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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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어디에나 있었다. 집과 학교, 서점, 헌책방, 책은 몇 권 없는데 북 카페라 불리는 그곳에도. 열렬한 하루키 팬이라고 자처하는 한 선배는 소설 창작 시간에 하루키 스타일로 글을 써와 지도 교수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후진 소설을 써와도 악평을 하지 않는 교수였는데. 읽고 나서는 말이 없었다. 음, 하루키는 하루키 스타일이 있는 거니까. 미국에서는 하루키 소설로 공부도 한다고 하지 않나. 대체 무슨 말인지. 차라리 이렇게 쓸 바에는 당장 집어 치어라고 하는 게 더 와닿을 것 같은데.


읽지도 않을 거면서 헌책방에 가면 하루키 책을 사다 날랐다. 가격이 쌌다. 초등학교 옆에 할머니가 운영하는 헌책방이었는데 그곳의 책 대부분을 권당 500원, 1000원으로 살 수 있었다. 그 돈으로 책을 살 수 있다니. 감격스러운 마음 때문에 그중에 내가 아는 작가인 하루키 책을 골라 나왔다. 책꽂이 몇 칸의 지분을 하루키가 확보했다. 잘 모르고도 읽었다. 신기했다. 하루키 소설은. 의미를 알 수 없으나 가독성이 훌륭했다. 다 읽고 나서야 방금 내가 무얼 읽은 건지. 누군가의 꿈속을 여행하고 나온 것 같은 아련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비 오는 날 콜라를 마시며 읽으면 기분이 나아진다. 맥주가 아니어도 된다. 그렇게 하루키 월드에서 팬까지는 아니고 주변인으로서 살아갔다, 지금까지. 신작 소설집 『일인칭 단수』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을 읽어가면서 깨닫고야 말았다. 철저한 주변인은 아니었구나. 열혈이나 극성의 수식어를 붙이는 팬까지는 아니어도 조용한 팬으로서는 살아갔구나 하는. 일단 책을 사 모으는 것부터가 팬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니까. 각각의 소설은 현재의 나가 과거의 어느 한 시절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첫 번째 소설 「돌베개에」는 열아홉 살 때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그녀와 잠자리를 갖게 된 시간으로 돌아간다. 삶이란 인과 관계를 무시하고 무작위로 사건이 벌어지면서 흘러가는 속성답게 '나'는 어쩌다가 월급이 박한 직장을 그만두는 '그녀'와 우연히 하룻밤의 인연을 만든다. 오늘 밤이 지나면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예감과 함께. 나중에 그녀는 자비로 출판한 단카 가집을 보내온다. 책에 실린 단카를 읽으며 그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추측이 든다.


「크림」 역시 우연히 한 여자애와 만났던 짧은 회상의 기록이다. 피아노 학원을 같이 다녔던 것일 뿐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기엔 이상한 일이 '나'의 세계에 일어났다. 지독한 일이 인생에는 일어나게 되어 있는데 그럴 땐 '중심이 여러 개 있는 원'을 상상하면 괜찮아진다는 교훈. 오로지 '나'로만 이루어진 세계의 중심에서 벗어나면 원만한 인생을 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정말 실제인가.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는 묻는다. 죽은 음악가를 추억하기 위해 쓴 허구의 글은 실제가 되어 버린다. 재미 삼아 쓴 글이었는데 누군가에는 리얼이라고 믿고 싶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효능을 발휘했다. 죽음과 현실의 경계를 가뿐히 넘나들 수 있는 건 기억에서 출발한 애도뿐이다.


「위드 더 비틀스」는 벽지처럼 존재했던 그 시절의 비틀스 음악과 함께 했던 시간을 소환한다. 여자친구를 만나러 간 집에서 여자친구는 만나지 못하고 그녀의 오빠라 불리는 사람과 특이한 시간을 보낸다. 가끔 기억이 끊긴다는 그녀의 오빠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때 저질러버릴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두려워한다. '나'는 위로나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의 말을 듣기만 한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그를 만나 그녀의 현재를 듣게 된다. 내면에 갇힌 불안 때문에 타인이 가진 두려움을 없애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들고야 만다.


