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 열여섯 소년, 거장 보르헤스와 함께 책을 읽다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 산책자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2012년 첫 책으로 읽었다. 읽기 위해서 읽은 것은 아니다. 보르헤스가 시간을 어떻게 다루는지 궁금해 『픽션들』을 찾다가 보르헤스에 관한 책들을 모두 꺼내놓고 보니 이 책이 있었다. 찾아야할 책은 찾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새로 주문을 하고-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어쩌다 손에 잡혔는데 읽다보니 어느새 끝나 있었다.

 

리뷰를 써야한다는 부담감이 없으니 완독에 대한 부담도 없다. 그러다보니 이 책 저 책 손에 잡히는 대로 들여다본다. 쫓기지 않아 좋긴 한데 집구석이 엉망이다. 언제는 엉망이 아니었느냐마는 며칠 게으름을 피우다보면 책 폭탄을 맞은 집 같다. 소파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나면 까놓은 귤껍질처럼 소파위에 책이 쌓여있다. 꺼내온 곳에 다시 꽂아 넣는 일은 만만찮은 일이다. 해결방법은 하나. 그냥 마구잡이로 쌓아놓는다.

 

보르헤스는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왜 저런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우연과 무질서의 법칙에 대한 믿음’이 보르헤스의 서재에는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내게도 저런 믿음이 있을까? 글쎄다. 읽었던 책을 다시 찾을 때 어디쯤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을 보면 무질서의 법칙이 내게도 있기는 한건가? 되는대로 책을 쌓아놓는 데서 생기는 가장 창조적인 기능은 계통도 맥락도 없이 쌓아 놓은 책의 제목을 훑으면서 책제목만으로 시를 한 편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은 온통 책에 관한 이야기다. 세계적인 독서가로 알려진 알베르토 망구엘이 움직이는 도서관으로 알려진 보르헤스에 관해 쓴 글이니 오죽하랴. 시력을 완전히 상실한 보르헤스가 서점에서 일하던 망구엘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한 것은 망구엘의 나이 열여섯 살 때이다. 보르헤스는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였고 망구엘은 학교에서 보르헤스의 시와 문장으로 공부를 하는 나이였다.

 

“문장을 해체해보면 그의 작품이 얼마나 단순하고 명쾌한지, 동사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명사와 어우러지고 구문과 구문이 맞아 떨어지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빈도가 떨어진 형용사와 부사의 사용은 일상적인 단어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 해냈지만, 새로움보다 더 놀라운 건 정확함이었다.”

 

나도 이런 공부 해보고 싶다. 그래서 놀라고 감탄하고 싶다. 최근 영어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부럽기 짝이 없다.

 

보르헤스가 폭력배나 불한당을 높이 평가한 것은 그의 책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보르헤스는 워낙 책을 좋아해서 책의 표지를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책을 골라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세계를 한 권의 책으로 알았고 친구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책을 읽듯 독자의 입장을 취했다고 한다. 나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건 지난한해를 돌이켜보면서 내가 읽었던 모든 책들이 결국은 사람에 대한 이해로 귀결이 되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환상문학에도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영역에 종교와 철학과 고등수학을 포함시켰다고 한다.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나는 그와 친해지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찾다가 찾다가 결국 못 찾아 새로 주문한 책 『픽션들』에서 이것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나는 정말 아는 바도 없고 관심도 없는 분야다. 아무래도 올해는 환상문학이나 SF 소설 등에 관심을 두어야 할 듯싶다. 일 때문이었지만 지난해 후반기 로맨스소설을 읽어야 했다. 도무지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인지 로맨스소설이 내게는 낯설기 짝이 없었다. 세 번을 읽어야 했던 책도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몇 번을 읽어도 여전히 재미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맨스 소설을 읽는 일이 내게는 전혀 로맨틱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사정과 맞물려 삶이 나를 농락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곤혹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결국 ‘일이니까’라는 말로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섣달그믐에 하는 일이 향후 몇 달 동안의 활동이 된다고 하는 말을 친구로부터 들은 보르헤스는 이 충고를 충실하게 지켰다고 한다. 섣달그믐날 나는 산에 다녀왔고 공들여 메일을 한통 썼고 시집을 읽었다. 그리고 ‘성전’이니 ‘대행자’니 ‘소드 마스터’니 하는 이상한 용어들이 난무하는 판타지 소설을 읽어야했다. 이쯤 되면 새해 몇 달 동안의 내 앞날은 이미 정해 진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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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1-04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 모양이죠? 원하시는 결과를 얻기 바랍니다. 망구엘의 책에는 보르헤스의 그림자가 어려 있어서 그가 희대의 행운아인 듯싶다가고 나름대로 고충이 많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반딧불이 2012-01-04 17:34   좋아요 0 | URL
네 후와님. 어쩌다보니 네이버에 연재되고 있는 장르소설 검토하는 일을 하게되었어요. 팔자에 없는 로맨스소설들을 원도 한도 없이 읽게 되네요.

저는 망구엘의 글을 처음 읽는데 글을 참 잘쓴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얼핏보면 쉬운것 같은데 씹을수록 맛이 나는 글이네요.

