기의 교직 생활, 노년기의 투병 등을 비롯해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가감 없이 말이다. 다들 알다시피 하루키는 아버지와 이십 년 이상 전혀 얼굴을 보지 않는 '절연' 관계였던 걸로 알려졌다. 하루키는 아버지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할 수 없었고, 그가 서른 살에 소설가로 데뷔 했을 때 이미 부자 관계는 상당히 멀어져 있던 상태였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를 줄곧 실망시켰고, 거기에는 언제나 막연한 가책 같은 것이 따라다녔다고 한다. 아마도 그러한 이유로 하루키가 이 책을 쓰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루키는 그가 전업작가가 된 후로 어지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대화도 연락도 하지 않는 상태로 지내왔던 아버지와의 수십 년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마치 객관적인 사실 정보라도 들려주듯 이야기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겨우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를 나눈 것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때 하루키는 예순 가까운 나이였고, 아버지는 아흔 살로 심한 당뇨를 앓고 있는 데다 온 몸에 암이 전이되어 있던 상태였다고 한다. 다행히도 그때 아주 어색한 대화를 나누고 화해 비슷한 것을 했다고 하지만, 하루키는 그 순간 뭔가 깨달은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관계된 사람들을 만나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조금씩 듣게 된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란 성장한 시대도 환경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세계를 보는 시각도 다르게 마련이라 '세대 차이'라는 이름으로 종종 부딪치게 마련이다. 그러니 하루키가 풀어내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다소 낯설게 느껴지더라도, 결국에는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는 얘기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자 부모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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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의 힘 곤도 마리에 정리 시리즈 1
곤도 마리에 지음, 홍성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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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금 더 현명했더라면 이런 식으로 '정리 노이로제'에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조건 버리기만 생각하고 정리를 하면 그때의 나처럼 불행해진다. 정리를 통해 가려내야 할 것은 버릴 물건이 아니라 '남길 물건'이다. 나는 그때 머릿속에 스치듯 떠올랐던 '물건을 잘 봐'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 전까지 나는 버릴 물건에만 주목해서 진짜 소중히 해야 할, 남길 물건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p.57

 

요즘 <신박한 정리>라는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공간 크리에이터'라는 다소 낯선 직업을 가진 전문가가 등장해 출연자들의 집을 비우고, 정리해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만들어주는 방송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공간 구성, 인테리어, 수납 등이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공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물건은 계속 늘어나고, 치우고 버려도 어느 순간 돌아보면 언제나 제자리 걸음인 게 현실이니 말이다. 정말 신기한 건 한번 마음먹고 시간을 내어서 정리를 해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원상태로 되돌아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세계 최고의 정리 컨설턴트라 불리는 곤도 마리에의 이 책을 만나 보기로 했다.

 

‘곤마리하다(to konmari)’가 ‘정리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로 사전에 등재되었을 정도로 곤도 마리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리의 여왕’이다. 곤마리 열풍을 몰고 온 <정리의 힘>은 전 세계 1,200만 독자의 삶을 바꾸어 주었고, 미니멀라이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그녀의 모토는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였고, 물건만 남기고 버리는 작업을 하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까지 파악하게 된다는 거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곤마리 정리법의 핵심이다. 이 책을 만나기 전에 곤도 마리에가 업무 공간 정리법을 다루었던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정리를 하면서 물건을 마주 보는 것은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는 것과 같다는 점, 버릴 것은 버리고 비우는 정리를 통해 자신이 과거에 했던 선택을 인정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는 점이 너무도 공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의류, 책, 서류, 소품 정리를 끝냈다면, 드디어 '추억의 물건'을 정리할 차례다. 추억의 물건을 마지막에 정리해야 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버리기 어려운 물건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가슴 설렜던 물건을 버리면 추억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정말 소중한 추억은 그런 물건을 버린다고 해도 절대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잊고 싶은 과거의 추억이라면 잊는 것이 좋다. 우리는 '지금'을 살고 있다. 과거가 아무리 화려했어도 사람은 과거를 살지는 못한다. 지금 가슴 설레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p.145

 