하루키의 산문집 『고양이를 버리다』에서 확장된 이야기가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에 들어 있다. 조용한 상태로 유지되는 진구 구장에서의 시간, 야구팀 야쿠르트 스왈로스를 응원하게 된 예전의 나가 썼던 시를 소개한다. 오늘의 괜찮은 상태로 그럭저럭 유지되는 '나'를 바라보는 나.


첫 문장이 도발적인 「사육제(Canival)」는 잃어버린 찰나의 시간이 영원으로 바뀌고야 마는 현재를 씁쓸해한다. 미처 건네지 못한 말, 하지 못했던 행동. 아니 이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건네지 못한 말과 하지 못했던 행동이 아닌. 건네지 않은 말, 하지 않은 행동이라고. 능력이 없던 게 아닌 의지가 없어서 나누지 못한 마음의 반성이 「사육제(Canival)」에 표현되어 있다.


당신은 당신의 이름을 말할 수 있는가. 망설임 없이?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을 읽고 나서 당신은 순간 자신의 이름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기분에 빠질 수도 있다. 아니면 이름을 불러보더라도 낯선 기분에 휩싸일 수도. 온천 여관에서 일하는 원숭이와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원숭이의 인생. 원숭이가 사랑을 나누는 방식.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훔쳐 남은 인생을 그럭저럭 살아가는 일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여기게 된다.


소설의 표제작 「일인칭 단수」는 일곱 편의 소설에 담긴 메타포를 최종적으로 정리해 주는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굉장한 성공까지는 아니어도 질 좋은 슈트를 몇 벌 가지고 있는 '나'의 지금. 거울에 비친 자신이 낯설어 보인다.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닌데 괜찮은 사람인 척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말끔하게 슈트를 차려 입고 술집에 들어가 보드카 김렛을 주문하고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다. 그런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 여자. 그녀는 차마 내가 듣고 싶지 않았던 한 마디를 던지고야 만다.


소설 속의 '나'들은 과거의 기억과 싸운다.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훼손된 기억을 복원하기 위한 몸부림이 『일인칭 단수』에 들어 있다. '나'와 관계를 맺은 '그녀'들의 이름을 특정하지 못하고 복도에서 비틀스 음반을 들고 걸어갔던 여학생이 실재하는지조차 가늠이 안 간다. 한 시기를 열심히 만나 음악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에게마저 본질에 다가서는 일에 실패한다. 급기야는 '나'의 존재마저도 의문이 든다. 현재의 '나'는 여기에 없는 것이 아닌가 두려움에 빠진다.


또 다른 '나'가 있다. 그 '나'는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인 상태로 버젓이 살아가고 있다는 강력한 예감이 드는 것이다. 다른 '나'가 있는 세계는 죽음이 만연해 있고 바람이 불지 않으며 출구가 없는 세계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쉽게 무너지면서 이쪽의 '나'와 저쪽의 '나'는 기어이 만나 충돌한다. 「일인칭 단수」 속 '나'는 자신을 유일무이한 '나'로 인식하지만 '저쪽'에서 '나'를 만난 '그녀'로 인해 '삼인칭 복수'로서 실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끝이 없는 이야기 속에 '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서사를 이끌어 가지만 '그' 혹은 '그녀'로서 다른 이야기가 어딘가에서 쓰이고 있다.


그래도 괜찮은 건 불완전한 기억을 가지고 현재의 '나'는 '기록'이라는 행위를 통해 다른 세계의 복수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인칭 단수로서 말이다. 소설이라서 가능한 작업이다. 허구 안에서 '나'는 쉽게 잘못을 인정하고 죄책감을 가지며 연민을 느끼게 설정 된다. 먼저 연락하지 않아서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아서 부끄러운 나는 '기억의 상실'이라는 화두로 글을 써 나간다. 그것만이 최선이라는 각오로.