쉽싸리 2012-01-04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는 놓여난 덕분?인지는 몰라도 중간에 흥미가 반감되거나, 번역이 어렵거나 하면 읽다가 마는 경우가 부쩍 늘은것 같아요. 물론 보르헤스 같은 믿음이 있어서 그런건 아니구요. ^^

새해 좋은일 많이 만드시길 바랄께요...

반딧불이 2012-01-04 17:38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뵈요. 쉽싸리님. 새해 내내 평안하시고 행복하십시오.
저는 이제 흥미없는 글, 번역이 어려워 이해 안되는 글. 이런책 이제 그만 보려고해요. 이런책보다 흥미있는글 재미있는 글, 쉬운 글을 읽는 것이 훨씬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새해에도 좋은 글 보여주세요.

맥거핀 2012-01-04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로는 어떤 느낌이셨는지 모르지만) 산에 다녀오고, 메일을 공들여 쓰고, 시집을 읽고,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것도 꽤 괜찮아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일주일의 거의 대부분은 하루에 반을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나머지 시간들에는 영화관 스크린 앞에 앉아있었던 듯 합니다. 저보다는 그래도 나아 보이지 않나요..그래서 가끔 눈을 너무 혹사한다는 느낌이 있어요...^^;) 저도 책을 좀 보고 그래야 하는데, 못보고 쌓아둔 책이 너무 많아요. 한두챕터 읽고 던져둔 책도 많구요. 보르헤스처럼 저나 반딧불이님이나 좋은 책을 많이 만나는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반딧불이 2012-01-04 20:22   좋아요 0 | URL
하하..맥거핀님. 이거 뭐 도토리 키재기 하시는것도 아니구...
저도 컴퓨터 앞에 있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컴으로 메일쓰고 파일로 된 판타지 소설 읽고...저도 하루중 컴퓨터앞에 매달려 있는 시간이 너무 많아요. 급격히 시력이 떨어진 이유가 바로 컴퓨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누가 더 나은 시간을 보내는지 맥거핀님과 경쟁하고 싶지 않아요. ㅋㅋ 좋은 책 읽으시고 좋은 영화 보시고 같이 나누는 시간이 많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래요.
 
잭 구디의 역사인류학 강의 - 요리, 사랑, 문자로 플어낸 동서양 문명의 발달사
잭 구디 지음, 김지혜 옮김 / 산책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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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잭 구디는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인류학자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프리카의 전장으로 내몰렸고 그곳에서 독일군 포로로 잡혔다. 포로수용소에서 제임스 프레이져의 <황금가지>와 고든 차일드의 <역사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났던가>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우연은 훗날 그의 관심을 문학에서 고고학 및 인류학으로 바꾸어놓았다.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서 현지조사로 인류학자의 첫발을 내디딘 그는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연구 분야를 개척해 나갔다.

그가 관심을 두고 연구했던 것들은 문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 요리, 꽃의 문화, 상속, 가족의 역사 등인데 특히 내게 놀라웠던 것은 요리법의 세분화나 꽃을 심미적 용도로 사용하는 데에 경제적인 계층화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그의 이론이다. 그는 아프리카인들에게는 꽃 문화가 없으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꽃 문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아름답고 향기롭다는 이유만으로 꽃을 받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꽃을 선물하는 것도 좋아하는 나는?? 이미 내 무의식은 계층화 계급화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인가? 아는 게 병이라는 말은 이런데다 쓰는 거라고 자위해본다.

이미 적었지만 잭 구디는 역사학자이면서 인류학자다. 역사학과 인류학의 차이점은 뭘까? 역사학이 문헌으로 연구하는 것이라면 인류학은 현장조사로 연구하는 차이일까? 역사학이 시간성을 전제로 시간 안에 법칙과 리듬을 부여한다면 인류학은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을 연구하는 것인가? 이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역사학이든 인류학이든 언어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다를 바가 없다. 역사학자든 인류학자든 그들은 그들 고유의 언어로 기록을 남기는데 그렇다면 그들의 언어는 그들의 세계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언어의 지시기능뿐만 아니라 세계를 절단하는 기능으로 본다면 이들 학자들의 견해는 세계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절단하는 것이리라.

잭구디가 자신의 언어로 세계를 절단한 것을 보자. 그는 서양 중심주의에 비판의 메스를 대고 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산업화, 근대화라는 말의 배경에 유럽인들에 의해 이러한 발전이 시작되었다는 과장된 주장이 들어있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발전’이라는 말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열등한 것에서 우월한 것으로,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나아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뜻에서 근대화는 곧 서구화를 의미했고 서양=역동적, 동양=정태적, 서양=문명, 동양=야만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널리 통용되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서구는 문명사적으로 동양보다 우위에 있으며 온 힘을 다해 따라가야 할 모델이 된다.

인류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많은 학자들이 관여한 서양 중심주의에는 특히 사회가 원시적 형태에서 고대적 형태 - 봉건적 형태 - 자본주의적 형태로 순차적 발전과정을 거친다는 마르크스는 가장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집단적인 것에서 개인적인 것을 향하여 발전의 순차가 놓여 있다는 것 역시 마르크스 사상의 일부이다. 이에 따르면 농촌사회의 확대가족은 개인주의의 등장과 함께 근대사회의 핵가족으로 이행한 것이 된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다루면서 개인주의라는 낱말을 사용했는데 ‘개인주의는 공동체의 각 구성원들이 동료 집단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고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거리를 갖게 한다.’

