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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칭 - 자연의 패턴 속으로 떠나는 여행 승산의 대칭 시리즈 4
마커스 드 사토이 지음, 안기연 옮김 / 승산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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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과 수학자에 관한 책은 처음이다. 수학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숫자와 끝없이 씨름을 해야 하는 것 밖에 없다. 중학교 때인가 음의 정수, 양의 정수, 유리수의 혼합셈 문제를 풀 때 늘 부호를 빼먹어서 답이 틀렸던 기억, 어찌어찌 풀기는 했는데 답이 0이었을 때의 그 허무함, 소금물의 농도도 먹어보고 구하는 것이 빠를 듯싶었고 시간과 거리, 속도 등을 배울 때는 내 지능이 두 자리 수가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했었다. 도형은 특히 싫었다. 점대칭 선대칭이 내가 아는 대칭의 전부다. 중학교 때부터 싫어진 수학에 오답을 제출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이런 수학을 아름답게 여기고 여기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있다. 책은 쉽지 않았지만 재미있었다. 내가 만약 저렇게 오답만을 제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수학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었을 것 같은 아쉬움이 남았으니 책이 주인을 잘못 만난 셈이다.

책 속에는 자연에 숨겨진 모든 대칭의 패턴을 목록화하겠다는 야심에 가득한 모험가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주사위, 불가사리, 에셔의 그림, 알람브라 궁전의 17가지 대칭 등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로부터 시작된다. 얼마전 플르타르코스의 영웅전을 읽으며 루비콘 강에 이르렀던 카이사르가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한 말을 마주쳤을 때 나는 새삼스럽게 깜짝 놀랐었다. 주사위가 이미 기원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 책에 따르면 주사위 게임은 그리스 군대가 트로이를 포위 공격하는 동안 시간을 보내기 위해 팔라메데스가 고안했다고 한다. 로마 군인들은 주사위게임을 너무나 즐긴 나머지 그 전쟁중에도 무거운 주사위판을 등에 짊어지고 다녔다고 한다. 알고보니 주사위의 모양도 아주 다양하다. 그러나 완벽한 대칭 다면체는 다섯 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알람브라 궁전에 있는 17개의 패턴을 찾아나선 작가를 따라다니는 일은 흥미진진했다. 선회대칭이니 반사대칭이니 미끄럼대칭이니 하는 전문 용어는 몰라도 좋았다. 60도를 돌리든, 120도를 돌리든, 90도를 돌리든 점을 중심으로 하든 회전축을 중심으로 하든 아무상관없이도 재미있을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더욱 재미있었던 것은 보르헤스에 대한 저자의 언급이었다. 그는 보르헤스를 수학자들의 작가라고 한다. '그의 단편 소설들은 마치 수학 증명처럼 무리없이 엮어진 아이디어들로 정교하게 구성된다. 각각의 단계는 정밀함과 빈틈없는 논리를 갖추면서도, 놀라운 반전과 풍자로 가득하다'니...믿을 수 없다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왜 보르헤스의 책이 잘 안 읽히는지 여기에 해답이 있는 듯하다.  

이 책 중에 아마도 내가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소수를 가지고 하는 수학적 농담이었던 것 같다. 증류소 방문을 마치고 미니어쳐 술병을 주자 알콜도수가 30퍼센트에 불과하고 게다가 소수도 아니라는 사실이 수치스럽다는 말을 농담으로 하는 수학자나 그말을 듣자  술병들을 홱 치워버리고는 한참 있다가 새로운 병들을 가지고 나타나서는 '43퍼센트입니다. 제 생각에는 소수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주인이나 못말리는 수학에 미친자이지만 한편 귀여운 구석이 있다. 

우리의 생활에 퍼져있는 다양한 수학적 요소들을 찾아낸 설명을 듣노라면 수학을 떠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루브르 박물관의 피라미드, 파리 라빌레트 공원의 라제오드, 신 개선문 등의 건축 뿐만 아니라 일본의 가부키, 쇤베르크와 바흐, 모짜르트의 음악, 현대무용 등 그 범위를 제한 할 수 없다. 이런 재미와는 별개로 5차 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논문을 과학원에 제출했지만 빛을 보지 못하고 26세에 요절한 닐스 아벨, 그의 뒤를 이어 신체적 자유를 박탈당한 감옥에서 5차 방정식에서 새로운 패턴을 발견하고 자신의 논문을 완성했지만 복잡한 사랑게임의 논리와 규칙을 파악하지 못해 가슴에 총을 맞고 죽은 갈루아의 이야기는 가슴아팠다. '스무살에 죽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모든 용기가 필요하지'라고 했던 그의 말에 가슴이 뻐근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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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3-28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읽은 영국 수학자 하디의 <어느 수학자의 변명>이 떠오르네요. 어릴 때 교회에 가면 너무 지겨워 성가대가 부르는 찬송가의 음의 길이를 숫자화해서 인수분해하는 놀이를 즐겼다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그러면서 신동 소리깨나 들었던 수학자들은 대부분 어릴 때 그런 놀이를 즐겼다고 하더라구요. 아무래도 일반인과는 뇌구조가 다른 것 같아요^^

반딧불이 2011-03-28 01:15   좋아요 0 | URL
후와님께서는 수학관련 책을 많이 보시는 것 같아요. 혹시 후와님도 음의 길이를 숫자화하거나 자연에 숨겨진 대칭을 찾느라 거리를 헤매시는 건 아니에요?

