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레이하 눈을 뜨다 <5+5> 공동번역 출간 프로젝트 3
구젤 샤밀례브나 야히나 지음, 강동희 옮김 / 걷는사람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무지는 고통스러웠고, 오랜 기다림은 괴로웠다. 가끔 줄레이하는 이미 죽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위의 사람들은 무기력하고 창백하며, 종일 속삭이고 조용히 흐느끼는데, 이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죽지 않는 것일까? 춥고 비좁으며, 돌벽은 습하고 축축하며, 볕이 들어오지 않는 땅속 깊은 이곳은 무덤이 아닐까? 줄레이하가 방 구석에 있는 크고 깊숙한 양철 양동이로 만들어 놓은 화장실에 갔을 때, 그녀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고, 그제야 아직 죽은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죽은 이는 부끄러움을 알지 못한다.    p.195

 

열다섯 줄레이하는 마흔다섯의 부통 무르타자에게 시집을 와 척박한 시골마을에서 살고 있다. 결혼 후 십오 년 동안 네 명의 딸을 낳았지만 모두 죽어 버렸다. 그녀는 지독한 시어머니인 노파 우프리하의 온갖 구박을 받으면서, 마치 집안의 식모처럼 일만 하면서 살아 왔다. 어떤 부당한 일을 당해도,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어떤 취급을 받아도, 그저 묵묵히 참고 견디면서. 십오 년 전 줄레이하가 이 집에 왔을 무렵부터 시어머니는 눈도 멀고 귀도 먹어 버렸고, 그만큼 괴팍한 성질은 더해갔으며 지금도 쉬지 않고 잔소리를 해댄다.  줄레이하는 혹한의 날씨 속에서 아침부터 시어머니의 요강을 비우고 닦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남편과 땔감을 구해 오고, 간밤에 잔뜩 쌓인 눈을 치우느라 온 집안을 쓸고, 온 몸이 쑤시고 지쳐 쓰러져 겨우 잠이 들 무렵 다시 깨서 목욕물을 받으러 간다. 목욕실로 가는 눈길을 치우고, 이십 통의 물을 우물에서 길어 나르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온갖 욕을 들어 가며 목욕 수발을 하지만, 시어머니 몸에 상처가 났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빗자루로 맞는다. 그 와중에도 남편이 오랫동안 때리지 않고 빨리 진정했으니, 그 정도면 좋은 남편을 만난 거라고 생각한다.

 

대체 이 여인은 그 동안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너무 어릴 때 이 집안에 시집와서 거의 세뇌당하다시피 살아온 것은 아닐까. 거기다 시어머니가 꿈에서 줄레이하가 죽는 걸 보았다며, 너는 곧 죽을 거라고 말하자 그녀는 두려워진다. 살면서 그녀는 단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다. 누군가 시키는 대로 하는 매우 수동적인 삶을 살아 왔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그나토프가 이끄는 붉은군대에 의해 남편이 죽게 된다. 백 년은 거뜬히 살 것 같았던 강한 무르타자가 사라지고, 전 재산을 몰수당한 후, 그녀는 머나먼 시베리아로 이주를 떠나게 된다. 이번에도 그녀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삶이 흘러 가고 있었다. 그렇게 태어나서 한 번도 떠나 본 적 없는 율바시를 떠나 강제이주의 머나먼 여정이 시작된다.

 

 

부끄럽지 않았다. 어렸을 적 세뇌된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지워졌다. 대신 새로운 것이 생겨났고, 그것은 마치 홍수가 지난해 저장해둔 불쏘시개와 썩은 나뭇잎을 쓸어간 것처럼 두려움을 씻겨냈다. 
"아내는 남편의 대를 잇기 위한 경작지야." 엄마는 그녀를 무르타자의 집에 보내기 전에 그렇게 가르쳤다. "농부는 힘이 남아 있는 한, 그가 원하면 밭을 일구기 위해 경작지에 올 것이야. 경작지는 자신의 농부를 거부할 수 없어." 그래서 그녀는 반항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숨을 죽인 채, 참았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한 채 몇 년을 살았다. 그리고 이제는 알았다.     p.599~600

 

이 작품은 1930년에서 1946년 사이에 있었던 러시아 부농의 '시베리아 강제이주'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구젤 샤밀례브나 야히나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톨스토이 문학상을 비롯해 각종 상을 받으며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이 작품은 소련 붕괴 후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여겨졌던 유배 문학의 한 장르에 속한다. 우리 나라에도 유배되어온 사람들이 겪는 일들을 그린 유배문학이 있었으니, 비슷한 장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제2회 박경리문학상을 수상했던 류드밀라 울리츠카야가 서문에서 구젤 샤밀례브나 야히나를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잇는 위대한 작가' 대열에 들어온 젊은 작가라며 극찬했다.

 

사실 러시아 문학하면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등 고전 작가들의 작품부터 떠올릴 정도로, 현대의 러시아 문학에 대해선 거의 아는 게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 기회에 동시대 러시아 문학을 알게 되었고, 거의 700페이지에 가까운 엄청난 분량에도 가독성이 뛰어나 대단히 재미있게 술술 읽을 수 있었다. 유배지에 도착하자 마자 아들을 낳고,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 속에서 강제 노동으로 삶을 이어가는 줄레이하에게 찾아온 사랑의 대상이 남편을 죽인 붉은군대의 간부라는 점이 이 장대한 이야기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시베리아의 불모지인 지옥 같은 노동수용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모성과 사랑, 연민의 드라마는 열여섯이 된 줄레이하의 아들에 의해 희망적인 여운을 남기며 끝에 이른다. 그래서 이 작품은 시베리아라는 유배지의 역사적인 기록이자, 유배문학의 모습을 한 정통 소설로서도 너무 매혹적인 이야기였다. 한,러 수교 30주년을 기념하는 <5+5> 공동번역 출간 프로젝트의 세 번째 작품으로 출간이 되었는데, 계속 이어질 네 번째 <세기말의 러시아 문제>와 다섯 번째로 나올 <도스토옙스키 단편선> 역시 기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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