개인주의는 자본주의의 등장과 근대화, 기업정신에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세계적 팽창에 관한 논의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잉글랜드에서 유럽의 어휘 속에 처음 ‘개인주의’가 등장했을 때 우파는 당시 사회의 원자화를 뜻하는 의미로, 좌파는 사회주의에 반하는 것으로 사용했다. ‘신과의 관계 속에 있는 개인’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입장이나 사회조직보다 개인의 책임을 우선시한 청교도적인 입장 등 ‘개인주의’를 바라보는 입장은 참으로 다양하다.

마르크스의 발전 순차를 따른다면 현대사회는 단자화 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사회복지나 연금 등 사회제도나 투자 자본의 축적을 위한 혈통집단 등에서 보이듯이 오히려 현대사회는 훨씬 더 집단적이다. 이들이 말하는 개인의 의미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입장 등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좀체 합의점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주의라는 개념이 텍스트가 아니라 콘텍스트의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폭넓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성은 문명이나 제도에 대한 논의 이외에 인간의 감정, 특히 사랑의 감정에서 조차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다른 문화에서 보이는 로맨틱한 사랑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욕정이나 욕망이라고 여긴다. 로맨틱한 사랑에 대해서는 사회학적, 정신분석학적, 역사학적 접근이 요약 제시되고 있다.

로맨틱한 사랑은 근대적인 것이고 근대성은 유럽적인 것이므로 사랑은 유럽적이라는 기든스의 입장. ‘반쯤 문명화된 사람들’ 사이에서는 로맨틱한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레이크의 정신분석학적 관점. 사랑을 위한 결혼이 증가한 것은 소설의 소비 증가 때문이라고 말하는 역사학자 스톤은 ‘사랑이 커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 실은 지면 위에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이 커진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는 글을 사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사랑을 구분하면서 은연중에 글을 모르는 사람의 사랑의 감정을 욕정이나 욕망으로 끌어내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 동서양 문학에 나타난 사랑의 감정을 예로 들면서 이에 대한 비교거리를 제공한다. 또 아프리카인의 노래나 관습에도 사랑은 표현되고 있고 심지어 결혼한 여자나 남자의 연인까지도 허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잭 구디는 서구가 자본주의 혹은 근대화를 향한 어떤 특별한 경향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주장을 위해 각 분야의 다양한 이론들을 요약 정리하면서 그에 대한 자료를 제시하는데 많은 부분이 논증이나 제시보다 요약 정리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 또 저자는 서양의 독특성보다 유라시아의 독특성, 특히 아시아가 기여한 부분에 대해 논의하고 아프리카의 문화를 소개한다. 이것은 문자로 하는 일 못지않게 말로 하는 일(구술)의 가치를 재평가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서양/동양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에 아프리카를 위치시킨다.

인류가 생겨난 이래 단 하루도 멈추지 않았을, 또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가장 원초적인 행위의 하나인 먹기와 사랑, 그것을 확장하는데 기여한 문자를 키워드로 문화사를 조망하는 일은 가장 미시사적인 관점으로 거시사를 다루는 효과를 낸다. 한쪽 눈으로만 보던 역사를 비로소 두 눈을 뜨고 보는 것 같았다.

나쓰메 소세키는 문학으로서 문학을 알려고 하는 것은 피로써 피를 씻는 것과 같다고 했다. 역사를 알려고 하는 것 역시 이와 같지 않을까. 역사를 인류학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은 지리적 국경의 개념을 넘고 공간적으로도 우주 밖에서 지구를 조망하는 듯 넓은 시각을 확보하게 해준다. 잭 구디의 언어로 단절한 세계를 통해 내 시각은 새로워 진 셈이다. 그러나 서양의 우월성에 대한 논의도 또 그에 대한 반박도 모두 서양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지켜보면서 학문은 진보하고 있는 것인지 눈꺼풀에 씌운 콩깍지를 벗겨내고 있는 것인지 헛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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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0 0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0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1-10-10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서구중심적인 세계사에 대한 논의들은 읽어보았지만, 역사인류학이라는 것은 또 그것보다 훨씬 방대하고 넓은 세계인 것 같네요. 아마도 이 역사인류학이라는 것이 폭넓게 연구된다면 지금의 어떤 틀에 박힌데다가 유럽중심적인 세계사보다는 훨씬 넓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듯도 싶구요. 유럽중심적인 세계사를 넘어서자는 책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이 책처럼 역사인류학이 아닌) 기존 역사학의 방법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졌으니까요. 또 새로운 것을 배우고 갑니다.