비로그인 2011-03-28 01:19   좋아요 0 | URL
제게 맘 상한 일이 있으시다면 차라리 욕을 하세요. 그런 숭악한 말씀은 마시고요 ㅋㅋ^^

반딧불이 2011-03-28 01:26   좋아요 0 | URL
아유. 깜짝이야. 내일쯤에나 오실줄 알았더니.... 욕은 그만두고 한 대 때려주고 싶은데욧! ㅋㅋ

양철나무꾼 2011-03-28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신간평가단 도서인줄 알고...님의 리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전 신간평가단이랑 상관없이 이 책을 가지고 있는데...무려 읽기도 했는데,
난해하고 넘 어려웠어요~ㅠ.ㅠ

제 자신이 문과적 성향이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실은 이과였거든요.
그래서 수학 잘하는 친구들 종종 봤거든요.
그런 외려 그 친구들 정신세계 유니크 하더라구요~
독특하기도 하고, 단순하기도 하고~^^

반딧불이 2011-03-28 09:37   좋아요 0 | URL
저라고 안어려웠겠습니까? 다만 가끔 난해한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해야하느니..하면서 이차방정식도 풀어보고 대칭축도 찾아보고 했죠. 머.

저 역시 문과적 성향이라고 찰떡같이 믿고 있는데 아무래도 아닌듯 싶습니다. 그동안 제가 알던 수학과는 달리 추상적인 것을 구상으로 풀어내려는 수학자들의 노력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cyrus 2011-03-28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에서 그나마 재미있게 읽은게 알함브라 궁전 이야기에요, 나머지 내용들은
수학적 지식을 요구하는 것들이라서,, 그냥 대충 읽었어요,, ^^;;

반딧불이 2011-03-28 09:39   좋아요 0 | URL
서평이 마감날짜가 지났는데도 절반이 안올라오는걸 보면 누구라도 그러셨을 것 같은데요.
 
<도스또예프스키 평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에드워드 H. 카 지음, 김병익.권영빈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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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는 여덟 명의 아이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가 열다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열여덟 살 되던 해 피살당했다. 의사였던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 적지는 않았겠지만 넉넉한 환경은 아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28세 때 뻬뜨라세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8년의 징역을 언도받았다. 훗날 황제에 의해 ‘4년 징역, 그 후엔 사병으로 복역’으로 감형되었지만 이 때문에 그는 추방되어 족쇄를 차고 수용소에서 4년을 지냈다. 이런 형을 받게된 사건의 근본적인 성격은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고 군법회이 공식문서도 하찮은 점만 지루하게 강조될 뿐 뚜렷한 증거도 없는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이 사건에 대해서는 어조나 내용이 자주 바뀌기는 마찬가지여서 후세의 궁금증을 더할 뿐이다. 그러나 이 경험은 <죽음의 집의 기록>으로 남았고 <죄와 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그가 감옥을 나와 남은 형기를 병사로 근무하게 되었을 때 세관의 하급관리였던 이사예프의 부인과 사랑에 빠졌다. 이것은 그에게 첫사랑이었으며 그녀의 남편이 술 때문에 죽자 마리야 드미뜨리예브나 이사예프와 결혼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나이는 36세였다. 그러나 그녀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아들 하나를 남겨 의붓아버지로 만들고는 폐렴으로 사망했다. 이후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가 운영하던 잡지에 단편을 발표했던 뽈리나 수슬로바와 한 때 사랑했으나 결혼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43세에 첫 번 째 아내를 잃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46세에 당시 속기사였던 스무 살의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뜨끼나와 재혼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평생 동안 도스토예프스키의 성숙한 동반자였다. 낭비벽도 심하고, 룰렛에 대한 열정으로 도박에 자주 빠졌으며 값나가는 물건들을 전당포에 맡길 만큼 생활은 곤궁했다. 거기다가 때때로 심각한 지경의 간질 발작까지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모든 상황을 나이에 맞지 않게 이해하고 포용하며 도스토예프스키가 작업에만 몰두 할 수 있게 빚을 내어 외국으로 도피하는 모험을 강행하기도 했다.  

그들은 첫 딸 소피를 낳은 지 석 달 만에 감기로 잃었고 후에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다. 안나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넉넉하지는 않아도 경제적인 안정을 주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안나에게 심리적으로다 상당히 의존했던 듯싶다. 도스토예프스키는 60세에 폐의 동맥이 터져 유명을 달리했지만 그의 죽음은 문학적 명성이 절정기에 다다랐을 때였다. 3만 명에 이르는 조객이 줄을 이었고 저녁이 되어도 무덤 주위의 군중들은 흩어질 줄 몰랐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벨린스키, 네끄라소프, 뚜르게네프 등 쟁쟁한 인물들과 동시대를 살았다. 특히 뚜르게네프와는 태생도 작품의 성향도 지향하는 바도 서로 달랐지만 여러 가지 인연이 닿아있기도 하다. 그들은 러시아 문학사에서 도스토예프스키와 뚜르게네프 논쟁으로도 유명해졌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창작활동을 시작할 무렵 러시아의 소설은 센티멘털 소설, 괴기소설, 자연주의 소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센티멘털 소설과 괴기소설에서 많은 것을 빌려왔지만 특히 고골에 의해 창시된 자연주의적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그가 등장하자 새로운 고골이라는 평가가 따랐으니 말이다.

