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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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어디에나 있었다. 집과 학교, 서점, 헌책방, 책은 몇 권 없는데 북 카페라 불리는 그곳에도. 열렬한 하루키 팬이라고 자처하는 한 선배는 소설 창작 시간에 하루키 스타일로 글을 써와 지도 교수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후진 소설을 써와도 악평을 하지 않는 교수였는데. 읽고 나서는 말이 없었다. 음, 하루키는 하루키 스타일이 있는 거니까. 미국에서는 하루키 소설로 공부도 한다고 하지 않나. 대체 무슨 말인지. 차라리 이렇게 쓸 바에는 당장 집어 치어라고 하는 게 더 와닿을 것 같은데.


읽지도 않을 거면서 헌책방에 가면 하루키 책을 사다 날랐다. 가격이 쌌다. 초등학교 옆에 할머니가 운영하는 헌책방이었는데 그곳의 책 대부분을 권당 500원, 1000원으로 살 수 있었다. 그 돈으로 책을 살 수 있다니. 감격스러운 마음 때문에 그중에 내가 아는 작가인 하루키 책을 골라 나왔다. 책꽂이 몇 칸의 지분을 하루키가 확보했다. 잘 모르고도 읽었다. 신기했다. 하루키 소설은. 의미를 알 수 없으나 가독성이 훌륭했다. 다 읽고 나서야 방금 내가 무얼 읽은 건지. 누군가의 꿈속을 여행하고 나온 것 같은 아련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비 오는 날 콜라를 마시며 읽으면 기분이 나아진다. 맥주가 아니어도 된다. 그렇게 하루키 월드에서 팬까지는 아니고 주변인으로서 살아갔다, 지금까지. 신작 소설집 『일인칭 단수』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을 읽어가면서 깨닫고야 말았다. 철저한 주변인은 아니었구나. 열혈이나 극성의 수식어를 붙이는 팬까지는 아니어도 조용한 팬으로서는 살아갔구나 하는. 일단 책을 사 모으는 것부터가 팬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니까. 각각의 소설은 현재의 나가 과거의 어느 한 시절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첫 번째 소설 「돌베개에」는 열아홉 살 때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그녀와 잠자리를 갖게 된 시간으로 돌아간다. 삶이란 인과 관계를 무시하고 무작위로 사건이 벌어지면서 흘러가는 속성답게 '나'는 어쩌다가 월급이 박한 직장을 그만두는 '그녀'와 우연히 하룻밤의 인연을 만든다. 오늘 밤이 지나면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예감과 함께. 나중에 그녀는 자비로 출판한 단카 가집을 보내온다. 책에 실린 단카를 읽으며 그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추측이 든다.


「크림」 역시 우연히 한 여자애와 만났던 짧은 회상의 기록이다. 피아노 학원을 같이 다녔던 것일 뿐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기엔 이상한 일이 '나'의 세계에 일어났다. 지독한 일이 인생에는 일어나게 되어 있는데 그럴 땐 '중심이 여러 개 있는 원'을 상상하면 괜찮아진다는 교훈. 오로지 '나'로만 이루어진 세계의 중심에서 벗어나면 원만한 인생을 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정말 실제인가.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는 묻는다. 죽은 음악가를 추억하기 위해 쓴 허구의 글은 실제가 되어 버린다. 재미 삼아 쓴 글이었는데 누군가에는 리얼이라고 믿고 싶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효능을 발휘했다. 죽음과 현실의 경계를 가뿐히 넘나들 수 있는 건 기억에서 출발한 애도뿐이다.


「위드 더 비틀스」는 벽지처럼 존재했던 그 시절의 비틀스 음악과 함께 했던 시간을 소환한다. 여자친구를 만나러 간 집에서 여자친구는 만나지 못하고 그녀의 오빠라 불리는 사람과 특이한 시간을 보낸다. 가끔 기억이 끊긴다는 그녀의 오빠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때 저질러버릴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두려워한다. '나'는 위로나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의 말을 듣기만 한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그를 만나 그녀의 현재를 듣게 된다. 내면에 갇힌 불안 때문에 타인이 가진 두려움을 없애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들고야 만다.