반딧불이 2011-10-11 01:19   좋아요 0 | URL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이 있지요. 저는 특히 벤야민의 관점이 새롭게 보였어요. 역사내부에도 기존역사서술에 대한 비판들이 있구요. 인류학적으로 역사를 보니 시야가 넓어지기도 하지만 뭐랄까..순환론을 생각하게 된다고 해야할까요. 고대세계를 그리워하게 된다고 할까요...맥거핀님께서 살파신 몰락 이후의 세계를 생각해보게되는것 같아요
 
황금가지 1 - 을유세계사상고전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지음, 박규태 역주 / 을유문화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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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숲의 디아나’라고 불리는 성소이다. 이 성스러운 숲속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고, 그 둘레에는 밤낮 없이 잔뜩 긴장한 한 사람이 번쩍거리는 칼을 들고 언제 기습을 받을지 모른다는 듯이 긴장된 자세로 늘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는 사제인 동시에 살인자이다. 그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이유는 그도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가 그의 사제직을 계승하기 위해서 그를 살해하려 호시탐탐 노리기 때문이다. 이 성소가 바로 사제직을 계승하는 장소로서, 사제가 되려는 사람은 반드시 그의 전임자를 살해하여야 하고, 황금가지를 꺾어야만 그 직을 쟁취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성소의 엄격한 율법이다.”


이 성소의 율법에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사제는 왜 살해 되어야 하는가? 사제를 살해하려는 사람은 왜 반드시 황금가지를 꺾어야 하는가? 또 황금가지란 무엇인가? 프레이져의 『황금가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안락의자 위의 인류학자’라는 비난을 듣고 있는 프레이져의 황금가지는 총 13권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후대를 위해서인지 그는 스스로 1권의 축약본을 만들기도 했다. 아직도 나오고 있을 것만 같은 세헤라자데의 이야기 속 쥐만큼이나 방대한 자료들은 지루함을 넘어 끔찍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료를 통한 그의 이론은 더러 흥미롭기도 하고 가끔은 탄성을 자아내게도 하며 꽤 설득력이 지니고 있기도 하다.

고대사회에서 사제나 왕, 추장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다. 이들은 자연재해에 대한 책임을 져야했고 예기치 못한 자연의 폭력 앞에서 그들이 무너질 때 이 재난은 그들의 죄과로 돌려져 지위를 박탈당하거나 살해당하였다.

황금가지는 참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의 다른 이름이었다. 겨우살이의 가지를 잘라두면 잎뿐만 아니라 가지까지 황금색으로 변해 그야말로 황금가지로 보여 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겨울이 되어 참나무가 그 잎을 다 떨어뜨려도 이 겨우살이는 푸르름을 간직한 채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죽은 참나무의 정령이 그 겨우살이에 거처를 정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땅에도 하늘에도 속하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가장 안전한 곳으로 여겨졌다. 황금빛과 노란색은 동종주술의 원리에 의해 불씨 혹은 태양을 상징한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듬해 참나무가 다시 소생하는 것을 보고 겨우살이에 깃들었던 참나무의 정령이 겨울을 잘 보내고 참나무로 거처를 옮겨간 것으로 여긴 듯하다. 황금가지는 불이나 태양의 상징으로 모든 생명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축제를 통해 악령을 제거하는 정화의 의식에도 사용되었다.

프레이져의 연구는 디아나 숲의 사제 살해 모티프에 대한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준다. 그러나 왜 참나무여야 했는가에 대해서는 질문도 대답도 없다. 우리는 흔히 새 중의 새를 참새라 하고 나무 중의 나무를 참나무라 한다. 북부 이탈리아의 디아나 숲의 그 참나무도 내가 알고 있는 이 참나무라면 그곳에서 이 참나무가 어떤 의미였는지도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프레이져는 캐임브릿지 대학의 자기 서재 안에서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섭렵한 다음 그것을 정리했다. 그의 범위는 유럽뿐만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 아시아 등 지리적 경계를 망라하고 농경민족과 유목민족 등 인류의 생활양식도 함께 고찰한다. 그는 원시인의 주술, 신화, 입사의식, 터부, 수목의 정령이나 인간을 포함한 동물 살해, 축제 등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례를 비교 정리 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프레이져는 유사의 법칙에 의한 ‘동종주술(모방주술)’과 접촉, 전염의 법칙을 바탕으로 한 ‘감염주술’로서 인간이 가진 본질적 유사성을 추출해 낸다. 그것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인간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부정, 그리고 영혼불멸의 신앙이다. 프레이져는 마치 자연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자연은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순환되지만 그것이 반드시 일정불변의 법칙을 가진 것은 아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해마다 반복되지만 그 계절이 모두 똑같을 수는 없다(반복과 차이/엘리아데의 영원회귀). 자연은 친숙하고 다정한 얼굴로 찾아오기도 하고 폭력적인 재앙으로 예고도 없이 찾아들기도 한다. 처음 인간은 자연에 대해 자신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초자연적 힘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인간의 이 같은 믿음은 주술을 낳았다. 주술사는 자연에 대항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종의 해결사였다. 그러던 인간이 자연의 폭력 앞에 무릎 꿇어야 했을 때 그는 보이지 않는 어떤 위대한 존재가 있다고 믿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자비심을 구하는 일 뿐이었다. 인간은 초자연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서 종교가 생겨났다.  

