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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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누구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휴대전화에 입력된 주소록을 보았다. 통닭집, 고용부, 콜택시, 관리사무소, 피자집, 돈가스, 만둣집이 있었다. 이런. 가게 번호가 아닌 사람의 번호를 보여달란 말이다. 엄마가 생각났다. 살아 있을 때 엄마는 심야에 전화를 걸어왔다. 술에 취해 있을 때가 많았다. 두서없는 이야기 끝에 불쌍한 내 딸,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그래도 내가 너를 많이 생각하고 사랑한다 같은 멀쩡한 정신으로는 하지 못할 말을 하고 끊었다.


딱히 무슨 대답을 듣자고 말하지는 않았으리라. 그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는데 전화기를 꺼내니 목록에 내 이름을 발견했으리라. 그렇게 나는 아무 때나 전화를 걸면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못되고 무심하고 정이 없는 딸의 위치였다. 이제 나도 그러고 싶은데. 통화 버튼만 누르면 신호음이 가고 여보세요라는 말을 듣고 안심하며 대화를 시작하고 싶은데. 못 견디게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운 밤이 내게도 있는데. 엄마는 없다.


김영민 교수의 『공부란 무엇인가』에는 이런 글이 있다.


책은 사회와 자아의 중간에 있다. 사회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독서에 몰입할 수도 있고, 자아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책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준다. 책의 내용은 언어로 되어 있고, 언어는 사회가 공유하는 것이며, 그 언어를 통해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한다. 사회로부터 도망하기 위해 책을 읽다가 거꾸로 소통을 위한 언어가 풍부해지는 역설이 독서 행위에 있다.

(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中에서)​


우연인지 몰라도 김영민 교수의 책을 읽는 시점에는 마음이 복잡하고 일이 안 풀릴 때이다. 누가 들으면 대단한 일 하며 사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일 자체가 숭고하고 대단하고 진지한 일 아닌가. 그저 하루를 사는 게 아니다. 하루를 산다는 건 운이 좋으면 내일 아침에도 눈을 뜰 수 있게 되는 일이다. 어제는 진지하게 아침도 아닌데(김영민 교수의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의 영향으로) 삶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저녁에는 희망을 생각하자며 의지를 다져 놓고서는.


『공부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새삼 나의 공부 인생을 돌아보았다. 학과 공부를 충실하게 한 건 딱 중학교 때까지였다. 그 후에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만 하며 살아갔다. 책 읽기도 그중에 하나다. 책에는 많은 인간들의 모습이 담겨 있어 독자의 신분으로 팔짱 끼고 앉아서 뭐 니들이 그렇지 하는 자세로 읽으면 정말 재미있다. 신난다. 나와 비슷한 구질구질함을 책에서 발견하면 놀라기도 하고 뭐 니들도 다르지 않구나 하는 식으로.


『공부란 무엇인가』를 다 읽고 드는 생각은 이 책은 사람이란 무엇인가로 바꾸어 읽어도 좋겠다는 것이다. 공부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서 필요하다. 정답을 맞혀서 좋은 대학에 가고 취업에 성공하는 공부에서조차도 인간에 대한 탐구가 있어야 한다. 사회가 싫어 도피해 책으로 안착했지만 그 안에서도 여지없이 다양하고 기상천외한 기괴함으로 뭉친 인간 군상을 만난다. 그러면서 배운다. 사회에서 만나면 이렇게 행동해야지. 수준 낮은 대화와 비판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요령이 『공부란 무엇인가』에 있다.


한동안 리뷰를 쓰고 제목을 달지 않았다. 귀찮아서. 제목의 효용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글의 완성을 짓는 건 제목이라는 말에 서둘러 이 글에도 제목을 달았다. 서평이란 무엇인가. 글은 뜨끔했다. 서평에 기대어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나의 신세 한탄을 늘어놓곤 했는데 서평은 그런 것이 아니란다. 좋은 서평은 그걸 읽고 책을 읽고 싶게끔 만드는 것이라는 말. 그동안 나의 서평 쓰기는 실패였다는 말을 듣는 듯해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럼 제대로 써야지 안 그래?


이 글도 『공부란 무엇인가』를 읽고 쓰는 서평인데 시작부터 힘들다느니 죽은 엄마와 통화하고 싶다느니 누가 들으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만한 말을 늘어놓고 있다. 그런데 이걸 누가 진지하게 읽을까. 나조차도 긴 글을 웹페이지로 힘들어하는데. 그저 자존감 낮고 시간은 많은 열패감에 찌든 사람이 책을 읽고 어쩔 수 없는 마음에 쓴 글인데. 이걸 읽고 미치도록 읽고 싶다, 당장 사서 봐야지 할까.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아니까 내 마음대로 쓴다.


다만 기억할 것은 청중과 독자의 반응은 원래의 말과 글에 대해서 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독자나 청중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사실이다. 마치 '악플'이든 '선플'이든 원래 글에 대해서라기보다는 그 '리플'을 단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中에서)


『공부란 무엇인가』는 무슨 책인가. 공부를 잘할 수 있는 비밀을 알려주는 책인가. 책을 읽으면 공부뽕이 올라 당장 인강이라도 끊게 된다는 책인가. 공부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책인가. 읽고는 싶은데 시간은 없어 누군가 쓴 리뷰를 보며 읽은 척하고 싶어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시간 낭비. 제가 쓰는 서평은 서평일 수 없지만 서평인 척하고 싶은 서평입니다. 책에 대한 정보 대신 한 인간의 나약함과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며 자신이라는 존재의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글입니다. 어떤 반응을 보이든 김영민 교수의 저 말처럼 그 반응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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