과연 '한 번 정리하면 절대 다시 어지럽혀지지 않는 정리법'이라는 게 존재할까. 곤도 마리에는 이 책의 서문에서부터 그렇다고 장담한다. 자신의 정리법은 기존의 정리, 정돈, 수납법 관점에서 보면 매우 비상식적이지만, 그렇게 정리한 사람들의 삶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말이다. 그러니 깨끗이 정리해도 사흘만 지나면 대개 다시 어지럽혀지는 경험을 해봤다면, 모든 물건들에 의미와 추억을 부여해 죽어도 못 버리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이 꼭 필요하다. 곤도 마리에는 우선 우리가 평소에 잘못 알고 있었던 정리 상식부터 바꿔 준다. 정리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습관처럼 익숙해지는 것이라는 의식부터 버려야 한다. 조금씩 정리하라는 팁에 넘어가면 안 된다고, 수납의 편리함에 의존할 수록 물건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고 나면 정리의 1단계는 바로 버리기에서 시작된다. 이 책에 따르면 '한 번에, 짧은 기간에, 완벽히' 정리하는 것이 올바른 정리 방법이라고 한다. 의식이 바뀔 정도의 충격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짧은 기간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실용적인 점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정리를 해나가는 방법들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물건을 버리는 순서와 기준, 버릴 수 없는 물건을 다루는 요령, 의류, 책, 서류, 소품, 추억의 물건 순으로 정리하는 방법, 옷 개기와 옷장에 옷 거는 요령, 책 정리 방법과 소품류, 동전, 사진, 방치된 물건 처리 법 등등을 비롯해 효과적인 수납 컨설팅으로 마무리가 된다. 정리를 통해서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되고, 자신의 역사를 돌아보게 되고, 결국 인생을 극적으로 바꾸게 된다는 대목에 이르면, 이건 정말 '정리의 마법'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지금, 인생을 새로 시작하고 싶거나, 지금의 생활을 더 좋은 상태로 만들고 싶거나, 바꾸고 싶다면 이 책과 함께 '정리'를 시작해 보면 어떨까. 매일매일 설레는 하루를 위해서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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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7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오나 2020-10-27 14:40   좋아요 0 | URL
그죠? 추억의 물건이 가장 정리하기 어렵죠.ㅎㅎ ‘신애라하다‘라는 표현도 너무 괜찮네요. ㅋㅋ
 
줄레이하 눈을 뜨다 <5+5> 공동번역 출간 프로젝트 3
구젤 샤밀례브나 야히나 지음, 강동희 옮김 / 걷는사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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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지는 고통스러웠고, 오랜 기다림은 괴로웠다. 가끔 줄레이하는 이미 죽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위의 사람들은 무기력하고 창백하며, 종일 속삭이고 조용히 흐느끼는데, 이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죽지 않는 것일까? 춥고 비좁으며, 돌벽은 습하고 축축하며, 볕이 들어오지 않는 땅속 깊은 이곳은 무덤이 아닐까? 줄레이하가 방 구석에 있는 크고 깊숙한 양철 양동이로 만들어 놓은 화장실에 갔을 때, 그녀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고, 그제야 아직 죽은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죽은 이는 부끄러움을 알지 못한다.    p.195

 

열다섯 줄레이하는 마흔다섯의 부통 무르타자에게 시집을 와 척박한 시골마을에서 살고 있다. 결혼 후 십오 년 동안 네 명의 딸을 낳았지만 모두 죽어 버렸다. 그녀는 지독한 시어머니인 노파 우프리하의 온갖 구박을 받으면서, 마치 집안의 식모처럼 일만 하면서 살아 왔다. 어떤 부당한 일을 당해도,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어떤 취급을 받아도, 그저 묵묵히 참고 견디면서. 십오 년 전 줄레이하가 이 집에 왔을 무렵부터 시어머니는 눈도 멀고 귀도 먹어 버렸고, 그만큼 괴팍한 성질은 더해갔으며 지금도 쉬지 않고 잔소리를 해댄다.  줄레이하는 혹한의 날씨 속에서 아침부터 시어머니의 요강을 비우고 닦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남편과 땔감을 구해 오고, 간밤에 잔뜩 쌓인 눈을 치우느라 온 집안을 쓸고, 온 몸이 쑤시고 지쳐 쓰러져 겨우 잠이 들 무렵 다시 깨서 목욕물을 받으러 간다. 목욕실로 가는 눈길을 치우고, 이십 통의 물을 우물에서 길어 나르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온갖 욕을 들어 가며 목욕 수발을 하지만, 시어머니 몸에 상처가 났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빗자루로 맞는다. 그 와중에도 남편이 오랫동안 때리지 않고 빨리 진정했으니, 그 정도면 좋은 남편을 만난 거라고 생각한다.