[질문1: 이 글의 마지막 문장 '먼저 연락하지 않아서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아서 부끄러운 나는 '기억의 상실'이라는 화두로 글을 써 나간다'에서 '부끄러운 나'는 다른 '나'들과 어떻게 다른가?]



[질문2: 이 글을 쓴 일인칭 단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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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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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갓집


그 집은 길가에 있었다. 대문이 없는 집이었다. 주인은 골목 안 조그만 슈퍼를 했다. 빨래를 널려면 슈퍼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러니까 남의 집 마당에 내 빨래를 널어놔야 했다. 부끄러워져서 속옷은 꼭 짜서 방 이곳저곳에 걸어놨다. 비가 오면 내 몸에서 쉰내가 나는 건 착각이었을까. 부모는 헤어졌고 나는 방치되었다. 한 달 월세가 7만 원인 그 집에서 혼자 2년을 살았다. 엄마랑 살던 동생이 잠깐 같이 살기도 했지만 철저히 혼자였다. 아이들은 꼭 내 방 앞에서 공차기를 했다. 골목은 비좁았고 하필이면 내 방 앞이 넓었다. 참다가 어느 날은 나가서 그만 가라고 소리를 치곤했다. 그들보다 몇 살 많은 나라서 말은 듣지 않았다. 잰 뭐야. 시큰둥한 얼굴로 다시 벽으로 공을 찼다.


여름방학 내내 갈 데가 없었다. 문을 열어 놓고 목욕탕용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유일하게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 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 앉아서 책을 읽어도 시간은 흘러가지 않았다.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나중에는 소록도 사람들의 비애가 내게까지 전해져서 마음이 뜨거웠다. 그 여름 날. 반장이랑 반장 엄마가 찾아왔다. 내가 혼자 지낸다는 이야기를 반장이 엄마한테 했다. 반장 엄마는 방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러곤 기도를 해줬다. 눈을 감았지만 눈 안쪽이 간지러워 뜨고 싶었다.


반지하


길갓집에 살다가 반지하로 이사 왔다. 주인은 할머니였다. 혼자 사셨는데 가끔 나를 자신의 1층 집으로 불러 음식을 먹이곤 했다. 사양하지 않고 식구 같은 얼굴로 상 위에 음식을 전부 먹었다. 수제비를 자주 해주셨다. 그 집은 월세가 10만 원이었다. 고등학교 내내 그 집에서 살았다. 장마철이 최악이었다. 습기 때문에 미치는 줄 알았다. 문학소녀답게 책을 사서 모았는데 아침에 펼쳐 두고 간 책이 학교 갔다 오면 퉁퉁 불어 있었다. 거짓말 아니다. 물기 머금은 책장은 쉽게 다음 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많은 책을 읽었다. 도서관에서 빌리고 헌책방에서 사서. 가난한데 꿈은 많아 결코 좌절을 모르는 주인공이 나오는 이야기에 심취했다. 나를 대입해 놓고는 무수한 상상을 부풀렸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언젠가는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상상과 추상이 섞여 몽상이 되었다. 대학을 목표로 아이들이 방학에도 학교에 나가 자습을 할 때 나는 하루 종일 어두운 방에서 책을 읽었다. 하성란의 『삿뽀로 여인숙』. 레마르크의 『개선문』. 박완서. 조세희. 조정래. 한 번은 국어 선생님이 최인훈의 『광장『을 읽으라고 했다. 읽었다. 도서실로 오라고 했다. 원고지를 주고 독후감을 쓰라고 했다. 은상을 받았다. 글쓰기로 받은 최초의 상. 문학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문학이 나를 구원해 줄 거야. 그런 마음을 갖게 만든 일이었다.


