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비행 - 생계독서가 금정연 매문기
금정연 지음 / 마티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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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 해 내가 읽은 책은 총 110권이다. 그렇게나 부지런히 읽었는데, 이것밖에 못 읽었어. 하는 나에게 주변 사람들은 혀를 내두른다. 수치로 보면 거의 3일에 한권 꼴로 매일같이 책을 봤다는 건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우리 나라 직장인들의 1년 평균 독서량이 5권도 안되는 걸 아냐고 말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읽어야 할 책은 산더미인데, 아무리 계산해봐도 1년에 읽을 수 있는 책은 제한되어 있고 그렇다면 나의 남은 생애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이란 고작 3,000여권 내외일 거란 말이다. 하루에도 수백권씩 쏟아지는 책들, 매일같이 인터넷 서점을 들락거리고, 서점에라 가지만, 내가 읽어야할 그 수많은 책들 속에서 어딘가 슬픈 기분이 든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그누구도 중요한 작품을 '모두' 읽을 수 없다는 것.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것 정도.

 


그래서 이런 나에게는 동지가 필요하다. 1년에 베스트셀러 한권 읽을까 말까하는 평범한 대다수의 직장인들 말고, 책에 대한 미칠듯한 애정으로 습관적으로 마구 책을 구입하거나, 희귀한 책들을 수집하거나, 강박적으로 읽어대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말이다. 이 책의 작가는 자신을, 책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애서가도 아니고, 책 안에 모든 것이 있다고 말하는 독서광도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나는 그의 애정넘치는 서평이 재미있었고, 뭉클했고, 친근했다. 마치 나의 친구를 만난 것처럼.

 

아직 의심을 버리지 못한 당신은 묻는다. 영화 속 졸부들이 하드커버 껍데기로 서재를 채우는 일과 무엇이 다르냐고. 그런 당신을 위도하는 에코의 일화가 있으니, 수많은 장서로 가득 찬 그의 서재를 방문한 사람이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렇게 묻는다. "와, 시뇨레 에코 박사님! 정말 대단한 서재군요. 그런데 이 중에서 몇 권이나 읽으셨나요?" 에코의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아니요. 저 가운데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어요. 이미 읽은 책을 무엇 하러 여기에 놔두겠어요?" 정답!


그리하여 나는, 읽지 않은 책이 가득한 책장에 오늘도 몇 권의 책을 꽂는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꿈꾸게 하는, 즐거운 독서의 가능성으로 충만한 일종의 스피노자적 행위. 사과나무엔 언젠가 열매가 열리기 마련이고, 종말은 아직 멀다.


움베르코 에코의 이런 일화는 나같은 사람들에게 무한한 위로를 준다. 이미 읽은 책은 아직 읽지 않은 책보다 한참 가치가 떨어지는 법이라는 것. 나이를 먹고, 지식이 쌓이고, 읽은 책도 높이 쌓이지만, 그만큼 서가엔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늘어나야 한다는 것 말이다. 요즘엔 이북이 많이 나오고 있어 그나마 부피가 덜해졌지만, 종이 책들은 책꽂이를 늘어나게 만들고, 자리가 없어 방바닥에 쌓이고, 책상 위를 굴러다니고 있다. 이제 그만 책 좀 그만사라는 잔소리를 가족들에게 늘 듣지만,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 모든 책들은 내가 꼭 읽어야 하는 것들이란 말이다.

 

어떤 타짜들에겐 첫 패가, 어떤 당구 동호인들에겐 첫 타가, 어떤 일본인들에겐 찻잔 속의 찻잎이 그렇듯 새해 첫날 읽은 책이 그 해의 운수를 말해준다는 믿음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닐 듯하다.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이다" 라는 이국의 속담을 바꿔말하면 "당신이 읽는 것이 당신"이고, 새해 첫 책은 이내 펼쳐질 한 해에 대한 암시인 셈이다. 의도적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모두 나름의 진실을 담고 있으니.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올해 나의 첫 책은 할런 코벤의 '숲'이었다. 흠, 우연이지만 나름 만족스럽다. 내가 영원히 사랑하는 장르의 책이니 말이다. 올해도 스릴러, 추리소설 분야를 열심히 달릴테니까. 그럼 작년 첫 책은 무얼까 돌이켜보니, 윌리엄 에이커스의 '시나리오 이렇게 쓰지 마라'였구나. 작년에는 작법 공부와 스터디에 충실했으니 딱 맞는 책이었군. 그럼 재작년에는 시라이시 가즈후미의 '다른 누구도 아닌 너에게'였다. 오호라, 어째 정말 첫 책이 그 해의 운을 말해준다는 게 맞는 것도 같다. 재작년에는 한창 남자친구와 사랑에 빠져 행복에 허우적거리던 해였으니 말이다.

자, 당신이 올해 처음 읽은 책은 무엇인가? 당신이 지금 읽는 책이, 바로 당신을 규정한다는 말은 어처구니 없는 단언처럼 들릴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매혹적인 마술같기도 하다. 아직까지 올해 아무런 책도 보지 않았다면, 자신의 한해 운을 만들어줄 멋진 책을 하나 골라서 읽어보라. 내년 이맘 때 즈음에 어쩌면 책을 읽기를 잘했다.고 미소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지금 당장 책을 집어들어라. 시간이 아깝지 않은가. 모래처럼 흘러내리는 시간을 붙잡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책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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