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설계도
이인화 지음 / 해냄 / 201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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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책을 지나치게 많이 읽다보면, 시놉만 읽어도 아, 이 작품이 어떻게 진행되겠구나. 대충 감이 오는 지경에 이르른다. 그래서 더 새로운 이야기, 더 색다른 캐릭터, 상상치 못한 반전을 기다리며 더 많은 이야기를 찾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한달에 수십권을 읽어도 어딘가 부족한, 마치 중독된 것처럼 책을 탐닉하게 된다는 것.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수백, 수천가지의 이야기들은 어쩔수 없이 두 손가락에 꼽히는 플롯으로 정리가 된다. 이야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고, 서사는 그것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일종의 변주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인화 작가의 신작인 이 작품을 내심 기대하면서 구입했다. 바로 작가가 직접 개발했다고 하는 저작 지원 프로그램이라는‘스토리헬퍼'라는 스토리텔링 저작도구 때문이다. 내년에 일반일들에게도 공개된다고 하는 '스토리헬퍼'는 머릿속에 든 온갖 분절된 아이디어를 이용해 장르·인물·상황·행동 등에 관한 29가지 객관식 질문에 답을 입력하면 A4지 한장 분량의 일관된 줄거리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그리고 쓰고자 하는 글의 기본 정보를 입력하면 기존 작품들과의 유사성을 백분율로 알려준다고 하니, 이거 정말 엄청난 거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작가는 이번 작품인 '지옥설계도'가 세상의 어떤 이야기와도 유사성이 55% 이하라고 밝혔다. 신선하고, 독창정일거란 얘기다.


오호.. 자, 이쯤되면 작가가 8년만에 내놓은 신작에 대한 기대감이 뭉실뭉실 피어 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서사의 패턴은 한정되어 있는데, 세상의 어떤 이야기와도 유사성이 낮다고 하니... 얼마나 독특한 이야기일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카마엘은 인위적으로 천재들을 만들어 1년 안에 새로운 세계 1위 기술 백 개를 얻는다는 걔획을 새웠어요. 신기술을 적용한 공장 천개를 동시에 세우고 고임금을 견딜 수 있는 일자리 백만 개를 창출하자는 계획이죠."

"그래서 성과를 얻었나요?"

"사람이 많이 죽었죠. 강화 약물의 임상실험 대상이 되어서. 사형수들, 장기수들, 창녀들, 정치범들... 자오얼이 첫 번째 성공 사례였어요. 카마엘은 감격해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겠죠."

"자오얼은 머리에 복사기가 있는 사람 같았어요. 온갖 책들을 엄청난 속도로 읽어치웠고 모든 내용을 소화했어요. 수학적 추론, 논리적 추론, 언어 능력, 공간 시각화 능력이 인간이 측정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죠. 외교, 경제, 사회, 산업 각 분야의 주제를 가지고 모든 전문가들이 놀랄 만큼 굉장한 보고소들을 잇달아 내놓았어요."

 

그러나 강화인간들은 스스로 부작용이 더 적은 약을 개발해, 새로운 강화 인간들을 만들어낸다. 왜냐하면 강화인간들의 눈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부족함이 눈에 뻔히 보였으니까. 높은 지능으로 이 세상이라는 무대의 뒤를 본 존재들이 과연 인간들의 아래에서 그들의 지배를 받는다는게 애초에 말이 안되지 않나.. 현실에서의 살인사건과 가상세계인 인페르노 나인에서의 이야기가 병렬 배치되어있는 이 작품은, 어딘가 애매모호하다. 다양한 장치와 세계관을 늘어놓기는 하는데, 그것이 이야기속에 잘 녹아들어있지 않다는 느낌이랄까.. 게임마니아들이라면 또 다를지 모르지만, 특히 인페르노 나인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크게 와닿지 않는다.


내가 너무 기대를 한 걸까.. 보통사람보다 10배이상의 지능을 가진 강화인간은 어딘가 '제노사이드'를 떠올리게 하고, 최면 세계인 인페르노 나인은 어쩔 수 없이 '인셉션'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어딘가 낯익은 설정의 유사성만이 문제인 건 아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겠다는 '독창성'에만 신경을 쓴건지, 새로움은 있지만 '감동'이 없다. 잘 빠진 몸체는 멋진데, 심장이 없는 로봇같다는 느낌....ㅡㅡ;; 작가는 후기에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소설밖에 없다고 말한다. 황당무계하고 졸렬한, 대중이 좋아하는 새빨간 거짓말만 씌어 있는 나쁜 소설과 어떤 사회 속에서 부대끼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 인간의 진실된 모습이 그려져 있는 좋은 소설이라고. 그렇다면 이 작품은 전자인가 후자인가.. 글쎄... 작가의 치열한 고민은 보이지만, 진심이 담겨져 있는지는 의문이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일생에 사랑이 몇 번 찾아올까.
열 번? 백 번? 터무니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앞으로 더 좋은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여든 살, 아흔 살까지 살아버린다. 내일은 무한히 다양하고 극적이고 경이로울 것이며, 아마도 또 사랑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강화인간은 이런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 눈을 뜨면 행복이 꿈처럼 아련하게 남아 있는 아침. 내가 진실로 그 사람의 사랑이었고 그 사람의 일부였고 그 사람의 존재가 줄 수 있는 모든 은혜를 다 받았다는 느낌이 이어지는 아침. 천사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아침. 그럼 아침은 일생에 한 번만 온다.


나도 일생에 한 번밖에 오지 않는, 그런 새로운 작품을 언젠가는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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