 

프레이져는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사유는 이렇게 주술에서 종교를 거쳐 과학으로 진행되어왔다고 결론짓는다. 과연 그의 말대로 주술은 종교보다 앞서 존재했고 종교는 과학보다 앞서 존재하면서 진화론적으로 발달하는 것일까? 문명화의 식민지와 같고 과학에 대한 믿음이 망상으로까지 치닫는 현대에도 여전히 주술이 행해지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주술과 종교의 차이는 다만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방법적 접근의 차이로서만 설명될 수 있을까? 과학은 진보하지만 주술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 효력이 극대화되었다. 혹시 프레이져가 말하는 미개인에게는 주술이 과학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기독교에 대한 프레이져의 생각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불 축제에 대해 고찰하면서 크리스마스가 태양의 탄생에 관한 고대 이교도의 축제들을 대신하기 위해서 교회에 의해 제도화되었다고 했을 때 기독교도들의 비판을 받을 만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25일이라는 날짜가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동지 즈음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는 것 역시 우주만물의 순환과 농경사회에서의 태양의 의미, 주역에서의 괘 등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해주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한 가지 불편한 심사가 뒤따른다. 프레이져가 말하는 미개인들이 인간과 동물 사이에 뚜렷한 경계의식을 두지 않았고 또 자신이 죽이는 동물에 대해 아무리 경건한 의식을 갖추고 존경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가 인간 우월주의, 인간 중심주의, 힘의 논리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살육이고 이론의 확립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배제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예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동물이나 맛좋은 고기를 제공하는 동물은 경건한 의식으로 존중되고, 무섭지도 않고 맛도 없는 동물은 멸시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숭배하기 때문에 살해하지도 먹지도 않는가 하면 바로 그 숭배 때문에 살해하고 먹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이헌령비헌령이 따로 없다.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무생물이나 동물 심지어 같은 인간에게까지 옮기는 행위, 속죄양을 만드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스스로도 이런 행위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을 때, 또 끝내 비껴갈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할 때 넘을 수 없는 벽을 맞닥뜨린 것 같고 암담한 거울 앞에 서 있는 듯하다. 사물을 비추지 않으면 거울이 아니다. 어쩌면 사람을 비추지 않으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황금가지는 나를 비추는 종이거울이며 프레이져는 인간의 형상을 한 거울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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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9-30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와 같이 쉬시다가 저와 같을 때 리뷰를 남기셨네요. ㅋㅋㅋ 뭔가 왠지 모를 동지 의식을 느낍니다. 휴! 어려운 책을 읽으신 것 같아요. 속죄양을 만드는 행위라는 부분이 마음에 와 닿네요. 항상 정치도 그렇고 속죄양을 만드는 것에 능숙한 것이 지금의 사회이지 않나란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사물을 비추지 않으면 거울이 아니다'란 표현 음~확 와닿네요. 전 이런 문장들이 좋아요. 뭔가 가슴을 후벼 파는 문장 말이죠. 개인적으로 너무 긴 책은 읽지 못하는 습성이 있는데 <황금가지>를 쓴 저자를 보면 참으로 반성이 되네요. 대단하다는 생각 뿐입니다. ^^ 오셔서 너무 반가워요. ㅋㅋ

반딧불이 2011-10-03 13:37   좋아요 0 | URL
답이 늦었습니다. 저도 다시뵈어 반가워요.

속죄양.말씀을 듣다보니 고대사회에서의 속죄양과 현대사회의 속죄양은 좀 다른의미로 쓰이는것 같네요. 아주 중요한 것을 짚어주셨어요.

프레이져는 좀 심하게 길어요. 저도 이런책 별로~ 안좋아한답니다. 앞으로 종종 뵐 수 있기를 바래요.


비로그인 2011-10-01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활동을 재개하신 건가요? 그럼 이제 반딧불이님의 글을 읽을 수 있겠군요ㅎㅎ
저는 한겨레출판에서 낸 <황금가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도 그럼 축약본이겠군요.
암튼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졌네요. 감기 조심하시길...^^

반딧불이 2011-10-03 13:43   좋아요 0 | URL
활동이라 할 만한 것도 없고 후와님께서 즐겨 읽으실 가치도 별로 없는 글인걸요. 뭐
<황금가지>는 나와있는 것이 모두 축약본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저는 1980년에 출간된 삼성출판사 책을 가지고 있는데요. 혹시나해서 을유문화사본을 도서관에서 빌려 함께 보았습니다. 이 책이 참고사진이나 주석 등을 통해 다양한 설명을 곁들여 놓아서 도움이 되더라구요. 늘 필요한 부분만 찾아보다가 통독을 하고 나니 속은 시원한데, 씁쓸한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cyrus 2011-10-01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고 계셨나요? 오랜만에 서재에 들리게 되었어요.
저는 축약본이라고 해도 과연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몇몇 서재 이웃분들 사이에서도 이 책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시던데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요 ^^;;
이제부터 날씨가 쌀쌀해진다고 하네요.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


반딧불이 2011-10-03 13:46   좋아요 0 | URL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영감을 얻는다고 해요. 대표적인 사람이 T.S.엘리엇이죠. '4월은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그의 시 <황무지>가 이 책을 읽고 쓰여졌다고 하네요.
책도 인연이 있다는 것이 제 생각이니 언젠가 인연이 되면 읽으시겠지요. 환절기 건강하게 보내시기 바래요.

맥거핀 2011-10-01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이 점점 발달하고, 미개인이 모두 사라지고, 언젠가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주술이 사라질까요? 종교도 사라질 수 있을까요? 글을 읽다보니 궁금해집니다.

컴백을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좋은 글 자주 볼 수 있기를..