E.H. 카의 도스토예프스키 평전은 그동안 내가 읽었던 몇 안 되는 평전과 구별되는 점이 있다. 우선은 작가가 역사학자라는 점이 가장 도드라진다. 대상에 대한 냉정할만큼의 객관적 거리확보는 여기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또 도스스토예프스키 작품에 대한 평전이라할만큼 그의 작품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 것이 다른 평전들과 가장 다른 점이다. 저자는 주제별로 작품에 대한 분석을 해두었는데 이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는데 크게 도움이 될것이다.  

E.H. 카의 도스토예프스키 평전은 박홍규의 카프카 평전처럼 자신이 쓰는 대상에 대해 손가락이 오그라들 만큼 살갑게 굴지 않는다. 카의 도스토예프스키 평전은 리영희 평전처럼 자신이 쓰고자 하는 대상의 글 인용으로 절반 이상을 채우지 않는다. 카의 도스토예프스키 평전은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처럼 박진감 넘치거나 살아움직이게 그리지는 않았지만 작가의 생활과 작품과의 관계를 추적하는데 유용하다. 카의 도스토예프스키 평전은 고모리 요이치의 나는 소세키로소이다와 형식면에서 가장 유사하다.  E.H.카는 역사학자이고 고모리 요이치는 일문학자다. E.H.카는 영국인으로서 러시아인을 다루었고 고모리 요이치는 일본인으로서 일본인을 다룬것이 이들의 차이일 것이다. 평전이 다루는 인물에 대해 객관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면 이 책은 그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평전이 인물이나 작품에 대해 비평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면 그 또한 이 책은 그 책무를 다하고 있다. 

이 책에 대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다. 번역하신 분들은 신뢰할 만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주어와 서술어의 문장호응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읽는데 두 번 이상 꼼꼼히 읽지 않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더러 보인다. 오탈자도 당연히 없을 리 없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외래어의 표기다. 도스또예프스키로 하던지 도스토예프스키로 하던지 출판업계에서 통일해 주었으며 좋겠다. 리뷰마감에 쫓겨 아직 찾아보지 못했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시들로프스키가 내가 '낯설게 하기'라는 말로 기억하고 있는 쉬클로프스키인가도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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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1-03-27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님, 저 마지막에서 두번째 대목에서 저는 추천 도서 목록을 막 주워 담아요. 빅홍규의 카프카 평전이 눈에 뜨이네요. 관심있었던 책, 친절하고 정갈한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반딧불이 2011-03-27 23:38   좋아요 0 | URL
아이고 블랑카님 어째서 하필이면 그 책입니까. 도서관에서 먼저 일별하시기 바래요. 오문과 비문과 난무하는 오탈자로 박홍규에 대한 신뢰를 저버린 책입니다.

2011-04-04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1-03-28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전에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 몇 권을 읽어서 다행이지 평전치고는 재미가
조금 없었던거 같아요,,,^^;; 그나마 도박벽에 대한 내용은 읽어볼만했을뿐이구요,,
어느 역사학자가 말하길 E.H. 카는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게 만드는 역사 주제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체는 무미건조하다고 평한 적이 있어요,,
제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카의 서술 자체에 우러나오는 무미건조함에
매끄럽지 않은 번역까지 더해져서 읽는데 쉽지 않았던거 같습니다. ^^;;

반딧불이 2011-03-28 09:51   좋아요 0 | URL
저도 읽을 때는 사이러스님과 비슷한 생각이 들었었는데요. 다시 생각해보니 평전이란 이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객관적인 거리 유지, 작품과 작가와의 유기적인 관계 등은 나무랄 때가 없지 않나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것을 즐겁게 읽지 못한 것은 순전히 번역때문이라고 매도하고 있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3-31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국인으로서 소련인을 다루었다...도스토예프스키로서는 자신을 소련인이라고 표기한 반딧불이 님께 항의할 것 같은데요.

반딧불이 2011-03-31 00:38   좋아요 0 | URL
하하.. 정말 그럴 것 같은데요. 얼른 바꾸겠습니다. 지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루쉰P 2011-04-04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모리 요이치의 '나는 소세키로 소이다'가 혹시 번역돼 있나요? 꼭 한 번 읽어 보고 싶네요. 후반부의 평전에 대한 평가에 대해 좋은 부분이 많아서 좋았네요. ^^ 저도 꽤나 평전을 좋아하는데 이번 평전은 정말 무미건조하고 객관적으로 모든 자료를 가지고 그를 분석하는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최대한의 추측은 삼가하구요. 사람은 100% 완벽하게 다시 재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알 수 없는 일이라 항상 생각해요. 한 30~40%만 재생해 내도 훌륭한 평전일 것 같다고 홀로 생각하는데 제가 이상한가요? ㅋㅋㅋ

반딧불이 2011-04-05 12:34   좋아요 0 | URL
그럼요. 당연히 번역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냥 평전을 읽을 때는 글쓴이가 어떤 관점을 취하고 있는지 생각하면서 읽어요. 똑같은 사람에 대한 평전도 쓰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E.H.카처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해주는게 좋죠. 나머지 판단은 제 몫이니까요.