한옥집


하재영의 에세이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를 읽어갈수록 나는 어느 한 시절과 세월을 다시 마주 봐야 했다. 잊었다는 감각도 없이 잊고 지내왔던 시절이었다. 가스가 떨어져 난방이 안 된 방에서 이불 몇 채를 뒤집어쓰고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었던 길갓집. 문을 열어 놓으면 잠시 햇빛이 떨어지던 시간에 연습장을 펼쳐 놓고 소설을 썼던 반지하. 겨우 마련한 등록금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집을 구해야 해서 전봇대만 쳐다보고 다녔다. 다리가 아파 포기할 때쯤 '방 있음'이라는 글자가 적힌 종이를 발견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 방을 안내했다. 거대한 한옥집이었는데 대문에서 입구까지 다닥다닥 방이 붙어 있었다. 그 방이라면 들어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다행히 보여준 방은 두 분이 기거하는 바로 옆이었다. 도둑이 들 일은 없겠구나. 한 달에 14만 원. 10년을 살았다. 그 집에서. 책을 제일 많이 읽고 많이 사 모았던 집이었다. 사면을 책장으로 채웠다. 청소는 한 달에 한 번 했다. 집을 가꾼다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문학이 나를 구원했을까.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는 하재영 소설가의 집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책의 띠지에 여성학자 정희진은 책의 소개를 이렇게 남겼다. '나는 오랜 시간 울었다. 이 책이 내가 살아왔던 집들을 모두 불러냈기에.'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그리움과 비애 때문에 울컥했다. 정희진은 정확한 사람이구나. 또한 모두에게 공통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집에 대한 기록을 낱낱이 써낸 하재영은 정확하고 야무진 사람이구나를 실감한다. 자신이 살았던 최초의 집에 대한 기억을 시작으로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는 꿈의 좌절을 겪었지만 끝내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버텨낸 한 인간의 서사가 담담한 언어로 펼쳐진다.


총 열 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는데 마지막 문장마다 서글프고 힘겨웠던 과거를 소환 한다. 소설을 쓰겠다고 밖으로 나가지 않고 텔레비전만 보던 시간. 집 밖에서는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학비를 벌기 위해 아프간으로 떠난 젊은이는 죽음을 맞이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한 사람을 울게 한다. 가방 디자이너로 일하는 동생이 할부로 산 명품 가방을 메고 나간 언니는 백화점에서 가방을 잃어버리고야 만다. 자신의 싸구려 지갑은 쓰레기통에 버려졌고 에곤 실레의 그림으로 감추려 했던 초라한 현실을 목도한다.


시를 읽고 소설을 써도, 그림과 사진으로 싸구려 벽지를 감춰도, 나는 나의 현실을 잊은 적 없었다. 재개발의 희망조차 사라진 쇠락한 동네를 오르락 내리며, 창문 밖에서 오가는 거친 말소리를 들어야 하는 진짜 현실을. 나는 떠나기 전에 이 동네에 많은 것을 버리고 싶었다. 에곤 실레의 그림, 시가 적힌 종이, 쓰이지 않은 소설, 직업이 될 수 없는 직업 같은 것들을.

(하재영,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中에서)


한옥집에 사는 10년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학과 사무실을 빈번하게 드나들며 구직 정보도 챙기지 않았으며 교직 이수조차 하지 않았다. 재학 원생이라면 할인을 받아 싸게 들을 수 있는 영어 강좌도 등록하지 않았다. 학교에 가면 도서관에 갔고 학교를 나오면 시립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에 있는 책들이 달랐기에. 진은영이 시 '대학시절'의 한 구절처럼 '시시한 시들만 토해'내다가 졸업했다. 이력서에는 학교를 다닌 기록 외에는 적을 게 없었다. 단단한 마음도 없었기에 집에서 글만 쓰겠다는 각오도 없었다.


