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퍽10 <5+5> 공동번역 출간 프로젝트 1
빅토르 펠레빈 지음, 윤현숙 옮김 / 걷는사람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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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언급한 모든 것은 당신, 친애하는 독자에게도 해당한다. 경찰청 정보에 따르면 인간성의 근본적인 본질은 똑같기 때문이다. 저명한 학자와 신비로운 진리 탐구자들이 내린 결론도 그렇고. 사실 자기 자신에 관한 것 같은 것을 알려면 인간은 처음에는 ‘자신’이라고 부르는 동물 언어 프로그램의 실타래를 풀며 반평생 연꽃 자세로 앉아 있어야 한다.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드물다. 그러니 단순하게 당신과 나, 우리는 같은 피라고 하자. 우리는 행동하고 있으며 바로 이런 이유에서 서로 말이 통한다고 할 수 있으니.      p.11

 

이 책의 화자는 경찰 문학 로봇 ZA-3478/PHO 빌트9.3인 포르피리 페트로비치이다. 대개 로컬화되지 않은 채 네트워크 공간에 나타나는 알고리즘이다. 포르피리이 수행해야 하는 기능은 범죄를 밝혀 악을 벌하고 선을 공고히 하고, 경찰 조서를 바탕으로 범죄에 관한 소설을 쓰는 것이다. 포르피리는 탐정소설을 써서 경찰청에 수익을 안겨 주는데, 벌써 소설을 이백마흔세 권이나 쓴 작가이기도 하다. 이 인공지능은 인간들이 증강현실 안경이나 화면으로 볼 수 있는 겉모습도 있는데, 대개 정해진 패턴을 유지하면서 약간 변화를 주는 정도이다.

 

포르피리는 이번에 미술비평가이자 큐레이터인 마루하 초에게 임대된다. 그녀는 '미술 시장에 대한 은밀한 분석'을 하는데 필요하다고 해당 서비스 패키지를 구입했다. 그녀는 포르피리에게 사진이 석고 전문가라고 소개하며, 석고에 대한 책을 두 권 썼고, 지금 세 번째를 쓰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책보다는 컨설팅으로 주로 돈을 버는데, 비싼 거래에는 비싼 수수료가 따른다고 한다. '석고'는 21세기 전반 25년 러시아와 유럽, 아메리카, 중국 등에서 만들어진 개별적인 미술 작품으로 보통 거래 금액이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매우 희귀하고 비싼 미술이다. 그녀가 포르피리에게 준 임무는 직무상 능력을 사용해 최종 구매자에게 가서 뭘 샀는지를 정확하게 알아 오는 것이다. 기밀 정보이지만 가능하다면 발견한 걸 다 복사해 와야했다. 물론 거래의 비밀을 깨뜨리는 것은 아니었고, 사립 탐정처럼 예술 컬렉션과 관련된 세부 사항 몇 개만 알아오는 거였다. 포르피리는 그녀에게 이름과 주소, 구매 일자를 받아 구매자들을 만나러 간다. 포르피리는 그렇게 이종격투기 선수, 은행가 등을 만나 미술 거래들을 조사해 나가기 시작한다.

 

 

인간이 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땅에 철학도 종교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처음부터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된다. 과연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톱니바퀴가 존재하길 원할까? 여기에 문제가 있다. 물론 인간이 원한다면 자기의 인공 자식을 갖가지 방법으로 속일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인공 자식의 자비를 기대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햄릿의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to be or not to be)'로 귀결된다.      p.461

 

이 책은 한?러 수교 30주년을 기념하는 <5+5> 공동번역 출간 프로젝트의 첫 작품으로 포스트소비에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빅토르 펠레빈의 SF 장편소설이다. 이 프로젝트는 2020년 한?러 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문학번역원과 러시아문학번역원이 협업하여 한국 및 러시아문학 시리즈 공동출간(총 10권)을 지원, 양국 간의 외교-문화적 협력 관계 공고화를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 국내에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저기 개가 달려가네요>, <줄레이하 눈을 뜨다>가 출간되었고, 이어 <세기말의 러시아 문제>와 <도스토옙스키 단편선>이 나올 예정이다. 러시아에서는 채만식의 <태평천하>를 비롯해서 이문열 단편선, 20세기 한국시선(한용운?윤동주?박경리?김남조), 김영하의 <빛의 제국>, 방현석의 <내일을 여는 집>이 발간된다고 하니 여러모로 의미있는 프로젝트가 아닌가 싶다.

 

포르피리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마라와 포르피리는 일종의 연인 관계가 된다. 마라는 생물학적으로 여성이지만, '고환 달린 여성'이다. 이는 그녀가 자신의 몸에 테스토스테론 디스펜서를 심어 고환이 없는 여자보다 몸이 좀 더 남성적이고 강해졌다는 뜻이다. 그녀는 넓은 어때와 좁은 엉덩이에도 불구하고 겉모습으로는 천상 여자였다. 그들은 여러 감정을 오가며 가까워지는데, 포르피리가 마라의 일과 과거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이를 그녀가 알아채면서 이야기는 클라이막스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화자가 포르피리에서 마라로 바뀌게 되는데, 대단히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빅토르 펠레빈이 철학적 주제와 종교적 사유, 신화와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열광적인 팬들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답게 이 작품에서도 예술의 역할, 존재의 의미, 사랑과 욕망 등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인상적이었다. 독특한 SF 작품을 만나 보고 싶다면, 현재 러시아의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 중 하나로 꼽히는 작가의 작품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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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6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오나 2020-10-26 23:23   좋아요 0 | URL
그죠? 탐정소설을 쓰고 경찰 수사를 돕는 인공지능이라니.. 대단히 독특한 작품이었어요. 기회가 되면 만나 보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