루쉰P 2011-04-05 12:5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제 몫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좀 어려운 부분인 것 같기도 해요. 하기사 세상사도 제 멋대로 판단하며 사는데 왠지 평전이라고 하면 마치 사람을 박제해서 전시해 놓듯이 저 사람은 위대하니 저래야 한다거나 라는 등의 고정된 선입관으로 볼려고 하는 정답 찾는 듯한 평전 읽기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제 자신을 보더라도 어느 때는 변태적 일정도로 욕망에 차 있고 어느 때는 봄의 여운을 느끼며 여유로운 사람이 돼 있고 하는 등...어려워요.^^ 하도 학교 다닐 때 정답 찾는 교육만 받아서 그런지 정답이 없는 것이 세상사고 사람도 그러한데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뇌구조가 못 되는 것이 한탄스러워요. ㅋㅋ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루타르코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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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플루타르코스의 『비교열전』은 23쌍의 그리스 로마 영웅의 일생을 기술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이 책에 실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의 영웅 5명, 로마의 영웅 5명 총 10명의 모습을 실었다. 플루타르코스가 알렉산드로스 전에서 밝혀 두었듯이 그가 쓰려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전기이다. 때문에 수천 명이 전사한 전투나 전쟁장비 같은 이야기보다 한 인물의 우연한 발언이나 농담 같은 사소한 일들에 더 비중을 두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영웅’이라 불리는 ‘인간’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영웅’에 대한 현대의 사전적 의미는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다. 지혜와 재능과 용맹이 영웅의 세 가지 조건처럼 여겨진다. 이것은 플루타르코스가 다룬 그리스 로마의 영웅 열 명 모두에게서 찾아 볼 수 있었다. 때로는 지혜가 때로는 재능이 또 때로는 용맹이 돋보이기는 했지만 어느 한 사람도 그것이 결여되어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영웅의 현대적 의미를 기원전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해도 될지는 의문이다. 키케로는 그의 책에서 지혜, 정의, 용기 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가 소위 '영웅'이라 칭하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더 부각되는 모습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영웅의 조건을 ‘탁월함’이라 부른다. ‘탁월함’은 완벽함과는 구별되어야 하며 미덕 혹은 한 사람이 가진 고유하면서도 빼어난 자질이라 하는 편이 더 가깝겠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고유한 탁월함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탁월함은 평상시에 잘 연마했다가 필요한 때에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두장이에게는 구두장이만의 탁월함이 있고 달리기 선수에게는 그만의 탁월함이 있는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러한 탁월함을 그리스인에게서는 의사와 키잡이에 비유하고 로마인에게서는 운동선수에 비유하여 그리고 있다.

그리스의 영웅 다섯 명 중에서 나는 알렉산드로스가 가장 매력 있게 느껴졌고 로마의 영웅들 중에서는 안토니우스였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참으로 멋지게 그려졌던 솔론이 이 영웅전에서는 빛을 잃었다. 대신 뤼쿠르고스가 돋보였다. 그는 왕들에 의한 참주제와 원로들에 의한 과두제, 백성에 의한 민주제 등을 혼합한 혼합정체를 만들었다. 토지를 재분배하고 부에 대한 욕망을 근절하기 위해 공동식사제도를 도입했다. 그가 돈에 대한 가치를 평가절하하기 위해 철제 돈만을 사용하게 한 것은 웃음을 금치 못하게 한다.  

그는 또 법을 성문화하지 않았다. ‘성문법이란 거미줄과 같은 것이어서 약하고 작은 것이 걸려들면 붙잡을 수 있어도 힘 있고 돈 있는 자가 걸려들면 갈기갈기 찢어진다.’고 한 아나카르시스의 말이 그 이유인 듯싶다. 그리스의 영웅들에게서는 참으로 많은 제도와 정책들이 만들어진다. 어떤 사람의 권세가 압도적이어서 민주주의의 평등과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지면 그들은 10년 동안 도편추방하여 그의 명성과 권위를 훼손했다. 그런데 이 제도는 처벌의 수단이 아니었다. 오히려 탁월한 자들을 비하하기 좋아하고 그렇게 특권을 박탈하고 한풀이를 함으로써 시민들의 시기심을 달래게 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레오니다스 등을 스승으로 삼았던 알렉산드로스는 빼어난 외모와 자기 절제, 섬세한 심성 등이 돋보였다. 고열에 시달리다가 갈증이 나서 포도주를 마시고는 정신착란에 빠져 헛소리를 하다 죽었다고도 하고 또 독살설도 있는데 그 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었다는 얘기가 있다. 어떤 것이 사실인지 알 수도 없고 어떻게 죽었는지가 중요한 것도 아니지만 그의 죽음이 아까운 것만은 사실이다.