하재영은 집을 떠나올 때마다 무언갈 버린다. 텔레비전을 그림과 종이를 소설을. 그리고 '직업이 될 수 없는 직업 같은 것들을'. '집다운 집'에 살고 싶어서. 그렇게 살아가려면 소설을 버려야 했다. 꿈 하나를 포기하고 현실의 안온을 얻었다. 닥치는 대로 글을 쓰자 겨우 살만한 곳에서 살아간다. 그게 좋았다. 안 되는 걸 아는데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게 아니라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위치로 옮겨 갔다는 사실이. 남의 집이지만 사는 동안에는 '온전한 내 집'이라는 마음으로 집을 꾸미자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각오가 생겼다.


햇살 맛집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는 개인의 서사이기도 하지만 읽어가다 보면 알게 된다. 모든 집의 기록은 보편의 서사로서 개개인에게 작동한다는 것을. 오랫동안 마음속에 간직했을 그 꿈. '내 집 갖기'는 공간을 점유한다는 탐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곰팡이가 피어오르지 않고 책이 물에 젖지 않는 집. 낮인데도 불을 켜 놓는 대신 햇살이 들어와 사방을 밝혀 주는 집. 각자의 방이 아니라도 넓은 책상 하나를 들여놓고 그 앞에 앉아 무얼 적을까 고민하게 하는 집.


누군가가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싶다면, 그러나 그것이 어려운 환경이라면 집의 한구석에 자기만의 책상을 놓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책상이 차지하는 면적만큼 내밀한 공간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재영,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中에서)


다양한 집에 살아왔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를 읽고 나서 이렇게 쓸 수 있겠다. 나는 다양한 시절을 거쳐왔다고. 기쁨과 즐거움보다는 서글픔과 분노가 나의 한 시절을 지배했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그 시간을 살지 않았더라면 나는 시시한 사람이 되어 피곤한 일들을 하며 현재를 보내고 있을 거라고. 품위 있는 사람으로 살 수는 없었다. 척박하고 삭막한 집에서의 시간이었다. 밤새 부부 싸움을 하며 텔레비전 선을 잘라가 자신의 집에 연결하는 사람이 있었고 문을 열어 놓고 음악을 크게 듣는 이웃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미래의 집을 희구했다. 커다란 창이 있고 거실에는 책상을 놓아둔다. 바람이 잘 통하고 햇빛이 들어와 곰팡이가 올라오지 않는다. 이리저리 옮겨 다닐 일 없이 원하면 평생 살아도 되는 집으로 나를 밀어 넣어 준다. 팬데믹 시절, 나는 직장을 잃고 이력서에 쓸 한 줄을 위해 하루 4시간 컴퓨터 수업을 받고 있다. 엑셀과 수식 함수, 차트 그리기, 셀 합치기, 처리 용량 속도, 에드삭, 에드박 같은 용어를 외우며 살아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전히 누군가의 기록을 읽으며 과거의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때의 나는 어리숙하고 아팠던 거구나 이런 마음으로 현재의 나에게 용기를 준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는 좋은 책이다. 결코 용서할 수 없게만 느꼈던 과거의 나와 화해를 시켜주기 때문이다. 집에서의 기억을 꺼내보니 희미한 사랑이 있었다. 버림받았다고 울고 있을 때도 나는 혼자이지 않았음을 떠올린다. 반장이 주인집 할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곰인형을 사 왔던 엄마가 있었다. 하필이면 그때 아빠가 찾아와 얼른 가라고 화를 내었다. 곰인형을 주지도 못한 채 엄마는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졌다. 단발 파마머리를 한 늙은 여인만 보면 마음이 내려앉는다. 그때 왜 우리는 같이 살지 못했나.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가 좋은 책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말로 하면 신파가 되어 버리는 나의 서사를 길고도 자세하게 쓸 수 있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겨울밤은 서글프지 않았다. 내일의 햇살을 기대해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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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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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지 6일째 되는 날이다, 오늘은. 코로나가 무섭기도 하지만 원래 돌아다니는 걸 싫어하기도 해서 괜찮다. 짠함은 넣어둬. 그럼 집에서 무얼 하냐고? 정말 할 거 많다. 일어나서 몸무게 재고 물 마시고 청소기 돌린다. 날이 추워도 환기는 필수라서 창문을 전부 열어 놓은 채로. 상쾌한 공기 흡입하고 냉장고를 열어 배를 채운다. 뉴스를 보면서. 매일 확진자 수가 늘어나서 걱정이다.