 

대체 이 여인은 그 동안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너무 어릴 때 이 집안에 시집와서 거의 세뇌당하다시피 살아온 것은 아닐까. 거기다 시어머니가 꿈에서 줄레이하가 죽는 걸 보았다며, 너는 곧 죽을 거라고 말하자 그녀는 두려워진다. 살면서 그녀는 단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다. 누군가 시키는 대로 하는 매우 수동적인 삶을 살아 왔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그나토프가 이끄는 붉은군대에 의해 남편이 죽게 된다. 백 년은 거뜬히 살 것 같았던 강한 무르타자가 사라지고, 전 재산을 몰수당한 후, 그녀는 머나먼 시베리아로 이주를 떠나게 된다. 이번에도 그녀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삶이 흘러 가고 있었다. 그렇게 태어나서 한 번도 떠나 본 적 없는 율바시를 떠나 강제이주의 머나먼 여정이 시작된다.

 

 

부끄럽지 않았다. 어렸을 적 세뇌된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지워졌다. 대신 새로운 것이 생겨났고, 그것은 마치 홍수가 지난해 저장해둔 불쏘시개와 썩은 나뭇잎을 쓸어간 것처럼 두려움을 씻겨냈다. 
"아내는 남편의 대를 잇기 위한 경작지야." 엄마는 그녀를 무르타자의 집에 보내기 전에 그렇게 가르쳤다. "농부는 힘이 남아 있는 한, 그가 원하면 밭을 일구기 위해 경작지에 올 것이야. 경작지는 자신의 농부를 거부할 수 없어." 그래서 그녀는 반항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숨을 죽인 채, 참았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한 채 몇 년을 살았다. 그리고 이제는 알았다.     p.599~600

 

이 작품은 1930년에서 1946년 사이에 있었던 러시아 부농의 '시베리아 강제이주'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구젤 샤밀례브나 야히나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톨스토이 문학상을 비롯해 각종 상을 받으며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이 작품은 소련 붕괴 후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여겨졌던 유배 문학의 한 장르에 속한다. 우리 나라에도 유배되어온 사람들이 겪는 일들을 그린 유배문학이 있었으니, 비슷한 장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제2회 박경리문학상을 수상했던 류드밀라 울리츠카야가 서문에서 구젤 샤밀례브나 야히나를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잇는 위대한 작가' 대열에 들어온 젊은 작가라며 극찬했다.

 

사실 러시아 문학하면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등 고전 작가들의 작품부터 떠올릴 정도로, 현대의 러시아 문학에 대해선 거의 아는 게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 기회에 동시대 러시아 문학을 알게 되었고, 거의 700페이지에 가까운 엄청난 분량에도 가독성이 뛰어나 대단히 재미있게 술술 읽을 수 있었다. 유배지에 도착하자 마자 아들을 낳고,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 속에서 강제 노동으로 삶을 이어가는 줄레이하에게 찾아온 사랑의 대상이 남편을 죽인 붉은군대의 간부라는 점이 이 장대한 이야기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시베리아의 불모지인 지옥 같은 노동수용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모성과 사랑, 연민의 드라마는 열여섯이 된 줄레이하의 아들에 의해 희망적인 여운을 남기며 끝에 이른다. 그래서 이 작품은 시베리아라는 유배지의 역사적인 기록이자, 유배문학의 모습을 한 정통 소설로서도 너무 매혹적인 이야기였다. 한,러 수교 30주년을 기념하는 <5+5> 공동번역 출간 프로젝트의 세 번째 작품으로 출간이 되었는데, 계속 이어질 네 번째 <세기말의 러시아 문제>와 다섯 번째로 나올 <도스토옙스키 단편선> 역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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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퍽10 <5+5> 공동번역 출간 프로젝트 1
빅토르 펠레빈 지음, 윤현숙 옮김 / 걷는사람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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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언급한 모든 것은 당신, 친애하는 독자에게도 해당한다. 경찰청 정보에 따르면 인간성의 근본적인 본질은 똑같기 때문이다. 저명한 학자와 신비로운 진리 탐구자들이 내린 결론도 그렇고. 사실 자기 자신에 관한 것 같은 것을 알려면 인간은 처음에는 ‘자신’이라고 부르는 동물 언어 프로그램의 실타래를 풀며 반평생 연꽃 자세로 앉아 있어야 한다.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드물다. 그러니 단순하게 당신과 나, 우리는 같은 피라고 하자. 우리는 행동하고 있으며 바로 이런 이유에서 서로 말이 통한다고 할 수 있으니.      p.11