반딧불이 2011-10-03 13:51   좋아요 0 | URL
다시 뵈서 반가워요. 맥거핀님. 이 책도 그렇고 레비스트로스도 그렇고 나카자와 신이치도 그렇고 엘리아데도...신화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랄까 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듯했어요. 이 세계가 어떤 법칙으로 움직이는지 잘 모르겠지만 자연을 떠나 살 수 없는 인간에게서 주술이 사라질수는 없을 것 같다는 것이 제 생각이네요.

릴케 현상 2011-10-07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님 방가방가 계속 띄엄띄엄 인사드리게 되네요^^ 합리성 속에 언제나 신화가 깃들어 있다는 말이 문득 생각나네요. 저도 긴 책은 통 읽기 어려워요. 두꺼운 책 한 권 들고 잠적하고 싶은 밤입니다요

반딧불이 2011-10-07 10:32   좋아요 0 | URL
산책님~~ 재앙같은 여름을 견디고 절 기다려주신건가요? ㅋㅋ
산책님께는 짧으면서도 겹겹인 시가 있으시잖아요~ 그나저나 논문쓸때 되신거 아니유?

릴케 현상 2011-10-08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저도 여름 내내 납작 업드렸다가 반딧불이님 돌아올 때 쯤 된 듯해서 들렀어요
 
마르탱 게르의 귀향
내털리 데이비스 지음, 양희영 옮김 / 지식의풍경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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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반 프랑스의 툴루즈 고등법원에서 한 남자의 형사재판이 진행되었다. 한 여자가 3년을 함께 산 자신의 남편을 가짜라고 고발한 사건이었다. 재판을 진행했던 한 판사는 이 사건을 <잊을 수 없는 판결>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했다. 이 책은 이후 6년간 다섯 번이나 재인쇄 되었고 라틴어로도 발간되었다. <잊을 수 없는 판결>은 <마틴 기어의 귀향>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영화 작업에 협력했던 역사학자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는 영화가 역사적 기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리고 영화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아쉬워했다. 그녀는 이런 아쉬움을 해결하기 위해 미시사적으로 재접근했다. 이렇게 쓰여진 책이 사건의 주인공 이름을 딴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다.

마르탱 게르는 열네 살에 베르트랑드와 결혼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자식을 낳아야 결혼이 완성된 것으로 여겼지만 그들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마르탱이 성불능자였기 때문이다. 자식 없이 3년을 넘기면 결혼은 취소될 수 있었으므로 베르트랑드의 가족은 그녀에게 이혼할 것을 종용했다. 결혼 후에는 교회법에 따라 재혼도 허락되었다. 하지만 베르트랑드는 가족의 뜻을 따르지 않았고 8년 후 우여곡절 끝에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러나 마르탱은 스물네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곡식 약간을 훔치고는 아버지의 처벌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름다운 아내와 아들, 상속지, 부모를 모두 버리고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베르트랑드는 정조를 지키며 자식을 키웠고 8년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은 전혀 딴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새 마르탱은 모든 면에서 베르트랑드를 만족시켜주었다. 비록 하나는 죽었지만 삼 년 만에 딸을 하나 더 얻었다. 그렇게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던 베르트랑드가 갑자기 남편을 가짜 마르탱이라고 고발했다.

마르탱 자신은 물론 촌락의 많은 사람들이 가짜 마르탱을 진짜 마르탱이라고 증언했고 그의 열정적인 설득은 진실로 받아들여져 재판관들의 판결만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판결이 내려질 무렵 극적이게도 진짜 마르탱이 외다리가 되어 등장함으로써 가짜 마르탱은 사형에 처해진다.

대체 베르트랑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사람들은 왜 가짜 마르탱을 진짜 마르탱이라고 증언했을까? 마르탱이 마르탱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가짜 마르탱이 되어 마르탱으로 살았던 아르노 뒤틸의 삶마저 진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16세기 사람들은 진실과 재산 중 어느 것에 더 비중을 두었을까? 그들의 정체성은 어떻게 형성 되는가? 내가 ‘나’라는 것은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가? 법률적, 역사적, 철학적, 존재론적 진실은 어떻게 다른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진실인가, 사실인가?

저자는 가짜 마르탱 역할을 했던 아르노 뒤틸에게 단순히 마르탱의 재산과 아내를 탐한 사기꾼이 아니라고, 또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혼생활을 지속했던 베르트랑드를 재빠른 현실 감각을 가진 의지의 여인으로 묘사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결혼은 새로운 삶과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간 ‘창안된 결혼’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저자는 또 이 기록에 대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보이는 관심을 덧붙였다. 작가들은 믿기 어려운 기이한 특징들에 관심이 있었고 아르노 뒤틸을 경탄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제거되어야 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일반 남성들은 사기꾼보다 속은 아내에게 일체감을 가졌으며 20세기까지 이 사건에 대한 여성의 논평이 없음도 밝혀두었다. 또 저자는 몽테뉴의 에세이를 언급하고 있다. 몽테뉴는 이 사건을 보면서 진실을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인간 이성이 얼마나 불확실한 도구인지를 강조하면서 재판장의 사형 판결은 매우 대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녀 재판이 횡행하던 당시에 더구나 이단이 판을 치던 랑그독 지방에서 재판관은 어떤 판결을 내려야 했을까? 더구나 재판관은 판결을 기다리는 사건 당사자들과 수많은 마을 사람들을 면전에 두고 있었다. 몽테뉴라면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

