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뎀션 그렌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넌 여기서 죽은 건데.

내가 무사히 죽도록 도왔는데.

넌 계속 살아 있었어.

내가 살 수 있도록 도왔으니까.

 

여기,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죽어야만 했던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존 메이어 프레이. 열일곱이던 그는 열여섯 여자친구의 살해혐의로 기소되었고, 사형을 선고 받아 사형수동에서 10년을 보냈다. 살해된 엘리자베스와 그는 사건이 발생하기 1년 전부터 사귀어온 사이였다. 그녀의 집안 곳곳에 그의 지문이 있었고, 그녀의 몸에 그의 정액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었다. 범죄현장에서 그를 봤다는 목격자도 없었고. 현장 어디에서도 그의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다. 쉽게 흥분하는 다혈질에다 소년원도 두어 차례 들락거렸던 그의 이력이 혐오할 대상이 필요했던 사람들에게 적합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는 주지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딸이 살해당했으니 누군가 그에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했고, 권력을 이용해서 사형제도를 지지하는 배심원들로 배심원단을 꾸리는 게 가능했다는 얘기이다. 실제로 그가 무고한지는 작품의 끝까지 읽어봐야 알 수 있지만, 어쨌든 무고하다고 생각하는 그는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지 않고 그곳을 빠져 나온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다른 나라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산다. 스토리적인 재미를 위해 그가 '어떻게' 죽음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맞이했고, '어떤' 방법으로 지금의 삶을 살고 있었던 건지에 대한 부분은 밝히지 않겠다. 이 부분은 직접 책을 읽으면서 그 재미를 느껴봐야 하니까 말이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2퍼센트, 혹은 3퍼센트 정도는 잘못된 증거나 강압수사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경우라고 세계적인 연구결과가 밝히고 있다고 한다. 무고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한 벌을 받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얘기이다. 만약 이 연구 결과가 사실이라면, 사형이 집행되고 난 뒤에는 무죄가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다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형폐지론자들은 죄값을 목숨을 빼앗는 걸로 치르는 것이 피해자 가족들에게 보상을 하는 것은 아니므로 정의실현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이 있을 경우 사형이란 결국 또 다른 피해자를 낳는 것이고, 사형제도고 존속이 된다고 하더라도 강력범죄가 근절되는 것은 아니므로, 굳이 국가의 이름으로 살인을 행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다고 말한다. 반대로, 사형존치론자들은 억울한 사형이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수사하는 과정에서의 문제이지 사형제도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살인자가 사형을 선고 받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갈수록 흉악한 범죄들이 많아졌고, 그들을 수감하느라 국민들의 세금이 쓰이는 것도 말이 안되고, 정의의 구현을 위해서라도 사형제도는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해자 유족들도 물론 알고 있다. 살인범이 죽는다고 해서 죽은 가족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라는 걸. 하지만 죄에 대한 응당한 대가가 치뤄 지지 않고, 법이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는다고 느끼면 그들은 과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수 십 년간 매일, 매 시간, 죽은 가족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그들에겐 내일이 없으니까 말이다. 사형수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증오하는 감정을 흘려 보내고, 슬픔과 회환, 안도의 감정과 함께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는 말도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는 간다.

 

난 마커스빌 교도소가 문을 열 때부터 거기서 일해왔소. 평생 재소자들과 함께 살아온 셈이지. 30년 넘게 일하면서 온갖 종류의 범죄자들을 대해봤고 그 인간들이 저지른 짓도 속속들이 알게 됐소. 난 형벌제도를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형벌을 가하는 사회야말로 제대로 된 규범을 가진 사회라고 생각하니까.

 

, 한 가지 예외는 있소. 바로 사형제도. 규범을 가진 사회는 살인하는 사회가 돼선 안 된다는 말이오. 사형수동에서 몇 년을 보내고 나서야 그걸 이해하게 됐소. 어느 교도소를 가든, 수사상의 오류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이 있기 마련이오. 나뿐만이 아니라 교도소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내가 관리하는 사형수동에도 그런 무고한 사람들이 있소. 난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강력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사형제도 존폐에 관해서 논란이 일고는 한다. 작년에 사형제도 존속여부에 대해서 여론 조사를 했을 때. 찬성하는 쪽이 과반수를 훨씬 넘어섰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갈수록 흉악한 범죄들이 많아지자, 사람들 모두 보다 강력한 처벌로 재범 방지와 유사한 다른 사건을 막고 싶어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국가가 사람을 죽일 권한은 없고, 사법부가 오판을 할 가능성도 있으며, 범죄자의 인권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사형제도의 법적 근거는 헌법에 기초한 것이고, 그 법적인 근거를 믿지 못한다면 애초에 사법부가 존재하는 의미가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범죄자의 인권과 생명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인권과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어폐가 있는 게 아닐까. 우선 이 작품에서 작가의 입장은 사형제도폐지론자 쪽에 가깝다. 무고한 누명을 쓴 주인공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기도 하고, 피해자의 가족의 슬픔보다는 그들이 막무가내로 사형을 요구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기도 하고, 실제 죄의 유무보다는 국가적인 입장과 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모습도 반영되어 있으니 말이다. 한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법적 권한의 부당함도 맞는 말이고, 희생자 유족에게 적법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논리도 틀린 말은 아니다. 사형제도가 무고한 국민을 국가가 합법적으로 살해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극적인 정의 실현으로 인해 이후 벌어질 각종 범죄들에 대한 예방책이 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97년 이후로 사형집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사형대기수라는 명목으로 스무 명 가까이 수감 중인 걸로 알고 있고, 그들 흉악한 범죄자들을 위해 국민들의 세금이 매년 얼마나 낭비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난 여름 추리소설 학교에서 염건령 교수님의 범죄학 강의를 들을 때,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수치는 아니지만 실제 사형수 한 명당 1년에 쓰이는 금액이 5.000만원인데 그에 비해 피해자 유가족에 대한 보상은 500만원 정도라고 하셨던 걸 기억한다. 사실 가해자의 인권에 대해서는 떠들면서, 정작 피해자의 보상이나 인권에 대해서는 언론이든 경찰 측이든 배려가 그만큼 되고 있지 못한 게 현실이니 말이다. 그래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무조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사형으로 판결이 나는 것도 아니고, 죄질에 따라서 합당하게 판결이 나는 것이므로, 사형제도는 정의의 실현이라고 생각한다. 갈수록 사형제도 폐지 국가가 늘어나고는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강력범죄가 줄어드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죄를 지으면 대가를 치뤄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과거에야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한 것도 아니었고, 강압수사에 의한 자백도 있었고 하니 오판에 대한 우려도 당연한 것이지만, 현재 국내 검찰들의 수사 기반에서는 전혀 의미 없는 걱정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범죄자가 뉘우치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혹시 모를 개과천선만을 기다리며 피해자가 받아야 할 상처와 고통, 그리고 사회적 혼란을 묵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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