전날 읽다만 책을 읽고 다 읽으면 리뷰를 쓴다. 책상에 앉아서. 창가 쪽으로 책상을 옮겨 놨는데 들어오는 햇빛의 양이 상당하다. 실내 온도를 높이기 위해 커튼을 열어 둔다. 책을 읽다가 집 안을 둘러본다. 약간의 강박증이 있어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놓아두어야 해서 일어나 물건의 위치를 바로 한다. 다시 책을 읽는다. 집에서 나는 다음의 도약을 위한 에너지를 충전 받는다.


요코야마 히데오의 장편 소설 『빛의 현관』을 하루 종일 읽었다. 햇빛 안에서. 광합성을 하듯. 소설은 건축사 아오세 미노루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건축주에게 의뢰를 받고 돌아오는 아오세. 그는 현재 이혼한 상태로 딸과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거품 경제 시절 건축 사무소에서 활발하게 일을 했다. 아내는 인테리어 전문가로 활약했다. 바쁘다 보니 둘의 시선이 묘하게 일치하지 않게 되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아내 유카리는 이혼을 요구했다. 대학 시절 친구였던 오카지마 밑에서 일을 한다. 아오세는 어느 날 이상한 의뢰를 받는다. 요시노라는 남자가 찾아와 아오세가 살고 싶은 집으로 건축을 해달라고 한 것이다. 자신의 취향이나 요구를 드러내지 않은 채 오직 아오세가 살고 싶은 집으로. 요시노는 그 무렵 획일적으로 설계를 하는 자신에게 지쳐 있었다.


북쪽으로 향해 집을 짓는다. 아오세는 건축에서 금기시되는 북쪽으로 집의 방향을 잡는다. 지붕에 세 개의 빛이 들어오는 굴뚝을 내고 거실로 빛이 모이게 하는 구조. 노스 라이트. Y 주택은 그렇게 탄생한다. 건축주 요시노는 큰 만족감을 드러냈다. 아오세는 자신의 대표작이 될만한 건축을 남겼다는 점에서 역시 만족을 한다. 그러다 연락을 받는다. Y 주택에 감명을 받은 또 다른 의뢰인으로부터.


의뢰인은 Y 주택에 반해 내부를 보러 갔지만 어쩐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오세는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소장 오카지마와 요시노의 집으로 간다. 누군가 침입 흔적이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2층에는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창가 쪽을 향해 놓여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고 해도 모자랄 만큼 심혈을 기울여 지은 집인데 방치해 놓았다니.


『빛의 현관』은 한 번 잡으면 내려놓을 수 없는 소설이다. 하루 종일 읽을 수 있는 게 가능한 게 이야기의 힘 때문이다.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삶이라는 걸 알아버린 체념이 삶의 정서가 된 한 남자. 그가 마주 보고 이겨내야 할 현실의 막막함을 마구 응원해 주고 싶다. 과거의 잘못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내내 후회로 살아간다. 아내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꿈꾸었지만 그마저도 실패한다.