로마의 영웅 다섯 명 즉 마르쿠스 카토, 티베리우스 그락쿠스, 가이유스 크라쿠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도 예외가 아니다. 이들에게서 탁월함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이미 플루타르코스의 검증을 거쳤으니 말이다. 그러나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도 여전히 커다란 울림으로 남아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든가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같은 수많은 명언들을 남기고 삼두동맹, 갈리아전쟁, 역법개혁 등 서양사에 큰 영향력을 끼쳤지만 끝내 암살당하고 만 카이사르가 아니다.  

그런가 하면 역자로부터 ‘탁월한 자질과 유리한 조건을 살리지 못하고 허송세월하다가 무비유환의 삶을 살다 간 반면교사’라는 소리를 듣지만 제2차 삼두정치를 성립했고 동방원정을 했던 안토니우스도 아니다. 그것은 이런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정복한 클레오파트라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가 드넓은 영토를 정복했다면 클레오파트라는 두 정복 왕을 정복한 셈이다. 과연 진정한 영웅은 누구인가? 플루타르코스가 기술한  그리스 로마 영웅 23쌍 중에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여성의 이름은 없는 듯하다. 영웅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당시에 여성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최소 9개 국어를 구사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플푸타르코스에 의하면 그녀는 자신의 혀를 여러줄의 현악기처럼 다루었다고 한다. 그녀는 또 안토니우스를 유혹하기 위해 엄격한 식이요법으로 체중을 줄이기도 하고 안토니우스가 다가오면 황홀하다는 듯 쳐다보고 떠나가면 괴로워 기절할 것 같은 모습을 지어보였다고 한다. 그녀는 미모뿐만 아니라 매력과 자기 절제, 정치적 술수까지 모조리 갖추었던 듯하다. 옥타비아누스의 개선행렬을 장식하는 전리품으로 사용될 수 없어 자신의 죽음마저도 아름답게 치장할 줄 알았던 여자. 순간의 기지는 말할 것도 없고 교활함까지도 사랑스러운 이런 여자를 어떻게 남자로서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내가 그리스 로마시대에 태어나지 않았음을 한탄했다. 이 매력적인 영웅들을 유혹하느라 일생을 탕진하더라도 아깝지 않을 듯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를 읽고 당시에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같다. 카이사르가 신념과 원칙에 따라 움직였다면 안토니우스는 흥분과 격정이 꿈틀거리는 감정의 원초적 공간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위험을 무릅쓰고 권력과 통치를 추구 했다면 안토니우스는 사랑을 좇았다. 카이사르가 공적인 제도 수립 등에 힘썼다면 안토니우스는 ‘모방 수 없는 생활인의 동아리’, ‘죽음을 함께 하기로 한 동아리’같은 사적인 놀이도 즐겼다. 카이사르가 생김새와는 다르게 지도자의 면모로 묵직한 모습이라면 안토니우스는 스스로를 조롱거리로 만들어 즐기기까지 하는 경박하지만 귀여운 모습을 지녔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은 죽음이다. 카이사르의 권력에 대한 지나친 야심은 암살을 부르고 안토니우스의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집착은 자살을 소환한다. 카이사르는 예기치 않은 죽음이 가장 훌륭한 죽음이라고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죽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누렸던 온갖 행운을 생각하며 세상에서 최고의 명성과 권력을 누리다가 죽는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플루타르코스의 말대로 운명이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기보다 피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아름답고 가치있게 죽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던 당시의 사람들을 지금의 우리와 비교해보게 된다.  

플루타르코스가 인물들을 그려낼 때 단지 영웅적인 모습만을 그리는 것은. 비교열전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그들이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탁월함과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 밖에 없는 결점까지 모두 보여준다. 영웅들이 남긴 수많은 명언들과 플루타르코스의 수사학이 빚어내는 이 책은 말의 향연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플루타르코스의 화려한 문장이 페르시안 카펫처럼 펼쳐진다. 당시의 시민들이 글을 몰랐기 때문에 정치가들에게 웅변술은 생명이었을 것이므로 끊임없이 웅변술을 갈고 닦았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것이 플루타르코스의 수사학인지 당시 그리스 로마인들의 수사학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 영웅들의 웅변은 다분히 철학적이고 도덕 교과서 같은 반면 로마의 영웅들에게서는 민중의 영향력이 보이고 인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그리스인들이 신탁에 의존하며 신을 숭배했다면, 로마인들은 실존인물들을 신격화하며 그들을 숭배했다. 각각의 인물들을 살피노라면 물질문명은 극한까지 발달했지만 인간의 본성은 병아리 눈물만큼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족, 3월 15일이 알렉산드로스인지 안토니우스인지가 헷갈리지만 둘중의 한사람이 죽은 날이었던 것같은데... 어디서 봤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저주받은 기억력같으니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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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2011-03-15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레오파트라는 모든 일에 올인하는 스타일이었나봐요.ㅎㅎ;;
읽고 싶게 리뷰를 쓰셨어요.^^

반딧불이 2011-03-15 13:17   좋아요 0 | URL
네..그런것 같죠? 참으로 열정적이었던 여자 같아요. 정복왕을 정복하려면 저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이참에 클레오파트라에게서 좋은 것 뿐만 아니라 나쁜 것까지도 다 배우려구요.~

맥거핀 2011-03-15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웅의 신화가 사라져버린 우리들의 세계에 영웅전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향수만은 아니겠지요. 왜곡된 영웅화나 영웅화에 대한 맹목적인 반감만이 남아있는 이 시대에 영웅전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케해보는 글입니다.
그러나저러나 옛날 분들 글 참 잘써요. 글쓰기에 어찌 그렇게 힘이 있는지..