하루키의 산문집 『고양이를 버리다』에서 확장된 이야기가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에 들어 있다. 조용한 상태로 유지되는 진구 구장에서의 시간, 야구팀 야쿠르트 스왈로스를 응원하게 된 예전의 나가 썼던 시를 소개한다. 오늘의 괜찮은 상태로 그럭저럭 유지되는 '나'를 바라보는 나.


첫 문장이 도발적인 「사육제(Canival)」는 잃어버린 찰나의 시간이 영원으로 바뀌고야 마는 현재를 씁쓸해한다. 미처 건네지 못한 말, 하지 못했던 행동. 아니 이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건네지 못한 말과 하지 못했던 행동이 아닌. 건네지 않은 말, 하지 않은 행동이라고. 능력이 없던 게 아닌 의지가 없어서 나누지 못한 마음의 반성이 「사육제(Canival)」에 표현되어 있다.


당신은 당신의 이름을 말할 수 있는가. 망설임 없이?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을 읽고 나서 당신은 순간 자신의 이름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기분에 빠질 수도 있다. 아니면 이름을 불러보더라도 낯선 기분에 휩싸일 수도. 온천 여관에서 일하는 원숭이와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원숭이의 인생. 원숭이가 사랑을 나누는 방식.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훔쳐 남은 인생을 그럭저럭 살아가는 일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여기게 된다.


소설의 표제작 「일인칭 단수」는 일곱 편의 소설에 담긴 메타포를 최종적으로 정리해 주는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굉장한 성공까지는 아니어도 질 좋은 슈트를 몇 벌 가지고 있는 '나'의 지금. 거울에 비친 자신이 낯설어 보인다.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닌데 괜찮은 사람인 척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말끔하게 슈트를 차려 입고 술집에 들어가 보드카 김렛을 주문하고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다. 그런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 여자. 그녀는 차마 내가 듣고 싶지 않았던 한 마디를 던지고야 만다.


소설 속의 '나'들은 과거의 기억과 싸운다.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훼손된 기억을 복원하기 위한 몸부림이 『일인칭 단수』에 들어 있다. '나'와 관계를 맺은 '그녀'들의 이름을 특정하지 못하고 복도에서 비틀스 음반을 들고 걸어갔던 여학생이 실재하는지조차 가늠이 안 간다. 한 시기를 열심히 만나 음악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에게마저 본질에 다가서는 일에 실패한다. 급기야는 '나'의 존재마저도 의문이 든다. 현재의 '나'는 여기에 없는 것이 아닌가 두려움에 빠진다.


또 다른 '나'가 있다. 그 '나'는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인 상태로 버젓이 살아가고 있다는 강력한 예감이 드는 것이다. 다른 '나'가 있는 세계는 죽음이 만연해 있고 바람이 불지 않으며 출구가 없는 세계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쉽게 무너지면서 이쪽의 '나'와 저쪽의 '나'는 기어이 만나 충돌한다. 「일인칭 단수」 속 '나'는 자신을 유일무이한 '나'로 인식하지만 '저쪽'에서 '나'를 만난 '그녀'로 인해 '삼인칭 복수'로서 실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끝이 없는 이야기 속에 '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서사를 이끌어 가지만 '그' 혹은 '그녀'로서 다른 이야기가 어딘가에서 쓰이고 있다.


그래도 괜찮은 건 불완전한 기억을 가지고 현재의 '나'는 '기록'이라는 행위를 통해 다른 세계의 복수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인칭 단수로서 말이다. 소설이라서 가능한 작업이다. 허구 안에서 '나'는 쉽게 잘못을 인정하고 죄책감을 가지며 연민을 느끼게 설정 된다. 먼저 연락하지 않아서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아서 부끄러운 나는 '기억의 상실'이라는 화두로 글을 써 나간다. 그것만이 최선이라는 각오로.


[질문1: 이 글의 마지막 문장 '먼저 연락하지 않아서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아서 부끄러운 나는 '기억의 상실'이라는 화두로 글을 써 나간다'에서 '부끄러운 나'는 다른 '나'들과 어떻게 다른가?]



[질문2: 이 글을 쓴 일인칭 단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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