아오세 미노루. 그가 지은 Y 주택에 숨겨진 비밀이 하나씩 드러날수록 가슴에는 비통함이 흐른다. 시간 여행자가 되어 과거로 돌아가 잘못을 수정할 수 없다. 결과로서 묵묵히 받아들이며 결코 절망으로 다가가지 않도록 나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빛의 현관』은 집이란 무엇일까를 성찰하도록 만든다. 어릴 때는 태양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존재하는 줄 알았다. 이사를 거듭할수록 지상에서 지하로 집을 옮겨 갈수록 빛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유년 시절 내내 이사를 다닌 아오세에게 집은 가족이 단란한 식사를 하고 내일을 도모할 수 있는 곳이라야 했다.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패했다. 집이란 타인을 절대적으로 의식해서 가꿀 수 없는 곳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빛의 현관』속 인물들은 행복을 찾게 된다. 사랑의 기억으로 혼자 평생 그림만을 그리며 살아간 화가 후지미야 하루코. 망명의 순간에 연인과 함께 하며 쓸쓸함을 달랜 건축가 타우트. 아들에게만은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고 싶어 했던 오카지마.


그들이 추구한 삶의 정서는 기적 같은 사랑이었다. 기억이 남는다. 죽음 이후에는. 사랑하는 이의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갈 때 빛은 그런 나를 보듬어 준다. 오늘 내 손 등을 간질이는 햇빛은 먼저 간 이들의 따뜻한 눈길임을 알아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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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도 있다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북포레스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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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다 미리의 산문집 『그런 날도 있다』는 느긋한 마음으로 읽었다. 느긋해지기 위해 마스다 미리의 책을 골랐다. 그런 믿음을 주는 작가가 있다. 어떤 장을 펼쳐 읽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현실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었던 위로의 말을 들려주는 작가. 내게는 마스다 미리가 그렇다. 신간이 나오면 꼭 읽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 의미 없이 보내진 않았을까 조바심 나는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의미 없이 보낸 게 아닌 의미를 찾아가는 하루였다고 말한다. 『그런 날도 있다』에 실린 글은 대략 2007년에 쓰였다. 책에서 밝히는 마스다 미리의 나이는 서른여섯. 첫 장은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 위해 도쿄로 상경한 10년 전에 일을 그리고 있다. 스물여섯에 마스다 미리는 연고도 없는 도쿄에 온다. 퇴직금과 가지고 있는 돈을 가지고서.


평소 성격대로라면 그 돈을 아끼고 아껴서 살아가야겠다고 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단다. '저금이 바닥날 때까지 느긋하게 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반 년을 지냈다.


그나저나 아무것도 안 했던 그 반년은 뭐였을까? 불현듯 떠오르곤 하는데, 그때마다 유쾌해서 참을 수가 없다. 그 시기는 도쿄라는 대도시에서 상처받지 않을 힘을 비축하기 위한, 나만의 소중한 휴식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마스다 미리, 『그런 날도 있다』中에서)


좋다. 이런 글. 온 마음을 다해 내게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조급해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최근에 한국에 번역돼 나온 마스다 미리의 책들 중 『그런 날도 있다』가 가장 좋았다. 무려 13년 전에 쓰인 글인데도. 오래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일상에서 겪어내는 다양한 상황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존경스럽다. 불합리한 일이 있으면 용기를 내어 따지기도 한다.


사치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코트와 냄비, 구두를 산다. 친구와 셀럽 모임을 만들어서 유명 식당을 탐방한다. 마사지를 받으러 다니고 피아노를 배운다. 세뱃돈 주는 걸 아까워하는 부분에서는 깊은 공감을 했다. 돈을 주면서도 이 돈으로는 이걸 샀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마스다 미리. 자신을 자책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좋아해 준다.