반딧불이 2011-03-16 11:04   좋아요 0 | URL
'비교열전'이 '영웅전'이라는 제목으로 둔갑한 걸 보면 우리나라의 출판성향이랄까 하는 것도 읽혀지는 것 같아요. 당시 사람들은 '도편추방'이라는 제도를 통해 개인이 영웅화되는 걸 경계했으니까 말이에요. 굳이 영웅이라는 말을 사용해야한다면 당시 사람들의 영웅은 자기절제에서 영웅이었다고 봐야할 것 같았어요. 현대인들에게 특히 정치가들에게 강력하게 요구되는 부분이기도 하구요.

훌륭한 문장때문에 저는 이 책을 거의 글쓰기와 상상력의 독본으로 읽은 셈이 되었어요.

감은빛 2011-03-24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때 문고판으로 읽었던 것 같아요. 굉장히 심하게 축약된 책이었던 것 같구요.
클레오파트라 이야기가 굉장히 인상적이네요.
9개 국어를 구사했다니 대단하네요!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반딧불이 2011-03-25 13:40   좋아요 0 | URL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만큼 클레오파트라가 아름다웠던것 같지는 않지만 같은 여자인 제가 매료될만큼 매력덩어리였던 것 같아요. 저는 갑자기 궁금해져서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를 준비해놓았답니다. 여러줄의 현악기같은 클레오파트라의 혀를 셰익스피어가 어떻게 연주하는지 맛보려구요.

starover 2011-04-22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꼭 읽어봐야 할 이야기로서, 그의 영웅전이 찬사받는 이유는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모든 인간이 영웅이 될 수 있는 조건을 저자는 '영웅들'을 통해서 드러냈기 때문이죠.

반딧불이 2011-04-22 21:1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이프리트님.
영웅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저는 이 세상을 치열하게 살다간 사람들을 만나는 것 같아 부끄럽고 즐겁고...그랬습니다.

kampfwagen 2021-08-23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월 15일에 사망한 인물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입니다.

반딧불이 2021-08-24 19:54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고요로의 초대 민음의 시 171
조정권 지음 / 민음사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독락당(獨樂堂)


독락당 대월루(對月樓)는
벼랑 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


시집 『산정묘지』에 실려 있는 시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참으로 독한 시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시인이 깊이 은거할 것 같은 예감과 시집에 실려 있는 ‘산정묘지’ 연작들이 마치 그 은거에 필요한 주문처럼 느껴졌었다.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리고, 맑은 달빛을 마주 하며 홀로 즐기는 집에 거한 이. 그것은 이름처럼 즐거운 집이 아니라 외롭고 쓸쓸한 고행을 달게 견디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시인의 새 시집 『 고요로의 초대』를 읽으면서 그 때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은둔지



시는 무신론자가 만든 종교.
신 없는 성당.
외로움의 성전.
언어는
시름시름 자란
외로움과 사귀다가 무성히 큰 허무를 만든다.
외로움은 시인들의 은둔지.
외로움은 신성한 성당.
시인은 자기가 심은 나무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
나는 나무에 목매달고 죽는 언어 밑에서
무릎 꿇고 기도한다.
시인은 1인 교주이자
그 자신이 1인 신도.
시는 신이 없는 종교.
그 속에서 독생(獨生)하는 언어.
시은(市隱)하는 언어.
나는 일생 동안 허비할 말의 허기를 새기리라.


‘독락당’이 ‘은든지’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그곳은 ‘외로움의 성전’이 되었다. 시인은 그곳에서 스스로 교주이면서 스스로 신도이다. 그가 교주로서, 신도로서 읽고 쓰는 것은 오로지 詩라는 성전. 그는 쓸수록 허기지는 말=시를 새겼고, 새기고, 새길 것이다. ‘독락당’이면서 ‘은둔지’이고 또한 ‘외로움의 성전’이기도한 이곳에서 시인은 교주이면서 신도이듯이, 실체이면서 그림자이고, 초대하는 자이면서 초대받는 자다. 아무도 없는, 시인이 혼자 거하는 이곳은 고요한 장소다. 아니 고요 그 자체다.



고요로의 초대



잔디는 그냥 밝고 마당으로 들어오세요 열쇠는 현관문 손잡이 위쪽
담쟁이넝쿨로 덮인 돌벽 틈새를 더듬어 보시구요 키를 꽂기 전 조그맣게 노크하셔야합니다 적막이 옷매무새라도 고치고 마중 나올 수 있게
대접할 만한 건 없지만 벽난로 옆을 보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장작이 보일 거예요 그 옆에는
낡았지만 아주 오래된 흔들의자
찬장에는 옛 그리스 문양이 새겨진 그릇들
달빛과 모기와 먼지들이 소찬을 벌인 지도 오래 되었답니다
방마다 문을, 커튼을,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쉬세요 쉬세요 쉬세요 이 집에서는 바람에 날려 온 가랑잎도 손님이랍니다
많은 집에 초대를 해봤지만 나는
문간에 서 있는 나를
하인처럼 정중하게 마중 나가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 무거운 머리는 이리 주시고요
그 헐벗은 두 손도