흥행의 극적 요건을 갖춘 이 사건은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마르탱 게르를 마치 영웅전설의 주인공처럼 만들었다. 같은 사건을 다루었지만 미시사적으로 접근한 책은 사건의 갈피갈피에 상상력을 불어넣으면서 인물들에게 주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사실 사이만을 오갈 수 있는 추론식의 역사적 상상력 때문인지 문학적 상상력과는 다른 한계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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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06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 굉장히 흥미로운 내용인데요. 16세기에 판결을 내려야 했다면 그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증명 지금은 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당연하게 생각되고 인식되지 않은 문제인 듯 느껴지지만 이렇게 발달한 문명의 한복판에도 단순히 '나'라는 사람이 하나로 정해지지 않고 가지 가지로 다른 모습을 보이며 사는 것도 있지 않은가 생각을 합니다.
하여튼 내용적인 면에서는 굉장히 흥미롭네요. ^^ 오랜만에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배 불러요. ㅋ

반딧불이 2011-06-07 08:43   좋아요 0 | URL
저자가 영화에서 다룰 수 없던 것들을 다루면서 정체성의 문제에 주목했던 것 같아요. 마을 사람들이 마르탱을 증언하는 내용이 재미있는데, 어떤 사람은 신발 사이즈로 어떤 사람은 기억으로 또 어떤 사람은 키로 마르탱을 기억하거든요. 이런 것들이 마르탱을 마르탱이게 하는 증거가 되지만 진짜 마르탱이 나타났을 때 아무 의미가 없어지죠. 내용은 재미있는데 책은 그렇게 재미있게 읽히지는 않아요. 참고하셔요.

루쉰P 2011-06-07 19:50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완전 참고하겠습니다. ㅋㅋ 반딧불이님 덕분에 항상 책에 대한 수고를 덜어요. 또 좋은 리뷰 기대하고 있을께요!!

2011-06-18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8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0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라하가 사랑한 천재들 - 카프카에서 스메타나까지 도시가 사랑한 천재들 2
조성관 지음 / 열대림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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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여행을 준비하면서 이 책을 처음 만났다. 이 책은 맛있는 먹거리나 훌륭한 쇼핑센터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여행 안내서라면 반드시 있어야할 그 흔한 지도도 한 장 없다. 그런데도 이 책은 프라하를 여행할 때 반드시 챙겨가고 싶은 책이다. 여행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도 가끔씩 들여다보는 책이기도 하다.

프라하는 한국인이 가고 싶어 하는 유럽도시 1순위라고 한다. 그 이유가 뭘까?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약소국이고 과거 한때 식민지였다는 동질감 때문일까? 만약 그런 이유라면 지리적 혹은 역사적 동질감의 확인을 목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아주 예외적 인물이 넘쳐나는 나라에 나는 살고 있음에 틀림없다. 여행하고 싶은 도시 1순위는 짐작하건대 체코라는 나라이름보다도 프라하라는 도시 이미지가 강하게 작용 한듯싶다. 우리나라에서 프라하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데에는 ‘프라하의 연인’이라는 드라마가 단단히 한 몫 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이미 오랜 전에 ‘프라하의 봄’이라는 영화도 있었다. ‘프라하의 봄’은 또 체코 국민음악의 아버지 스메타나를 추모하는 음악축제의 이름이기도 하다. 영화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원작이고, 축제는 매년 5월 12일에 개막해 6월 초순까지 계속된다. 프라하나 체코의 이름이 알려진 데는 밀란 쿤데라나 스메타나 외에도 『변신』의 프란츠 카프카, <뻐꾸기 둥지로 날아간 새>의 밀로스 포먼 감독, <신세계 교향곡>의 드보르자크, 벨벳혁명을 이끌었고 전직 대통령이며 극작가인 하벨 등 많은 예술가들이 기여했다.

프라하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도 연합군의 폭격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중세의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프라하는 합스부르크 제국시절에는 식민지의 중심도시였고, 1989년 벨벳혁명이 일어나 공산정권이 붕괴할 때까지 사회주의 국가였으므로 상업자본주의의 흔적도 거의 없다.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은 프라하를 사랑했고 프라하는 또 천재를 알아보고 키워낼 줄 아는 도시였다. 가히 예술의 도시라 할만하다. 가보고 싶은 도시 1순위로 자리매김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기자출신의 저자는 여섯 명의 예술가들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족적을 따라 프라하를 소개하고 있다. 각 예술가들의 짧지만 애정 어린 평전을 읽는 듯도 하고 반드시 찾아보아야할 여행지를 안내해 주는 듯도 하다. 카프카가 글을 썼던 지붕 밑의 다락방과 묘지, 스메타나의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을 들으며 거닐면 좋을 블타바 강과 카를교, 토론과 집회의 메카였지만 ‘프라하의 봄’이 짓밟힌 바츨라프 광장,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집으로 여러 번 등장했던 흐라드찬스케 광장 7번지의 주택 등이 깔끔한 사진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 살다간 시기는 비록 달랐지만 어디에선가 그들의 발자국이 겹치기도 했을 것만 같다. 품격 있는 여행안내서로 영혼을 살찌우는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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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5-16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카프카를 무척 좋아하는 터라 가고 싶은 도시로 손 꼽는 도시인데 거기를 가신다니 부럽네요. ^^

하벨 대통령도 무척 좋아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에요.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상당히 뛰어나는 느낌을 받거든요. 아무쪼록 프라하에서 이 책에 써 있는 사람들의 발자취를 다 보고 오셨으면 합니다. 아! 대박 부러워요.