 

이 책의 화자는 경찰 문학 로봇 ZA-3478/PHO 빌트9.3인 포르피리 페트로비치이다. 대개 로컬화되지 않은 채 네트워크 공간에 나타나는 알고리즘이다. 포르피리이 수행해야 하는 기능은 범죄를 밝혀 악을 벌하고 선을 공고히 하고, 경찰 조서를 바탕으로 범죄에 관한 소설을 쓰는 것이다. 포르피리는 탐정소설을 써서 경찰청에 수익을 안겨 주는데, 벌써 소설을 이백마흔세 권이나 쓴 작가이기도 하다. 이 인공지능은 인간들이 증강현실 안경이나 화면으로 볼 수 있는 겉모습도 있는데, 대개 정해진 패턴을 유지하면서 약간 변화를 주는 정도이다.

 

포르피리는 이번에 미술비평가이자 큐레이터인 마루하 초에게 임대된다. 그녀는 '미술 시장에 대한 은밀한 분석'을 하는데 필요하다고 해당 서비스 패키지를 구입했다. 그녀는 포르피리에게 사진이 석고 전문가라고 소개하며, 석고에 대한 책을 두 권 썼고, 지금 세 번째를 쓰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책보다는 컨설팅으로 주로 돈을 버는데, 비싼 거래에는 비싼 수수료가 따른다고 한다. '석고'는 21세기 전반 25년 러시아와 유럽, 아메리카, 중국 등에서 만들어진 개별적인 미술 작품으로 보통 거래 금액이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매우 희귀하고 비싼 미술이다. 그녀가 포르피리에게 준 임무는 직무상 능력을 사용해 최종 구매자에게 가서 뭘 샀는지를 정확하게 알아 오는 것이다. 기밀 정보이지만 가능하다면 발견한 걸 다 복사해 와야했다. 물론 거래의 비밀을 깨뜨리는 것은 아니었고, 사립 탐정처럼 예술 컬렉션과 관련된 세부 사항 몇 개만 알아오는 거였다. 포르피리는 그녀에게 이름과 주소, 구매 일자를 받아 구매자들을 만나러 간다. 포르피리는 그렇게 이종격투기 선수, 은행가 등을 만나 미술 거래들을 조사해 나가기 시작한다.

 

 

인간이 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땅에 철학도 종교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처음부터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된다. 과연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톱니바퀴가 존재하길 원할까? 여기에 문제가 있다. 물론 인간이 원한다면 자기의 인공 자식을 갖가지 방법으로 속일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인공 자식의 자비를 기대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햄릿의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to be or not to be)'로 귀결된다.      p.461

 

이 책은 한?러 수교 30주년을 기념하는 <5+5> 공동번역 출간 프로젝트의 첫 작품으로 포스트소비에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빅토르 펠레빈의 SF 장편소설이다. 이 프로젝트는 2020년 한?러 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문학번역원과 러시아문학번역원이 협업하여 한국 및 러시아문학 시리즈 공동출간(총 10권)을 지원, 양국 간의 외교-문화적 협력 관계 공고화를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 국내에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저기 개가 달려가네요>, <줄레이하 눈을 뜨다>가 출간되었고, 이어 <세기말의 러시아 문제>와 <도스토옙스키 단편선>이 나올 예정이다. 러시아에서는 채만식의 <태평천하>를 비롯해서 이문열 단편선, 20세기 한국시선(한용운?윤동주?박경리?김남조), 김영하의 <빛의 제국>, 방현석의 <내일을 여는 집>이 발간된다고 하니 여러모로 의미있는 프로젝트가 아닌가 싶다.