시를 가만히 읽고 있으면 화자는 고요 자체이다가 ‘초대하는 나’로 바뀌고 ‘무거운 머리’와 ‘헐벗은’두 손을 가진 ‘초대받는 나’로 등장한다. 중복되는 화자들, 그러나 그들은 각각이 아니라 모두 한 사람이다. 내게는 외롭고 쓸쓸한 고행을 달게 견디겠다는 뜻으로 읽히던 ‘독락당’이 비로소 홀로 즐기는 ‘독락당’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그곳은 시인이 ‘대지가 갓 발행한 파릇한 풀잎을 붙이고/나도 모르는 곳으로 나를 발송해 버’(<우표에 대한 상처>)린 곳인지도 모르겠다.


시집 전체에 분열된 자아들이 그림자처럼 움직이고 있다. ‘왕벚꽃 온 사방에서 몰려와 내 눈을 염해 버린다.’(<벚꽃 하품>)에서 처럼 ‘염’한다는 단어들도 자주 등장한다. 시집을 덮고 나서도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시인의 각각의 모습들과 ‘염’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박혀있다.  시집 곳곳을 배회하는 분열된 자아들이 다만 시적 전략이기를, '염'이라는 단어 역시 시인과 아직은 멀리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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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3-05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열된 자아들이 그림자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표현... 정말 시적이로군요.
'고요로의 초대'란 시집을 소개하는 문장으로는 딱이다 싶습니다^^

반딧불이 2011-03-05 13:05   좋아요 0 | URL
시를 너무 오랜만에 읽었더니 생면부지의 남의 집에 들거간것 같습디다. 제가 쓰고나서도 제가 쓴것 같지가 않아요. 후와님의 말씀을 들으니 제게도 분열된 자아가 있어 저도 모르게 그것이 쓴게 아닌가 싶어지네요.

양철나무꾼 2011-03-05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정묘지' 읽었던 것 같아요, '독락당'이 기억나는 걸 보면...
'고요로의 초대', 찾아 보겠어요~

자아를 관조하는 느낌의 페이퍼라 저도 수선 떨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요~^^

반딧불이 2011-03-05 18:36   좋아요 0 | URL
관조는요. 무슨...저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말인걸요.
나무꾼님 시도 많이 읽으시던데요. 새해엔 시를 좀봐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저는 잘 안되네요
 
<반자본발전사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반자본 발전사전 -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가지 개념
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카이브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反자본 발전사전』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어휘들의 사전적 의미와 그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오용되고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의미들을 파헤친다. 제목이 시사 하는 바처럼 자본주의와 관련된 단어들 즉 발전, 환경, 평등, 시장, 진보, 기술, 과학, 환경, 생활수준, 인구 등등 19가지의 개념들에 대해 각기 다른 필자들이 글을 썼다. 이 책을 엮은 볼프강 작스의 글이 두 꼭지 있으니 총 17명의 필자가 있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반 일리히를 제외하면 모두 처음 대하는 필자들이다.

초판 서문에는 이 책이 결실을 맺게 된 과정이 적혀 있다. 그들은 모두 처지가 달랐으므로 며칠씩 혹은 몇 주씩 함께 모여 요리하고 여행하고 토론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모르는 것은 나누었고 아는 것은 겨루었’으며, ‘같이 헤맸고 같이 깨달음을 얻었다.’ 그들은 또 ‘비강단 지식인은 우정과 공동의 책임감을 빼면 시체라는 것을 체험’했으며 이렇게 나온 책은 이들의 ‘우정의 결실’이면서 ‘서로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밝혔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부러웠던 부분이다.

그들이 가장 먼저 파헤치는 단어는 ‘발전’이다. ‘발전’은 성장, 진화, 성숙 같은 단어들과 팔짱을 끼고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열등한 것에서 우월한 것으로,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나아가는 행보를 늘 암시한다.’ ‘발전’이란 무조건 좋은 것, 그래서 누구나 온 힘을 다해 따라해야 하는 것 등 긍정적인 의미로 자신을 포장하므로, 어떤 ‘존재의 합당한 형태를 향해 움직인다는 변형’의 개념에서 점점 ‘완벽한 형태를 향해 움직’이는 것으로 개념이 진화했다. 그래서 ‘발전’은 ‘저발전’이라는 대상을 갖게 되고 이것은 어느 순간 ‘미개인’같은 개념과 동일시된다. 결과적으로 ‘발전‘이라는 단어는 경제중심 세계관의 패권을 강화하게 되는 것이다.

‘발전’이라는 말이 이렇게 원래의 의미와는 다른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였다. 트루먼 대통령이 취임한 날 그가 천명한 발전 사업으로 인해 ‘저발전’이라는 말이 발명되었다. 1949년 1월 20일, 이날부터 세계 20억 인구는 ‘저발전’인이 되어 자신들이 가진 온갖 다양성을 버리고 저발전이라는 부끄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경험과 꿈에 속박 당하게 할 뿐만 아니라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고 ‘절대빈곤’의 수준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발전’이라는 단어는 아무 여자나 집적대는 바람둥이와도 같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단어들은 ‘발전’과 관계 맺는다. ‘한 세계’라는 부분도 예외가 아니다. 고대인들은 하늘의 태양과 별을 바라보면서 인간을 자연의 일부라고 여겼다. 그들에게 인간은 우연에 휘둘리는 지상의 미미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영원불변의 천상과 관계 맺는 것에 관심을 쏟았다.