반성하고 깨우쳐야지 하는 계몽 의식으로 자신을 꾸짖지 않는다. 나마저도 내가 싫을 때가 있다. 그 순간에 왜 그런 말을 내뱉었는지. 잘못했다고 말하면 될걸. 미련한 고집을 부려 타인에게 상처를 준 나. 캄캄한 곳으로 숨고 싶을 때. 종일 누워서 그 일을 되짚어 보는 바보 같은 나에게 『그런 날도 있다』를 건넨다. 기운이 나지 않는다면 목차만이라도 읽어 보라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뒹굴뒹굴 누워 『그런 날도 있다』를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입가에는 미소를 지으면서. 찡그리고 분노하는 내가 아니게 된다. '어마어마한 사치'를 하거나 '포기하지 않겠어'라는 생각으로 돈을 돌려받는 용기를 내거나. 평범한 일상이란 거창한 게 아니라고 말해준다. 카페를 가지 못하면 창가 쪽에 의자를 하나 두고 앉아 있는 일로. 맛있는 디저트 가게가 문을 닫지 않도록 전화를 걸어 주문해 놓고 마스크를 쓰고 디저트를 찾아오는 일로.


우리에게 그런 날도 있었지. 암담한 기억이겠지만 회상해 보면 배시시 웃음 지을 수 있도록 오늘을 기분 좋게 살아내자. 『그런 날도 있다』는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소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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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공간 - 나를 이루는 작은 세계
유주얼 지음 / 허밍버드 / 2020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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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한 글이다. 유주얼의 『자기만의 공간』은. 다시 도서관이 열렸다. 코로나19로 달라진 것 중에 하나는 도서관을 갈 수 없다는 거다. 예전에는 휴관일을 빼고는 아무 때나 갈 수 있었다. 여유롭게 가서 책을 고르고 넓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곤 했었다. 지금은 눈치 게임처럼 가야 한다. 거리 두기 단계가 올라가면 휴관. 다시 내려가면 문이 열린다. 도서관 홈페이지를 즐겨찾기 해놨다.



열린다는 공고가 뜨면 얼른 가서 빌려온다. 2층, 3층까지 자유롭게 갈 수는 없지만 신간 코너에서 미리 찜해둔 책을 찾아서 나온다. 『자기만의 공간』은 신간 코너에 얌전히 꽂혀 있었다. 요즘 공간에 꽂혀 있기 때문에 당연히 빌렸다. 집순이인 나는 집이 좋다. 집 꾸미기가 좋다. 유튜브로 오늘의 집을 보는 걸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공간에 살고 있나. 어떻게들 해놓고 사나.



공감 가는 글이 많았다. 최소주의 생활에 입문하게 된 계기부터. 이웃을 이해하는 방법. 친구와 절교 후에 느꼈던 당혹감.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의미를 찾아가는 『자기만의 공간』의 글은 편안했다. 자신의 불행을 전시하지 않고 과한 수사 없이 마치 자신에게 건네는 듯한 무심한 위로의 말이 들어 있었다.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이 보이곤 한다. 유주얼은 단정한 사람일 듯하다.


생활을 꾸리는 형태로 보나 세계를 이해하는 건강한 시선으로 보나. 그동안의 집 주소가 적힌 초본을 떼어 볼 때. 나 역시 많은 곳을 다니며 한곳에 정착하기를 꿈꾸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저곳에 내 이름과 주소를 남겼다. 변기가 막혀 심야에 사람을 불러야 했을 때. 어떤 의도도 담기지 않은 "여기 혼자 사세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유주얼은 당황한다. 좋은 일이란 무엇인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결혼은 언제 할 거냐라는 의미로 묻는 좋은 일에 대해. 그 좋은 일은 없지만 다른 좋은 일은 많다고 외친다.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어렵다. 실패에 관해서는 더더욱. 누군가를 미워하지만 그 일에 대해 쓰는 건 조심스럽다. 상처를 주었지만 미안하다고 말하는 일에는 서툴다. 『자기만의 공간』을 읽으며 미움과 질투라는 감정에 차분히 생각을 해보았다.


자기만의 공간에 산다는 건 그 모든 감정을 껴안고 나를 미워하지 않아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드라마 정주행을 시작하고 문을 열어 환기를 하는 일. 소박한 오늘 하루의 투 두 리스트이다. 창고를 비우는 일이 추가되어야 하는데. 그 일은 내일로. 그래야 내일이 기다려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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