 

포르피리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마라와 포르피리는 일종의 연인 관계가 된다. 마라는 생물학적으로 여성이지만, '고환 달린 여성'이다. 이는 그녀가 자신의 몸에 테스토스테론 디스펜서를 심어 고환이 없는 여자보다 몸이 좀 더 남성적이고 강해졌다는 뜻이다. 그녀는 넓은 어때와 좁은 엉덩이에도 불구하고 겉모습으로는 천상 여자였다. 그들은 여러 감정을 오가며 가까워지는데, 포르피리가 마라의 일과 과거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이를 그녀가 알아채면서 이야기는 클라이막스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화자가 포르피리에서 마라로 바뀌게 되는데, 대단히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빅토르 펠레빈이 철학적 주제와 종교적 사유, 신화와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열광적인 팬들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답게 이 작품에서도 예술의 역할, 존재의 의미, 사랑과 욕망 등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인상적이었다. 독특한 SF 작품을 만나 보고 싶다면, 현재 러시아의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 중 하나로 꼽히는 작가의 작품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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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6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오나 2020-10-26 23:23   좋아요 0 | URL
그죠? 탐정소설을 쓰고 경찰 수사를 돕는 인공지능이라니.. 대단히 독특한 작품이었어요. 기회가 되면 만나 보시길 ^^
 
수수한 아이패드 드로잉
수수진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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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료 어플인 '포토샵 어도비 스케치'를 사용해 초보자도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드로잉 방법을 알려 준다. 데이비드 호크니도 아이패드로 그림 작업을 할 정도로, 전문가, 일반인 할 것 없이 아이패드가 대중적인 그림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요즘이다. 그래서 아이패드와 애플펜슬을 구입했지만, 어떻게 그림을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면, 이 책을 통해서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워보면 좋을 것 같다.

 

 

드로잉 툴이 많은 데 그 중에서도 어도비 스케치는 심플하고 직관적인 앱이다. 무료 앱이라 화려하고 다양한 기능이 들어 있지만, 포토샵의 브러시 기능을 압축해 드로잉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앱이라 초보자도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사용하고 있는 기기는 아이패드 프로 11형 모델, 애플 펜슬 2, iosOS 13이다. 하지만 동일한 스펙의 기기가 아니라도 상관없다고 한다. 물론 안드로이드 같은 경우에는 조금 차이가 있겠지만, 아이패드라면 어떤 것이든 괜찮을 것 같다.

 

 

이 책은 우선 어도비 스케치 앱의 구석구석 메뉴들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드로잉 도구가 캔버스에 닿을 때의 감각을 느낄 수 없는 디지털 드로잉에 익숙해지기 위해 필요한 연습이라든가, 브러시를 선택하고 조정하는 방법, 작업한 그림을 어도비 스케치 앱 외에 다른 곳에 저장하는 방법 등 기초적인 부분부터 차근차근 알려준고 있다.

 

무엇보다 이론적인 설명보다 직접 그려 가며 배울 수 있는 책이라서 더 좋았다. 카페, 베이커리의 다양한 음료와 케이크, 브런치 메뉴를 시작으로, 드레스, 스웨터, 라탄 오브제 등의 패션 아이템, 그리고 여행, 사람, 동물 등의 드로잉들이 그리는 방법이 단계별로 설명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단연코 압권은 마지막 파트에 수록되어 있는 '서양화풍의 회화 드로잉' 편이었다. 점과 선을 자유롭게 사용해 풍경화를 그리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었는데, 작품의 수준이 월등히 높아서 깜짝 놀랐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까지 아이패드 드로잉으로 해볼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고흐의 작품들은 정말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너무도 그럴듯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수수진의 수수한 팁>이라는 제목으로 드로잉 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요령들이 담겨 있어서 좋았다. 두꺼운 아크릴 브러시 농도에 따른 발색 차이, 어도비 스케치 앱에 있는 자 기능 활용 방법 등등 전문가의 깨압 팁들도 유용하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책에 수록된 그림들은 베이커리, 패션, 여행, 동물, 추상화 등 약 100가지나 된다. 특별한 이론이나 스킬 없이도, 무료 어플을 통해 따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저 가볍게 그림을 한 번 그려보고 싶은 이들에게도, 아이패드는 가지고 있는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이들에게도, 디지털 드로잉을 배워보고 싶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이들에게도 매우 유용한 가이드가 되어줄 만한 책이다.

 

일상을 간단하게 드로잉으로 기록하고 싶다면, 여행에서의 추억을 기록하고 싶다면 이 책과 함께 디지털 드로잉을 시작해 보자. 디지털 드로잉은 종이에 그리는 그림보다 수정이 쉽고,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과 질감으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단계를 따라 천천히 해보다 보면 어느 샌가 멋진 디지털 드로잉 작품을 완성시키게 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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