반면 과학이 발달(발전)하게 되자 현대인들은 지구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광막한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을 바라본다. 그리고 지구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한 몸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이것은 세계를 하나의 동질적 공간으로 파악하게 만들면서 각 나라 고유의 관습과 문화를 서서히 증발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공간이 중심에 오는 사고는 일체성을 추구하게 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관계 맺는 장소는 사라지게 만든다. 사이버, 인터넷, 트위터 등의 공간에서만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장소를 자신의 뿌리로 여기면서 더 큰 공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을 점점 더 공간에 빼앗기고 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아니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들을 뒤집어 그 속을 낱낱이 보여주는 저자들의 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생활수준’은 행복의 다양성을 줄이고, ‘사람’은 ‘인구’로 대체되었는데, 그것은 사람을 ‘규정된 확률로 만나서 짝짓기를 하는 번식 군집’으로 정의하면서 통제와 관리가 필요한 존재로 환원 시킨다. ‘요구’는 호모 사피엔스가 마땅히 가져야 하는 의식과 감각을 갖지 못한 궁핍한 인간으로 탈바꿈 시키면서 새로운 종 ‘호모 미세라빌리스(궁핍한 인간)’를 탄생시킨다. 낙원으로 가는 비밀통로라고 여겼던 ‘기술’은 자연이 이룩해 놓은 것을 약탈하고 자연에, 제3세계에, 미래 세대에게 비용을 떠넘긴다. 이제 미래는 희망이 아니라 궁핍으로, 공포의 저장소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필자들이 이 글을 쓴 것이 내게 협박을 하거나 절망의 나락으로 집어던질 의도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던 모든 어휘들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다 보니 만약 내가 생의 역사를 써야한다면 그건 ‘교정의 역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쉽지 않은 내용에 분량이 주는 압박감으로 거의 탈진 상태다. 나는 ‘사전’을 이런 식으로 읽어본 적이 없다. ‘사전’에 대한 개념정의도 다시 해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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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2-25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는 분량이 주는 압박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단순히 '분량'의 문제가 아니더군요. (처음에는 하루에 3개장만 읽자..생각했는데, 1개장 읽기도 꽤나 시간이 걸리더군요.) 내용이 진중하고, 680여쪽이라는 페이지보다는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잘 정리하신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반딧불이 2011-02-25 23:38   좋아요 0 | URL
읽고 정리하시느라 애 많이 쓰셨지요? 함께 소감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쁘네요. 좀 고단했지만 다음에는 어떤 책이 선정될지 리뷰 올리자마자 금방 또 궁금해지는 마음, 맥거핀님도 다르지 않으실것 같아요.

비로그인 2011-02-26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탈진 상태에 이르면서까지 읽고 써내신 글을 너무 쉽게 읽는 건 아닌가 싶어 부끄러워지네요. 잘 보았습니다. 주말엔 좀 푹 쉬시죠. 건강에도 유의하셔야죠^^

반딧불이 2011-02-26 01:30   좋아요 0 | URL
주말에 부산으로 강진으로의 일정이 잡혀있어서 미루어두었던 일을 한꺼번에 하느라 그래요.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하지말자..뭐 이런 심보로 살다보니 이렇게 헐떠덕거리네요.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cyrus 2011-02-28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는 사전이라는 타이틀과 어마어마한 분량 때문에 겁 먹었지만 차근차근히
읽게 되니깐 내용은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은거 같았어요,, 뭐 몇몇 챕터의
내용은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요,,^^;; 그래도 그동안 긍정적인 면만
바라보고 있었던 발전, 개발, 진보, 과학 등 주제의 또 다른 이면을 볼 수 있어서
좋았던거 같아요.

반딧불이 2011-02-28 09:57   좋아요 0 | URL
서평단 도서로 저희가 공부를 참 많이 하지요? 시간적인 압박만 없다면 정말 금상첨화인데 말이에요. 한편 생각하면 날짜가 정해져 있으니까 읽지 그렇지 않으면 읽지도 않을것 같긴해요.

굿바이 2011-03-02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님, [교정의 역사]라는 표현에서 잠시 쓰러졌습니다 :)
저도 책을 읽으면서, 제 머리속의 온갖 조잡함 개념들을 몽땅 교정하고 싶었거든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반딧불이 2011-03-02 11:31   좋아요 0 | URL
이미 교정하신것 같은데요. ㅋㅋ 늘 굿바이님의 재미있는 글, 다시 생각하게 리뷰 늘 잘 읽고 있습니다.

choi pranchesca 2011-04-09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 상호 공감대를 형성 지금 병들어있는 인간의 내면적요소를 제거하는것이 지속발전틀이 되는것입 반자본에잇는사상을 읽으면 왜 인간이 살아야 하는가 발전론에 힘입어 살아가는 신자유주의 이념을 버리고 새로운 돌풍을 만들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