반딧불이 2011-05-16 00:31   좋아요 0 | URL
프라하를 작년에 가려다 못갔어요. 그때 읽었던 책인데 6월에 예정되어 있는 터기 여행관련 책을 찾다가 이걸 다시 보게 되었네요. 다시봐도 제 수준과 입맛에 딱 맞는 책이네요.

여담이지만 저는 제가 글을 올리면 누가 첫 추천을 누르나 늘 궁금했어요. 오늘은 그 범인(?)을 현장에서 체포한 기분인데요. 고맙습니다.

루쉰P 2011-05-19 23:00   좋아요 0 | URL
ㅋㅋㅋ 체포 당했지만 상쾌한데요. 아! 이 변태적인 범인의 심리 ㅋ

우와 6월에는 터키 여행이시라니 정말 부럽네요. ^^ 항상 어딘가를 떠나고 싶지만 항상 같은 곳에 잡혀 있는 저로서는 완전 부럽다고 밖에 할 수 밖에 없어요. 갔다 오시면 꼭 좀 글 좀 올려주세용!

여담이지만 저도 제 글에 추천하는 사람이 항상 궁금해요. ㅋ

비로그인 2011-05-16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라하를 가보고는 싶은데 당장은 어려운데다 영원히 기회를 얻지 못할 가능성도 농후하니 그저 이 책으로나마 위안을 삼아야겠군요 쩝! 내달에 터키를 가시는 모양이네요 ㅎㅎ^^

반딧불이 2011-05-16 11:10   좋아요 0 | URL
저도 마찬가지에요. 하여간 저는 준비하면 못간다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어서 아무 생각없이 있다가 그냥 떠나려고 맘먹었어요.

터키도 프라하꼴 날까 싶어 바로 티켓팅을 하고 아무 준비도 안하고 날짜만 세고 있습니다. 에어텔을 예약했으니 천재지변이 나기 전에는 떠날 수 있겠죠? 왠지 불안해진다는...

파고세운닥나무 2011-05-16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영어회화 수업을 듣는데, 미국인 강사가 한 여학생에게 해외 어디에 가고 싶냐니까 '파리의 연인'을 흥미롭게 봤다면서 파리에 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프라하도 그렇겠지만 대중 문화 속의 이미지들이 강하게 작용하는 듯 합니다.
터키에 가세요? 아마 체코와 더불어 터키도 유럽 속 변방이란 이미지가 강한 듯 합니다.
저도 티켓팅을 해두고 미국 가는 날을 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부의 도시인데, 근래 이상기후 때문에 그 쪽 지방에 피해가 있더군요. 5년간 안전하게 있다 돌아와야 할텐데요...

반딧불이 2011-05-16 11:17   좋아요 0 | URL
한류를 봐도 그렇죠. 저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으면서 가봐야겠다는 마음을 굳혔어요. 아시아의 끝, 유럽의 시작,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았던 곳, 지중해, 흑해 이런 것들이 저를 마구 끌어당기더라구요.

아마도 닥나무님께서 가실때쯤이면 이상기후가 물러가지 않을까요? 건강하게 무사히 잘 다녀 오시기를 바랍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1-05-17 11:06   좋아요 0 | URL
말씀 고맙습니다^^

언젠가 여행을 목적으로 해외에 나갈 일이 있겠죠? 저는 이번이 첫 출국이랍니다^^;

여행간 안전하시고, 건강하시길 빕니다!

2011-05-19 0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9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6-07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인은 프라하 특유의 고풍스럽고 세련된 우아함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아직도 옛 느낌이 살아있는 그림엽서 같은 그런 풍경...유럽의 옛 사회주의 국가들은 왠지 백인나라들 중에서도 좀 칙칙하다는 평가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체코가 좀 예외죠.사실 2차대전 전에도 과학기술이 발달한 나라이기도 했고요.그 반면 체코와 갈라진 슬로바키아는 왠지 인지도도 떨어지고 좀 그렇죠.

반딧불이 2011-06-08 12:2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말씀을 들으니까 반드시 현장확인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솟습니다. 그런데 노자님은 여러가지 분야에 참 관심이 많으신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1-06-08 16:14   좋아요 0 | URL
아...예...제가 민족분쟁이나 문명교류 쪽에 관심이 많고 외신기사도 정독하는 편이라서 그렇습니다.또 세계각지의 식생 동물분포 기후 지질 등도 관심대상이죠.

반딧불이 2011-06-10 11:45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그런데 말씀하신 영역뿐만 아니라 가요나 교육, 언어, 정치 등 많은 분야에 정통하신듯 하던걸요.

노이에자이트 2011-06-10 16:4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정통한 정도는 아니고...워낙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요...